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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바이킹이 되었다-46화 (46/205)

▣ 046화

나는 황제와의 면담이 끝난 뒤 막사로 돌아오자마자 쓰러지듯 침대에 널브러졌다.

“하… 진짜 두 번은 못 할 짓이네.”

게임에서야 내가 직접 황제를 마주하는 게 아니었기에 배를 벅벅 긁으면서 적당히 선택지를 골라도 상관없었지만 이건 현실이었고 모범답안지 같은 건 없었다.

그 때문에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심혈을 기울여야 했고 이로 인해 받는 스트레스는 농담이 아니었다.

“고생하셨습니다. 라그나르.”

“고생하셨습니다. 주군.”

그나마 위안이 되는 건 힐데와 이비가 있다는 점이었다. 솔직히 이 둘이 뛰어난 동료라서가 아니라 제대로 말이 통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좋은 것 같다.

NPC들에게 말을 걸어봤자 제대로 된 답변이 돌아오는 것도 아니고 단답식으로 끝나는 데다 자꾸 말 걸면 사기가 떨어지니 정신병에 걸리지 않기 위해서라도 동료의 영입은 필수다.

“힐데. 잠깐만 여기로 와봐.”

“…싫습니다.”

“그러지 말고.”

“싫다고 했습니다.”

젠장. 쓸데없이 눈치만 빠르기는. 결국, 난 직공법으로 나가기로 했다.

“아, 너무하네. 좀 피곤한데 무릎 좀 베게 해주면 안 돼?”

“안 됩니다.”

“너는 가끔 해달라고 하면서 왜 나는 안 돼?”

“맨날 허벅지에 뺨을 비벼대지 않습니까. 솔직히 수염 때문에 까끌까끌해서 아픕니다.”

“아니, 너도 그러잖아?”

“저는 수염이 없지 않습니까.”

꼬우면 너도 수염 자르라는 힐데의 말에 난 할 말이 없었다. 지금 당장에라도 수염을 자르고 저 자신만만한 얼굴을 일그러뜨려 주고 싶지만 그렇다고 수염을 자를 순 없다.

이 수염은 뭐라고 해야 할까… 바이킹으로서 반드시 가져야 할 자부심 같은 느낌이었으니까.

실제로 기억을 뒤적여봐도 몸단장에는 별로 신경 안 쓰는 상남자인 라그나르가 유일하게 신경을 쓰는 부위가 수염이었다.

내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앉아있자 내 눈치를 살피며 어쩔 줄 몰라 하던 이비가 다가와 조심스럽게 내게 얘기했다.

“주, 주군, 주치의로서 주군의 피로를 풀어드리는 것도 마땅히 제가 해야 할 의무입니다. 기분 나쁘지 않으시다면 제 무릎이라도 베시겠습니까?”

“정말? 그럼 나야 고맙지.”

내 승낙에 그녀는 조심스럽게 침대에 걸터앉았고 나는 그녀의 허벅지를 베고 누웠다. 그 순간 베개 따위와는 비교도 안 되는 부드러우면서도 말랑말랑한 감촉에 피로가 싹 날아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생각해보면 힐데는 조금 슬렌더한 타입이고 이비는 적당히 살이 오른 타입이었기에 살의 감촉만 보자면 이비가 훨씬 좋았다.

그렇게 이비의 허벅지에 볼을 비비며 천국을 느끼고 있는 나를 힐데는 경멸 어린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당신이란 사람도 참 변함없군요.”

“원래 사람이 쉽게 변하면 죽을 때가 다 된 거라고 했어.”

“후… 뭐, 좋습니다. 한창 성희롱을 하는 와중에 죄송합니다만 일단 이것부터 읽으셔야 될 겁니다.”

“뭐야 이건? 힐데 네 마음과 사랑을 가득 담은 고백 편지야?”

“개소리하지 마십시오. 사자공이 보낸 편지입니다.”

“어?”

“사자 말입니다. 어흥~ 하는.”

힐데가 귀엽게 양손을 든 채 어흥 하고 외쳤지만 나는 사자공이라는 말에 나는 정신이 번쩍 들어 그녀의 손에 들려있는 편지를 낚아챘다.

편지에 찍혀있는 인장은 틀림없이 벨프가의 인장이었다.

시발. 왜 사자공이 내게 편지를 보냈지? 날 죽음으로 초대하겠다는 정중한 의사표시인가? 혹시 지랄할까 봐 전후 뒤처리도 잘하고 왔는데 대체 왜?

