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 속 바이킹이 되었다-40화 (40/205)

▣ 040화

내 자기소개가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응접실 내부의 싸늘한 공기는 가시질 않았다.

게임 속에서야 내가 실제 분위기를 느끼는 것도 아니고 기껏해야 지문으로 몇 문장 나오고 말았기에 그러려니 했는데 이 얼음장 같은 분위기를 그대로 느끼려니 죽을 맛이었다.

“크흠, 그러니까… 그대가… 어… 칼리나 여변경백이 보낸 지원 병력이라는 거군. 맞나?”

황제는 당황했는지 드물게 말을 더듬으며 물었고 나는 여전히 무릎을 꿇은 채로 답했다.

“그렇습니다. 폐하. 지혜롭고 강인하며 제국에 대한 충심으로 가득 찬 칼리나 여변경백은 제 군대를 이끌고 위대한 황제 폐하의 군대에 합류해 적을 분쇄하라 명하셨습니다.”

“…그렇구만. 내, 칼리나 여변경백의 정성과 충심은 아주 자~알 알겠네. 이만 물러가게.”

“예, 폐하. 하옵고 칼리나 여변경백이 폐하께 편지를 전해달라 하셨습니다. 괜찮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 편지를 전해드려도 되겠습니까?”

황제의 안전에서 품속에 손을 집어넣는다든가 하면 주변에 있는 경비병들이 기겁하며 칼을 뽑아 들 게 뻔했기에 나는 미리 양해를 구했고 황제는 인상을 쓰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허하노라.”

나는 주변의 경비병들이 내 손동작을 확인할 수 있도록 천천히, 아주 천천히 품에서 편지를 꺼냈고 그대로 바쳤다.

물론 황제가 직접 가져가는 일은 없었고 근처에 서 있던 호위병이 편지를 한 번 확인한 뒤 황제에게 건네주었다.

황제는 편지를 봉인하는 인장을 확인하고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내게 이야기했다.

“편지는 확실히 받았네. 멀리서 오느라 피곤할 텐데 아직 집합 시일까진 시간이 좀 남아있으니 이곳에서 여독을 풀고 있게나. 궁정백!”

“예. 폐하.”

“저 친구를 안내해주게.”

“명을 받들겠습니다. 따라오시지요.”

나는 미련 없이 떠나는 황제를 굳이 붙잡지 않았다. 여기서 굳이 편지를 읽어봐라 어쩌라 할 것도 없이 시간이 흐르면 황제가 나를 부를 것이다.

지금의 나는 야만인 용병단장에 불과하고 이곳은 황제의 영역이다. 그러니 지금은 그냥 조용히 시키는 대로 행동해야 할 때다.

“이곳에서 머무르시면 됩니다. 아무래도 본관보다는 별채에 머무르시는 게 편하시겠지요?”

그 말대로다. 내가 게임의 고인물이라지만 황실의 예법 따위를 알고 있는 것도 아니고 이곳의 사람들에겐 야만인으로 비칠 테니 조용히 구석에 있는 게 서로 편하다.

어차피 내 가치는 전쟁터에서 드러날 테니 지금 와서 관종 짓을 할 필요도 없고 이비의 문제도 있으니 그의 호의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큰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콘라드 경. 경께서 베푸신 호의와 친절을 가슴에 새기고 있겠습니다.”

내 말에 콘라드는 재밌다는 얼굴로 날 바라보며 물었다.

“흠, 혹시 제가 라그나르 경에게 자기소개를 했던가요?”

“비록 제가 미천한 야만인이라지만 호엔슈타우펜이 낳은 희대의 천재이자 라인팔츠의 지배자이며 제국의 궁정백을 맡고 계시는 분을 어찌 모르겠습니까.”

“하하하, 스스로를 야만인이라 소개한 것치고는 입이 아주 매끄러우신 분이군요.”

그는 호탕하게 웃더니 이내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내게 인사했다.

“아직 여독이 풀리지 않으셨을 텐데 편히 쉬고 계십시오. 곧 폐하께서 부르실 겁니다.”

뭐, 당연히 내가 칼리나의 의지를 받들어 이곳에 왔으니 한 번쯤은 만나보겠지.

