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53화
레이몬드 5세에게 도발을 끝낸 나는 당당히 귀환했고 그런 나를 프로방스의 백작인 라몬 베렌게르가 맞아주었다.
“어서 오시오. 라그나르 경.”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백작 각하.”
“그대의 위명은 내 익히 듣고 있던 바요. 북부에서 례셰크를 사로잡는 기염을 토해냈다지? 과연 칼리나 변경백 각하께서 그대를 총애할 만하구려.”
“과장된 소문일 뿐입니다. 그보다 백작님. 연합에는 가입할 용의가 있으십니까?”
내 말에 백작은 턱을 쓰다듬으며 말을 아꼈다. 하긴, 생각해보면 제대로 생각할 시간도 없이 선택을 강요하는 셈인데 바로바로 대답이 나오는 것 자체가 이상하지.
살루조와 사보이, 알본은 각자 이유가 있어서 가입을 했던 거고 프로방스 입장에선 가입에 신중할 수밖에 없다.
“물론 고민을 하시는 건 이해합니다. 다만 제가 약속드릴 수 있는 건 연합에 가입하시게 되면 칼리나 변경백 각하와 연합의 이름으로 보호받게 될 겁니다.”
“그 말은 칼리나 변경백이 이곳 프로방스에 대한 우리 가문의 소유권과 정당성, 계승권에 대해서 보증해준다는 얘기인가?”
“그렇습니다. 애초에 이 계승권 논쟁 자체가 툴루즈 쪽의 생떼에 불과하지 않습니까?”
원래 생떼도 계속 쓰다 보면 명분이 생기는 법이다. 각국의 영토 분쟁이나 역사 왜곡이 일어나는 게 다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니던가.
“다시 이를 말인가. 저 근본 없는 놈들 때문에 나도 그렇고 아버지도 그렇고 오랜 기간 싸워와야 했네.”
“연합에 가입하게 되면 그런 문제가 모두 해결될 겁니다.”
“좋아. 가입하도록 하지. 다만 이번 전쟁에서 우리가 승리해야 하네. 그게 아니라면 내가 연합에 가입하는 의미가 없지 않나?”
“그렇게 말씀하실 줄 알고 결투로 승부를 보기로 얘기를 끝마쳐 놨습니다.”
내 말에 백작은 헛웃음을 터뜨리며 나를 바라보았다.
“철두철미하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간이 크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군. 내가 그대의 제안을 받아들일 거라고 확신을 한 것인가?”
뭐, 결과만 놓고 보자면 별문제가 없었지만 나는 백작의 허가가 떨어지기 전에 단독으로 툴루즈와 협상을 한 꼴이니 라몬 입장에선 화가 날 법도 했다.
물론 지금 와서 어쩌고저쩌고하면서 변명을 늘어놓는 것도 없어 보이기에 납작 엎드리며 라몬 백작을 치켜세워주기로 했다.
“백작 각하의 안목과 통찰력을 믿은 겁니다. 백작님처럼 지혜로우신 분이라면 뭐가 이득인지는 잘 아실 테니까요.”
“말솜씨가 제법이군. 좋아. 레이몬드 그 개자식에게 한 방 먹여줄 수만 있다면 그 정도야 관대하게 넘어가 줄 수 있네.”
“목숨을 걸고 결투에서 승리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한 자리는 자네가 싸운다 치고 두 자리는 이쪽에서 대전사를 준비하면 되겠나?”
“아니요. 굳이 준비하실 필요 없습니다. 여기 최고의 대전사가 있으니까요. 2승을 챙기면 굳이 남은 대전사가 나설 필요도 없지 않습니까?”
내가 한 발짝 물러나며 힐데의 어깨에 손을 올리자 백작은 미묘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사제님 말인가? 확실히 정화교단의 사제분들이 직접 전투에 나선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아무래도 불안한 모양이다. 일단 여자에다가 근육이 빵빵한 것도 아니고 여리여리해 보이는 힐데가 대전사로 나선다니 아무래도 불안하겠지.
물론 충분히 이해한다. 원래 사람이란 자신이 직접 보지 않은 이상 본인의 경험과 그로 인해 내린 판단을 맹목적으로 믿는 편이니까.
“저와 힐데가 나선다면 승리는 따놓은 당상입니다. 백작 각하께선 편하게 앉아 툴루즈 백작의 패배와 일그러진 표정을 감상하시면 됩니다.”
“으음….”
하지만 내 장담에도 불구하고 라몬은 불안한 표정이었고 나는 선심 쓰듯 이야기했다.