“뭐 때문에 편지를 보낸 건데? 전령이 뭐래?”

“전령이 아니라 본인이 직접 왔습니다.”

“이런 씹….”

힐데의 말에 멘탈이 나갈 것 같았지만, 일단은 내용은 확인해봐야 했기에 조심스럽게 편지를 뜯었다.

[자네를 보러 찾아왔네만 황제 폐하께서 부르셨다고 하더군. 그대만 괜찮다면 폐하와의 면담이 끝나는 대로 나를 찾아와줄 수 있겠나? 자네의 방문을 기다리고 있겠네.

작센과 바이에른의 정당한 지배자.

하인리히 사자공으로부터.]

다행히 날 죽여버리겠다는 내용은 아니었고 단순히 내가 보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도 아니면 황제와 독대를 하면서 무슨 얘기를 했는지 궁금한 걸지도 모르고.

“프리드리히도 그렇지만 사자공도 만만찮은 인물은 아닌데… 돌겠네.”

나는 한숨과 함께 사자공의 뒷배경을 떠올렸다. 그는 프리드리히의 라이벌이자 동방식민운동을 이끈 호전적인 군주였으며 벨프가의 가주이자 작센 공국과 바이에른 공국의 주인이었다.

거기에 사자라는 별명이 들어간 것에서 알 수 있듯 개인의 무력도 상당했으며 북부에 수많은 도시를 건설했고 이는 후일 한자동맹이 발족할 수 있던 뿌리가 되었다.

이것만으로도 대단한데 장인이 잉글랜드의 왕인 헨리 2세였고 그가 다스리는 땅이 제국의 황제인 프리드리히의 영토보다 더 넓었으니 더 말할 필요가 있을까?

“근데 별로 기분 나쁜 얼굴은 아니었습니다. 추측건대 가볍게 얼굴이나 한번 보고 눈도장이나 찍자는 것 같았습니다.”

“알겠어. 일단 갔다 와 볼게.”

옷매무새를 가다듬은 나는 모든 무장을 내려놓은 채 사자공의 막사를 찾았다. 황제의 막사를 제외하고 가장 큰 막사를 찾으면 됐기에 딱히 길을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제국의 2인자답게 그의 막사 내부에는 수많은 이들이 모여있었는데 사자공은 내 얼굴을 보자마자 안에 있던 이들을 전부 다 밖으로 내보냈다.

사람들이 바글거리던 공간이 순식간에 비워지자 나는 다소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사자공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사자공 전하. 절 찾으셨다고 들었습니다.”

“어서 오게. 라그나르 경. 안 그래도 피곤할 텐데 여기까지 오라고 해서 미안하네.”

“그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런데 혹시 제가 시간대를 잘못 맞췄습니까?”

“아니. 어차피 얘기도 다 끝났었네. 딱 맞게 와줬어.”

그는 일단 앉으라며 자신의 앞에 있는 의자를 권했고 나는 조심스럽게 그와 마주 앉았다.

“다른 게 아니라 그대에게 몇 가지 물어볼 게 있어서 이렇게 불렀다네. 자네는 그러니까… 이제 곧 40일의 의무가 다 끝나가지 않나.”

“…그렇지요.”

지금 사자공은 내게 40일간의 의무복무가 끝나면 여기서 손을 떼라고 강권하고 있었다.

아니, 권하는 것도 아니고 단정 짓는 걸 보면 이 이상 내가 칼리나의 이름을 걸고 전쟁에 참여하는 것을 원치 않는 모양이다.

“나는 북부에 머무니 자네가 남부로 내려가고 나면 또 언제 다시 볼 수 있겠나. 그래서 이렇게 실례를 무릅쓰고 얼굴을 보자고 한 것이네.”

“괘념치 마십시오. 저 역시 북부의 영웅이라 불리는 사자공 전하를 뵐 수 있어 무한한 감동을 느끼는 중입니다.”

“그렇게 얘기해주니 고맙네. 그래서… 자네는 칼리나 변경백과 무슨 사이인가?”

“예전에 조금 인연이 있어서 알게 된 사이입니다.”

“과거의 인연이라… 그런 것 치고는 그녀가 자네를 굉장히 신뢰한다던데 맞나?”

“저 같은 일개 야만인 용병이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저 칼리나 변경백 각하의 믿음과 신뢰에 답할 뿐입니다.”

