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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바이킹이 되었다-51화 (51/205)

▣ 051화

알본으로 향하는 말 위에서 느긋하게 질겅질겅 육포를 뜯고 있던 내게 이비가 다가왔다.

“주군. 쉬시는데 죄송합니다. 잠깐 드릴 말씀이 있는데 괜찮겠습니까?”

“어? 어… 따로 자리 좀 만들까?”

“아니요. 그런 개인적인 얘기는 아닙니다. 단지 제가 그 베아트리체 님과 조금 인연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어? 진짜?”

내가 눈이 휘둥그레져서 묻자 그녀는 멋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녀의 표정이 직접 드러난 건 아니었지만 척하면 척이었다.

힐데는 물론이고 이비와도 온종일 붙어 다니다 보니 이제는 가면을 쓰고 있어도 그녀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눈에 훤히 보인다.

“예. 제가 노예로 붙잡히기 전에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는데 그때 베아트리체 백작님을 만났습니다.”

이게 의사 동료들의 좋은 점이다. 사람인 이상 당연히 질병에 걸리고 다칠 수밖에 없다.

당연히 그건 고위급의 귀족이어도 예외는 아니었고 이를 치료하려면 의사가 필요한데 어중이떠중이가 아닌 이븐 시나나 아스클레피오스, 화타와 같은 신의들은 대부분의 병을 말끔히 고쳐준다.

그러니 필연적으로 권력자들로부터 신뢰와 인망을 가질 수밖에 없다.

물론 이비는 본인의 외모 때문에 화타나 아스클레피오스에 비해 끗발이 딸리기는 하지만 이런 일이 있는 게 특별한 건 아니라는 얘기다.

“흠, 의사로서 만났다면 썩 좋은 일은 아니었다는 얘기네.”

“그렇습니다. 당시 베아트리체 님의 부군께서 생사의 고비를 넘기고 있을 때 그곳을 지나던 제가 우연히 부군을 돌보게 되었습니다.”

이게 동화와 같은 이야기였다면 이비가 그녀의 남편을 살리는 해피엔딩을 맞이했겠지만, 여긴 잔혹한 현실이었고 나를 비롯한 모두가 그 결말을 알고 있다.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봤습니다만, 죽음을 잠시 보류하는 것에 불과했습니다.”

“네가 그렇게 얘기할 정도면 상태가 꽤 심각했나 보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비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정도면 그건 진짜다. 그녀가 가지고 있는 신의라는 호칭은 도박으로 딴 게 아니니까.

“예. 솔직히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물론 다친 직후에 제가 바로 봤다면 얘기는 또 달라졌겠습니다만….”

“하이르 앗 딘에게 습격을 받았다고 했던가?”

“예. 돈과 관련해서 트러블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돈? 해적 놈들과 연관된 것도 께름칙한데 돈까지 걸려있으면 합법적인 일은 아니었겠네.”

아마 장물을 처분해준다든가 통행료를 받는다든가 물자를 공급해준다든가 뭐 그런 일들을 했겠지. 알본에는 지중해로 빠지는 론강도 흐르고 있으니 물자 운반에 걸리적거리는 일도 없을 테고.

애초에 니스의 북부는 알프스산맥으로 막혀있어서 뻗어 나갈 곳이 동쪽과 서쪽, 북서쪽밖에 없다.

당연히 직접 땅을 맞대며 사이가 안 좋은 제노바나 프로방스는 협상 대상에서 제외될 테니 결국 남는 건 북서쪽의 알본밖에 없다.

“근데 굳이 알본의 백작이 하이르 앗 딘과 손을 잡는다는 것도 이상한데. 영지에 돈이 많이 모자랐나?”

“백작님이 아니라 백작님의 부군이 단독으로 일을 처리했다고 합니다.”

“간도 큰 양반이시군. 그래서?”

“정확한 내막을 알지는 못합니다만 일이 잘 안 풀렸고 결국, 하이르 앗 딘 쪽에서 백작님의 부군을 납치해 협박하려다가 생각보다 저항이 거세서 죽이게 된 것 같습니다.”

“백작의 눈이 뒤집혔겠군.”

“예. 그때 여백작께서 복수를 천명하시면서 하이르 앗 딘과 연관된 모든 이들을 처형하시고 알본의 자금을 싹싹 끌어모아 용병들을 고용한 뒤 니스를 공격하셨습니다.”

이 역시 동화였다면 베아트리체가 하이르 앗 딘을 참살하고 남편의 무덤에서 통곡하는 새드 엔딩을 맞이할 테지만 현실은 그보다 더 가혹했다.

“하이르 앗 딘이 멀쩡히 살아있는 걸 보면 성공하진 못한 모양이네.”

