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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바이킹이 되었다-42화 (42/205)

▣ 042화

정찰.

뭐, 적의 정세나 지형을 살핀다는 뜻인데 말이 정찰이지 실은 미리 병력 끌고 가서 근처에 있는 마을 좀 불태우고 약탈도 하고 조져버리라는 얘기다.

당연히 이런 일을 하면 명성이랑 명예가 깎인다. 물론 황제가 시켰기에 어느 정도 감안은 되겠지만, 나치가 시켜서 사람들을 죽인 것뿐이라고 변명한들 그들에게 죄가 없는 건 아니잖은가.

그리고 근처 마을에 대한 약탈은 보복에 가까운 수단이었다. 상식적으로 어차피 영주가 머무르는 성을 점령하면 근처의 마을도 전부 손아귀에 들어올 텐데 굳이 마을을 약탈할 필요가 없잖은가.

비유하자면 현대에서 전쟁을 할 때 민간인 살해를 전쟁범죄로 규정짓는 것과 비슷하다고 보면 될 것이다.

그걸 모를 리가 없을 텐데 내게 정찰을 빙자한 약탈을 명하는 건 온전한 땅을 사자공에게 주기 싫다는 황제의 의지였다.

“폐하. 그게 무슨 말입니까! 그건 합의에 없던 얘기가 아닙니까!?”

황제의 속셈을 알아챈 사자공은 으르렁거리며 황제를 쏘아붙였지만, 황제는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얼굴로 반문했다.

“무슨 말인가? 나는 그저 칼리나의 이름으로 나를 지원하러 온 바이킹 용병대장인 라그나르에게 단순한 정찰을 부탁하고 있는 걸세.”

과도할 정도로 많은 수식어였지만, 칼리나라는 이름을 무시할 순 없었는지 사자공은 눈살을 찌푸리더니 이내 이글거리는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았다.

이게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는 건가. 의도치 않게 태풍의 핵이 돼버린 나는 ‘좆됐다’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태연한 얼굴로 최선의 답을 이끌어 냈다.

“알겠습니다. 대신 제 휘하에는 기병이 부족하니 기병을 2기만 붙여주시겠습니까? 그러면 드레스덴 성벽의 높이와 영주, 수비 병력, 근처의 지형지물까지 전부 다 조사하겠습니다.”

하지만 이건 원하던 대답이 아니었는지 황제는 내게 과할 정도로 힌트를 주며 되물었다.

“두기가 아니라 십여 기와 보병 지원도 가능하네. 어차피 자네 휘하의 병력이 그렇게 많은 건 아니니 차라리 별동대로 행동하는 게 낫지 않겠나.”

“별동대 말씀이십니까?”

“그렇다네. 가령, 근처의 마을을 돌면서 지원병력을 차단한다든가 하는 식으로 말이야. 물론 마을 주민들이 반항한다면, 적절한 조치가 필요하겠지.”

황제는 대놓고 병력까지 지원해줄 테니 근처에 있는 마을을 조지라고 부추겼지만, 난 모르쇠 작전으로 밀고 나가기로 했다.

애초에 나는 야만인이 아니던가. 이런 정치적인 화법과 말 속에 내포된 의미를 몰라도 어쩔 수 없다.

“단순 정찰이 목표니 그렇게 많은 병력은 필요 없습니다. 다만, 폐하께서 별동대로 움직이길 원하시니 저는 따로 움직이면서 적들에게 들키지 않도록 철저히 정찰을 완료하겠습니다.”

“나는 그 이상을 원하네.”

“원하시는 바를 말씀해 주신다면, 성심성의껏 따르겠습니다. 지난번에 말씀하신 대로 칼은 오직 주인의 의도대로 움직일 뿐입니다.”

그러니까 내게 뭘 시키고 싶으면 네가 직접 네 이름으로 제대로 된 명령을 내리라는 내 말에 황제는 피식 웃더니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칼리나 여변경백이 자네를 보낸 이유를 알겠군. 좋아. 자네가 얘기한 대로 기병을 2기 지원해줄 테니, 제대로 된 정찰을 부탁하겠네.”

원래 자기 땅 되찾으러 가는데 정찰할 이유가 뭐가 있겠는가. 굳이 정찰을 가지 않아도 어차피 드레스덴에 주둔 중인 영주와 병력의 숫자까지 다 알고 있는 마당에 정찰은 무슨.

“명을 받들겠습니다.”

황제의 가벼운 견제를 부드럽게 빠져나가자 사자공은 꽤 흥미롭다는 얼굴로 날 바라봤지만, 그뿐이었다.

반면 황제의 얼굴은 웃고 있지만, 아마 나에 대한 신뢰도는 폭락했을 것이다. 이대로 가면 나에 대한 황제의 평판만 까이는 불합리한 상황에 처할 수밖에 없다.

물론 만회할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많이 써먹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영주의 성향과 특성에 따라 성공 가능성이 갈리지만, 지금 상황에서 한번 써먹어 볼 만한 작전이 하나 있다.

