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41화
나는 황제를 알현하기 위해 그의 집무실로 앞에 섰고 가볍게 심호흡을 했다. 그런 나를 보며 콘라드는 사무적으로 이야기했다.
“폐하를 영접하게 되면 묻는 것에만 답하시고 혹여 불손한 행동을 하게 된다면 그에 따른 책임을 물게 될 겁니다.”
“알겠습니다.”
“잘 아시겠지만, 이곳에서 문제가 생기면 라그나르 경을 추천해주신 칼리나 변경백께도 폐가 되는 일임을 명심해주시길.”
“방금 해주신 말씀, 가슴에 새기도록 하겠습니다.”
“좋습니다.”
콘라드는 내 확답에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더니 가볍게 문을 노크했고 황제의 허락이 떨어지자 나와 함께 방 안으로 들어갔다.
“폐하. 말씀하신 대로 라그나르 경을 모셔왔습니다.”
“고생했네. 나가보게.”
콘라드는 황제에게 허리 숙여 인사한 뒤 날 쳐다보며 눈으로 문제를 일으키지 말라 당부한 뒤 밖으로 나갔다.
“여독도 채 안 풀렸을 텐데 바로 불러서 미안하네. 지저분하지만 일단 앉게.”
황제는 와인병을 따며 내 잔을 채워주더니 자신은 병나발을 불며 와인을 벌컥벌컥 들이킨 뒤 입가를 훔치며 내 앞에 마주 앉았다.
“그래. 자네 이름이 라그나르라고 했던가?”
“그렇습니다. 황제 폐하.”
“혹시 이 편지 안의 내용을 알고 있는가?”
“저는 알지 못합니다. 그저 칼리나 여변경백이 폐하께 전달하라 했고 그 명을 충실히 이행했을 뿐입니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황제는 검지로 탁자를 내려치며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이내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렴 어떤가. 솔직히 자네가 여기 편지에 쓰인 것처럼 실력이 있는지 어쩐지 나는 알지 못하네. 중요한 건 칼리나 변경백이 내 군사 작전의 소집 명령에 응했다는 거지.”
원 역사에서 당대를 호령했던 황제답게 젊은데도 불구하고 바로 요점을 캐치해내는 걸 보면 능력 자체는 확실한 것 같다.
“자네 생각은 어떤가?”
“칼이 딴생각을 품으면 주인을 베는 법입니다. 뭐든지 시켜만 주신다면 해내겠습니다.”
“노력이 아니라 해내겠다라… 태도는 마음에 드는군.”
황제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미소 짓더니 소파의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말을 이었다.
“일단 난 자네를 써볼 참이네. 자네가 낡아빠진 검인지, 그저 그런 검인지, 세상에 둘도 없을 명검인지는 휘둘러봐야 알지 않겠는가.”
“기대하는 것 이상을 보여드리겠습니다.”
“그 자신감과 배짱도 마음에 쏙 드는군. 왜 칼리나 변경백이 논란이 터질 걸 알면서도 그대를 내게 보냈는지 알 것 같구만.”
딱히 내게 답을 요구하지 않았기에 나는 침묵으로 일관했고 황제는 원하는 대답을 모두 들었는지 손을 내저으며 내게 퇴실을 명했다.
“알았으니 그만 나가보게.”
* * *
내가 합류한 뒤로 일주일이 더 지났다. 그동안 뉘른베르크의 궁성에는 나에 대한 소문이 쉬지 않고 떠돌았으며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호기심 어린 눈초리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나를 바라보는 이들은 3가지 부류로 나눠볼 수 있었는데, 웃기게도 셋 다 나에 대한 스탠스가 전부 달랐다.
먼저 황제를 지지하는 쪽에서는 당사자인 황제가 별다른 말 없이 만족하고 있으니 일단은 지켜보자는 느낌이었다.
중립 쪽에서는 나름 큰 사건이라 생각을 한 것 같지만, 정작 당사자인 칼리나가 온 것도 아니라서 그런지 생각보다 별 반응이 없었다.
만약 황제가 이를 칼리나의 굴복으로 받아들이고 다른 영주나 귀족들을 압박했다면 문제가 됐겠지만 그건 아니었기에 그들 역시 일단은 지켜보자는 반응이었다.
반면 하인리히 사자공의 파벌이나 반황제파, 몇몇 선제후들은 칼리나가 이번에 노바라 사태에 개입한 것에 대해 황제에게 관여하지 말아 달라는 의도로 파악했다.
현 황제가 황권을 강화하려 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제후들은 없었고, 남부의 노바라 사태는 황제가 개입하려고 하면 얼마든지 개입할 수 있었다.
