▣ 059화
[베네치아. 도제의 저택]
“아니, 그래서 자네는 아무 말도 못 하고 돌아왔다는 말인가?”
“송구스럽지만 그렇습니다.”
자신의 죄를 고하듯 고개를 숙인 채 이야기하는 티에폴로를 보며 도제는 어이가 없는지 헛웃음을 지었다.
“허… 참. 아니, 알만한 사람이 왜 그랬나? 교황이 말을 안 들으면 바닥에 눕든지, 아니면 바짓가랑이라도 붙잡고 그를 설득하지 그랬나. 자네 정녕 이 사안이 우리에게 얼마나 중대한지 몰라서 그러나?”
“죄송합니다.”
“최근 라틴 제국에 있다 보니 감을 잃었나? 하긴, 그곳이 편하긴 하지. 안 그런가?”
“죄송합니다.”
“내가 자네에게 죄송합니다 소리 들으려고 교황청으로 보낸 게 아니잖나. 막말로 내가 자네에게 죄송합니다 소리 들어서 어디다 쓰겠나.”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자네가 이런 식으로 나오면 다음 도제 자리를 약속할 수가 없네. 마리노 단돌로가 자네의 뒤를 바싹 쫓아오고 있다는 건 나보다 자네가 더 잘 알고 있지 않나.”
마리노의 이름이 나오자 티에폴로는 입술을 깨물었다. 확실히 도제의 말대로였다.
아직까지는 자신이 도제의 자리에 더 근접해있긴 하지만, 언제든지 여론은 뒤바뀔 수 있었으며 무엇보다 마리노 단돌로는 엔리코 단돌로의 손자였다.
그런 만큼 마리노 단돌로는 아직 자신의 힘으로 무엇 하나 증명한 적 없는 애송이였지만, 수많은 사람들의 기대와 지지를 받고 있었다.
“다음 도제 자리를 마리노가 차지하게 되면 단돌로 가문의 힘이 얼마나 커질지 자네도 모르는 게 아니잖나. 저 빌어먹을 신성 제국의 호엔슈타우펜마냥 독재가 이어질 수도 있음이야.”
“잘 알고 있습니다.”
“내가 일부러 자네의 공적을 만들어주기 위해 힘을 써줬는데 이런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여주면 곤란하네.”
“제 불찰입니다.”
무슨 말을 해도 잘못했다, 죄송하다는 말만 내뱉는 티에폴로를 보며 도제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 후우… 뭐, 됐네. 일단 뭐 얘기나 해보게. 자네가 일을 허투루 처리하진 않았을 테고. 교황이 그렇게 강경한 태도를 보인 이유가 뭐라 생각하나?”
그 말만을 기다렸다는 듯 티에폴로는 속사포처럼 말을 내뱉었다.
“제 생각에 이미 교황은 하이르 앗 딘을 잡기로 마음먹었던 것 같습니다. 말이야 칼리나 변경백의 핑계를 대고 있지만, 실상은 저희의 독주를 막아두고 싶은 것 같습니다.”
“균형을 유지하고 싶다는 말인가?”
“예. 최근 라틴 제국에 저희가 큰 영향을 끼치고, 나아가 레반트 지역의 무역을 독점하고 있지 않습니까. 거기에 제노바는 하이르 앗 딘에 의해서 조금씩 몰락해가고 있는 상황이니 교황 입장에선 판을 재정립하고 싶지 않겠습니까?”
그의 말에 탁자를 검지손가락으로 두들기며 잠시 고심하던 도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교황 입장에서 지금의 베네치아는 부담스러울 터였다.
“그럴듯하군. 하긴, 엔리코 단돌로가 파문을 당했을 때도 무시하고 콘스탄티노플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는 걸 보고 느낀 게 있었겠지.”
실상 교황청 자체가 엄청난 무력을 지닌 건 아니었다. 물론 일당백이라고 불리는 이단 심문관들이 있긴 하지만 그 숫자가 채 백 명도 되지 않았다.
거기에 그들은 동로마의 바랑기안 가드들처럼 교황을 호위하는 게 주 임무였기에 교황청을 습격하지 않는 이상 마주칠 일이 없었다.
즉, 교황이 뽑을 수 있는 최고의 카드는 파문이었는데 그게 들어먹지를 않으니 위기감을 느꼈을 것이다. 지금이야 막대한 돈을 받고 있기에 따로 문제 삼지는 않지만 불안하겠지.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조차 교황의 파문에 직접 카노사까지 와서 용서를 빌지 않았던가.
물론 그 사건 자체가 교황의 힘을 보여줬다기보단 신성 제국의 영주들이 이를 빌미로 사용한 것에 불과하지만, 어쨌든 파문 자체를 마냥 무시할 수는 없다는 얘기였다.
