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57화
칼리나는 밀라노, 투스카니, 그리고 카노사 순으로 자신의 직할령을 돌며 귀족들과 영지민들을 위무하는 한편 귀족들이 딴생각을 하지 못하게 기강을 잡았다.
분명 새롭게 연합을 발족하면 잡음이 일 텐데 이를 이용해서 헛짓거리를 해 먹으려는 놈들이 튀어나올 게 뻔하기 때문이다.
단지 자신의 기우일 수도 있겠지만, 사람 사는 게 다 거기서 거기고 대가리를 굴려봤자 나오는 생각이야 다 똑같으니까.
실제로 보니파시오가 이탈리아반도를 공격했을 때 몇몇 이들이 반역을 일으켰고 이에 동조한 가문 몇 개를 본보기로 박살 낸 경험이 있었다.
“카노사야 대대로 우리 가문의 영지였고 밀라노야 내가 계속 머무니 상관없지만 투스카니는 조금 불안하네.”
원래는 라그나르에게 맡겨볼 생각이었지만 그가 거절했으니 별수 없다. 애초에 싫다는 걸 그에게 강요할 수도 없는 노릇 아니던가.
“쯧, 내 가신으로 두고 계속 옆에 붙잡아 뒀다가 결혼할 생각이었는데.”
라그나르를 떠올리다 보니 괜스레 그에 대한 그리움이 솟구쳐 올랐다.
그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칼리나는 품속에서 라그나르의 초상화가 그려진 종이를 꺼내 들었고 종이에 그려진 그의 모습을 보자 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물론 남들이 이런 자신을 두고 미쳤다고 얘기하거나 뒤에서 수군거리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무너져내렸던 자신에게 손을 내밀어 준 건 오직 라그나르뿐이었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자신이 일어설 수 있도록 도와주고 복수가 끝났을 때 본인의 존재가 내 앞날에 방해가 된다는 걸 깨닫자 쥐고 있던 모든 걸 내려놓은 채 떠난 사람이었다.
그때는 잡지 못했지만, 이번에는 절대 놓치지 않으리라. 지금은 그를 붙잡을 만한 힘이 있으니까. 그의 옆에 붙어 다니는 날파리들은 조금 거슬렸지만, 그 정도는 너그럽게 봐줄 생각이다.
이랬거나 저랬거나 결과적으로 자신을 사랑해준다면 그런 건 상관없었고, 그에게 질투에 눈이 먼 여자로 낙인찍히고 싶지 않았으니까.
“돌아가면 일주일 정도는 찰싹 붙어 다녀야겠어.”
투스카니를 신경 써서 둘러보고 안전장치까지 해놨으니 서둘러 복귀하려고 할 때 익숙한 모습의 전령이 자신 앞에 무릎 꿇었다.
“변경백 각하를 뵙습니다.”
그의 모습에 가슴이 철렁했다. 왜 라그나르에게 붙여놓은 기사가 자신을 찾아왔단 말인가? 혹여나 라그나르의 신변에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게 아닐까 싶어서 절로 말투가 험악해졌다.
“무슨 일이지? 내가 분명 라그나르를 호위하라는 명령을 내렸을 텐데? 만일 라그나르에게 문제가 생겼다면….”
자신이 으르렁거리자 전령은 겁먹은 기색으로 품속에서 편지를 꺼내더니 허겁지겁 자신에게 바쳤다.
“라, 라그나르 경께서 보낸 편지입니다. 급하니 최대한 빠르게 변경백 각하께 전달하라 하셨습니다.”
“라그나르가 보낸 편지라고? 내게?”
“그렇습니다. 각하.”
“흠….”
안의 내용을 모르지만, 그의 편지라는 말에 선물을 받는 아이처럼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조심스럽게 편지를 펼치자 그 안에는 다소 삐뚤빼뚤한 글씨가 적혀있었다.
거칠고 강인해 보이는 모습과는 다르게 아이가 쓴 것 같은 글씨체에 키득거리면서도 칼리나는 내용을 천천히 탐독했다. 그가 자신을 생각하며 쓴 글을 허투루 볼 수는 없으니까.
[나의 영원한 동반자에게
오랜만이야 칼리나.
이렇게 새삼스럽게 편지를 쓴 건 몇 가지 얘기할 게 있어서야.
일단 너도 중간에 보고받아서 알고 있겠지만 일은 잘 풀리고 있어. 제노바 역시 조건을 걸긴 했지만 연합에 합류할 것 같고.
이제 마지막으로 몽페라토만 가면 되는데 아마 거기도 별문제 없이 연합에 합류하겠지. 다만, 갑자기 생각난 건데 네게 한 가지 부탁할 게 있어.
