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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바이킹이 되었다-44화 (44/205)

▣ 044화

적은 저주받아 잊혀진 신의 이름을 외치며 광기를 표출했고 그 누구도 그의 행보를 막아낼 수 없었다.

아군의 진형은 구멍 난 댐처럼 허물어져 가기 시작했고 패퇴하는 아군을 막기 위해서 례셰크는 자신을 지키던 호위병들까지 투입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례셰크는 그들을 투입하면서도 저 괴물을 이길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진 않았다. 그저, 자신이 남아 있는 병력을 수습하고 퇴각할 시간을 벌어주길 빌었건만, 그조차도 사치였다.

호위병들은 자신의 명령을 완수하기 위해 공포를 삼킨 채 각자의 무기를 쥔 채 적에게 달려들었지만, 그의 도끼가 번뜩일 때마다 바닥을 나뒹구는 시체가 늘어날 뿐이었다.

하지만 수많은 병사들의 희생을 제물로 바쳐서일까? 아니면 이 신성한 땅에서 바이킹 같은 야만인이 날뛰는 모습에 신께서 분노하셨기 때문일까.

“으아아아아아!!”

저 괴물의 틈을 노리고 있던 병사 한 명이 거대한 기합과 함께 들고 있던 창으로 괴물의 몸을 찔러 들어갔다. 단 한 번의 일격이었지만, 상대의 빈틈을 노리고 들어간 필사의 일격이었다.

상대는 뒤늦게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그 공격을 막으려 했지만 이름 모를 병사가 내지른 창은 야만인의 살과 근육을 가른 채 몸을 꿰뚫었다.

그 순간 례셰크는 주먹을 움켜쥐며 희열을 느꼈지만, 그 희열이 절망으로 바뀌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는 주춤했지만, 결코 쓰러지지 않았고 광기에 사로잡힌 짐승을 한 번에 죽이지 못한 대가는 가혹했다.

“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

상처 입은 늑대의 포효와도 같은 괴성을 내지른 그는 자신의 몸을 꿰뚫은 병사의 머리를 한 손으로 붙잡아 그대로 있는 힘껏 바닥에 내려찍었다.

그것만으로도 기괴하고 두려운 광경이었지만, 그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그대로 발을 들어서 상대의 머리를 박살 내버렸다.

콰직! 콰지직!

묘사하기조차 혐오스러운 그 잔혹한 광경에 대부분의 병력들은 전의를 잃어버린 채 바닥에 주저앉았고 일부는 공포에 질려서 자신의 신을 찾으며 구원을 기도했다.

“예수시여. 영원한 빛으로 절 구원하소서. 예수시여. 영원한 빛으로 절 구원하소서. 예수시여. 영원한 빛으로 절 구원하소서. 예수시여 영원한 빛으로….”

그런 병사를 재밌다는 얼굴로 바라보던 그는 처음으로 미소 지으며 입을 열었다.

“포기해라.”

그게 그의 입에서 나온 마지막 음성이었고 그 후 상대는 혼자서 병력들을 찢어발기며 희대의 학살극을 찍었다. 그의 뒤에 서 있던 다른 병력들이 개입할 것도 없었다.

그는 전설 속에 나오는 영웅처럼 혼자서 수백의 병력들을 상대했고 전투가 끝났을 때 대지에 발을 올리고 굳건히 서 있는 건 오직 바이킹뿐이었다.

“하…하하….”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병력을 끌고 자신만만하게 상대를 급습하겠다고 이곳으로 왔을 때? 얼마 되지 않는 적의 숫자에 방심했을 때? 박살 나는 아군을 보면서도 퇴각을 명하지 않았을 때?

아니, 아니다. 그저 저 재앙과 마주친 것 자체가 문제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 와서 그게 무슨 소용일까.

이미 자신이 끌고 온 병력들의 태반이 시체가 되어 누워있었고 나머지는 도망쳤으며 자신의 곁에는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생각보다 간단하군.”

그리고 이런 참상을 남긴 상대는 그저 간단하다는 말 한마디로 상황을 정리했다.

이 말도 안 되는 불합리함에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눈앞의 상대는 불합리라는 말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사내였다. 애초에 저런 자연재해와도 같은 괴물을 상대로 화내봤자 뭘 어쩐단 말인가.

그리고 마침내 그 괴물의 시선이 자신에게 향했을 때, 례셰크는 죽음의 공포를 느꼈으며 이곳이 자신이 죽을 자리라는 걸 깨달았다.

자신은 여전히 말 위에 타고 있었고 사내는 말에서 내린 상태였기에 이대로 기수를 돌리면 도망칠 수 있었다.

하지만 저 저주받을 시선에서 도망치는 순간 저 사내의 손에 들려있는 도끼가 자신의 머리에 박힐 게 분명했다.

“후우… 후우…… 후우… 후.”

그 때문에 몇 번이나 심호흡하며 마음을 다스린 례셰크는 말에서 내려 검을 뽑아 들었다.