“허면 나머지 1명의 대전사는 백작님께서 선출하시지요. 어차피 힐데가 진다고 해도 저와 백작님께서 뽑은 대전사가 승리하면 되는 일 아닙니까?”
“그건 그렇지.”
“절 믿어주십시오. 그녀는 저와 함께 용병으로 활동하며 때려잡은 도적의 수만 네 자릿수에 이를 겁니다.”
물론 내 말에도 백작은 여전히 께름칙한 얼굴이었지만 난 필사적으로 그를 설득했다. 이길 게 확실한 패를 두고 굳이 백작이 고른 대전사로 모험을 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거기에 힐데는 정화교단의 전투 사제입니다. 그냥 사제도 아니고 전투 사제로 임명받는 게 얼마나 힘든지는 백작 각하께서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전투력이 교황청의 이단심문관들과 비등하단 얘기는 들었네만… 알겠네. 자네 말대로 하지.”
“탁월한 선택이십니다. 장담컨대 오늘 상상했던 것 그 이상을 보게 되실 겁니다.”
그리고 말 그대로 라몬 백작은 입을 떡 벌린 채 힐데가 싸우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라몬뿐만 아니라 이곳에 모인 이들 모두가 힐데의 모습에 경탄하고 있었다.
“경배하라! 신성의 힘을!!!!”
내가 본인에게 무한한 신뢰를 보여줌과 함께 직접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에 고무된 건지 그녀는 평소와는 다르게 수많은 퍼포먼스를 보여주었다.
그녀의 메이스에는 정화의 불꽃이 넘실거리고 있었고 힐데의 몸은 신성력이 응집되다 못해 새하얗게 빛나며 후광을 내뿜고 있었다.
살아있는 기적의 현신과도 같은 그녀의 모습에 몇몇 이들은 무릎 꿇은 채 신의 이름을 찬송했고 몇몇은 두려움에 떨었다.
모든 준비작업을 마친 힐데는 메이스를 빙글빙글 돌리더니 이내 상대를 향해 번개처럼 달려나가 메이스를 휘둘렀다.
쾅!
벼락이 내려치는 듯한 둔중한 소리가 전장에 울려 퍼졌고 결투는 그걸로 끝이었다. 그 누구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지 못했지만 가슴 한가운데가 찌그러져 있는 대적자의 갑옷만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려주고 있었다.
상대가 쓰러진 걸 확인하자 힐데는 더 볼 것도 없다는 듯 고개를 돌려 귀환했고 멍하니 그녀를 쳐다보던 라몬 백작은 벌떡 일어나 물개처럼 박수를 쳤다.
“대단해! 정말 대단하군! 라그나르 경. 그대의 말이 맞았소! 과연 그대가 내게 호언장담을 할 만하군!”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남은 결투도 마음 편하게 구경하시면 됩니다.”
“하하, 그대만 믿고 있겠네. 레이몬드 저 개자식이 죽을상을 하고 있는 걸 보니 십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군!”
내가 백작과 대화를 하는 사이 결투에서 승리한 힐데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고 나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잘했어 힐데. 너라면 이길 거라 믿고 있었어.”
“당연합니다. 당신이 지켜보는데 제가 추태를 보일 리가 없지 않습니까.”
“그래. 고생했어.”
난 그녀의 어깨를 툭툭 두들겨주며 가볍게 치하해준 뒤 간단한 무장을 하고 뚜벅뚜벅 걸어 나갔다. 툴루즈 쪽에서도 대전사와 함께 레이몬드 5세가 걸어 나왔는데 나는 기 싸움도 할 겸 가볍게 그를 도발했다.
“대전사의 실력이 형편없더군. 아니면 여자에게 두들겨 맞는 취향의 대전사를 데려왔던가?”
“콧대가 치솟았구나 야만인. 하지만 걱정하지 마라. 곧 희망이 절망으로 뒤바뀔 테니.”
“글쎄, 다른 건 모르겠지만 네가 정신 승리를 하고 있다는 건 알겠군.”
“하룻강아지 새끼가 범 무서운 줄도 모르고 날뛰는구나. 야만인.”
“누가 범이고 누가 하룻강아지인지는 신께서 알려주시겠지.”
내가 한마디도 밀리지 않자 그는 죽일 듯 날 노려보더니 이내 비릿하게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그 잘난 바이킹의 긍지를 내다 버린 채 칼리나의 기둥서방 노릇을 하니까 좀 살만하던가? 괜찮으면 나한테도 한 번 빌려주지 그래?”
레이몬드는 갑자기 노선을 바꿔 칼리나를 들먹이며 나를 도발했지만 나는 태연한 얼굴로 받아쳤다. 원래 이런 트래쉬 토크에선 먼저 화를 내는 쪽이 지는 거다.
