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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바이킹이 되었다-45화 (45/205)

▣ 045화

“뭐, 뭐라고?”

내 말에 가장 놀란 건 다름 아닌 포로로 붙잡혀있는 당사자인 례셰크였다. 그는 죽음을 각오한 얼굴이었는데 김빠지게 내가 살려준다고 하자 오히려 당황한 모습이었다.

“어린 나이에 귀가 먹었나? 아니면 내 말이 조금 어색한가? 그렇다면 미안하네. 보다시피 야만인이라 어쩔 수 없네.”

내가 기억하기로 언어툴을 설치해놨던 걸로 아는데 그게 현실로 구현되면서 조금 미묘하게 바뀐 모양이다.

말을 하는 당사자인 나는 모르지만 아마 저들이 듣기에는 다소 어눌하게 들릴지도 모르겠다.

사실 FM대로 가자면 타국과는 말도 안 통하는 게 현실이지만 그렇게 플레이를 했다간 귀찮기만 할 뿐 재미가 없었기에 통합 언어팩을 설치해뒀었는데 천만다행이라 생각하고 있다.

그게 아니었다면 지금 이렇게 제대로 대화조차 못 하고 손짓, 몸짓, 발짓 다 해가며 회화를 해야 했을 테니까.

“아니, 그런 문제가 아니다. 지금 나를 풀어준다고 했나?”

“그런데?”

“어째서지? 내 입으로 이런 말을 하는 것도 웃기지만 나를 포로로 잡으면 신성 제국에게 유리하지 않나?”

“그렇겠지.”

“그런데 왜 날 풀어주는 거지?”

“말하지 않았나. 그저 네가 예상보다 잘 싸웠고 거기에 감탄해서 내 나름대로 경의를 표하는 것뿐이라고.”

“…….”

말을 마친 내가 말의 엉덩이를 툭 치자 말은 투레질을 하며 콘라드와 폴란드군 진영으로 향했다. 그렇게 떠나는 례셰크를 향해 나는 손을 흔들어 주었다.

하지만 례셰크는 아직 할 말이 남았는지 말을 멈추고 뒤돌아서서 물었다.

“라그나르 로드브로크라고 했나?”

“그런데?”

“그대의 호의와 명예로움, 배려에 깊은 감사를 표한다. 내 모든 것을 걸고 맹세하건대 오늘 이곳에서 그대에게 받은 이 은혜는 언젠가 반드시 갚도록 하겠다.”

“보답을 바라고 풀어주는 건 아니지만… 기대하도록 하지.”

말을 마친 나는 쿨하게 돌아섰고 례셰크 역시 자신의 갈 길을 향해 기수를 돌렸다. 그렇게 드레스덴 근방에서 벌어진 전초전은 신성 제국 측의 승리로 마무리되었다.

* * *

이게 동화 속 이야기나 소설이라면 싸움에서 이겼다! 라는 말로 끝날 테지만 이건 현실이었기에 나는 남아서 뒤처리를 해야 했다.

례셰크는 애초에 드레스덴을 지킬 생각이 없었으니 이대로 타고 온 배를 타고 돌아가면 그만이지만 나는 그게 아니었다.

시체들을 이대로 뒀다간 내 명예가 떨어짐은 물론 이 근방에 역병이 돌 수도 있고 땅이 오염될 수도 있기 때문에 제대로 뒤처리를 해야 했다.

제대로 된 땅을 사자공에게 가져다 바쳐도 나에 대한 시선이 안 좋을 텐데 병신이 된 땅을 자랑스럽게 건넨다? 대놓고 싸우자는 얘기밖에 안 된다.

“힐데. 시체들은 전부 다 불태우고 주변 정리 좀 해줘. 그리고 이비는 다친 병력들이 있으면 좀 보살펴주고 마을 주민들 상태도 한 번씩 점검해주고.”

“아니, 그게 지금 중요합니까? 왜 상대를 풀어주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주군. 일반적인 영주도 아니고 무려 정의공의 아들입니다. 프리드리히가 정의공에게 가지고 있는 자격지심이 상당할 텐데 어찌 무마하실 요량이십니까?”

