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54화
신께서 보우하신다면 승리하리라는 이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는 가치관을 기반으로 한 결투는 결국 나와 힐데의 활약에 힘입어 프로방스의 승리로 끝났다.
당연히 툴루즈와 프로방스 간의 영지전도 프로방스의 승리로 끝났고 우리는 승리의 대가로 툴루즈에게 합당한 금액의 전쟁보상금을 받기로 하고 전쟁을 마무리 지었다.
당연히 툴루즈는 장례식장 분위기였지만 프로방스는 축제 분위기였다. 심지어 영주인 라몬 베렌게르는 내 옆에 찰싹 달라붙어 날 찬양하기에 이르렀다.
“라그나르 경. 내 지금껏 살아오면서 수많은 기사와 영웅들을 봤지만 단연코 자네가 그중 최고라 단언할 수 있네.”
“제 작은 재주를 그리도 칭찬해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군요.”
“아니아니, 내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닐세. 그 용맹한 사자공도, 프리드리히 폐하도 그대의 배짱과 용기에 경의를 표할 걸세.”
“하하, 과찬이십니다. 제가 어찌 영웅이라 불리는 그 두 분과 비견되겠습니까.”
세상에는 수많은 귀와 입이 도사리고 있다. 여기서 기분 좋다고 분위기에 취해 허세를 부리다가 재수 없으면 접싯물에 코 박고 죽을 수도 있기 때문에 나는 적당히 겸손을 떨었다.
라몬도 그런 내 기색을 눈치챘는지 슬쩍 말을 돌렸다.
“그나저나 자네가 레이몬드 그 개자식을 두들겨 패는 걸 보니 속이 다 시원하더군. 대체 뭐라고 했길래 멀쩡한 대전사를 내버려 두고 본인이 칼을 뽑아 든 건가?”
“아, 그게 말입니다.”
나는 실실 웃으며 레이몬드와 나누었던 이야기에 적당히 MSG를 쳐서 라몬 백작에게 이야기했다. 처음에는 무슨 소린가 하고 듣던 백작은 이야기를 전부 듣고 나자 물개박수를 치며 박장대소했다.
“푸하하하핫, 멍청한 녀석 같으니라고. 자네 싸우는 것만 잘하는 줄 알았더니 입담도 제법이군. 왜 칼리나 변경백 각하께서 그대를 신임하는지 이제야 알 것 같네.”
“아마 오늘 이후로 레이몬드는 프로방스의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할 겁니다. 그렇게 자존심이 짓밟혔는데 또 싸움을 걸려서 없지요.”
갖은 모욕이란 모욕은 전부 다 당하고 거기에 굴욕적으로 패배하기까지 했다. 물론 분노가 이성을 마비시킨다면 다시금 덤벼들 수도 있겠지만 그땐 칼리나가 믿음직스런 방패가 돼줄 것이다.
“하하, 레이몬드가 또 쳐들어온다면 자네가 다시 나서면 될 일이잖나.”
“물론이지요. 백작 각하께서 검은 용군단의 일원으로 있는 한 그 누구도 프로방스를 짓밟게 놔두진 않을 겁니다.”
그는 웃으면서 은근슬쩍 나를 들먹였고 나 역시 웃으면서 확실히 방점을 찍었다. 어디까지나 내가 나선 건 라몬 백작이 연합에 참가한다는 조건이었으니까.
“하하하, 다시 이를 말인가? 오늘부로 나는 영원히 검은 용군단의 자랑스러운 일원이 될 것이네.”
“그 말씀만으로도 칼리나 변경백 각하께서 기뻐하실 겁니다.”
“그래그래. 자네가 말 좀 잘해주게.”
그렇게 승리의 달콤한 맛에 빠져서 프로방스로 귀환한 라몬 백작은 떠나려는 나를 붙잡고 무려 사흘 동안이나 승전연에 초대했다.
그걸로도 모자랐는지 조금만 더 있다 가라는 백작의 권유를 간신히 뿌리친 나는 지도를 펼치며 제노바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이제 슬슬 이 긴 여정도 마무리 지어야 한다. 일이 길어질수록 하이르 앗 딘도 내 움직임을 눈치채고 대비할 것이다.
정보가 새어 나가는 건 막을 수 없겠지만 최대한 빠르게 준비해서 상대의 허를 찔러야 하지 않겠는가.
* * *
<제노바 아도르노 가문의 대저택>
“흐음… 그러니까 그대가 이 일에 관해 칼리나 변경백 각하에게 전권을 부여받았다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동시에 알본의 베아트리체 님의 편지도 전하는 전령이고요?”
“예.”
아도르노 가문의 가주인 가브리엘 아도르노는 팔짱을 낀 채 자신의 앞에 놓여진 편지 2장과 수염을 기른 매서운 눈초리의 바이킹을 바라보았다.
“제게 뭘 원하시는 겁니까?”