나 역시 칼리나라는 인맥에 대해 알기 전까지는 황제에게 도우우우우움! 이라며 헬프 콜을 외침과 동시에 그와의 연결고리를 만들 생각이었으니까.
그런 관점에서 바라볼 때 반황제파에서 도출해낼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결론은 이거였다.
‘칼리나 여변경백은 노바라의 사태에 대해서 황제가 개입하길 원치 않는다. 하지만 이대로 입을 싹 씻을 순 없기에 이에 대한 대가로 황제의 소집에 응했다.’
‘하지만 지금껏 칼리나는 중립적인 스탠스를 취하고 있었고 그 때문에 본인이나 용기사단을 보내게 되면 정치적으로 큰 파장이 있을 수밖에 없다.’
‘칼리나가 중립을 표방하는 만큼 균형이 흐트러지는 것을 원치 않기에 구색만 맞추고 체면치레만 할 수 있는 야만인 용병대장을 보낸 것이다.’
‘이는 그 야만인이 끌고 온 병력이 채 30명이 안 되고 제대로 훈련된 기병이 하나도 없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따라서 지금까지의 균형과 관계가 흔들리는 일은 없을 것이며 크게 신경 쓸 일은 아니다.’
각자 나에 대한 평가는 달랐지만 결국 저 세 그룹은 ‘나’에 대해서 이목을 집중하는 게 아니라 내 뒤에 있을 ‘칼리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굳이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용병은 실적으로 얘기하는 법이었고 이 전쟁이 끝나게 되면 모두의 뇌리에 라그나르의 이름이 새겨질 테니까.
* * *
추수가 끝난 10월 무렵. 하인리히 사자공까지 원정군에 합류하자 황제는 무려 5천에 달하는 대병력을 이끌고 북쪽으로 진군했다.
황제와 제국군의 첫 목표는 기존에 잃어버렸던 땅인 드레스덴 지역이었다.
“작전 회의는 어땠습니까? 작전에 대한 개요나 이동 루트는 들으셨습니까?”
힐데는 정화교단의 정복을 입고 있었는데, 워낙 미인인 데다 정화교단의 사제는 드문 편이었기에 근처의 시선이 전부 그녀에게 쏠리고 있었다.
하지만 힐데는 익숙한지 별다른 신경도 쓰지 않은 채 내게 딱 붙어 물었고 난 잠시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음… 뭐, 이미 출진했으니까 상관없겠지. 애초에 비밀이라고 할 것도 아니고.”
현대 시대에는 당연히 군대의 이동 경로나 군사 규모, 목적지, 작전 당일 등이 군사 기밀이지만 중세는 조금 사정이 달랐다.
먼저, 군사 규모.
이건 당연히 영지 여기저기 퍼져있는 영주들의 병력이 모여야 하기 때문에 병신이 아닌 이상 집결지만 확인하고 있어도 누구나 파악할 수 있다.
이동 경로는 당연히 가도를 따라 이동할 수밖에 없다. 네다섯 명이 모여서 산책가는 것도 아니고 천 단위의 병력이 보급품을 끌고 이동하는데 산길을 택할 수는 없잖은가.
알프스를 넘은 한니발이나 등애, 마속 같은 등산 매니아가 아니고서야 제정신이라면 멀쩡한 가도를 버리고 이상한 길을 택하진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작전 개시일이나 목적지도 첩자가 직무유기만 하지 않는다면 미리 알고서 대비하는 게 가능했다. 물론 이러한 점들에도 불구하고 적들이 대비하기 전에 기습적으로 적을 공격한 사례가 없는 건 아니었다.
동로마의 황제였던 이사키오스가 불가리아를 공격할 때 한겨울에 1만 이상의 병사를 끌고 발칸산맥을 넘어갔던 적이 있었다.
실제로 불가리아의 차르였던 이반 아센은 성 앞에 나타난 동로마군을 보고 깜짝 놀랐다는 기록이 있는데 그것과는 별개로 이사키오스는 전투에서 철저하게 발렸다.
이건 이사키오스가 싸우기만 하면 발리는 무능력한 지휘관이었다는 건 차치하고서라도 한겨울에, 제대로 된 보급도 없이, 그 험준하다는 발칸산맥을 넘어서 발생한 일이었다.
이 사례에서 알 수 있듯 싸우기 좋은 계절에, 보급까지 끌고, 가도를 통해 이동하는 게 일반적이었고 그러다 보니 적이든 아군이든 공격을 할 시기가 정해져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게 전쟁의 상식이었는데 이 고정관념을 깨버린 게 바로 몽골군이었다. 하루에 100km도 넘게 행군하는 몽골의 미친 기동전에, 정신 나간 활 솜씨와 스웜 전술에 정신줄 놓고 처맞다 보니 각개격파 당해서 발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다.