“내가 잡은 걸 내가 풀어주겠는데 뭔 상관이야. 꼬우면 지가 잡던가.”

내 대답에 힐데는 어이없다는 얼굴로 날 쳐다보며 대꾸했다.

“아니, 최근에는 그렇게 머리를 잘 굴리더니 왜 갑자기 다시 멍청해진 겁니까? 황제 앞에서 그렇게 얘기할 생각입니까?”

“에이, 내가 바보도 아니고 설마 그러겠어?”

힐데의 말에 내가 능글맞게 대꾸하자 그녀는 눈가를 씰룩이며 나를 바라보았다. 아마 내가 라그나르가 아닌 일반적인 플레이어였다면 벌써 뚝배기가 깨지지 않았을까?

그녀는 심호흡을 하며 끓어오르는 화를 참은 뒤 차분한 어조로 나를 설득했다.

“라그나르. 당신의 생각이 그렇다고 해도 황제는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을 겁니다. 지금까지는 노회한 권신처럼 머리를 잘만 굴려대더니 왜 갑자기 이상한 데서 똥볼을 날리는 겁니까?”

“그렇다고 지금 와서 또 붙잡을 수는 없잖아.”

“필요하다면 뭔들 뭣하겠습니까. 능욕까지 했으니 황제가 더 좋아하겠군요.”

확실히 실제 게임에서도 그게 가능하기는 했다.

적 영주를 풀어준 뒤 도망가는 거 붙잡아서 ‘실은 마음이 바뀌어서 다시 자네를 포로로 잡기로 했네. 미안하게 됐네.’라고 능욕하면 상대 영주는 피꺼솟해서 온갖 욕설을 퍼붓는다.

당연하겠지만, 그런 행동을 하면 호감도는 바닥을 찍는다. 난이도에 따라 다르겠지만, 내가 선택한 난이도에선 바로 철천지원수로 바뀌니 조심해야 한다.

“주군. 분명 황제는 이 행위에 대해서 문책을 할 겁니다.”

이비까지 힐데의 말에 동조했지만 난 어깨를 으쓱이며 대꾸했다.

“당연히 하겠지.”

내 휘하 병력들이야 내가 입단속을 한다고 해도 폴란드 쪽에서 소문이 날 테고 카지미에슈 정의공과 사이가 나쁜 미에즈코는 이를 동네방네 소문내며 명분을 거머쥐려 할 것이다.

“한데 어째서….”

“자자, 잘 생각해봐. 내가 지금 누구 하청받고 왔어?”

“칼리나 변경백에게 받지 않았습니까?”

“그래. 즉 지금의 나는 칼리나의 대리야. 그런 내가 이번 전쟁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면 황제가 좋아할까? 애초에 이 전쟁이 왜 일어났는지 잘 생각해봐.”

“그건….”

“황제는 이번 전쟁을 통해 지난번의 패배를 설욕하고 싶어 하는데 엉뚱한 놈이 사람들의 관심과 칭송을 받는다? 겉으로는 웃지만 속으로는 날 죽이려고 들걸?”

“하지만 잘 설명한다면….”

“사자공이 가만히 있을까? 아마 어거지로 날 칭송하면서 지난 전쟁에서 무능력하게 패퇴한 황제와 날 비교하겠지.”

“정의공에게 패퇴한 황제와 정의공의 아들을 사로잡은 야만인으로 비교당하겠군요.”

“맞아. 그러니 욕 좀 먹더라도 그냥 풀어주는 거야.”

거기에 이번 전쟁은 드레스덴을 수복하는 선에서 흐지부지 끝나야 한다. 이대로 시간이 흐르면 사자공은 역사대로 프리드리히에게 숙청당하게 된다.

삼국지에서 촉이 무너지자 오나라도 무너졌던 것처럼 사자공이 무너지고 나면 칼리나 역시 황제에게 복종을 강요받을 것이다.

“라그나르. 혹시 당신 저와 헤어졌던 몇 년간 어디 정치판에서 구르기라도 했습니까?”

“뭐?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아니, 최근에 사람이 좀 바뀐 것 같긴 했는데 솔직히 이런 모습은 너무 낯섭니다.”

“내 지적인 모습에 새삼 반했어?”

