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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바이킹이 되었다-50화 (50/205)

▣ 050화

내 대답에 험버트는 재밌다는 듯 피식 웃었다. 이질 때문에 빼빼 마르긴 했지만, 험버트의 눈은 여전히 날카로웠고 그는 나를 시험하듯 물었다.

“내가 원하는 것이라? 그게 뭔지 알고 있나?”

“그렇습니다. 총 두 가지일 텐데 하나는 병상을 훌훌 털고 일어날 힘입니다.”

“흠….”

그는 더 얘기해보라는 듯 팔짱을 낀 채 나를 바라보았고, 나는 좀 더 상세하게 설명했다.

“모든 일에는 원인과 결과가 있습니다. 백작님께서 이질에 걸린 것도 다 원인이 있지요. 그러니 그 근본 원인을 찾아서 제거한다면 말끔하게 나을 수 있을 겁니다.”

“꽤 많은 수의 의사가 날 치료하겠다 했지만 제대로 치료를 한 이는 없었소.”

“그거야 돌팔이들을 데려와서 그런 거지요.”

이 게임의 의학 수준은 정말 바닥을 기고 있었는데, 현대의 상식으로는 말도 안 되는 치료법들이 버젓이 존재하고 있었다.

가령, 피가 오염됐으니 피를 빼서 깨끗하게 해줘야 한다든가, 열이 나면 불의 성질을 가진 피를 빼야 한다든가 등등.

돌팔이 같은 놈들은 치료보다는 돈을 뜯는 게 그 목적이었는데 장미수나 식초에 목욕을 하라고 하고, 신께 기도를 드리라는 등 하등 도움 안 되는 처방을 내려주기도 했다.

더러는 믿음이 부족하다며 아픈 사람을 데려다가 매질하며 고해를 하게 만드는 놈도 있었으니 더 말해 무엇할까.

뭐, 목욕을 해서 몸을 청결히는 할 수 있겠지만 그건 예방의 목적이지 치료의 목적은 아니잖은가. 어쨌든 중세를 기반으로 만든 이 게임은 쓸데없이 그런 점까지 고증을 따르고 있다.

“자네는 자신 있다는 거군?”

“자신이 없다면 백작님의 앞에서 얘기를 꺼내지도 않을 겁니다.”

“좋아. 그럼 자네를 한번 믿어보도록 하고… 또 하나는 뭔가?”

“살루조와의 전쟁을 멈출 명분입니다.”

내 말에 지금까지의 느긋하던 분위기가 날카롭게 변했다. 험버트 3세는 격앙된듯한 목소리로 나를 쏘아붙였다.

“그대는 내가 이 전쟁에서 질 거라는 건가?”

“그 누구도 그렇게 얘기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상황이 여의치 않음을 이야기한 것뿐입니다.”

“…….”

“백작님도 잘 아실 거라 생각하지만 능력이 안 돼서 하지 못하는 것과 상황이 여의치 않아 하지 못하는 건 다릅니다. 그런데도 굳이 제 입으로 현재 사보이가 처한 상황에 대해 듣고 싶어 하시니 얘기해드리겠습니다.”

나는 가볍게 숨을 들이쉰 뒤 왜 살루조와의 전쟁이 좆망했는지, 이대로 가면 왜 좆되는지 차근차근 읊어주었다.

“먼저 전염병 때문에 백작님이 이렇게 드러누우신 상황입니다. 전쟁을 지휘해야 할 분께서 이렇게 골골대며 누워계시니 병력들의 사기는 땅끝까지 떨어진 상황입니다. 자주 전쟁에 나가시니 사기의 중요성은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겠지요?”

“다음으로 전염병으로 인해 전쟁이 너무 길어졌습니다. 휘하 가신들에 대한 동원령도 슬슬 끝나가는 데다 여기서 시간을 더 끌리면 내년 농사를 장담할 수가 없을 겁니다.”

“또한, 이로 인해서 살루조의 후작인 만프레드 2세 역시 전열을 정비할 시간을 얻게 됐고 성벽에 대한 보수도 완료했습니다. 오히려 지금 역습을 준비하고 있다는군요.”

“마지막으로 지금의 사보이는 전쟁을 수행할만한 여력이 안 됩니다. 식량과 물, 물자, 사람 등등 모든 게 모자랍니다. 그걸 아시기에 험버트 경께서도 퇴각한 게 아닙니까?”

여기까지 얘기한 나는 적당히 그를 달래주기 위해 몇 마디 덧붙였다. 바른말을 해서 현실을 직시하게 하는 것도 필요한 일이지만 그래도 백작의 자존심은 지켜줘야 했으니까.