“일부 피해를 주기는 했습니다만, 아무래도 해상전까지 할 여력은 없다 보니 일망타진은 실패했습니다. 물론 알본 역시 그 반동으로 힘든 시기를 보내야 했고요.”

“왜 칼리나가 자신만만하게 그녀의 합류를 장담했는지 알 것 같군.”

그리고 칼리나의 장담대로 내가 알본에 도착할 때까지만 해도 미심쩍은지 경계 어린 눈빛을 보내고 있던 베아트리체 여백작의 태도가 바뀌는 건 한순간이었다.

그녀는 칼리나의 이름으로 쓴 편지와 하이르 앗 딘 토벌의 이야기를 꺼내자마자 더 들을 것도 없다는 듯 바로 승낙했다.

합류에 대한 대가를 얘기할 필요도 없이 그녀에겐 하이르 앗 딘의 토벌 자체가 보상이자 포상이었던 모양이다.

“신이시여. 드디어 이 미천한 여인의 소원을 들어주시는군요. 라그나르 경. 그대의 말에 정녕 거짓은 없는 것입니까?”

“물론입니다. 백작님께서도 그동안의 굴욕과 치욕을 감내하고 일어서서 하이르 앗 딘과 맞서 싸울 준비가 되셨습니까?”

“그 간악하고 저주받아 마땅한 악인을 이 손으로 죽일 수 있다면, 내 육체가 부서지고 영혼이 갈기갈기 찢기더라도 기쁘게 받아들일 겁니다.”

그녀의 두 눈은 말 그대로 복수라는 이름으로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나는 그런 그녀의 집념과 열망에 순수하게 경의를 표했다.

“고결한 분이시여. 그대의 바람은 칼리나 각하의 이름으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헌데 라그나르 경. 연합이라는 걸 보면 저 이외에도 다른 영주들이 참전한다는 얘기입니까?”

“그렇습니다. 여백작께서도 아시다시피 하이르 앗 딘은 니스에 본거지를 두고 있으며 그의 휘하에는 수천의 정예병들이 철통같이 도시를 지키고 있습니다.”

물론 어느 정도 과장이 섞여 있고 하이르 앗 딘 휘하의 병력 대부분이 어중이떠중이들이긴 하지만 그 숫자가 많은 건 엄연한 사실이었다.

거기에 상대도 바보가 아닐 테니 당연히 성을 끼고 농성을 할 텐데 고작 몇백 명으로 니스를 공략하는 건 어림도 없는 얘기였다.

“최대한 손실을 줄이고 하이르 앗 딘을 사로잡기 위해선 새로운 동맹이 더 필요합니다.”

“혹시 추가로 생각하고 있는 동맹이 어딘지 알 수 있을까요?”

“사보이와 살루조, 이곳 알본과 몽페라토, 프로방스와 제노바입니다. 그리고 사보이와 살루조는 이미 검은 용군단에 함께하기로 약조한 상태입니다.”

“칼리나 각하와 원수 사이인 몽페라토를 끼는 것도 의외이기는 하지만, 제노바까지 연합에 합류시키는 건 정말 의외군요.”

확실히 이 시기가 교황파와 황제파의 대립이 심한 시기이기는 했다. 제노바와 피사가 투닥거리면서 싸운 건 티레니아해의 이권 때문이기도 했지만, 제노바가 교황파이고 피사가 황제파인 것도 있었으니까.

“백작님께서도 아시다시피 하이르 앗 딘을 끝내기 위해서 강력한 함대는 필수입니다. 그리고 이 근방에서 그럴만한 힘을 지닌 건 오직 제노바뿐입니다.”

“하지만 제노바는 교황파이지 않습니까. 설득하기가 쉽지 않을 텐데요.”

“쉽진 않지만 어떻게든 해내야겠지요. 그래야 칼리나 각하를 실망시키지 않음은 물론 백작님의 원수도 갚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내 말에 그녀는 나를 지긋이 쳐다보더니 품속에서 편지를 하나 꺼내서 내게 내밀었다.

“여기 이 편지를 아도르노 가문의 가주인 가브리엘에게 전해주세요. 현 제노바의 총독은 조반니 1세지만 아도르노 가문의 입김을 무시할 순 없을 겁니다.”

차분히 편지의 용도를 설명하는 그녀의 말에 내가 감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아도르노 가문과도 인연이 있으셨습니까?”

“이전에 제노바의 아도르노 가문이 자금난에 힘들어할 때 제가 보증을 서줬던 적이 있습니다. 지난번에는 힘이 모자라서 제노바를 끌어들이지 못했지만, 이번에 이렇게 대규모로 연합하고 공동작전을 펼친다면 제노바도 참전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배려와 신뢰, 믿음에 감사드립니다. 백작 각하.”

