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49화
하지만 힐데는 나와 칼리나 사이의 미묘한 공기를 눈치챘는지 그녀는 그때 이후로 무조건 나한테 붙어 다녔다.
본인이 붙어있지 못하면 이비를 붙여놨기에 안타깝게도 칼리나와의 관계를 돈독히 하는 건 불가능했다.
결국, 연합에 대한 구체적인 안이 나오자마자 칼리나는 내게 모든 걸 일임하겠다며 모두에게 천명한 뒤 카노사와 투스카니를 한번 돌아보고 온다며 떠났다.
뜬금없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녀를 중심으로 연맹이 만들어지면 분명히 여기저기서 동요와 잡음이 일 것이다.
특히 교황청에서 발작할 수도 있으므로 그녀는 직접 영지를 순회함으로써 자신의 건재함을 과시하고 동시에 주변 영주들에게 깝치지 말라고 경고하는 목적도 있었다.
그게 아니고서야 움직이는 것 자체가 돈지랄인 용기사단을 끌고 순회할 리가 없잖은가. 나 역시 칼리나에게 용기사 10기를 호위라는 명목으로 건네받았다.
물론 분류는 용병으로 되지만, 애초에 전투력이 넘사벽인 데다 돈 역시 칼리나가 부담하는 걸로 되어있기에 나로서는 쌍수를 들고 환영할만한 일이었다.
거기에 대도시인 밀라노에서 오랫동안 편하게 쉰 데다 충분한 양의 물자를 가지고 이동하다 보니 병력들의 사기는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무엇보다 시커먼 기사들이 10명이나 붙어 있다 보니 여행은 편안함 그 자체였다. 솔직히 지금까지는 거짓말 조금 보태서 1일 1도적이 기본이었으니까.
“역시 돈과 권력이 최고야. 늘 짜릿해.”
“돈과 권력의 유용함에 대해서 부정은 하지 않겠습니다만, 때로는 돈으로도 살 수 없는 것들도 있습니다.”
“돈으로 살 수 없다면 돈이 부족한 게 아닐까?”
물론 돈으로 인간의 힘을 넘어서는 일을 막을 순 없지만, 그럴 때 길바닥에 나앉아서 우는 것보단 람보르기니에 앉아서 우는 게 더 낫지 않겠는가?
“뭐, 당신이라면 그렇게 말할 것 같았습니다.”
“애초에 신들도 돈을 좋아할걸? 돈이 싫으면 제물을 바치라는 얘기는 안 하겠지.”
내 말에 힐데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대꾸했다.
“혹시 지금 한 말이 신성모독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이게 신성모독이었다면 오딘께서 날 굽어살피시지도 않겠지.”
힐데는 내가 오딘의 힘을 사용하는 걸 봐서 그런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애초에 내가 보여준 힘은 바이킹 중에서도 오직 선택받은 자들만 사용할 수 있다는 에인헤랴르의 힘이었으니까.
“그나저나 이비. 왜 그렇게 심각한 표정이야? 혹시 이슬람교의 교리 때문에 그래?”
모든 종교가 그런 건 아니지만, 이슬람교도 그렇고 기독교도 그렇고 유일신을 모시다 보니 타 종교를 인정하지 않는 측면이 있다.
애초에 오딘을 섬기는 내가 신성 제국에서 배척받지 않는 건 신성 제국이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래 봤자 정교회냐 카톨릭이냐의 양자택일이었지만, 애초에 게임이고 칼리나가 날 비호해주고 있기에 묵인해주는 것뿐이었다.
다만, 내가 귀족이 되면 분명 이걸 걸고넘어질 놈들이 있을 테니 그 전에 대책을 생각해두긴 해야 했다.
“예? 아, 아닙니다. 제가 아이유브 출신이긴 하지만 딱히 이슬람교를 믿는 건 아닙니다.”
“그래? 그럼 혹시 저주 때문에 그래? 지금은 좀 바쁘지만, 그래도 네 저주를 풀 방법도 까먹지 않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물론 주군이라면 그렇게 해주실 거라고 믿고 있습니다.”
“뭐야? 그것 때문에 시무룩한 것 아니었어?”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그게 아니라?”
“혹시 사보이부터 가실 겁니까?”
“아니, 노바라부터 갈 거야. 어차피 지나가는 길인 데다 레비아탄의 상단장이랑 펠릭스를 본지도 꽤 됐으니 안부 인사나 해야지. 근데 그건 왜?”
“으음, 이건 순전히 제 추측입니다만 사보이에 전염병이 돈 것 같습니다.”