자신은 피아스트 왕조의 피를 이었으며 폴란드의 대공인 카지미에슈 정의공의 장남이었다. 죽을 때 죽더라도 허무하게 죽을 순 없었다.

그런 자부심과 머릿속에 각인된 귀족의 의무 덕분에 례셰크는 공포에 떨면서도 검을 상대에게 겨누며 소리쳤다.

“이름 모를 바이킹 전사여! 그대의 힘과 실력에 경의를 표한다. 나는 폴란드의 대공 카지미에슈 정의공의 아들이자 피아스트 왕조의 피를 가장 진하게 이은 례셰크다. 그대의 이름은 무엇인가!?”

그런 자신을 호기롭게 쳐다보던 상대는 도끼와 방패를 꺼내 들며 짤막하게 대꾸했다.

“라그나르 로드브로크.”

라그나르. 그게 자신을 죽일 상대의 이름이란 말인가. 죽는 그 순간까지 그 이름을 잊지 않을 거라 다짐한 례셰크는 자세를 바로잡은 뒤 소리쳤다.

“좋다. 덤벼라. 라그나르! 나는 결코 숨지도, 도망치지도 않는다!”

“유언은 그걸로 끝인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자 상대는 피식 웃더니 순식간에 먼 거리를 도약해 들어왔다. 도저히 같은 인간의 몸이라고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압도적인 운동신경이었다.

하지만 미리 대비하고 있었기에 례셰크는 가볍게 상대의 도끼를 튕겨냈다. 아니, 정확히는 튕겨내려 했다.

“크윽!!!”

전력을 다한 것도 아니고 그저 가볍게 휘두른 것처럼 보이는 상대의 일격은 거대한 벽 그 자체였다.

양손으로 비껴서 흘려낼 수 있을 거로 생각했건만, 상대의 도끼는 살아있는 뱀처럼 교묘하게 휘어들어 오며 자신의 목을 노렸다.

결국, 례셰크는 공격을 피하기 위해 흙바닥을 나뒹굴 수밖에 없었고 추가타로 들어오는 상대의 공격을 막아내려 했다.

하지만 상대는 땅바닥을 뒹구는 자신이 재밌는 구경거리라도 되는 것처럼 쳐다만 보고 있었다. 그러더니 입꼬리를 쓱 말아 올리며 한마디 툭 던졌다.

“바닥에서 재롱을 부리는 모습이 제법 볼만하군.”

까딱까딱.

말을 마친 사내는 언제든지 들어오라는 듯 손을 까딱이며 자신을 도발했고 례셰크는 입술을 깨물었다. 저건 값싼 도발이다. 냉정하고, 침착하게 상대를 받아쳐야 한다.

“흐아아아아압!”

머릿속에 스멀스멀 기어오는 공포를 쫓아내기 위해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기합을 내지른 례셰크는 있는 힘껏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검은 당연한 것처럼 상대의 방패에 가로막혔으며 단순히 그것만으로도 례셰크는 압도적인 실력 차이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대로 밀릴 순 없었다. 최선의 방어는 공격이라고 했던가. 례셰크는 젖먹던 힘까지 다해서 상대를 압박해갔지만, 상대는 그 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은 채 자신의 검격을 전부 다 받아냈다.

이대로 가다간 자멸할 게 뻔했기에 검을 회수한 뒤 한 방을 노리려 했지만, 상대는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방패로 자신의 검을 튕겨냈다.

“큭!”

상대의 방패에 밀려 시원스럽게 드러난 가슴팍을 방어하기 위해 다시 한번 뒤로 물러나려 했지만, 두 번의 기회는 없었다.

상대는 예측한 것처럼 자연스레 자신을 따라 들어와 그 집채만 한 손으로 자신의 멱살을 붙잡더니 그대로 바닥에 메다꽂았다.

“커허억!!”

난생처음 느껴보는 고통에 례셰크는 숨을 쉬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했다.

하지만 가슴 한가운데가 조여오는 질식의 고통에 점차 정신이 멀어지는 게 느껴졌고 이내 례셰크는 정신을 잃고 말았다.

* * *

가볍게 상대를 바닥에 내리꽂은 라그나르는 도끼와 방패를 수납하며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보다 배짱이 있는 놈이군. 도망칠 줄 알았는데 이렇게 싸울 줄이야.”

물론 도망친다고 해도 그냥 보내줄 생각은 없었지만 이렇게 죽기 살기로 자신에게 덤벼드는 것을 보니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아마 이건 전사로서 일생을 살아온 라그나르가 자신의 모든 것을 불태워 맞서 싸운 전사에게 보내는 존중과 경외심이겠지.

그렇게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례셰크를 바라보다 보니 이내 가슴팍에 난 상처에도 시선이 닿을 수밖에 없었다.

가슴 한가운데 난 상처는 빈말로라도 가볍다고 할 수 없었는데 에인헤랴르의 힘을 끌어썼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아물지 않고 피가 철철 흘러내리고 있었다.