“거기에 신성 제국의 프리드리히가 강력한 중앙집권을 원하는 만큼 교황은 이탈리아 북부를 손에 쥐고 있는 칼리나와 새롭게 발족한다는 그 연합과 좋은 관계를 가지고 싶어할겁니다.”
“칼리나 변경백이 판을 잘 읽고 정확히 틈을 노렸단 말인가?”
“확신할 수는 없지만 돌아가는 상황으로 봐서 그렇지 않겠습니까?”
티에폴로의 말에 도제는 두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꽤 오래전부터 칼리나가 판을 짰다고 하면 지금 와서 그 판을 흔드는 건 불가능했다.
“라틴 제국은 지금 군사를 일으킬 여력이 되나?”
“…불가능합니다. 라틴은 지금 니케아를 비롯해 불가리아와 맞서는 데 온 힘을 쏟고 있으며 테살로니카는 오히려 저희에게 적대적입니다. 그 밑의 백국들이야 수만 많지 덩치가 작으니 모여봤자 병력의 숫자가 얼마나 되겠습니까.”
“쯧, 보니파시오 그 멍청한 놈은 시간만 끌어주면 우리가 우회해서 카노사와 투스카니를 함락시켰을 텐데….”
“아무튼, 이번 일에 라틴 제국을 끌어들이는 건 힘들 것 같습니다. 오히려 저희 쪽에서 물자와 병력을 지원해줘야 할 정도입니다.”
“칼로얀이 그 정도로 용맹하던가?”
“예. 니케아나 헝가리, 쿠만족, 세르비아 할 것 없이 다 두들겨 패고 있습니다.”
“결국 하이르 앗 딘은 버려야 하는 패인가?”
“이참에 깔끔하게 손을 터는 게 어떻겠습니까? 안 그래도 본인의 힘이 커지자 말도 안 듣고 배짱을 부리는 데다 최근엔 저희의 배를 턴 전적도 있습니다.”
“으음….”
“만약 저희가 하이르 앗 딘을 도울 낌새를 보이면 교황청에서 기다렸다는 듯이 파문을 날릴 겁니다. 파문이 취소된 지 얼마나 됐다고 또 파문을 받으면 베네치아 내부의 여론도 악화될 테고 교황청과의 관계도 되돌릴 수 없을 겁니다.”
“쯧, 외통수군. 좋아. 이건 자네 말대로 하지. 다만 모든 가문들을 모아놓고 설득을 해야 하니 적당히 여론구성을 해놓도록.”
도제의 말에 티에폴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걸로 자신의 실패를 어느 정도 만회할 수는 있을 것이다.
물론, 그것과는 별개로 여론을 조성하고 마리노 단돌로를 비롯한 반대파들을 설득하기 위해선 엄청난 노력과 재물이 들어갈 것이다.
그 때문에 티에폴로는 자신만만한 얼굴로 자신을 내려다보며 비웃던 여자의 얼굴을 떠올리며 이를 갈았다.
“빌어먹을. 칼리나 이 개같은 년. 언젠가 반드시 한 방 먹여주마.”
* * *
몽페라토를 마지막으로 모든 임무를 끝마친 나는 돌아가는 길에 원래 가려고 했던 노바라에 들렀다.
사실 노바라는 그렇게 큰 도시도 아니고 내전 아닌 내전을 겪었기에 영주인 펠릭스가 군단에 합류한다고 해도 파병을 보낼 수 있는 병력의 수가 얼마 되지 않을 것이다.
숫자로만 따져본다면 그의 합류는 솔직히 있으나 없으나 마찬가지고, 오히려 각 영주들이 얻게 될 이익만 줄어드는 느낌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사람 간의 관계라는 게 딱딱 맺고 끊는 게 불가능하지 않던가.
펠릭스 역시 이게 내 자비이자 기회라는 걸 알고 있었는지 내게 온갖 선물을 안겨주며 내게 잘 보이려 애썼다.
레비아탄 상단의 탈다스 역시 그간 격조했다며 선물과 함께 배당금을 건네주었고 혹여 군수물자가 필요한 게 있다면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선에서 최대한 싼값에 협조해 주겠다고 이야기했다.
당연하겠지만 그건 내가 정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나는 어디까지나 외교에 관한 권한만 부여받은 거지 그 이외의 일에 대해선 내 권한 밖의 일이다.
물론 내가 권력을 남용한다고 해도 칼리나는 아무 말 안 할 테지만 그녀의 밑에 있는 귀족들이 들고 일어설 것이다. 아마 지금도 어느 정도 나에 대한 불만들은 쌓여있지 않을까?
갑자기 튀어나온 야만인을 칼리나가 싸고도는데 불만이 없을 리가 없지. 다만 실제로 나 자신의 능력을 입증하는 한편 전쟁에 참여하는 등 행동으로 보여주었기에 일단은 지켜보자는 입장이 대다수일 뿐이다.