뭐, 이 게임을 만 시간이 넘게 플레이하면서도 어릴 적의 이 친구와 대적해본 기억은 많지 않지만 사람이란 게 그리 쉽게 바뀌진 않을 테니 이번에도 충분히 먹힐 것이다.

* * *

현 드레스덴의 영주는 폴란드의 대공. 카지미에슈 정의공의 장남이자 피에스트 왕조의 피를 이은 례셰크였다.

그는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프리드리히가 병력을 일으켰다는 사실을 접했고, 안타깝게도 그 첫 목표가 이곳 드레스덴이라는 소식에 휘하의 귀족들을 전부 끌어모았다.

“다들 알겠지만, 프리드리히가 이곳을 탈환하기 위해 병력을 일으켰소. 그대들은 우리가 어떻게 대처해야 한다고 생각하시오?”

례셰크가 물었지만, 이곳에 모인 귀족들은 합죽이처럼 입을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실 정답 자체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적의 숫자는 전투병력만 5천 명이고 기타 보급 병과를 포함한 총 군세는 1만을 넘어가는 대군이었다. 반면 이쪽은 이것저것 다 끌어모으고 현역 남성들까지 징집해봤자 1천도 안 되는 숫자였다.

징집병을 빼면 제대로 훈련된 병력의 숫자는 채 삼백이 안 되니 이 숫자로 적의 공세를 막는 건 미친 짓이었다.

거기에 이곳은 원래 적의 영토였고 자신들에게 적대감을 가지고 있는 영지민들도 있었기에 무턱대고 징집하기도 힘들었다.

3살 난 어린아이가 봐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도망쳐야 한다는 결론을 낼 테지만, 자신에게 미운털이 박히기 싫었는지 그 누구도 먼저 나서서 퇴각을 입에 담지 못했다.

례셰크는 그 분위기를 읽지 못할 정도로 둔하지 않았기에 바로 자신의 동생에게 물었다.

“콘라드. 네 생각엔 우리가 어찌해야 한다고 보느냐?”

그의 물음에 콘라드는 기다렸다는 듯 답변했다.

“일단 현 상황을 현실적으로 짚어봐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곳 드레스덴은 본국인 폴란드에서 멀리 떨어져 있기에 전투가 장기화되면 지원을 받기가 힘듭니다.”

“미에즈코 공작에게 지원을 요청할 수도 있지 않나.”

“물론 근처에 미에즈코 공작이 있지만, 그와 저희의 사이는 좋지 않습니다. 또한, 그가 지원을 와준다고 해도 제시간에 도착할지는 미지수입니다.”

“적과 싸우지 말자는 건가?”

“그런 얘기가 아닙니다. 형님. 이득 볼 게 없는 전투를 할 필요가 없다는 거죠. 퇴각해서 힘을 보존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입니다.”

싸워선 안 되는 이유를 조목조목 논리적으로 이야기하며 퇴각을 입에 담자 이에 힘을 얻은 것인지 다른 귀족들도 퇴각을 입에 담았고 레셰크는 한숨을 쉬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 역시 이곳을 통째로 비운 채 퇴각해야 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이대로 싸워서 자신과 동생이 포로로 붙잡힌다면 아버지에게 폐가 될 것이다.

그 사실을 정의공도 알고 있었기에 감당할 수 없는 적이 쳐들어오면 그냥 내버려두고 퇴각하라고 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례셰크는 이대로 물러나자니 자존심이 상했다. 자신이 처음으로 얻은 영지고 단독으로 적을 맞이하는 상황이다.

아무리 적의 숫자가 많고 자신들이 열세라지만 이대로 물러나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방법이 없었기에 결국 철군을 명하려던 그 찰나 전령이 허겁지겁 달려오며 보고했다.

“급보입니다! 현재 적의 선발대가 마이센 마을을 급습하고 있다고 합니다!”

“마이센을?”

“적들이 생각보다 빠르게 왔군요. 서둘러 퇴각하시지요.”

“그렇습니다. 어쩌면 저 선발대는 저희의 발을 묶기 위해서 왔을지도 모릅니다.”

콘라드뿐 아니라 다른 귀족들도 례셰크에게 서둘러 퇴각할 것을 제안했는데 그도 그럴 게 마이센은 이곳에서 20km 정도 떨어져 있는 마을이다.

물론 이곳까지 오기 전에 라데보일 마을을 하나 거쳐야 하긴 하지만,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라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례셰크는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오히려 잘됐다. 어차피 쳐들어온 건 적의 선발대가 아니더냐. 그 정도는 처리할 시간이 있겠지.”

“형님. 저희를 끌어내려는 수작일지도 모릅니다. 애초에 저들에게 마을을 습격할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콘라드. 너도 드레스덴이 본래 작센 공국의 영토였다는 걸 알고 있지 않으냐. 아버지께서 미에즈코 공작과 대립하는 것처럼 바르바로사와 사자공이 대립하는 게 어제오늘 일이더냐.”

“그건 그렇습니다만….”

