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58화
<로마 내부 교황청>
“교황 성하. 칼리나 변경백이 접견을 요청하였습니다.”
그 말에 업무를 보고 있던 그레고리오 9세는 깃펜을 내려놓더니 사제를 바라보며 되물었다.
“칼리나? 신성 제국의 그 칼리나 디 카노사 말인가?”
“그렇습니다.”
본래 교황을 만나는 것 자체가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이처럼 직통으로 자신에게 보고가 들어오는 케이스가 몇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카노사 가문의 가주였다.
과거 하인리히 4세 시절, 카노사의 굴욕이라 불리는 사건에서 당시 교황이었던 그레고리오 7세를 보호해주고 변호해주었던 마틸데 디 카노사 여백작의 공로를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과거의 사건 때문이 아니라도 칼리나 여변경백은 이탈리아 북부에서 엄청난 영향력을 끼치고 있기에 그녀를 만나서 나쁠 건 없었다.
“용건이 뭐라던가?”
“그건 교황 성하를 직접 만나 뵙고 말씀드린다고 하셨습니다.”
“흠… 뭔가 내게 부탁할 게 있는 모양이군.”
자신이 들어줄 수 있는 부탁이라면 들어주는 게 좋을 것이다. 그녀의 위명은 날이 갈수록 널리 퍼지고 있었으며 테살로니카의 보니파시오를 물리친 뒤 정점을 찍고 있었으니까.
“어떻게 할까요?”
“들어오라 하게. 그녀가 보자고 하면 없던 시간도 만들어야 하지 않겠는가.”
교황의 말에 사제는 조심스럽게 방문을 나섰고 칼리나가 올 동안 교황은 서류들을 정리한 뒤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그 사이 칼리나가 도착했고 그녀는 정중하지만 당당한 모습으로 인사했다.
“오랜만입니다. 교황 성하.”
“그래, 내 취임식 때 본 이후로 다시 보는 거니 꽤 오래됐군. 일단 앉게.”
칼리나가 앞에 마주 앉자 교황은 아껴뒀던 포도주를 꺼내 잔에 따르며 물었다.
“그래, 무슨 일 때문에 이 먼 곳까지 와서 이 늙은이의 얼굴을 보자고 한 건가?”
“카노사 가문과 교황청의 사이가 얼마나 돈독한데 꼭 무슨 일이 있어야 오겠습니까?”
“하하,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지. 가장 힘들었던 시절 도와줬던 카노사 가문의 공로를 어찌 잊을 수 있겠나.”
“그렇지요. 정작 저희 카노사 가문은 어려울 때 그 누구에게도 도움을 받지 못했지만.”
말에 뼈가 잔뜩 담긴 말이었지만 그레고리오 9세는 넉살 좋게 포도주를 건네며 대답했다.
“그 일은 미안하게 생각하네. 굳이 변명을 하자면 그때 당시 엔리코 단돌로가 이끌던 십자군이 동로마를 멸망시키지 않았던가.”
“그랬지요.”
“물론 내가 교황에 재임 중이던 시절에 벌어진 일은 아니지만, 그 뒷수습을 해야 했던 건 나였네. 그러다 보니 자네의 가문에 벌어진 비극에 대해서 개입할 수가 없었네. 부디 용서해주게.”
교황이 직접 고개까지 숙이며 사죄하자 칼리나도 그 이상 캐묻지는 않았다.
“뭐, 좋습니다. 사실 구태여 그 일을 캐물어서 교황 성하와의 관계를 엉망으로 만들고 싶지도 않고 당시 상황도 그랬으니 이해합니다.”
“이해해주니 고맙네. 사실 말을 안 해서 그렇지 자네 가문의 일은 언제나 내 마음의 짐이었다네.”
그런 것치곤 꽤 오랜 기간 연락도 없었던 데다 테살로니카의 보니파시오가 공격할 때도 입 다물고 있던 모습이 아니꼬웠지만, 어쨌든 오늘은 그런 얘기를 하러 온 게 아니었다.
애초에 이런 이야기를 꺼낸 것도 자신이 부탁을 함에 있어 상대가 양심의 가책을 받으라고 한 것에 불과하다.
다만 이게 너무 과해서 추궁으로 변질되면 상대의 기분이 상하게 될 여지가 있으니 이 정도가 딱 적당할 것이다.
“뭐, 과거의 일을 가지고 계속 왈가왈부하는 것도 멍청한 일이지요. 과거에 얽매이기보다 현재에 충실하고 미래를 향해 나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나 역시 동의하는 바이네. 과거를 잊어선 안 되지만 그렇다고 과거에 목매는 것도 해선 안 될 일이지.”
“그렇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제가 교황 성하께 한 가지 사소한 부탁을 드릴까 합니다.”
지금까지 한 얘기가 지금 할 부탁을 위한 빌드업이었다는 걸 깨달은 교황은 헛웃음이 새어 나왔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말한 대로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범위 내의 부탁이라면 들어주는 게 좋으니까.