어깨를 으쓱이며 묻는 내 말에 힐데는 코웃음 치며 대꾸했다.

“그 나불거리는 혓바닥만 아니었으면 반했을지도 모르겠군요.”

“아쉽게 됐네. 아무튼 이걸로 의문은 다 풀렸지? 이제 곧 해가 질 테니 서둘러 뒷정리부터 시작하자.”

“알겠습니다.”

* * *

<드레스덴 근방 신성 제국 본대 주둔지>

“그러니까 지금 자네 말에 의하면 내가 ‘정찰’을 명한 그 야만인이 정의공의 아들과 싸워서 이긴 것도 모자라 포로로 붙잡았다… 뭐 이런 얘기인가?”

“그렇습니다. 폐하.”

“하, 그것 참 재밌는 농담이군. 본래 난 농담을 그리 좋아하진 않지만, 이번만큼은 넘어가 주도록 하지.”

“폐하. 그… 농담이 아니라 감시 차원에서 붙여놓은 기병들의 보고내용이 전부 동일합니다. 저도 믿기진 않습니다만 정말 승리한 모양입니다.”

그제서야 황제는 안색을 굳히며 머리칼을 부여잡았다. 승리한 것 자체는 기뻐할 일이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승리의 주체가 칼리나가 보낸 용병이라는 건 별로 달가운 소식이 아니다.

“돌겠군. 칼리나 그 미친년이 진짜 제대로 된 칼을 보내준 모양이야.”

“심지어 거진 혼자서 적들을 궤멸시켰다고 합니다.”

“어쩐지 자신만만하게 이야기하더니 믿는 구석이 있던 모양이군. 뭐 좋아. 사로잡은 건 례셰크라던가 콘라드라던가?”

“례셰크를 붙잡았는데 풀어줬다고 합니다.”

전령의 대답에 황제는 마시던 와인을 집어 던지며 분노했다.

“뭐? 아니 시발, 그건 또 뭔 개소리야!? 그걸 왜 풀어준 건데?”

“소, 소신도 그것까지는….”

느닷없는 황제의 욕설에 당황한 전령은 말까지 더듬었고 황제는 의자의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머리를 부여잡았다.

“야만인이라 그런지 도통 종잡을 수가 없는 놈이군.”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현재는 드레스덴 앞에서 대기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곳으로 소환하도록. 어디 뭐라고 변명할지 좀 듣고 싶군.”

“알겠습니다.”

* * *

“례셰크와 싸워서 대승을 거뒀다지?”

소환하자마자 자신과 독대하겠다며 부른 황제를 보며 라그나르는 가볍게 침을 삼켰다.

“폐하 덕분에 작은 승리를 거둘 수 있었습니다.”

“그게 왜 내 덕분인가?”

“폐하께서 제게 정찰을 명하지 않으셨다면 어찌 적과 싸워 승리할 수 있었겠습니까.”

라그나르의 대답에 어이가 없었는지 프리드리히는 피식 웃은 뒤 자신의 잔에 와인을 따랐다.

“뭐, 그렇다고 치지. 어차피 지금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니까.”

황제는 와인을 단번에 들이킨 뒤 탁 소리 나게 내려놓으며 추궁하듯 물었다.

“왜 례셰크를 놔줬지?”

“더 큰 미래를 봤을 뿐입니다.”

“말해봐라. 그 미래가 너의 사리사욕으로 가득 차 있다면 대가를 치르게 될 테니.”

여기서 엉뚱한 대답을 하면 황제에게 찍힐 테니 난 사전에 몇 번이나 시뮬레이션한 대답을 내뱉었다.

“폐하. 현재 폴란드는 볼레스와프 2세 사후 4개의 공국으로 쪼개진 상황입니다. 루스 공국처럼 서로 싸우기도 하고 공공의 적을 상대할 때는 힘을 합치기도 하고 있지요.”

“그 정도는 나도 알고 있네. 설마 자네가 아는 걸 내가 모른다고 생각하는 건가?”

“그 때문입니다. 현재 폴란드에서 서열 2위라고 할 수 있는 미에즈코 공작은 폴란드의 대공 지위를 노리고 있습니다만, 그의 동생인 정의공 때문에 쉽지 않은 상황입니다.”

