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48화
이름이야 검은 용군단이라지만 세상을 파멸시킬 생각은 없었고 단순히 한자동맹과 같은 연합을 만들 생각이었다.
애초에 단순히 칼리나를 중심으로 뭉치라고 한들 사람들이 뭉칠 리가 없다. 물론 그녀의 압도적인 힘을 바탕으로 무릎 꿇릴 수도 있었지만 그랬다간 한 발자국만 삐끗해도 뒤통수를 맞을 것이다.
이 시대의 동맹이란 건 허울뿐인 약속에 불과했다. 같은 가문끼리도 내전을 벌이고, 혈연으로 맺어졌는데도 죽자고 싸우는데 힘으로 굴복시킨들 따를 리가 없다.
결국, 다른 이들을 뭉치게 하기 위한 미끼가 필요했는데 제일 좋은 건 돈이었다. 그리고 이 시대에 돈을 끌어모으는 방법 중 최고는 무역이었다.
그리고 운 좋게도 이탈리아반도는 지중해 무역의 중심지였다. 베네치아와 제노바를 비롯한 4대 해양도시가 이탈리아에 붙어있던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않던가.
다만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고 장점이 있으면 단점이 있는 것처럼 이탈리아 북부는 치명적인 문제가 있었다.
바로 교황이 머무는 로마와 가까웠기에 구엘프(교황파)와 기벨린(황제파)의 대립이 지랄 맞는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이 때문에 내가 새로운 연맹을 만들 생각을 한 것이다.
황제도, 교황도 아닌 칼리나를 중심으로 뭉친다면 그간의 반목과 불화를 조금이나마 잠재울 수 있지 않겠는가.
“라그나르. 일단 네가 말한 연합에 합류할만한 영주들을 대강 추려봤어.”
내가 지도를 보며 고민하는 사이 칼리나는 각 영주의 인적사항이 적혀있는 서류를 가지고 내 앞에 마주 앉았다.
나는 습관적으로 문서를 받으려다 그만뒀다. 굳이 내가 글자와 씨름하며 떠듬떠듬 읽는 것보다 칼리나의 사견을 곁들인 설명을 듣는 게 훨씬 나을 것이다.
“크게 흠 없는 인간들이지?”
“이 세상에 흠 없는 인간이 어디 있겠어. 단지 어느 정도 중립적이거나 내게 호의적인 영주들만 좀 추려봤어.”
“하나씩 얘기해봐.”
“일단 알본의 여백작 베아트리체는 굳이 내게 합류하라고 들이밀 것도 없이 하이르 앗 딘을 처단한다고 하면 쌍수를 들고 환영할 거야.”
“과거에 갈등이 있었나 보지?”
“남편이 하이르 앗 딘에게 죽었거든.”
“저런… 원한이 뼈에 사무쳐 있겠구만.”
“그러니 하이르 앗 딘 토벌을 미끼로 연합에 가담하라 한다면 충분할 거야.”
알본. 알본이라. 프랑스와 조금 가깝긴 하지만 그 정도는 상정범위 내다. 어차피 프랑스도 굳이 칼리나를 건드리는 정신 나간 짓은 안 할 테니까.
“좋아. 복수를 빌미로 꼬시면 되겠군. 또?”
“그리고… 사보이의 백작인 험버트 3세와 살루조의 후작인 만프레드 2세도 괜찮아. 특히 사보이는 슈바벤과의 경계에 있어서 연합을 형성한다면 필수적으로 끌어들여야 해.”
“둘이 세트로 끌어들여야 할 필요가 있어?”
“왜냐면 지금 둘이 신나게 치고받으면서 영지전을 벌이고 있거든.”
“아, 오케이. 알 것 같네. 당연히 살루조가 밀리고 있겠지?”
생각해보면 사보이와 살루조의 영주들은 꽤 긴 시간을 싸워왔다. 정확히는 살루조가 사보이에 대항해서 싸운 거지만.
“맞아. 근데 갑자기 얼마 전부터 전쟁이 멈췄어.”
“뭐? 왜?”
“글쎄, 거기까진 나도 모르겠네. 아무튼, 그 둘을 어떻게 연합에 끌어들일지는 당신이 잘 생각해봐. 믿고 맡겨도 되지?”
“좋아. 그건 나중에 내가 생각해 볼 문제고… 더 있어?”
“프로방스의 백작 라몬 베렌게르도 괜찮아. 아라곤의 왕이었던 알폰소 2세의 손자에 나름대로 능력도 있고 평판도 나쁘지 않은 데다 관대함으로 이름 높지.”
“거기는 니스랑 직접 경계를 맞대고 있으니 더 골칫덩이겠군.”
“그것도 그런데 툴루즈 백작이랑 국경분쟁 때문에 사이가 안 좋아. 그 부분을 활용해 봐.”
나는 그녀가 얘기해주는 게 다 힌트라는 걸 알고 있기에 허투루 듣지 않고 가슴 한구석에 새기며 천천히 손가락을 접었다.