아무튼, 말이 조금 샜는데 내가 지금부터 힐데에게 이야기할 정보들은 딱히 군사기밀이 아니라는 말이다.
“어. 칼리나를 대신해서 그런지 작전회의에서 나름 발언권도 주더라.”
물론 따로 발언은 안 하고 그냥 듣고만 있었다. 회사에 막 입사한 신입이 ‘아 그거 그렇게 하는 거 아닌데.’, ‘아, 차라리 내가 하는 게 더 나을 것 같은데.’ 이런 식으로 얘기하면 좋아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결국, 귀족들도 사람이고 권력을 잡기 위해선 단순히 명성과 명예를 쌓는 데서 그치는 게 아니라 귀족들을 내 편으로 끌어들여야 했다.
모두와 친해질 수는 없어도 모두와 적대할 순 없는 노릇 아니던가.
“대강 정리해보자면 일단 드레스덴 지역으로 동진해서 그곳을 점령한 뒤 남부 실레지아 지역의 브로츠와프를 점령하는 선에서 끝마칠 것 같아.”
내가 지도를 보여주며 얘기하자 힐데는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드레스덴이야 수복하는 영역이니 그렇다고 쳐도 고작 브로츠와프 하나 점령하고 끝입니까? 이렇게 대규모 병력을 끌고 가야 할 정도로 브로츠와프가 가치 있는 땅인지는 모르겠군요.”
“봉건 의무가 40일밖에 안 되니 별수 없지. 그렇다고 황제 혼자서 싸울 수 없으니 현실과 타협할 수밖에.”
물론 지난 전쟁에서 폴란드의 수도였던 크라쿠프까지 진군했던 것에 비하면 볼품없고 별 볼 일 없는 전쟁이었지만, 이게 지금 황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이 전쟁이 시작될 수 있던 것도 하인리히 사자공이 황제와 적당히 타협했기 때문이었다.
본래 하인리히 사자공은 영토 확장에 온 힘을 쏟았는데 수많은 이민족과 덴마크를 공격하며 그들을 엘베강 이북으로 쫓아냈고 그 결과로 얻은 게 드레스덴을 비롯한 여러 영토였다.
문제는 황제가 폴란드를 조진다고 쳐들어갔다가 카지미에슈 정의공에게 영혼까지 털렸다는 점이었다.
거기까지면 말도 안 하련만 퇴각하면서 드레스덴까지 폴란드에게 넘어가게 됐으니 사자공 입장에선 피가 거꾸로 솟을만한 일이었다.
하지만 고작 이걸로 황제와 대적하기에는 명분이 모자랐고 중간에 발을 뺀 자신의 잘못도 있었기에 구석에서 분노를 삭일 수밖에 없었다.
황제는 황제대로 적의 궤멸이 코앞이었는데 자신의 힘이 커질까 두려워해 발을 뺐던 사자공에게 이를 갈고 있었다.
그렇게 서로 으르렁거리며 당장에라도 내전이 벌어질 정도로 상황이 험악하게 흘러갔지만, 이들은 극적으로 타협안을 도출해냈다.
하인리히 사자공은 드레스덴의 수복을, 황제는 폴란드에게 무너졌던 자신의 자존심을 세우고 싶어 했다. 각자 원하는 바는 다르지만, 그 원하는 바를 실현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전쟁뿐이었다.
그 때문에 황제는 드레스덴의 수복을 도와주고 사자공은 브로츠와프 공략을 도와주기로 합의했고 이렇게 출진할 수 있었다는 얘기다.
“전쟁이 길어지진 않아서 다행이군요.”
“황제도 파종 시기를 놓칠 순 없으니 봄이 오기 전에는 돌아갈 수 있을 거야.”
“전쟁이 끝나면 다시 밀라노로 돌아가실 겁니까?”
“글쎄, 그건 조금 생각해봐야 할 문제인 것 같은데….”
내가 힐데와 전쟁이 끝난 후의 미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을 때 황제의 사자가 말을 몰아서 내게 달려왔다.
“라그나르 경. 폐하께서 찾으십니다.”
아직 적진에 도착하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날 찾는 황제의 모습에 왠지 불길한 느낌이 들었지만 미천한 야만인인 나는 황제의 부름에 응할 수밖에 없었다.
“잘 와줬네. 자네에게 임무를 하나 맡기려는데 괜찮겠나?”
“물론입니다. 폐하.”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황제는 내게 좆같은 임무를 떠넘겼다.
“드레스덴에 대한 정찰을 좀 부탁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