우리가 발족하는 연합과 하이르 앗 딘에 대한 공격에 대해 공식적으로 교황청의 승인을 받아줘. 하이르 앗 딘과 베네치아가 물밑에 커넥션이 있는 게 뻔하니 어떻게든 우리를 방해하고 흔들려고 할 거야.
만약 거기에 교황청의 이름으로 개입하게 되면 구엘프(교황파)와 기벨린(황제파) 간의 항쟁으로 시점이 변질될 우려가 있어.
그렇게 되면 구엘프인 제노바 입장에서도 난처해질 테고 연합에 합류한 다른 영주들도 난처해질 거야. 무엇보다 프리드리히 황제가 이를 빌미로 개입할 수도 있고.
그러니까 카노사에 간 김에 교황청에 들러서 이에 대한 확답을 받아줘.
늘 날 위해 고생하고 희생해줘서 고마워.
언제나 너의 배려에 감사히 생각하고 있어.
조금만 더 고생해줘.
너에 대한 애정을 담아.
라그나르 로드브로크로부터]
편지를 전부 읽은 칼리나는 올라가 있는 입꼬리를 숨기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솔직히 편지를 읽으면서 다른 내용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단지 가장 위에 쓰여있는 ‘영원한 동반자’와 애정을 담았다는 말만 뇌리에 깊게 새겨져 있을 뿐.
“참, 이런 미사여구 필요 없이 ‘사랑해’와 ‘해줘’ 두 마디면 될 텐데….”
그래도 라그나르가 머리를 감싸 쥐고 자신에게 적을 말들을 고민했을 걸 생각하면 입가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교황청이라… 교황청에 가는 것도 참 오랜만이군.”
* * *
<베네치아 도제 피에트로 치아니의 저택>
모두가 잠들어야 할 새벽이지만 도제의 저택은 환하게 밝혀져 있었고 넓은 응접실은 수많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사실, 집주인의 사회적 지위가 지위인 만큼 사람들이 북적이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얘기였지만, 초대받은 이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이 모임의 심각성을 짐작할 수 있었다.
“어서들 오게. 이 늦은 밤에 이곳까지 와줘서 고맙네.”
“도제님. 일단 불러서 오기는 했습니다만 이리 갑작스럽게 저희를 소환한 이유가 뭡니까?”
“너무 그렇게 날 세우지 말게나. 천천히 다 얘기해 줄 테니.”
도제는 인자한 얼굴로 대꾸하며 사람들의 얼굴을 살폈다. 몇몇은 왜 자신들이 불려왔는지 아는 눈치였고 몇몇은 그야말로 자다가 불려 나온 얼굴이었다.
상인이라는 놈들이 이렇게 정보가 어둡다는 사실에 몰래 혀를 찬 도제는 어느새 얼굴 표정을 바꾸고 가장 상석에 앉아 본론을 꺼냈다.
“최근 칼리나 변경백이 본인의 영지를 돌고 있는 건 알고들 있나?”
“물론입니다. 헌데 이는 일 년에 한 번 정도 정기적으로 하던 일이 아닙니까?”
“그런가? 하지만 내가 입수한 정보를 들으면 그녀의 행보가 조금 다르게 보일 걸세.”
모두의 시선이 자신에게 향한 걸 확인한 도제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정보를 풀었다.
“칼리나 변경백은 지금 하이르 앗 딘과의 전면전을 준비하고 있네. 그리고 검은 용군단이라는 웃기지도 않는 이름의 연합을 발족하려 하고 있지.”
“검은 용군단이라니… 설마 황제나 사자공처럼 독단적인 세력을 만들려는 겁니까?”
“자세히는 알지 못하나 행보를 보면 그래 보이더군. 하이르 앗 딘은 그 첫 희생양이 될 테고.”
“으음. 하이르 앗 딘은 아직 이용가치가 남아있습니다만… 그래봤자 병력의 숫자가 얼마나 되겠으며 해군도 없이 하이르 앗 딘을 잡는 게 가능하겠습니까?”
타당한 지적이었기에 모임에 참가한 인원들 몇몇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도제는 고개를 저었다.
“그놈들도 바보는 아닌지 제노바를 꼬드기더군. 더 큰 문제는 제노바가 승낙을 했다는 거고.”
그 말에 조용하던 응접실이 충격과 공포로 웅성거렸고 도제는 일부러 그 웅성거림을 진정시키지 않고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어느 정도 분위기가 진정되자 도제는 손을 들어 모두의 시선을 끌어모은 뒤 단호한 어조로 선언했다.
