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52화
나는 기사를 몇 명 대동한 채 칼리나의 가문을 뜻하는 검은 용의 깃발을 휘날리며 툴루즈 백작이 있는 곳으로 천천히 말을 몰았다.
툴루즈의 경계병은 뜬금없이 다가오는 내 모습에 경계심 어린 표정이었으나 내 뒤에서 휘날리는 깃발을 확인하고는 부리나케 다가와 넙죽 고개를 숙였다.
“고귀한 분이시여. 제게 고귀한 분의 성함을 알 수 있는 영광을 주시겠습니까?”
“본인은 칼리나 변경백 각하의 명을 수행하고 있는 라그나르 로드브로크라고 하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라그나르 경. 혹시 이곳에 방문하신 목적을 알 수 있겠습니까?”
“프로방스에 볼일이 있어서 왔는데 툴루즈와 싸우고 있다고 하더군. 해서 직접 중재를 위해 이렇게 찾아왔으니 했던 말 그대로 레이몬드 5세에게 전하게.”
“알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경비병은 허겁지겁 안으로 들어갔고 나는 말 위에 올라 툴루즈군의 야영지를 둘러보았다. 이번에는 꽤 작정하고 왔는지 대충 훑어봐도 병력의 숫자가 거진 천에 달해 보였다.
게임을 플레이할 때마다 상황이 다르긴 하지만 대개 프로방스의 백작들은 늘 툴루즈와 싸워왔다. 싸우게 된 이유가 조금 웃긴데 예전에 프로방스의 여백작 엠마가 툴루즈의 윌리엄 3세와 결혼을 한 적이 있었다.
물론 그녀는 프로방스의 백작 자리에 대해 별생각이 없었는데 갑자기 자신의 형제가 죽자 물려받게 된 케이스긴 했지만 어쨌든 여기까지는 별문제가 없었다.
문제는 그녀 사후에 그녀의 자손인 툴루즈의 백작들이 프로방스를 밟아본 적도 없으면서 프로방스에 대한 소유권과 계승권을 주장한 것이다.
당연히 원래 프로방스를 다스리던 백작들은 피가 거꾸로 솟을 일이었고 그 때문에 백 년이 넘게 영토 분쟁을 벌인 것이다.
그 과정에서 일부 영토에 대한 분할도 있고 다른 곳에서 개입하기도 하고 별 지랄이 있기도 했지만, 어쨌건 툴루즈와 프로방스 백작 사이의 영토 분쟁은 굉장히 긴 시간 동안 이어져 왔다는 게 주요 골자였다.
그리고 현 툴루즈 백작인 레이몬드 5세는 프로방스가 하이르 앗 딘 때문에 고통받는 틈을 타 그 기나긴 싸움에 종지부를 찍기 위해 기습적으로 병력을 일으킨 거였다.
물론, 난 그 꼴을 두고 볼 생각은 없다. 프로방스가 넘어가게 되면 추후 내가 니스를 다스릴 때 지속적인 위협이 될 테니까.
* * *
<프로방스 백작 라몬 베렌게르 4세의 주둔지>
“어… 그러니까 자네가 칼리나 변경백 각하의 명령을 받아서 이곳에 왔다는 얘기인가?”
“아니요. 저는 레이븐 용병단의 수장인 라그나르 로드브로크 단장의 명령을 받고 왔습니다.”
자신을 힐데가르트 폰 빙옌이라고 소개한 여사제를 보며 라몬 백작은 당혹스러운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 레이븐 용병단의 수장인 라그나르 로드브로크라는 사내가 칼리나 변경백 각하의 명을 받았고?”
“그렇습니다.”
“그럼 결과적으로 자네는 칼리나 각하의 명을 받은 게 아닌가?”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오직 라그나르 단장의 명만을 받들고 수행합니다.”
단호박 같은 힐데가르트의 답변에 라몬은 일단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어… 음… 그… 일단은 알겠네. 자네만 괜찮다면 잠깐 편지를 읽을 시간을 가져도 되겠나?”
“편하실 대로 하십시오.”
여사제는 의자의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눈을 감았고 라몬은 서둘러 편지의 봉인을 뜯었다.
신성 제국에 수많은 가문과 그 가문을 뜻하는 문장이 있다지만 반드시 외워야 하는 3개의 문장이 있었으니 호엔슈타우펜의 3마리 사자와 벨프가의 3마리 사자, 마지막으로 카노사 가문의 검은 용이었다.