이비의 폭탄선언에 난 제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갑작스러운 내 행동에 용병단 전체가 멈춰 섰지만, 난 심각한 얼굴로 이비를 추궁하듯 캐물었다.
“사보이에 전염병이 돌고 있다고? 확실해?”
“100% 장담할 수는 없습니다만, 저는 주치의로서 주군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삼아야 하기에 노파심에서 말씀드린 겁니다.”
“그 근거는?”
“일단 사보이의 영주인 험버트 3세가 승기를 잡아가고 있었는데 전쟁이 멈췄다는 걸로 미루어보아 사보이에 무슨 일이 터졌다고 생각하는 게 타당하지 않겠습니까?”
“뭔지는 몰라도 뭔가 터지긴 했겠지.”
“실은 얼마 전 주군께서 들르실 도시들에서 온 상인들을 만나 특이사항이 없는지 확인해봤습니다. 다른 곳들은 별다른 이상이 없었는데 사보이는 좀 다르더군요.”
오, 저건 나도 생각 못 한 건데 괜히 신의라고 불리는 게 아닌 것 같다. 하긴, 그녀만 동료로 삼을 수 있다면 질병에 걸려서 죽을 위험은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구체적으로 얘기해봐.”
“사보이에서 대대적으로 발열과 복통, 구토를 호소하며 설사에 시달리는 인원이 늘어나고 있다고 합니다.”
“이질이네.”
증상만 듣고 병명을 정확히 추리해내는 날 놀랍다는 얼굴로 쳐다본 이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아무래도 전쟁을 하다 보면 위생상태가 불결해지고 오염된 물에 노출될 확률이 늘어나지 않습니까? 험버트 3세가 갑자기 전쟁을 멈추고 퇴각한 건 대다수가 이질에 걸렸기 때문으로 사료됩니다.”
이건 이비의 말이 무조건 맞을 것이다. 이비 같은 역병의사는 전염병이나 질병에 굉장히 민감한데 종종 이런 식으로 예언에 가까운 조언을 할 때가 있고 그 경우 100% 확률로 들어맞았다.
“본인도 이질에 걸렸고?”
“그것까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아마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출발하기 전에 의약품들을 저렇게 바리바리 챙긴 거야?”
“그렇습니다.”
이비의 대답에 나는 팔짱을 낀 채 생각에 잠겼다. 사실 이질 자체가 치사율이 높은 것도 아니고 치료법이 엄청나게 어려운 것도 아니다.
그저 주변의 위생상태를 깔끔하게 만들고 충분한 양의 수분 보급과 전해질을 보충해주며 푹 쉬면 대부분 낫는다.
문제는 환자가 물설사를 싸대서 물에 대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 데다 사람의 위생습관과 주변 환경이 한순간에 바뀌는 게 아니었기에 치료가 더딜 수밖에 없었다.
“그럼 이비 네 말은 지금 바로 사보이에 가자는 얘기야?”
“그렇습니다. 주군. 이질이라는 게 치사율은 높지 않아도 엄청난 고통을 수반하지 않습니까?”
그녀의 말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인 이상 몸이 축축 처지고 먹는 족족 줄줄 새는 데다 시도 때도 없이 화장실에 가는 게 썩 즐거운 경험은 아니겠지.
“제가 가서 험버트 3세를 치료하고 그에 대한 대가로 살루조와의 화친과 검은 용군단에 대한 합류를 제시한다면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겁니다.”
“좋아. 이비 네 말대로 하지.”
* * *
그렇게 밤낮을 쉬지 않고 이동한 나와 용병단은 일주일 만에 300km를 돌파하는 업적을 달성했다.
이게 가능했던 건 병력들이 정예화된 데다 돈을 쏟아부으며 피로와 사기 관리를 해줬기 때문이었다. 물론 힐데의 버프가 아니었다면 애초에 시도조차 하지 못할 일이었겠지만.
아무튼, 그렇게 사보이에 도착하고 성안으로 들어가 주변을 확인하자마자 나는 이비의 추측이 맞다는 걸 확신했다.
사보이는 1만 이상의 인구수를 가지고 있는, 근방에서 꽤 큰 규모의 도시였다. 그런데도 도시는 기분 나쁜 적막에 싸여있었고 시장과 광장은 고요했으며 집에는 출입을 금하는 흰색 줄이 매여 있었다.
“생각보다 상태가 심각한데?”
“빈민가는 더 심할 겁니다. 그쪽의 위생은 볼 것도 없을 테니까요.”
“이래서야 없던 병도 걸리겠군.”
나는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내심 이게 기회라 생각했다. 영지가 이렇게 개판이 나서야 험버트도 전쟁을 지속하기가 힘들 테니까.