그 때문에 나는 꼬투리를 잡히지 않기 위해 병력을 운용함에 있어 최대한 칼리나의 도움을 받지 않고 자율적으로 운용하는 것이다.
그렇게 나는 그리운 얼굴들을 뒤로한 채 노바라를 떠났고 가을이 되기 전에 밀라노에 도착할 수 있었다.
내가 돌아온 지 채 사흘도 안 돼서 칼리나도 돌아왔고 그녀는 나를 꽉 끌어안는 것으로 그간의 그리움을 표현했다.
“보고 싶었어. 라그나르.”
“그래, 나도 보고 싶었어.”
내 말에 그녀는 배시시 웃더니 날 식당으로 끌고 가며 그간 밀린 이야기들을 늘어놓았다. 그녀는 소녀처럼 재잘재잘 이야기를 하다가 문득 생각난 것처럼 얘기했다.
“아, 그러고 보니 당신의 통찰력에 놀랐어.”
“통찰력?”
“교황에게 이야기하는 것 말이야. 내가 며칠만 더 늦었으면 베네치아 놈들이 수작을 부렸을걸? 당신이 의외로 날카로운 건 알았는데 솔직히 감탄했어.”
“뭐, 상인 놈들 생각하는 게 다 뻔하지. 그래서, 새삼스럽게 반했어?”
“나야 항상 당신한테 반해있지.”
칼리나의 돌직구에 나는 너털웃음을 터뜨린 뒤 그녀의 잔에 와인을 채워주며 얘기했다.
“그나저나 남부를 순회하면서 느낀 건데 네 이름값이 대단하던걸?”
이건 농담이 아니었다. 아마 내가 칼리나 디 카노사라는 인물을 등에 업지 못했다면 영주들과 면담은커녕 꺼지라면서 쫓겨나지 않았으면 다행일 것이다.
“하, 그런 게 무슨 소용이야. 내가 밑바닥에 있었을 때 내 진가를 알아보고 구제해준 건 당신뿐인데.”
“눈앞에 보석이 굴러다니는데 안 줍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
“흐흥. 당신 최근에 어떻게 말하면 내 기분을 좋게 해줄지 연구라도 하고 있는 거야?”
“위대한 변경백 각하의 심기를 거스르면 안 되잖아?”
“심술부리기는… 뭐, 그래도 이제 기본적인 준비는 대강 끝났네.”
“문제는 지금부터 시작이라는 거지만.”
“그렇긴 하지만 서로 간에 고생했단 의미로 잠깐의 휴식 정도는 괜찮잖아?”
그녀는 자신의 잔을 들며 얘기했고 나 역시 그녀의 말에 동감하는 바였기에 잔을 들고 그녀의 글라스에 가볍게 부딪혔다.
* * *
연합을 만들고 교황의 의지가 담긴 금인칙서를 받아왔다고 모든 일이 끝나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이제부터 본게임 시작이라고 할 수 있었는데 나는 기나긴 겨울 동안 밀라노에 틀어박혀 칼리나와 머리를 맞대며 본격적으로 연합을 발족시킬 준비를 했다.
우선 각 영지 간의 면세 혜택과 정보의 공유, 내부에서 문제 발생 시 화해 주선 및 조정, 외부와 문제 발생 시 연합의 적극적인 개입, 제노바에 대한 투자 및 이익 공유 등을 기본 골자로 혜택을 구체적으로 문서화시켰다.
이 모든 걸 겨울이 가기 전에 끝내야 했는데, 애초에 여름이 되기 전에 전쟁을 마무리해야 했기에 어쩔 수 없었다.
병력들의 사기나 음식의 부패, 수원 확보 등의 문제가 있었기에 여름은 공격자에게 너무나도 가혹한 계절이었다.
그 때문에 나는 각 백작령에 편지를 보내며 영주들 간의 의견을 조율하는 데 힘을 썼고 서로 사이가 데면데면하거나 원수지간인 영주들도 있었기에 그들의 관계를 개선하는 것도 내 일이었다.
허구한 날 영주들을 밀라노로 불러서 함께 술도 마시고 사냥도 하고 선물도 해주는 등 여러모로 바쁘게 지냈다. 이걸 보면 회식이 업무의 연장선상이라는 것도 개같지만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괜히 내가 느그 서장이랑 사우나도 가고 마! 술도 마시고! 마! 다했어! 이런 소리가 나오는 게 아니겠지.
이런 내 노력이 빛을 발했는지 연합은 시간이 흐를수록 견고해졌고 영주들 간의 유대관계도 끈끈해졌으며 정예병들과 돈을 원하는 용병들이 밀라노로 속속들이 모여들었다.
그리고 마침내 약속했던 날짜인 3월 1일이 되자 도합 5천에 이르는 대군이 하이르 앗 딘 타도를 목표로 출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