그녀는 과거 본인이 병력을 일으켜 하이르 앗 딘을 토벌하면서도 사용하지 않았던 히든카드를 지금의 내게 맡긴 것이었다.

물론 정황상 그때 도움을 요청했다면 제노바가 거절했을지도 모르니 쓰지 않았던 거겠지만, 이렇게까지 날 신뢰해준다면 당연히 그 기대에 응해줘야 하지 않겠는가.

“반드시 좋은 소식을 가지고 다시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저 역시 그러길 빕니다. 꼭 올해가 가기 전에 그대와 함께 전장에 설 수 있기를.”

그렇게 나는 생각지도 못한 선물과 함께 베아트리체의 환송을 받으며 프로방스로 향했고, 가는 길은 그 어느 때보다 수월했다.

배 위에 올라 지중해로 흘러가는 론강을 타고 쭉 내려가다가 중간에 합류하는 듀헝쓰강으로 빠져서 조금만 거슬러 올라가면 프로방스였다.

그 때문에 지도상으로는 300km 정도 되는 거리였지만 예상 이동시간은 고작 사흘이었다.

그 때문에 시간을 많이 절약한 만큼 이곳에서는 조금 편하게 쉬다 가겠다는 생각으로 프로방스에 도착한 나를 맞아준 건 한창 툴루즈와 영지전 중인 프로방스의 모습이었다.

물론 한창 전투 중이라는 소리는 아니었다. 툴루즈에서 병력을 끌고 마을 하나를 약탈하자 빡친 프로방스에서 병력을 끌고 나와서 대치하고 있는 게 현 상황이었다.

사실 이런 소규모의 영지전은 흔했고 신성 제국에선 더없이 흔했다. 영지전이라고 해도 막 수천, 수만의 병력들이 부딪히는 게 아니라 고작 수백 명이 투닥거리는 게 전부였으니까.

현대 관점으로는 이해가 안 될지도 모르겠지만, 우와아아앙! 하고 달려가서 한번 붙은 뒤 기세 싸움에서 밀리면 지는 게 이 시대의 일반적인 전투였다.

그 때문에 심심하면 일 년에도 몇 차례 벌어지는 게 영지전이었고 이게 가능했던 건 영지전이라는 개념 자체가 우리가 생각하는 총력전과는 궤를 달리했기 때문이었다.

“툴루즈와 사이가 안 좋다더니 그게 사실이었나 보네.”

“개입하실 겁니까?”

힐데의 물음에 나는 잠시 팔짱을 끼고 생각에 잠겼다.

둘이 싸우는 걸 조용히 관음하다가 프로방스가 밀릴 때 도와주는 게 좋은가?

아니면 애초에 처음부터 프로방스에 붙어서 툴루즈를 영혼까지 털어버리는 게 좋은가?

그도 아니면 조용히 혼내주고 되돌려 보내는 게 맞는가?

고민하던 나는 마지막 방법을 택하기로 했다. 일단 내 목적은 어디까지나 프로방스를 연합에 넣는 것이었고 그 과정에서 굳이 프랑스와 척을 질 필요는 없었다.

이 게임에서는 굳이 전투가 아니어도 승패를 가릴 방법이 몇 가지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상대와의 결투였다.

옳고 그름을 결투라는 행위로 판단한다는 게 어이가 없겠지만, 여기에는 ‘네가 정말로 옳고 신께서 널 보우하신다면 당연히 싸워도 지지 않겠지?’라는 믿음이 깔려있었다.

물론 그 과정에서 늘 승자와 패자는 나뉘는데 패자가 진 이유는 이단이라서가 아니라 믿음이 부족해서 진 거라는 굉장히 개떡 같은 결론이 나오는 셈이다.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지만, 뭐, 본인들이 그렇게 생각한다는데 어쩌겠는가. 원래 외눈박이밖에 없는 마을에선 두눈박이가 비정상이 되는 거다.

물론 상대도 바보가 아닌 이상 질 게 뻔한 결투를 해주지는 않았다. 물론 그로 인해 받게 되는 모욕과 비웃음은 감내해야겠지만 말이다.

그러니 지금 내가 툴루즈 백작을 만나서 해야 할 일은 너무나도 뻔했다.

“힐데. 용기사단 몇 명 끌고 백작한테 가서 칼리나의 이름으로 전쟁을 불허하고 결투로 승부 낸다고 전해.”

“저희의 중재를 받아들이겠습니까?”

“백작도 굳이 툴루즈와 더 싸우고 싶진 않을 테니 좋다고 받아들일걸?”

“알겠습니다. 당신은요?”

“툴루즈 백작한테 가서 도발이나 좀 해줘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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