“글쎄, 자네가 칼리나를 만족시킬 수 있을지 모르겠군. 자네 자존심이 상할까 봐 내 이런 말까진 안 하려고 했는데… 자네가 밤 생활에 굉장히 문제가 많다지?”
“그게 무슨 개소리지?”
이번에는 이전과는 다르게 반응이 날카로웠고 나는 이게 상대의 아킬레스건이라는 걸 깨닫고 느긋한 어조로 이야기했다.
“자네의 아내가… 분명 프랑스 왕의 딸이었던 콘스탄스였지? 내가 듣기로 그녀와 이혼한 이유가… 자네가 밤에 만족을 못 시켜줘서 그랬다는데 맞나? 맞다면 정말 안타깝군.”
굳이 레이몬드의 대답을 들을 것도 없이 씰룩거리는 입가와 움찔거리는 눈가, 새빨개진 얼굴만으로도 그가 화나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혹시 새로 결혼한 아내도 자네의 길이와 기술에 만족 못 한다면 내게 보내주게. 바이킹의 긍지를 보여줄 테니.”
내가 가볍게 허리를 돌리며 레이몬드를 능욕하자 그는 더 이상 참지 않고 칼을 뽑아 들었다.
“이런 개자식!!!”
“하하하, 직접 대전사가 될 생각인가? 그것도 나쁘지 않지.”
나는 웃으며 가져온 도끼를 바닥에 내리꽂은 뒤 오직 방패 하나만 꺼내 들었다.
“지금 뭐 하는 짓이지? 무기를 들어라 야만인.”
“그러고 싶지만, 내가 여기서 자네를 죽였다간 외교적 문제로 번지지 않겠나?”
“자신만만하군. 후회하게 해주지!”
레이몬드는 열이 머리끝까지 뻗쳤는지 거대한 기합과 함께 내게 달려들었고 나는 끝까지 그의 검끝을 바라보다가 방패로 그의 공격을 튕겨냈다.
파아앙!
패링이 성공적으로 들어가자 백작의 가슴이 훤하게 드러났다. 그는 당황하며 왼손의 방패로 막으려 했지만 나는 발로 그의 가슴팍을 걷어찼다.
“크헉!”
백작은 내 발길질에 두 걸음 정도 뒤로 물러나더니 이내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이고 나를 노려보았다. 아마 통증보다는 내게 걷어차였다는 데서 오는 부끄러움과 분노가 더 크겠지.
“이게 전부인가? 그렇다면 실망인데.”
내 도발에 백작은 대꾸하지 않고 왼손에 찬 방패를 내팽개치더니 왼손으로 검의 중단을 잡았다.
“하프 소딩? 참나, 어이가 없어서.”
일반적인 자세가 아닌 찌르기 위주의 하프 소딩은 상대에게 근접해서 불시에 써야 효과를 발휘하는 법이다. 근데 저렇게 동네방네 쓰겠다고 광고하는데 당해줄 바보가 어디 있던가.
하지만 레이몬드는 개의치 않고 달려들었고 나를 압박해 들어왔다. 물론 나는 여유롭게 상대의 찌르기를 흘리거나 막아가며 이리저리 눈을 굴렸다.
이런 식의 공격은 패링을 하기가 까다로운 데다 중갑을 입어서인지 반격을 해도 어지간한 타격으로는 꿈쩍도 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었다.
레이몬드는 계속 날 몰아치는데도 유효타가 하나도 나오지 않자 조급해졌는지 검을 찌르는 동작이 커지기 시작했다.
거기에 내가 일부러 방패를 내리며 빈틈을 보이자 바로 검의 끝을 붙잡은 뒤 폼멜로 내 대가리를 깰 생각으로 있는 힘껏 내려찍었다.
물론 난 그 틈을 노리고 있었기에 한 발짝 먼저 상대의 공격을 피한 뒤 왼손에 매여있는 방패로 있는 힘껏 상대의 투구를 후려쳤다.
쾅!
엄청난 소리와 함께 레이몬드가 쓰고 있던 투구가 벗겨졌고 그는 술에 취한 것처럼 비틀거렸다. 딱 봐도 눈에 초점이 없는 게 맛이 간 것처럼 보였고 이내 바닥에 널브러지며 기절했다.
“그럭저럭 봐줄 만한 실력이었지만 한참 모자라군.”
백작의 상태는 누가 봐도 전투 불능이었기에 나는 바닥에 꽂아놓은 도끼를 챙긴 뒤 아직까지 혼절해 있는 그를 조롱했다.
“두 번 다시는 까불지 마라. 나는 바이킹이고 무적이다. 오딘은 신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