나는 적당히 두리뭉실하게 대답했고 사자공 역시 제대로 된 대답을 원한 건 아니었는지 적당히 맞장구를 쳐주었다.

“그렇구만. 그건 그렇고 자네가 례셰크를 풀어줬다고 들었네. 맞나?”

“그렇습니다.”

“왜 그랬지?”

물론 지금 사자공은 내 행동에 대한 설명을 원하는 게 아니다. 조금 전에 황제와 무슨 말을 했는지, 황제가 어떤 선택을 했는지, 뭐라고 설득했고 뭐를 대가로 내밀었는지를 알고 싶은 것뿐이었다.

그 때문에 나는 다시 한번 황제에게 했던 말들을 사자공에게 그대로 해주었다. 하지만 사자공과 황제는 서로 원하는 대답이 다르기에 난 몇 마디 더 덧붙였다.

“하지만 제 의견은 가능성일 뿐 실제로 어떻게 될지는 알 수 없습니다. 저는 그저 제안과 설득을 했을 뿐이고 그 선택에 대한 대가는 황제 폐하가 치러야 하지 않겠습니까.”

“흠, 그래서 자네 생각은 어떤가?”

“폐하께서 욕심부리지 않고 제가 간언한 대로 드레스덴 수복에서 만족하고 병력을 물린다면 폴란드 내의 공작들에게 불화의 씨앗을 뿌릴 수 있을 겁니다.”

“욕심을 부린다면?”

“정의공은 자신이 뒤집어쓴 누명을 벗기 위해 전력을 다해 싸우겠지요.”

신성 제국보다는 약하지만, 폴란드는 저력이 있는 국가였고 윙드 후사르라는 희대의 개사기 기병을 가지고 있다.

황제도 그런 인간 백정들과 피를 흘려가며 싸우고 싶진 않을 것이다. 그가 원하는 건 이번 전쟁을 통해 지난번의 굴욕을 갚고 황제의 권위를 세우는 거지 사생결단을 내는 게 아니니까.

“흠, 그럼 자네는 내가 어떻게 해야 한다고 보나?”

“저 같은 비천한 족속이 어찌 사자공 전하께 조언을 드리겠습니까?”

상대에게 이런저런 관점이 있다는 걸 얘기하는 것과 직접적으로 조언을 하는 건 별개다. 나는 어디까지나 중립이며 그 때문에 황제의 부름에도, 사자공의 부름에도 응한 거니까.

“왜 칼리나가 그대를 보냈는지 알 것 같군. 자네. 황제가 말한 정찰의 의미도 알고 있었지?”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군요.”

“그래. 당연히 그렇겠지. 자네가 그렇다면 나도 그런 걸로 알고 있겠네.”

내가 입을 다물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그는 와인병을 하나 꺼내며 내게 건넸다.

“오늘 자네와의 대화는 정말 유익했네. 혹여나 할 일이 없다면 날 찾아오게. 자네 같은 용병은 언제든지 환영이니.”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나는 사자공이 건네준 와인병을 든 채 그의 막사를 나섰고 피곤이 몰려드는 걸 느꼈다. 역시 이렇게 사람을 상대하는 건 내 전문이 아니다.

빨리 가서 이비한테 무릎베개 받으면서 힐링이나 해야지.

* * *

이후 신성 제국군은 드레스덴에 무혈입성했다. 그곳에서 보급과 약간의 휴식을 취한 황제는 고민 끝에 진군을 택했다.

한번 결정이 내려지자 제국군은 거리낌 없이 진군했고 마침내 브로츠와프까지 단 사흘 남겨둔 시점에서 내 의무복무 기간이 끝났다.

물론 이곳에 모인 이들은 다 황제 또는 사자공과 얘기가 된 이들이니 40일이 지나도 더 싸울 테지만, 나는 칼리나의 이름을 걸고 왔기 때문에 반드시 복귀를 해야 했다.

“폐하. 저는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끝까지 모시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아쉽구만. 브로츠와프 공략까지만 있을 수는 없나?”

“그럴 수 없는 걸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마음속으로나 폐하의 승전을 기원하겠습니다.”

“알겠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나와 맺었던 계약은 유효하겠지?”

“물론입니다. 폐하.”

“좋은 소식 기다리고 있겠네.”

“반드시 낭보를 전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40일간의 의무복무를 끝낸 나는 전선에서 이탈해 칼리나가 다스리는 밀라노를 향해 기수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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