“물론 사보이가 저력 있는 도시인 만큼 최후의 한 방울까지 쥐어짜 낸다면 살루조를 상대로 승리할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래서야 백작 각하의 손에 뭐가 남겠습니까?”

백작은 반박하려 했지만 틀린 말이 하나 없었기에 그저 입 다물고 내 말을 듣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저는 제가 이 제안을 하면 백작님께서 쌍수를 들고 환영해주실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도 이렇게 호통을 치신다는 건 전염병으로 인해 머리를 다치셨거나, 그도 아니면 저를 시험하셨거나 둘 중에 하나겠지요? 물론 저는 후자일거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내 말에 백작은 허탈한 표정으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폴란드와의 전쟁에 참전했던 영주가 말하기를, 칼리나 변경백 각하가 날카로운 비수를 하나 마련했다던데 그 말이 사실이었군.”

“과대 포장된 이야기일 뿐입니다.”

“내 눈엔 오히려 자네가 과소평가된 것처럼 보이는군.”

“절 그렇게 높게 봐주시는 백작 각하의 지혜로움과 통찰력을 믿고 이 야만인이 한 말씀만 더 드려도 되겠습니까?”

“얘기해보게. 폐하와 사자공, 변경백 각하를 설득한 자의 조언이라면 거를 이유가 없으니.”

“제 고향에는 어부지리라는 오래된 고사가 있습니다. 조개와 도요새가 서로 다투는 사이에 길을 가던 어부가 둘 다 붙잡아서 이득을 취한다는 뜻의 고사입니다.”

“현 상황을 꿰뚫는 얘기군.”

“험버트 경께서는 도요새이십니까? 아니면 조개이십니까? 그도 아니면 어부이십니까? 뭐가 될 수 있을지는 오직 험버트 경의 선택에 달려있습니다.”

물론 험버트의 선택지는 이미 정해져 있다. 그는 지금 엉엉 울고 싶었는데 아무도 뺨을 때려주지 않아서 울음을 참고 있는 상황이었으니까.

“무슨 말인지 잘 이해했네. 실은 나 역시 전쟁을 끝내고 싶었네. 그저 그럴듯한 명분이 없어서 지금까지 질질 끌고 있었을 뿐.”

“그 부분은 저희가 알아서 잘 처리하겠습니다. 이왕이면 살루조에서 숙이고 들어오는 게 그림이 더 좋겠지요.”

“그렇게 해주면 나야 고맙지.”

“그럼 이 얘기는 이 정도에서 마무리 짓고,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사제와 의사를 들여서 백작 각하를 치료해도 되겠습니까?”

“아, 그러고 보니 의사를 데려왔다고 했었지. 일단 들어오라 하게.”

백작의 허락이 떨어지자 나는 힐데와 이비를 안으로 들였고 백작은 가면을 뒤집어쓴 이비의 모습에 미심쩍은 표정을 지었다.

다만 정화교단의 정복을 입은 힐데와 나 때문에 일단 두고 보는 모양새였다.

“백작 각하. 현재 겪고 계시는 증상이 탈수와 복통을 동반한 설사, 헛구역질, 구토입니까?”

“그렇다네. 저기 사제분과 라그나르 경 앞에서 이런 말을 하기는 민망하네만 특히 변을 볼 때 너무 고통스럽다네.”

“장이 굉장히 약해져 있는 것 같으니 일단 식사를 하실 때 최대한 자극적인 음식은 피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또한, 힘드시겠지만 하루에 한 번씩 꼭 목욕을 하시고 특히 볼일을 보시고 난 뒤 깔끔하게 처리하셔야 합니다.”

“으음… 알겠네. 그리고?”

“백작 각하보다 음식을 조리하는 사용인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이야기인데 음식을 조리할 때 항상 손은 물론이요 조리 도구까지 씻게 하셔야 합니다.”

그 이외에도 힐데는 백작에게 몇 가지 주의사항을 이야기해 주었다.

그중에는 화장실을 자주 가더라도 반드시 충분한 양의 물을 섭취해야 한다는 얘기가 있었기에 백작의 얼굴이 일그러졌지만, 일단은 날 봐서라도 고개를 끄덕이는 모양새였다.

가벼운 진찰을 마친 이비는 가져온 배낭에서 이런저런 약초를 조합하더니 2시간 만에 뚝딱 약을 만들어내 백작에게 건넸고 효과는 사흘 만에 드러났다.

빼빼 말라서 피골이 상접했던 양반이 어느 정도 혈색이 돌아왔고 스스로 복통이 한층 더 나아졌다고 얘기할 정도였다.