아마 그도 속으로는 화친을 간절히 바라고 있을 것이다. 단지, 자신이 먼저 전쟁을 일으킨 데다 가신들을 설득할 그럴듯한 명분이 없어서 두 손 놓고 있는 것일 테고.
주변을 둘러보며 내성으로 가고 있자니 안쪽에서 허겁지겁 사람들이 달려 나왔는데 그들은 날 보자마자 말 위에서 내려 깍듯하게 얘기했다.
“어서 오십시오. 라그나르 경. 저는 현재 영주님을 대리해서 사보이를 다스리고 있는 칼란 카르데일이라 합니다. 미리 나가서 응접하지 못한 점 용서해주시길.”
“따로 약속을 잡고 온 것도 아니니 괜찮습니다. 오히려 이렇게 갑작스레 찾아와 폐를 끼쳐 죄송할 따름이군요.”
“아닙니다. 영주님께서도 라그나르 님의 방문을 기뻐하고 계십니다. 부디 그런 생각은 말아주십시오.”
“본래는 저도 이리 급박하게 찾아올 생각은 없었지만 최근 사보이가 힘들다 하여 이렇게 지원할 물자를 좀 가지고 왔습니다.”
슬쩍 말을 옆으로 치우며 가져온 짐수레들을 보여주자 칼란의 눈이 휘둥그레졌고, 내가 손짓하자 병사들이 가져온 물품들을 그와 함께 온 병력들에게 넘겨주었다.
“오오,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안 그래도 도움이 절실했는데 이렇게 때맞춰 지원을 해주실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일단 이건 급한 대로 가져온 거고 후일 칼리나 각하께서 추가로 지원을 해주실 겁니다.”
물론 그건 험버트 3세가 칼리나의 제안을 받아들였을 때의 이야기지만, 굳이 그것까지 얘기할 필요는 없겠지.
“오, 이리도 자애로우실 수가… 아, 이쪽으로 오십시오. 누추하지만 성안으로 모시겠습니다.”
칼란은 앞장서서 나를 이끌었고 나는 허리를 꼿꼿하게 편 채 성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곧장 험버트가 머무는 방까지 일사천리로 안내받았다.
다만, 험버트의 방 앞에서 경비를 서던 인원들은 조심스럽게 내 앞을 가로막음과 동시에 칼란에게 귓속말을 속삭였다.
이야기를 들은 그는 난처하다는 듯 경직된 웃음을 지으며 조심스럽게 이야기했다.
“어… 음. 라그나르 경. 백작 각하께서 오직 라그나르 경만 안쪽으로 초대하셨습니다.”
“여기 이 친구는 실력 있는 의사고, 이 친구는 보다시피 정화교단의 사제입니다. 그래도 안 되겠습니까?”
내 말에도 칼란은 쓰게 웃을 뿐이었고 난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그리 얘기가 길게 끌리지도 않을 것이고 의사인 이비만 데리고 가서 낫게 해주면 그만이었다.
“그럼 이렇게 하시지요. 제가 안에 들어가서 백작 각하께 허락을 받는다면 그때 들이는 걸로.”
“물론입니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는 힐데와 이비에게 여기 있으라고 눈짓한 뒤 노크와 함께 방문을 열었다. 고풍스러워 보이는 방 안의 한가운데에는 빼빼 마른 중년인이 누워있었다.
“보다시피 몸이 안 좋아서 이런 모습으로 그대를 응대하는 걸 용서하게.”
“괜찮습니다.”
한눈에 보기에도 상태가 안 좋아 보였기에 나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 정의공의 아들을 사로잡을 정도로 용맹하며 칼리나 변경백 각하의 신뢰를 듬뿍 받는 라그나르 경이 이 누추한 곳까지 방문한 목적은 무엇인가?”
“칼리나 변경백 각하의 편지를 가져왔습니다.”
“이 시국에 변경백 각하의 편지라… 간단한 안부 인사는 아니겠군.”
나는 대꾸하지 않고 품속에서 칼리나가 험버트에게 쓴 편지를 건네주었다. 그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봉인을 해제한 뒤 편지를 읽어내려갔다.
나는 얌전히 그가 편지를 다 읽기를 기다렸고 험버트는 긴 한숨과 함께 편지를 접으며 내게 물었다.
“변경백 각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는 알겠네. 하지만 모든 일에는 대가가 필요한 법이지. 내가 변경백 각하의 제안을 따른다면 난 무엇을 얻을 수 있나?”
“백작 각하께서 지금 간절히 원하는 것을 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