“음… 그럼 일단 나온 게 알본의 베아트리체에 살루조의 만프레드 2세, 사보이의 험버트 3세, 프로방스의 백작 라몬 베렌게르까지 해서 총 4명인가? 더 있어?”
“거기에 마지막으로 몽페라토의 후작 윌리엄 5세를 끌어들일 생각이야.”
“몽페라토? 거긴 보니파시오 그 개새끼의 영지 아니었어?”
보니파시오는 그 악명높았던 4차 십자군의 수장이었는데 라틴 제국 건설 후 테살로니카 왕국의 왕이 됐다. 그리고 얼마 전 칼리나를 공격했고 그녀에게 격퇴당한 전적이 있었다.
“그렇긴 한데 보니파시오의 형제인 윌리엄 5세가 반기를 들었고 보니파시오를 대신해 몽페라토를 다스리던 그의 아들을 몰아내는 데 성공했어.”
“그러니까 지금 영지의 주인이 바뀌었다는 말이야?”
“맞아. 좀 더 정확히 얘기해주자면….”
칼리나는 지도를 가져와 내게 그간의 일을 간추려서 얘기해줬고 나는 팔짱을 낀 채 그녀가 말해준 정보들을 다시 정리했다.
그러니까 원래 몽페라토의 후작이었던 보니파시오는 4차 십자군에 베네치아와 함께 참전해 동로마 제국을 무너뜨리고 라틴 제국을 세웠다.
보니파시오는 보두앵에게 밀려서 라틴 제국의 황제가 되지는 못했지만 테살로니카 왕국의 왕이 되는 데 성공했고, 그는 라틴 제국의 제후이자 테살로니카 왕국의 왕이 되었다.
그러다 무슨 이유에선지는 모르지만, 이탈리아 북부를 침공했고 그걸 칼리나가 막아냈다. 이때 입은 피해가 꽤 컸고 결국 본거지라고 할 수 있는 몽페라토에서의 입지가 줄어들었다.
그리고 그 틈을 타서 보니파시오의 형제인 윌리엄 5세가 후작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병력을 일으켰고 아버지를 대신해서 몽페라토를 다스리던 데미트리우스를 쫓아내는 데 성공했다! 라는 게 이야기의 전부였다.
“그럼 윌리엄 5세와 칼리나 너는 보니파시오라는 공통된 적을 가지고 있다는 소리네?”
“맞아. 내가 볼 때 보니파시오 그 멍청한 자식은 이상하게 황제라는 자리에 집착하더라고. 이탈리아 남부의 시칠리 왕국처럼 북부를 통일해서 제국을 만들고 싶었던 것 같아.”
“미친놈이었군.”
물론 이해 못 할 건 아니다. 황제라는 자리는 그 울림만으로 사람을 현혹하는 뭔가가 있으니까. 실제로 라틴 제국을 세울 때 베네치아에서 보두앵을 황제로 세우자 내전 직전까지 갔다고 했었지.
“나름대로 능력은 있던 미친놈이라서 문제였지. 아무튼, 이 정도가 내가 준비한 인선이야.”
나는 턱에 난 수염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각 영주가 자리 잡은 곳을 연결해보니 나름 그럴듯한 모양새가 나오긴 하지만 이걸로는 모자랐다.
순수하게 땅개만 투입해서 니스를 함락시키기에는 하이르 앗 딘이라는 이름값이 너무 높다. 거기에 단순히 내 감이긴 하지만 하이르 앗 딘의 배후에는 베네치아가 있을 것이다.
“거기에 하나 더 추가해야 할 것 같은데?”
“누구?”
“제노바.”
내 말에 칼리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탐탁지 않은 얼굴로 대답했다.
“확실히 해상 전력이 필요하긴 해. 근데 거기는 구엘프(교황파)잖아. 아무리 제노바가 힘들다고 해도 신성 제국의 영주들 모임에 굳이 들려고 하지는 않을 것 같은데?”
“안 되는 걸 되게 하는 게 능력이겠지?”
칼리나의 말처럼 확률이 희박하긴 했지만, 마냥 불가능한 얘기는 아니었다. 우선 제노바의 현 상황은 이 이상 없을 정도로 처참했고 나락을 향해 있는 힘껏 달려가고 있었다.
이전에는 티레니아해의 여왕이라 불렸지만, 지금은 퇴물이 되기 일보 직전이었다. 반면 라틴 제국과 함께 동로마 제국을 멸망시킨 베네치아는 레반트의 무역을 독점함은 물론 수많은 면세 혜택을 받을 수 있었다.
이로 인해 베네치아는 아드리아해의 여왕을 넘어서 지중해의 여왕이라 불리며 지중해를 호령하고 있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결국 제노바는 북아프리카나 이집트와의 거래에서 만족해야 했다.
사실 기존의 무역도 규모가 작은 건 아니었지만, 여전히 무역의 중심지는 레반트였고 제노바가 과거에 누리던 영광에 비하면 너무나 초라한 게 사실이었다.