그리고 일주일이 지난 지금, 백작은 거의 정상인에 가까울 정도로 몸 상태가 좋아졌으며 스스로 저택을 활보하며 걸어 다닐 정도였다.

“허허, 솔직히 놀랐네. 다른 의사들과 마찬가지로 별 효험이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뭐, 이게 게임을 기반으로 한 현실이기도 하고 이비와 같은 신의는 그냥 옆에다 두는 것만으로 자체 면역력이 올라가며 치료의 효율도 올라간다.

단적으로 말해 한창 흑사병이 유행인 지역에 단순히 이비를 머물게 하는 것만으로 천 명 죽을 게 오백 명만 죽는다는 얘기다.

“백작 각하께서 많이 좋아지신 걸 확인했으니 저희는 이만 살루조로 떠나보겠습니다.”

갈 길이 멀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여기서 사나흘 정도만 머무를 생각이었지만 치료를 위해서 이미 일주일이 넘게 머물렀다.

“어차피 살루조에 들른 뒤 다음 목적지는 알본이 아니던가? 알본에 가기 위해선 이곳을 거쳐 가야 할 테니 그때 동안만 자네의 동료를 빌리면 안 되겠나?”

“확실히 틀린 말은 아닙니다만… 이비 네 생각은 어때?”

“백작 각하께선 많이 나아지셨지만 아직 이곳 사보이에서 전염병이 완전히 퇴치된 건 아닙니다. 주군께서 허락해 주신다면 짧은 시간이지만 이곳에 남아 이들을 보살피고 싶습니다.”

“오오, 자네야말로 진정한 의사의 귀감이로군. 그대에게 신의 가호가 깃들기를.”

이비의 말에 백작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박수까지 치며 눈물을 흘렸다. 뭐, 초토화된 자기 영지민들 돌봐준다니 당연히 저런 반응이 나올 수밖에 없지.

나로서는 이비를 데려가고 싶었지만 본인의 의지도 있는 데다 이런 식으로 명성과 명예를 쌓음과 동시에 영주들에게 호감도 작을 해놓으면 훗날 든든한 방패가 되어줄 것이다.

아무래도 나는 종교와 출신지가, 이비 같은 경우는 출신지와 외모가 약점이 될 테니까.

“알겠습니다. 본인이 저렇게 얘기하기도 하니 몇 가지만 제게 약속해 주신다면 백작님의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뭐든 말만 하게.”

나는 백작에게 절대 이비를 과로시키지 않을 것과 치료에 관해서는 그녀가 하는 대로 내버려 둘 것, 마지막으로 그녀에 대한 호위를 철저히 해줄 것을 이야기했다.

당연히 발등에 불이 떨어졌던 백작은 자신의 명예와 가문을 걸고 내 조건을 받아들였고 나는 즉각 칼리나가 지원해준 기병과 백작이 추가로 지원해준 기병을 끌고 살루조로 향했다.

나는 사보이에서 머무는 1주일간 살루조의 만프레드 2세에게 대략적인 상황을 적은 편지를 보냈고 그래서 그런지 그는 뛸 듯이 기뻐하며 나를 맞아주었다.

그는 칼리나의 편지와 험버트 백작으로부터 전쟁을 끝내겠다는 얘기가 담긴 문서, 그리고 내 부연설명을 듣자마자 그 즉시 연맹에 가입하겠다는 각서를 썼다.

그도 그럴 게 만프레드 역시 전쟁이 끝나지 않았기에 동원령을 풀 수 없었다.

병력을 모으는 것만으로도 시간과 돈이 소모되는 데다 병력을 해산한 틈을 타서 험버트가 쳐들어올 수도 있는 일 아니던가.

특히 병력이 열세였던 만프레드는 병사뿐만 아니라 농노들까지 징집한 상태였기에 이대로 시일이 더 끌리면 한 해의 농사를 망칠 수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슬슬 휘하의 영주들에게서 불만이 나오고 있고 본인 역시 계속된 전쟁에 지쳐있던지라 내 제안을 덥썩 문 것이다.

“앞으로 있을 문제는 칼리나 변경백 각하의 이름으로 중재할 겁니다. 대신 이를 위해서 지금은 후작 각하께서 고개를 숙여주셔야 합니다.”

“다시 이를 말이던가.”

그렇게 양측으로부터 전쟁을 멈추겠다는 확답을 받으며 일을 마무리 지은 나는 사보이에 들러 이비를 복귀시킴과 동시에 곧장 알본으로 향했다.

이쯤 되면 슬슬 다른 영주들에게도 내가 여기저기 싸돌아다니고 있다는 사실이 전해질 테니 쓸데없는 방해가 들어오기 전에 최대한 빠르게 연합을 형성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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