물론 문장이야 얼마든지 위조할 수 있다지만, 목숨이 서너 개가 아닌 이상 그런 정신 나간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다.
“으음….”
편지를 다 읽은 라몬은 편지를 접어 품속에 넣은 뒤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용 자체는 길지 않았지만, 그 안에 담긴 내용은 프로방스의 미래를 결정지을 내용이 담겨있었기 때문이었다.
“혹시 자네는 이 편지에 뭐라 적혀있는지 알고 있나?”
“정확히 뭐라 적혀있는지는 모르지만, 대략적인 내용은 알고 있습니다.”
“그럼 얘기가 좀 더 빠르겠군. 이 편지에는 추후 조직할 검은 용군단 연합에 대한 가입 권유와 그로 인해 얻게 될 혜택들이 적혀있었네.”
“그게 전부입니까?”
“아니. 이 편지를 전하는 라그나르라는 전령에게 전권을 부여한다는 것과 그가 뭔가를 하려 한다면 믿고 지지해주라는 내용도 첨부돼있더군.”
“라그나르 단장께서는 이 전쟁은 칼리나 변경백의 이름으로 불허한다고 하셨으며 이 전쟁의 승패는 결투로 정한다 하셨습니다. 물론 상대측이 거절한다면 그때는 칼리나 변경백의 이름으로 이 전쟁에 개입할 겁니다.”
그녀는 모든 조건을 이야기한 뒤 여유로운 모습으로 한마디 덧붙였다.
“물론 최종 선택은 백작 각하께서 하시겠지만, 저희가 내민 손을 잡으신다면 절대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확실히 그것 말고는 별다른 선택지가 없는 것 같군. 물론 결투에서 승리한다는 전제가 붙긴 하겠지만… 라그나르 경이 결투를 얘기하는 걸 보면 자신 있다는 얘기로 받아들여도 되겠지?”
“물론입니다.”
자긍심과 자부심까지 느껴지는 그녀의 대답에 라몬은 기묘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녀에게서 라그나르라는 인물에 대해 맹목적인 믿음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자신이 듣기로 라그나르 로드브로크라는 인물은 칼리나 변경백의 총애를 받는 야만인 용병단장이라고 했다. 그 총애에 걸맞게 이번 북부의 전투에서 꽤 활약을 한 모양이고.
문제는 그런 그의 휘하에 있는 이 여사제가 칼리나 변경백에 대한 적개심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툴루즈와의 영지전을 마무리 짓는 것과 검은 용군단의 가입 여부였기에 라몬은 그 호기심을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알본과 살루조, 사보이도 가입했다고 했던가?”
“그렇습니다. 추후 제노바와 몽페라토도 가입을 권유할 생각입니다.”
“알겠네. 변경백 각하께서 여기 약조한 내용들을 지켜주시고 툴루즈와의 영지전을 승리로 마무리 지으며 이후 공격당할 시 지원을 약조한다면 기쁜 마음으로 연합에 가입하도록 하지.”
“탁월한 선택이십니다. 아후라 마즈다의 이름을 걸고 단언하건대 지금의 선택을 결코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 * *
<툴루즈 백작 레이몬드 5세의 주둔지>
쾅!
“칼리나? 그 미친년이 왜 이곳의 일에 개입한단 말이냐?”
“그, 그것까진 저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휘날리는 깃발의 문장은 틀림없는 카노사 가문의 문장이었습니다.”
“라몬이 헛수작을 부리는 것일 수도 있지 않나.”
“저도 그런 생각을 해봤습니다만 그 전령으로 온 라그나르라는 자는 칼리나 변경백에게 고용된 용병이 맞습니다. 얼마 전 프리드리히 황제가 일으킨 전쟁에서 크게 활약하지 않았습니까.”
“돌아버리겠군.”
수하의 보고에 머리를 쓸어올리며 한숨을 내쉰 레이몬드는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그래서 그 라그나인지 뭔지 하는 개자식은 어디에 있나?”
“현재 주둔지 밖에서 대기 중입니다.”
“불러… 아니, 내가 직접 가서 그 낯짝이나 한번 보도록 하지.”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레이몬드는 바로 말 위에 올라 주둔지 정문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수하의 보고대로 검은 용이 새겨진 깃발이 휘날리고 있었으며 검은색 갑주로 무장한 병력들이 서 있었다.
직접 본 적은 없지만, 저게 소문으로만 듣던 용기사단이라는 건 의심할 여지가 없어 보였다.