“얘기해보게. 내가 할 수 있다면 힘닿는 범위 안에서 도와주겠네.”
“예. 실은 다른 게 아니라 이번에 제가 남부에서 연합을 하나 창설할까 합니다.”
“연합? 그러고 보니 뭐 그런 움직임이 있다는 보고는 받았네.”
“여러 영주들과 이익이 맞아들어가서 창설하게 됐는데 주목적은 제노바에 대한 후원과 그로 인한 이익 창출을 우선하고 있습니다.”
칼리나는 지도를 펼치며 간략하게 설명했고 조용히 경청하던 교황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얘기했다.
“…그러니까 자네를 필두로 이탈리아 북부와 프로방스 지방의 영주들이 제노바를 후원하는 그런 연합이라는 건가?”
“그렇습니다. 교황 성하.”
“내가 듣기에 단순히 무역 공동체 연합인 것 같지는 않네만?”
“물론 어느 정도 군사적인 힘을 가지게 되겠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방위적인 측면에서 사용할 것입니다. 아무래도 저희가 이런 연합을 발족시키면 누군가는 싫어할 테니까요.”
물론 교황은 그 누군가가 베네치아를 뜻함을 단번에 깨달았다. 신성 제국의 영주들이 제노바를 후원한다? 베네치아 입장에선 피가 거꾸로 솟을 일일 테니까.
“으음, 연합이야 자네가 원한다면 발족시키면 되는 것 아닌가? 그걸 굳이 내게 이야기하는 이유가 뭔가? 부탁은 또 뭐고?”
“그를 위한 첫걸음으로 하이르 앗 딘을 토벌하고자 합니다.”
그 말에 교황은 눈앞의 여성이 왜 지금까지 말을 빙빙 돌리며 쓸데없는 이야기들을 넋두리마냥 늘어놓았는지 알 수 있었다.
하이르 앗 딘은 니스에 자리를 튼 해적 집단이었다. 물론 그런 해적 집단이 제노바라는 강대한 해상 도시를 옆에 두고 활개를 칠 수 있던 건 베네치아가 물밑에서 지원을 해주기 때문이었다.
물론 당연히 베네치아는 부인할 테지만, 이건 누구나 다 알고 있는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그런데 하이르 앗 딘을 토벌한다? 이건 베네치아와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얘기와 다름이 없었다.
“하이르 앗 딘이라… 괜찮겠나?”
자신은 베네치아를 적으로 돌려도 괜찮냐는 의미로 물었지만 칼리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순진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해적을 토벌하는 데 문제 될 게 뭐가 있겠습니까. 오히려 칭송을 받아 마땅한 일 아닙니까?”
확실히 그 말대로 명분 자체는 칼리나 변경백에게 있었다. 지중해가 제집인 양 활개 치는 악독한 해적을 토벌하겠다는데 그 누가 뭐라 하겠는가.
하지만 베네치아 입장에선 이런 칼리나의 행동을 자신들에 대한 적대행위로 받아들일 것이다.
그녀 역시 이를 모르지 않기에 이후에 있을 베네치아의 적대행위를 막아달라 부탁하기 위해 찾아온 것일 테고.
“하지만 세상에는 미친놈들이 많지요. 타 세력의 개입을 막기 위해 교황 성하께서 금인칙서를 내려주십시오.”
“으음….”
“복잡한 내용도 필요 없습니다. 그저 악랄하고, 잔인하며, 죽어 마땅한 악인인 하이르 앗 딘을 공적으로 선포해주십시오. 그리고 이를 도와주는 이들 역시 파문은 물론이요 함께 공적으로 선포하겠다는 의지를 담아주십시오.”
외통수였다. 애초에 명분 자체가 칼리나에게 있었기에 교황청 입장에서도 이를 반대하기란 쉽지 않았다. 하이르 앗 딘은 어떻게 커버 칠 도리가 없는 범죄자였으니까.
만약 여기서 자신이 칼리나의 부탁을 거절한다면 칼리나는 교황청이 하이르 앗 딘을 비호했다며 스리슬쩍 소문을 흘리겠지.
“…알겠네. 자네가 원한다면 그렇게 해주지. 다만, 이 부탁은 내가 많은 걸 포기하고 들어준다는 걸 알아주게.”
교황의 말에 칼리나는 악동처럼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비웃듯 이야기했다.
“범죄자를 범죄자로 선포하는 게 그렇게 힘든 일인지 몰랐군요. 교황청의 권위가 그렇게 떨어졌습니까?”
“눈에 보이는 게 다가 아니라는 건 그대도 알고 있지 않나.”
이는 베네치아와 교황청 간의 관계를 불편하게 만드는 일이었다. 명분이 이쪽에 있으니 베네치아도 대놓고 뭐라 하지는 못하겠지만, 국가 간의 외교라는 게 늘 정의로운 건 아니잖은가.
“하하하, 좋습니다. 교황 성하께서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신 만큼 저 역시 과거의 일은 잊도록 하겠습니다.”