“…계속해 보게.”

“왜 드레스덴을 서부에 본거지를 둔 미에즈코 공작이 아닌, 저 동부에 있는 정의공의 아들이 맡고 있었겠습니까? 애초에 정의공은 드레스덴을 지킬 생각이 없던 겁니다.”

실제로 지금 드레스덴은 내 휘하의 병력만으로도 점령이 가능할 정도였다. 단지, 황제가 직접 점령해야 의미가 있기에 포위만 한 채 대기만 하고 있을 뿐이지.

“아시다시피 저희 신성 제국을 상대할 때 가장 먼저 싸우는 건 미에즈코 공작입니다. 그 때문에 정의공은 지난번 전쟁으로 인해 쏠쏠하게 재미를 보지 않았습니까?”

실제로 정의공 입장에서 경쟁자인 미에즈코 공작이 두들겨 맞을 때까지 기다리다가 적당한 시점에 지원군을 보내 신성 제국군을 격퇴하는 게 가장 좋은 시나리오였다.

“그랬지. 실제로 지난번 크라쿠프를 치기 전까진 카지미에슈 그 개자식도 손 놓고 관망하기만 했고.”

“그러니 미에즈코 공작 입장에선 죽을 맛일 겁니다. 저희를 격퇴한다고 해도 본거지가 초토화됐으니 대공 작위에 대한 경쟁이 될 리가 있겠습니까?”

“빙빙 돌리지 말고 요점이나 얘기하게.”

“미에즈코를 이용하시지요.”

“어떻게? 어떤 식으로?”

“제가 례셰크를 풀어준 건 미에즈코에게 강력한 대의명분이 될 겁니다. 상식적으로 신성 제국에서 원수라고 할 수 있는 정의공의 아들을 놔줄 이유가 뭐가 있겠습니까?”

차라리 례셰크가 포로가 됐다면 반대로 정의공이 여론몰이를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봐라! 내 아들은 비겁하게 도망치지 않고 적과 맞서 싸웠다. 저 어린아이가 싸우는데 공작이라는 그대들은 뭘 하는 것인가!?’ 뭐 이런 식으로 말이다.

“그건 그렇지. 아마 사정을 모르는 이들은 모종의 거래가 있다고 생각하겠지.”

“그러니 미에즈코에게 ‘정의공이 신성 제국과 내통해서 경쟁자인 자신을 제거하려고 했다!’ 이런 식으로 여론을 주도하게 하는 겁니다.”

“그게 먹힐 거라 생각하나?”

“먹히든 아니든 상관없습니다. 중요한 건 적들의 결속을 깨고 불화의 씨앗을 키워두는 것만으로 충분합니다. 미에즈코 공작이 아니라 다른 공작들도 현 상황을 보면 다른 생각을 할지도 모르는 일 아닙니까?”

원래 우두머리가 여러 명이면 불화가 생길 수밖에 없다. 이건 동서양과 시대를 막론하고 통하는 진리다. 나라가 망해가는 와중에도 편을 갈라 싸우는 이야기는 흔하지 않던가.

“본래 적과 싸울 때 가장 무서운 건 적의 정예병이 아니라 믿을 수 없는 아군입니다.”

“흠… 즉, 자네의 행동은 의도됐다는 건가?”

“그렇습니다. 폐하. 거기에 이번에 운 좋게 브로츠와프를 점령한다고 한들 계속 지킬 수 있겠습니까? 길게 보셔야 합니다. 폐하.”

내 호소에 황제는 팔짱을 낀 채 고민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이번만큼은 자네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주도록 하지. 하지만 두 번은 없다는 걸 명심하게.”

다행히 황제를 설득하는 데 성공한 모양이다. 하긴, 그도 바보가 아닌 이상 내 말을 못 알아먹진 않겠지.

애초에 이번 전쟁 자체가 제대로 된 명분도 없이 복수라는 이름으로 벌어진 전쟁이 아니던가.

“폐하의 하해와 같은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알았으니 나가보게.”

프리드리히는 축객령을 내렸고 나는 그에게 공손히 인사한 뒤 황제의 막사를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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