“쯧, 변방 중의 변방인 폴란드에서, 그것도 이름 없는 병사가 신창을 가지고 있을 줄은 몰랐는데… 어떻게 보면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신창. 통칭 롱기누스의 창. 물론 자신을 찌른 창은 열화판에 불과하다. 하지만 열화판이라도 그 성능을 우습게 볼 순 없었다.

평상시에는 일반적인 창과 다를 게 없지만, 신성력을 기반으로 한 힘에는 엄청난 힘을 발휘하는 게 롱기누스의 창이다.

오딘의 가호와 에인헤랴르의 힘 등 온갖 버프를 떡칠한 자신이 이름 모를 병사가 내지른 창에 당했던 건 다 이유가 있는 법이었다.

다만 다행스럽게도 자신은 오딘 신앙을 믿는 바이킹이었고 창 자체가 열화판인 데다 그 창을 쓰는 이도 하위 티어의 이름 모를 병사에 불과했기에 이 정도로 끝날 수 있었다.

“그럼 이 짐덩이는 어쩐다?”

라그나르는 기절한 례셰크를 보며 잠시 고민에 빠졌다. 역사의 흐름대로라면 례셰크는 아버지인 카지미에슈 정의공이 사망한 뒤 그의 뒤를 이어 폴란드의 대공이 될 것이다.

물론 여러 가지 변수가 존재하는 만큼 100번의 시뮬을 돌리면 100번 다 다른 결과값이 나오고 프리드리히가 살아있는데 라틴 제국이 있다는 것부터 말이 안 되는 거지만, 그래도 기존의 역사를 무시할 순 없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례셰크는 정의공 사후 자신의 작은 아버지인 미에즈코와 싸우고 마침내 례셰크 백공이라는 이름으로 크라쿠프를 차지하며 대공의 자리에 오른다.

물론 자신만만한 성격 탓에 암살당해 죽게 되지만 아직 좀 남은 얘기니 안면을 터놓으면 어떤 식으로든 내게 이득이 될 것이다.

이 빌어먹을 게임에서 중요한 건 상대와의 동맹이 아니라, 상대가 나를 공격하지 않게 만드는 게 최우선 순위니까.

* * *

례셰크의 동생이자 카지미에슈 정의공의 차남인 콘라드는 패퇴해서 도망치는 아군 병사들을 보고 뭔가가 잘못됐음을 느꼈다.

서둘러 포위망을 형성하기 위해 넓게 퍼져있던 병력들을 철수시킨 뒤 마을로 향하고 있을 때 한 무리의 병력들이 먼지를 피워올리며 이곳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그리고 슬프게도, 적들이 휘날리는 깃발은 피아스트 가문의 것이 아니었다.

“전군 전투 준비.”

하지만 적들은 싸울 생각이 없는지 멀찍이 떨어져서 꼼짝도 하지 않았고 기병 몇 기만 앞으로 나섰기에 콘라드 역시 호위병들을 끌고 앞으로 나섰다.

온몸에 피칠갑을 한 사내는 자신을 위아래로 쓱 훑더니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대가 카지미에슈 정의공의 차남이자 피아스트 왕조의 피를 이은 콘라드인가?”

“그렇다. 내 앞에 있는 그대는 누구지?”

“내가 누구인지는 알 것 없고… 안타깝게도 그대의 형은 패배해 내게 사로잡혔다는 소식을 전해주러 왔네.”

사내가 기수를 옆으로 돌리며 슬쩍 몸을 피하자 양손을 묶인 채 힘없이 말 안장 위에 올라타 있는 례셰크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 모습에 절로 분노가 솟구쳤지만, 이 상황에서 감정을 드러내서 좋을 건 없다. 크게 심호흡하며 감정을 갈무리한 뒤 무표정한 얼굴로 싱글벙글 웃고 있는 상대를 향해 물었다.

“확인했다. 그를 풀어주는 대가로 뭘 원하나.”

“뭘 원하냐고? 어차피 지금 자네가 줄 수 있는 건 드레스덴밖에 없지 않나. 그마저도 지키지도 못할 땅에 불과하고.”

그 말대로 당장 머릿속에 떠오르는 건 드레스덴밖에 없었다. 하지만 전장에 나온 이상 저 사내 역시 전공을 원할 것이다.

그러니 어차피 뺏길 땅이긴 했지만, 형식적으로나마 상대에게 드레스덴을 직접 넘겨준다면 서로 간에 만족할 수 있을 것이다.

“솔직히 난 드레스덴 따위 알 바 아니야.”

하지만 눈앞의 상대는 그런 자신의 생각에는 관심도 없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배알이 꼴렸지만, 어쨌건 아쉬운 건 자신이었기에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고 그는 오직 승자만이 베풀 수 있는 관용을 보여주었다.

“대가 같은 건 필요 없다. 어린 나이에도 잘 싸우더군. 풀어주도록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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