저 두 개의 편지 중 칼리나 변경백의 인장이 찍힌 건 자신 앞으로 온 게 아니기에 봐선 안 되는 거였지만 상대는 굳이 자신에게 그 편지를 보여주었다.
물론 내용을 보여준 건 아니지만 본인의 입으로 그 안의 내용을 줄줄 읊어주니 당연히 무슨 꿍꿍이가 있을 거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간단합니다. 제노바가 검은 용군단 연합에 가입할 수 있게 힘을 좀 써주십시오.”
직설적인 라그나르의 말에 가브리엘은 당황한 눈치였지만 이내 뛰어난 상인답게 표정을 갈무리한 뒤 물었다.
“그로 인해 저나 아도르노 가문이 얻게 되는 이익은 뭐가 있습니까?”
“이익이라, 하긴 신의니 신뢰니 빚이니 하는 것보단 눈에 보이는 이득이 더 확실하겠지요.”
잠시 뜸을 들이며 기대감을 한껏 끌어올린 라그나르는 탁자에 양 팔꿈치를 대며 몸을 기울였다.
“다음 총독은 아도르노 가문에서 나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본인과 정치적 공작이나 정치적 거래를 하자는 얘기입니까?”
“오, 그건 아닙니다. 그저 현 상황에 대해 외부인으로서 좀 더 객관적으로 말씀드리는 것뿐입니다. 한번 들어보시겠습니까?”
능청스럽게 얘기하는 라그나르의 말에 가브리엘은 미심쩍은 표정을 지으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얘기를 들어보는 것뿐이라면 손해 보거나 문제 될 게 없으니까.
“사실 가브리엘 님께서도 아시다시피 제노바는 결국 이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겁니다. 지금의 제노바는 티레니아해의 여왕이라 불리며 찬란한 영광을 발하고 있지만 그게 죽기 직전에 내는 마지막 불꽃이라는 걸 다 알고 있지 않습니까?”
“으음….”
“비천한 야만인인 제가 생각건대 작금의 제노바가 쇠퇴하고 있는 건 니스에서 활개 치고 있는 하이르 앗 딘과 레반트 무역을 독점하며 지중해의 패권을 장악하고 있는 베네치아 때문이라고 사료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정확합니다. 그렇게 정곡을 찌르시니 가슴이 아프군요.”
“원래 상처를 헤집으면 아픈 법 아니겠습니까. 아무튼, 추가로 더 말씀을 드려보자면 검은 용군단에 합류하게 되면 위에서 언급한 문제점들을 해결할 수 있습니다.”
“경청하겠습니다.”
“일단 하이르 앗 딘을 처단할 정도로 힘 있으며 강력한 동맹을 얻을 수 있습니다. 또한 제노바와 칼리나 변경백 각하는 서로 공통된 적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공통된 적이라… 틀린 말은 아니지요.”
물론 제노바와 칼리나의 사이도 썩 좋은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베네치아에 대한 원한에 비할 건 아니었다.
“제노바 역시 베네치아가 비선실세로 있는 라틴과 사이가 좋은 건 아니잖습니까? 적의 적은 친구라 했으니 우리는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겁니다.”
“즉, 경께서는 이 기회를 잡아야 한다고 얘기하시는 거군요.”
“내부에서부터 조금씩 무너져 내리는 제노바가 유일하게 찾을 수 있는 돌파구는 이 연합밖에 없을 겁니다.”
이건 굳이 내가 이런 상황에서의 제노바가 어떻게 몰락하는지를 봐서 그런 게 아니라 통찰력이 있는 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일 것이다.
“그 때문에 적극적으로 제노바의 가입을 선도하고 하이르 앗 딘과의 전투를 이끈다면 지금은 무리라도 현 총독 이후에 그 자리에 오를 수 있을 겁니다. 원래 지도자는 대중에게 내세울 수 있는 업적과 임팩트가 중요한 것 아니겠습니까?”
조용히 내 말을 듣고 있던 가브리엘은 팔짱을 끼며 조금 다른 관점에서 날카롭게 질문했다.
“뭐, 그 이야긴 잘 알겠습니다. 그런데 라그나르 경의 말대로라면 합리적으로 생각해볼 때 당연히 우리 제노바는 만장일치로 검은 용군단에 가입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굳이 제게 이 제안을 얘기하신 이유를 모르겠군요.”
“정말 몰라서 질문하시는 겁니까?”
몰라서 물어보는 거면 눈앞의 사내가 형편없다는 얘기일 테니 아마 날 시험하려는 거겠지. 물론 난 얼마든지 그 시험에 대해 100점짜리 답안지를 제출할 자신이 있다.
“글쎄요. 혹시 알본의 베아트리체 백작님의 편지 때문에 일부러 저를 찾아오신 겁니까?”
“그것도 있지만 혹시 반대를 위한 반대를 아십니까?”
“…?”