“본인은 툴루즈의 백작 레이몬드라고 하네. 칼리나 변경백의 명을 받은 자가 누구인가?”
“나를 찾았나?”
한 발짝 앞으로 나서며 대답하는 덩치 큰 사내를 보고 레이몬드는 얼굴을 구겼다.
안 그래도 계획이 어그러져서 짜증 나 죽겠는데 비천한 야만인이 반말을 찍찍 싸갈기니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야만인이라 그런지 말이 좀 짧군. 그 머릿속에 예절이라는 건 없는 건가?”
“자칭 문명인들이 싸가지가 없는 건 대가리에 도끼가 찍힐 걱정이 없어서라고 하던데… 과연 틀린 말이 하나 없군.”
그 대답에 레이몬드는 뱃속에 울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애써 무시했다. 야만인과 싸워봤자 자신의 명성과 명예에만 흠이 가지 않겠는가.
“네놈의 무례는 내 관대함으로 용서해주지. 그래서 야만인. 이 먼 곳까지 뭐 주워 먹을 게 있다고 온 거지?”
“간단해. 지금 이 시간 이후로 프로방스는 검은 용군단의 일원이고 이에 대한 적대행위는 칼리나 변경백 각하에 대한 공격이라 간주한다는 걸 알려주기 위해 온 것이지.”
“그게 뭔….”
“야만인보다 머리가 안 좋은 것 같으니 간단히 얘기해주지. 영지전을 여기서 끝내고 병력들을 철군시켜라. 그리하면 그에 대한 배상 차원에서 적당한 양의 위로금을 건네주지.”
물론 레이몬드는 들을 가치도 없다는 듯 거절했다.
“개소리를 포장해서 지껄이는 취미가 있군. 이게 내정간섭이라는 건 알고 있나? 툴루즈는 프로방스에 대한 정당한 소유권과 계승권을 가지고 있다. 이 권리를 행사하는데 칼리나 변경백이 무슨 수로 막겠다는 거지?”
“누가 막겠다고 했던가? 원한다면 그 권리를 행사해도 좋아. 대신, 우리와 싸울 각오를 해야겠지.”
우리라는 말에 레이몬드는 라그나르의 뒤편에 휘날리는 깃발을 바라보았고 그곳에는 카노사 가문뿐만 아니라 알본과 살루조, 사보이를 다스리는 영주들의 문장까지 함께 휘날리고 있었다.
“감히 야만인 따위가 날 겁박하는 건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유감이군. 내 중재안이 싫다면 결투로 승부를 봐도 상관없어.”
“결투?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지껄이는군. 네놈이 칼리나 변경백의 전령이 아니었다면 진작에 그 목이 잘렸을 것이다.”
“그럴 배짱이나 있나 모르겠군. 아무튼, 뭘 택하든 네놈의 자유지만 결투를 두려워하는 걸 보니 네놈의 신앙심에 대해 아주 잘 알 것 같군.”
“감히 야만인인 네놈이 신앙을 입에 담는가?”
“겁먹은 게 아니라면 정정당당히 결투에 임해서 너 자신을 증명해봐라.”
“시답잖고 하찮은 도발이군. 좋아. 네놈 말대로 결투에 응하도록 하지.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얘기했으니, 네놈도 결투에 나오겠지?”
“오, 바이킹은 결코 싸움에서 도망치는 법이 없지. 누구와는 다르게!!!”
“하, 내 반드시 네놈의 목을 베어서 칼리나 변경백에게 보내주도록 하지.”
“할 수 있다면 얼마든지.”
“네놈이 부디 네 혓바닥만큼 실력을 가지고 있기를 빌고 있겠다.”
* * *
툴루즈 백작이 으르렁거렸지만 난 가볍게 무시한 뒤 발길을 돌렸다. 다행히 도발은 먹혀들었고 이제 이 전쟁의 승패는 결투로 결정될 것이다.
물론 결투에서 지거나 승리한다고 해도 적당한 보상금이나 뱉어내고 끝날 테지만 원래 이런 결투는 자존심 대결이었다.
한일전에서도 축구 한 번 이기거나 진다고 딱히 바뀌는 건 없지 않은가. 그런데도 사람들이 그렇게 열광하고 관심을 가지는 건 이게 자존심이 걸려있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라그나르가 기뻐하는 게 벌써부터 느껴지는군.”
몸속 깊은 곳에서부터 짜릿짜릿하게 울리는 흥분과 끓어오르는 고양감은 결코 나 자신만의 것은 아니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