“우리가 아드리아해의 여왕에서 지중해의 여왕으로 불리며 위세를 떨치게 된 건 십자군을 이끄신 엔리코 단돌로 도제께서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키고 동로마를 멸망시켰기 때문임을 잊으면 안 되네.”
그 말에 회의에 참여한 인원들 몇몇의 낯빛이 바뀌었다. 지금 여기서 굳이 엔리코 단돌로를 들먹이는 건 전쟁을 하자는 말과 다를 게 없었으니까.
물론 그 누구도 전쟁을 먼저 입에 담지는 않았다. 전쟁이란 누군가에겐 기회가 될 테지만 누군가에게는 돌이킬 수 없는 손실을 줄 테니까.
거기에 제노바는 최근 몰락하긴 했지만, 여전히 강력한 해양도시였고 칼리나 변경백과 동맹을 맺은 게 사실이라면 그 시너지가 몇 배를 발휘할 터였다.
“허면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저희를 부르셨다는 건 이미 대책을 세워놓으신 것 아닙니까?”
생각 외로 날카로운 질문에 도제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대책 같은 거창한 건 아니고 그저 이 늙은이가 작은 꾀를 낸 것에 불과하네.”
“도제님께선 언제나 선택의 순간에 최선의 답을 고르셨지요. 저희에게 가르침을 주십시오.”
적당한 아부성 발언에 도제는 다시 한번 자신이 죽지 않았음을 확신하며 다소 오만한 말투로 이야기했다.
“가르침이라고 할 것도 없네. 우린 그저 이 일을 교황 성하께 얘기하면 그만이니까.”
“괜찮겠습니까? 하이르 앗 딘은 대외적으로 해적 집단입니다. 그를 두둔하는 건 위험합니다.”
그 말도 일리가 있는 게 이미 엔리코 단돌로는 십자군을 이끌면서 교황에게 두 차례나 파문을 받음은 물론이요 공식적으로 질타를 받았었다.
상식적으로 이슬람을 공격하라고 보낸 놈들이 같은 기독교권 국가였던 동로마 제국을, 그것도 수도를 공격해서 점령하고 멸망시키는 게 정상은 아니잖은가.
단지 라틴 제국을 운영하고 무역을 독점함으로써 얻게 되는 막대한 부를 교황청에 가져다 바침으로써 무마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 상황인데 한술 더 떠서 악명높은 해적으로 유명한 하이르 앗 딘을 두둔한다? 당연히 교황은 물론이고 세간에서 욕이란 욕은 다 처먹을 것이다.
“난들 그걸 모르겠나. 그러니 애초에 방점을 하이르 앗 딘이 아닌 그 정신 나간 년이 조직한다는 연합에 찍어야지.”
이곳에 모인 이들은 눈앞의 도제에 비하면 정보력이 부족했기에 그의 다음 말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십시오.”
“칼리나 변경백은 일단 중립을 표방하고 있지만 어찌 됐건 신성 로마 제국의 제후고 얼마 전에는 황제를 위해서 병력을 파견하기도 했지. 그뿐만 아니라 그때 파견된 병력이 폴란드와의 전투에서 꽤 큰 활약을 했다 하더군.”
“그걸 물고 늘어지면서 트집을 잡자는 말씀입니까?”
“정확하네. 알다시피 로마는 카노사나 투스카니에서 그리 멀지 않네. 만약 변경백이 정신이 나가서 로마를 공격하면 샤코 디 로마(로마 약탈)가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보장이 있나?”
물론 변경백이 미치지 않은 이상 로마를 공격할 일은 없겠지만, 사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적당히 이 일을 부풀려 보고해 교황의 불안감을 증폭시키고, 최종적으로 교황이 이 일에 개입해서 연합을 흐지부지 만들거나 발족을 보류시키기만 해도 성공이었다.
그리고 그 틈을 타서 하이르 앗 딘에게 물밑에서 지원을 하는 한편 연합에 가입하려는 영주들에게 돈을 뿌려 내분을 일으키는 게 최종 목적이었다.
이렇게 모범답안처럼 차후의 계획까지 딱딱 얘기하는 도제를 보면서 이곳에 모인 이들은 자신도 모르게 박수를 치거나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허, 대단하시군요. 그렇게만 된다면 저희 쪽에서 따로 손을 쓸 것도 없겠습니다.”
“후후, 동양에서는 이를 두고 이이제이라고 하더군. 외부의 적을 다른 적으로 물리친다니… 참으로 멋진 말이 아니던가.”
그럴듯한 대책이 나오자 회의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고 이들은 서둘러 교황청에 특사를 보내는 것으로 회의를 마무리했다.
물론, 그 특사가 뇌물이라는 이름의 막대한 기부금을 가지고 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