“상대의 말이 옳은 걸 알아도 나와 사이가 안 좋으니까, 상대의 위상이 올라가는 게 싫어서 일단 반대부터 하고 보는 겁니다. 다 그런 건 아니지만 제노바처럼 유력한 가문들이 국정을 이끌어간다면 각 가문 간의 알력관계도 있을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내 말이 정답이었는지 그는 헛웃음을 지으며 박수를 쳤다.
“하… 하하… 하하하하하하! 정말 대단하시군요. 그대가 정말 야만인이 맞습니까?”
“문명인에 동화되고 있는 야만인이지요.”
“그대는 스스로를 야만인이라 얘기하고 있지만, 제노바에서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돼지 새끼들보다 훨씬 낫군요. 그대의 말이 맞습니다.”
“허면 가브리엘 님의 시험에는 통과했다고 봐도 되겠습니까?”
“시험이라니, 그렇게 거창하게 이야기할 건 아닙니다만 혹여나 그렇게 느끼셨다면 정말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이번에는 가브리엘 경이 제 시험에 답을 보여주셔야 할 테니까요.”
살짝 뼈가 담긴 내 말에 가브리엘은 흠칫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더니 이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이 문제는 제노바의 미래가 달린 문제니 저도 최대한 노력해보겠습니다. 다만 그것과는 별개로 최종 결정권을 쥔 총독은 라그나르 경의 제안을 거부할 겁니다.”
“이유가 뭡니까? 설마 교황을 지지하고 있어서 그런 겁니까? 그도 아니면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뭐, 그것도 있지만 실은 얼마 전 총독의 아들이 납치를 당했습니다.”
어떤 미친놈이 제노바 총독의 아들을 납치할까 싶었지만 이내 가브리엘이 왜 이야기를 꺼냈는지 알 것 같았다.
“허… 설마 그 납치를 한 게 하이르 앗 딘입니까?”
“예. 아마 총독은 제노바가 교황을 지지해 왔던 것을 강조하고 하이르 앗 딘과의 전쟁 시에 입게 될 피해를 언급하며 참전을 거부할 겁니다.”
그런 식으로 논점을 흐려버리면 나도 답이 없어진다. 원래 전쟁이라는 건 자국의 여론이 제일 중요한 법이니까.
“방법이 없겠습니까?”
“일단 저는 현 총독을 맡고 있는 조반니 가문을 제외한 다른 가문들을 설득해보겠습니다. 그리하면 총독이 거절해도 강제로 전쟁을 수행할 수 있을 겁니다.”
“알겠습니다. 일단은 이 편지를 총독에게 전해야 하니 저 역시 따로 총독을 만나 추가적으로 설득을 해보겠습니다.”
* * *
<제노바 총독의 관저>
“칼리나 여변경백의 뜻은 알겠지만 우리 제노바는 이 연합에 참여할 생각이 없네.”
가브리엘 아도르노의 말대로 총독은 칼리나의 편지를 보자마자 일말의 고민도 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런 중대한 사안을 총독님 혼자서 결정하신다는 얘기입니까?”
“자네가 뭐라 하건 내 결정이 번복될 일은 없을 걸세.”
“혹시 아드님이 하이르 앗 딘에게 납치당한 것 때문에 그러십니까?”
“……그대는 굉장히 유능한 것 같군. 그 이야기가 역린인 걸 알면서도 내 앞에서 당당하게 꺼내는 걸 보면 말이야.”
대놓고 날 모욕하는 말이었지만 난 어깨를 으쓱였다.
“흠, 그럼 이렇게 하시지요. 제가 아드님을 구출해드리겠습니다.”
“…농담이 과하군. 비록 제노바가 지는 해긴 하지만 제노바의 총독이라는 자리는 자네 생각보다 더 많은 권한을 가지고 있는 자리네. 그런 내가 아들을 구하기 위해 안 해본 게 있을 거라 생각하나?”
물론 저게 틀린 말은 아니지만 적어도 내게 해당되는 얘기는 아니었다. 원래 영주 구출이나 요인 구출은 자주 나오는 퀘스트였다.
단지 목적지가 하이르 앗 딘의 본거지라 조금 빡세긴 할 테지만 내 고인물 짬밥이 어디 가겠는가.
거기에 단독 행동으로 정평이 나 있는 바이킹이니만큼 외부에서 지원만 제대로 해준다면 구출해 낼 수 있을 것이다.
“뭐, 어떻게 생각하시든 그건 총독님의 자유고 제 제안을 거절하셔도 상관없습니다. 어차피 다른 가문들이 연합해서 칼리나 변경백의 제안을 수락하라고 총독님을 압박할 테니까요.”
사실 따지고 보면 내 입장에서 아쉬울 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총독에게 호의를 팔아두려는 건 그의 말대로 제노바의 총독이라는 자리가 가지는 힘을 마냥 무시할 순 없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런 나를 보며 총독은 재밌다는 얼굴로 되받아쳤다.
“자네… 보기와는 다르게 협상을 하는 법을 아는군. 칼리나 여변경백이 아주 제대로 된 사냥개를 길들였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