“가서 확인해 보고, 아니라면 그대로 퇴각하면 그만이다. 전령. 적의 본대는 어디쯤 와있지?”

“어제 보고받았을 때 츠비카우에 와있다고 했습니다.”

잠시 드레스덴과의 거리를 생각하던 례셰크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얘기했다.

“츠비카우라면 아무리 빨라도 일주일은 걸릴 거리다. 반면 우리는 병력의 숫자가 얼마 안 되는 데다 엘베강을 타고 이동할 테니 훨씬 더 빠르게 마이센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즉석에서 나온 작전치고 례셰크의 말은 나름대로 설득력이 있었다. 적의 본대는 일주일 정도 떨어진 위치에 있었고 그들의 덩치는 워낙 커서 이동에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자신들이 허를 찔러 적의 선발대를 치고 빠진다면, 충분히 이득을 거둘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애초에 이렇게 급습을 해봤자 별다른 피해를 못 줄지도 모르지만 중요한 건 적을 공격했다는 행위 그 자체였다.

만약 자신들이 이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물러난다면 미에즈코에게 정치적으로 공격받을 우려가 있었다.

군사적으로 판단이고 지랄이고 자신들이 싸워보지도 않고 퇴각하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으니까.

그 사실 때문에 콘라드를 비롯한 다른 귀족들도 쉽사리 반대하지 못했고, 결국 최종결정권자인 례셰크의 의견대로 병력들은 출정 준비를 할 수밖에 없었다.

* * *

힐데는 활활 타는 들판을 바라보며 떨떠름한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라그나르. 이게 맞습니까? 솔직히 저는 의문이 드는군요.”

“뭐가?”

“이 불을 지르는 행위 말입니다. 괜히 저희의 위치만 노출하는 게 아닙니까?”

마을에서 불이 나는 건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테지만, 이렇게 대규모로 불이 나는 건 열에 아홉은 도적이나 적군에 의한 습격 때문이다.

즉, 나는 우리가 마을을 습격한다는 사실을 대놓고 광고하는 것이다. 당연히 병력의 수가 적다면 해선 안 되는 금기 중의 금기였지만, 난 대놓고 당당하게 불을 지르고 있었다.

“넌 적이… 그러니까 례셰크가 이곳에 올 거라 생각해?”

“글쎄요. 제가 상대 영주에 대해 들어본 바가 없어서 정확히 판단하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이비 네 생각은?”

“예? 어…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떻게 판단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일반적이라면 굳이 오진 않을 것 같습니다.”

“그래? 하지만 례셰크는 올 거야.”

“아예 확신을 하는군요. 그럴만한 이유라도 있습니까?”

“례셰크의 성격도 그렇고, 상황도 그렇거든.”

례셰크는 아버지인 카지미에슈 정의공을 닮아 꽤 고결하면서도 대범하며 거침없는 성격이었다. 실제로 어려서부터 정의공을 따라 군대에 종군하기도 했으며 정의공 사후 미에즈코가 차지하고 있던 대공의 지위를 뺏어 올 정도로 능력 있는 사내였다.

거기에 드레스덴은 폴란드가 빼앗긴 했지만, 신성 제국에게 사방에서 포위된 형태의 땅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지키려면 얼마든지 지킬 수 있었지만, 정의공의 영지는 대부분 동쪽이었고 반면 미에즈코 공작의 땅은 서쪽이었다.

즉, 드레스덴은 폴란드에서도 저 서쪽 구석에 있는 땅인데 가장 가까이 있는 영주가 미에즈코였다. 이러다 보니 정의공은 이 땅을 미에즈코에게 줄 순 없는데 그렇다고 버려둘 수도 없는 상황에 처한 것이다.

결국, 이런 내부적인 문제로 인해 이 계륵 같은 땅은 례셰크에게 돌아가는 걸로 마무리되었고 프리드리히는 어린 례셰크가 땅을 맡고 있는 지금이 기회라 생각하고 병력을 일으킨 것이다.

“다른 나라의 내부 사정은 또 언제 조사하셨습니까?”

“빠르고 정확한 정보야말로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는 요소 아니겠어?”

“당신이 그런 말을 하니까 사람이 달라 보이는군요. 그나저나 안 오면 어쩔 겁니까?”

“안 오면 안 오는 대로 황제가 얘기한 ‘정찰’ 임무를 수행했다고 보고하면 그만이지.”

마을을 약탈하고 마을 사람들을 죽이며 초토화하는 건 사자공과 그를 따르는 귀족들은 물론이요 힐데와 이비의 호감도를 깎아 먹는 짓이었다.

하지만 마을 주민들 겁박해서 물건 좀 뺏고 집 한두 채 불태우는 것 정도는 그들도 이해하고 넘어갈 것이다. 어쨌거나 다 보는 앞에서 황제가 내게 이렇게 하라고 명령을 내렸으니까.

“그런데 딱히 그럴 필요가 없어 보이네.”

저 멀리 엘베강을 따라 배가 오고 있었다. 나는 배의 마스트 위에서 휘날리는 피아스트 가문의 깃발을 보며 미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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