물론 레반트에서 무역을 하려면 할 수도 있겠지만, 제노바의 상선은 무역을 하고 난 뒤 제노바로 복귀하질 못했다.
이른바 ‘들어올 땐 마음대로지만 나갈 땐 아니란다’와 같은 상황이었는데 크레타섬을 할양받은 베네치아는 그곳을 전진기지 삼아 레반트로 들어오는 함선들을 철저히 감시했다.
그러다 제노바의 깃발을 꽂은 상선이 나가는 게 보이면 후다닥 달려가서 조지고 약탈해버리니 제노바 입장에선 피눈물을 흘리며 레반트 무역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하하하, 맞아. 누구나 다 하는 걸 해봤자 그게 값어치 있는 건 아니지. 그럼 이번에도 당신의 능력을 보여줄 거야?”
“당연하지. 내 능력은 네가 더 잘 알잖아. 나한테 다시 한번 더 반할 준비나 해.”
물론 내가 단순히 허파에 바람이 차서 이런 말을 한 건 아니었고 나름대로 판단 근거와 성공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얘기한 거다.
단순히 위에 언급된 조건들만 가지고 협상을 한다면 실패할 확률도 있었겠지만, 제노바를 덮친 또 하나의 불운이 있었으니 바로 하이르 앗 딘이었다.
솔직히 이건 제노바 입장에선 재앙이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이 지랄 맞은 게임은 랜덤변수를 자주 활용하는데 그 때문에 하이르 앗 딘의 본거지는 맨날 바뀐다.
물론 그래 봤자 대규모의 해적이 본거지로 삼을만한 곳이 몇 군데나 있겠는가. 내 기억이 맞다면 이베리아반도의 발렌시아나 북해의 암스테르담, 발트해의 고틀랜드, 흑해의 세바스토폴, 지중해의 니스 정도가 전부다.
문제는 니스가 본거지로 걸리게 된 순간인데, 상식적으로 아무리 그가 이름 높은 해적이라지만 썩어도 준치라고 해상 강국으로 불리던 제노바가 옆집에 있는데 이렇게 안하무인으로 행동할 수 있을까?
답은 뻔했는데 바로 그가 베네치아와 동맹을 맺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건 내가 100% 확신할 수 있는데 하이르 앗 딘의 본거지가 니스일 때 백이면 백 전부 베네치아와 동맹관계였다.
제노바에게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베네치아와 하이르 앗 딘의 동맹은 필연적이었다. 일단 베네치아는 손도 쓰지 않고 제노바를 견제할 수 있었고 하이르 앗 딘은 베네치아가 뒷배로 있기에 마음껏 약탈을 하며 돌아다닐 수 있었다.
빡친 제노바가 이 악물고 전군을 동원해 하이르 앗 딘과 결전을 벌인다면 승리할 수는 있겠지만, 그뿐이다.
안 그래도 베네치아와 벌어졌던 격차는 더 이상 좁히지 못할 정도로 커질 테고 제노바는 스스로 불려 놓은 몸집을 유지하지 못한 채 내부에서부터 무너져 내릴 것이다.
물론 이건 제노바뿐 아니라 남부의 세력을 하나로 통합하려 하는 내게도 좋은 얘기는 아니었다. 그 때문에 나는 이를 빌미로 제노바를 연합에 끌어들일 생각이다.
제노바의 총독도 머리가 있다면 이대로 가봤자 말라죽을 수밖에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테니까.
이런 내 생각을 읽은 건지 칼리나는 가볍게 입술을 깨물며 나를 바라보았다.
“라그나르. 당신의 거칠고 야만적인 모습도 매력적이지만, 이런 지적인 모습도 굉장히 섹시한 거 알아?”
“뭐, 내가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의 소유자긴 하지.”
“아하, 그래서 하는 말인데, 그간 떨어져 있던 만큼 소원해져 있던 우리의 관계를 돈독히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아?”
그녀는 내 옆에 앉으며 노골적으로 그 큰 가슴을 밀어붙였고 그녀의 머릿결에선 달콤한 감귤 향이 풍겨왔다.
“흠, 나도 딱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그렇게 생각하면 행동으로 보여주겠어?”
대놓고 나를 유혹하는 칼리나의 모습에 내가 그녀에게 손을 뻗으려는 찰나 무기적이고 이질적인 노크 소리가 울렸다.
똑똑.
“라그나르. 안에 있습니까?”
예상치 못한 소리에 칼리나는 콧등에 검지를 올리며 계속하자는 신호를 보냈지만,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목소리에 나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 내 모습에 칼리나도 흥이 식었는지 머리칼을 쓸어올리며 신경질적으로 내뱉었다.
“아, 정말 눈치 없는 꼬맹이네.”
“아무래도 우리의 사이를 돈독하게 하는 건 조금 나중에 해야겠네.”
“뭐, 오늘만 날도 아니잖아. 기대하고 있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