“알겠네. 당장 칙서를 반포하는 건 무리고 어느 정도 시일이 걸릴 테니 돌아가 있으면 반포하도록 하겠네.”
“배려해주셔서 감사합니다만 기왕이면 교황 성하께서 쓰신 금인칙서를 직접 들고 가는 영광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꼭 그래야겠나?”
“그래야 연합에 모인 영주들 모두가 교황 성하의 막강한 권위 앞에 무릎 꿇지 않겠습니까?”
말 하나는 혀에 기름칠한 것처럼 기똥차게 하는 칼리나를 보며 교황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자네 좋을 대로 하게.”
* * *
그렇게 서둘러 금인칙서를 반포하고 칼리나를 밀라노로 돌려보내 이 골치 아픈 일을 잊으려던 교황에게 새로운 시련이 닥쳤다.
그녀에게 금인칙서의 반포를 약속하고 정확히 사흘이 지난 무렵, 베네치아에서 전권을 위임받은 전령이 교황청에 도착했기 때문이었다.
이름 없는 전령이었다면 그레고리오 9세도 가볍게 무시할 수 있었겠지만, 전령으로 온 이는 라틴 제국에 대해 큰 영향력을 행사하며 차기 도제라고 봐도 무방한 야코포 티에폴로였다.
“교황 성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희와의 상의도 없이 금인칙서를 반포하시겠다니요!?”
“하이르 앗 딘은 해적일세. 그런 그를 공적으로 치부하겠다는데 뭐가 문제인가?”
“교황 성하!”
티에폴로가 목소리를 높여 교황을 압박하자 타이밍 좋게 칼리나가 문을 열어젖히며 등장했다.
상상도 못 한 이의 등장에 티에폴로의 눈동자가 커졌고 칼리나는 비웃음 가득 찬 눈초리로 그를 바라보며 비아냥거렸다.
“한낱 장사치 따위가 교황 성하를 협박하다니, 내가 뭘 보고 있는지 모르겠군.”
물론 티에폴로는 칼리나의 등장에 일이 어떻게 된 건지 깨닫고 그녀를 향해 으르렁거렸다.
“변경백. 그대가 이를 사주했소?”
“사주? 말이 이상하군. 해적 놈을 토벌할 뿐인데 문제 될 게 뭐가 있지? 오히려 베네치아에서도 쌍수를 들고 환영할 일이 아닌가? 아니면 그 해적과 자네들 사이에 뭔가 ‘연결고리’라도 있는 건가?”
“말씀이 지나치시오!”
“그대가 오해를 살 만한 얘기를 하니 그런 게 아니겠나.”
정론으로는 이길 수 없자 티에폴로는 칼리나를 직접 도발하기로 했다.
“그러고 보니 변경백께서 최근 야만인 하나를 끼고 돈다고 하시는데 혹시 이 일도 그 야만인의 머리에서 나온 얘기입니까?”
그 순간 칼리나의 눈에 불꽃이 튀기며 티에폴로의 멱살을 쥐어 들어 올린 뒤 벽에 밀어붙였다.
쾅!
“네놈이 감히 나를 모욕하는가? 베네치아가 정녕 나와 칼을 맞대고 싶은 건가??”
“크윽… 이, 이게 무슨 짓이오!?”
“살고 싶다면 구석에 조용히 찌그러져 있는 게 좋을 것이다. 하이르 앗 딘과 함께 토벌당하고 싶지 않다면.”
도발을 할 생각이긴 했지만, 이건 효과가 좋아도 너무 좋았다. 그 때문에 티에폴로는 표정을 찡그리면서도 속으로는 쾌재를 부르며 도발을 이어갔다.
“나에 대한 모욕은 곧 베네치아에 대한 모욕이오. 본인은 이 일을 결코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것이오.”
“왜, 또 라틴 제국에게 충동질이라도 할 생각인가? 하지만 최근 불가리아의 이반 아센과 칼로얀에게 영혼까지 털리고 있다는데 이빨 빠진 호랑이가 이곳까지 병력을 끌고 올 만한 여력이 있는지 모르겠군.”
“변경백. 이 이상의 모욕은 더 이상 참지 않겠소.”
“요새는 진실을 모욕이라고 부르던가? 그리고 네놈들이 보니파시오를 꼬드겨 날 공격하게 만든 사실은 알고 있다. 이탈리아 북부를 장악하고 있는 내가 아니꼬웠겠지. 안 그런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구려.”
“내가 네놈들 상인 나부랭이가 두려워서 아무 말도 못 하고 있다고 생각하나?”
“무슨 소린지 모르겠지만, 큰 오해가 있는 듯하오. 변경백.”
앵무새처럼 오해라는 말만 줄창 내뱉는 티에폴로를 보며 칼리나는 비웃음 섞인 목소리로 통보하듯 이야기했다.
“상인이라면 누구보다 눈치가 빠르니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잘 알겠지. 굳이 이 얘기를 더 파고들지는 않을 테니 알아서 처신 잘하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