하지만 칼리나가 아닌 내가 왔다고 그렇게 대놓고 실망스러운 표정을 짓는 걸 보면 아직 바르바로사도 젊은 애송이에 불과했다.

“정중한 환대에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난 그 속내를 감춘 채 콘라드에게 정중히 답례했다. 황궁은 벽에도 귀가 있다고 하지 않던가.

이곳에서 내가 말하고 행동하는 것 전부가 황제의 귀에 들어갈 테니 혀를 잘 놀려야 한다.

콘라드는 그런 날 보며 작게 미소 지은 뒤 발걸음을 돌렸고 나는 피로도 풀 겸 방을 열고 들어갔는데 그곳에는 이미 힐데와 이비가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뒤 소파에 앉아 있었다.

나 역시 조금 지쳐있었기에 겉옷을 벗어서 침대에 내던지며 이비에게 다가갔다.

“이비, 몸은 좀 괜찮아?”

이븐 시나는 뉘른베르크에 들어오면서 쓰고 있던 가면 때문에 경비대와 한바탕 곤욕을 치렀는데, 경비대장에게 그녀의 얼굴을 보여주자 정중한 사과와 함께 프리패스로 통과할 수 있었다.

“괜찮습니다. 늘상 있는 일이었으니까요. 그저, 저 때문에 주군께 폐를 끼치는 게 아닐까 걱정될 따름입니다.”

“애초에 그렇게 생각했다면 널 데리고 다니지도 않았겠지.”

확실히 그녀는 장점과 단점이 명확한 동료였다. 사람이 사람을 판단할 때 외모와 첫인상을 보는 건 당연한 거였고 그녀의 외모는 다른 동료와의 불화를 일으키는 원인이 됐으니까.

하지만 힐데는 고작 그런 걸로 내게 불만을 이야기할 타입도 아니고 나 역시 그녀의 원판을 알고 있어서 그런지 별로 불편하진 않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이 때문에 이비의 컨디션이나 상태가 안 좋아지면 곤란했기에 나는 힐데에게 그녀를 부탁했다.

게임에서야 스탯으로 모든 걸 설명할 수 있었지만, 이건 현실이었고 스탯창으로는 볼 수 없는 것들이 존재했다.

동료 중에 음유시인이나 광대가 있었다면 적당히 멘탈케어가 됐을 테지만, 그게 아니었기에 나는 단장으로서 그녀가 스트레스를 받지 않게 해줄 필요가 있었다.

“힐데. 너도 피곤하겠지만 이비랑 같은 방에 머물면서 좀 챙겨줘.”

“그냥 둘 다 여기에 있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적어도 방 안까지 들어와서 건드리진 않을 테니까요.”

“나야 상관없지만 별로 좋은 시선은 못 받을 텐데….”

이게 게임이긴 하지만, 중세를 배경으로 만들어졌기에 대부분의 인물들은 성에 대해 꽤 보수적이었다.

정화교단의 사제인 힐데가 나 같은 야만인과 한방에서 지낸다는 얘기가 나돌아서 그녀에게 좋을 건 하나도 없었다. 한 교단의 성녀가 되기 위해선 신앙심도 중요했지만, 평판 역시 중요하니까.

“추후 성녀가 되는 데 문제가 있을지도 몰라.”

내 말에 그녀는 피식 웃으며 날 도발하듯 이야기했다.

“당신이 그럴 배짱이나 있습니까?”

그녀의 말에 나는 말문이 막혔고 그녀는 내가 벗어 던진 겉옷을 정리하며 말을 이었다.

“애초에 제가 당신과 몇 년을 같이 살았는지 아십니까? 교단도 그에 대해선 잘 알고 있으니 인제 와서 그걸 문제 삼진 않을 겁니다.”

“네가 그렇다면야….”

“그리고 전 남의 시선 따윈 신경 쓰지 않습니다. 가족과 함께 있을 수만 있다면 성녀건 뭐건, 그런 게 뭐가 중요하겠습니까.”

“어… 음.”

원래 힐데는 처음 등장부터 ‘빙옌의 성녀 힐데가르트’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등장하기에 기본적으로 성녀라는 직위에 어느 정도 욕망을 가지고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닌가 보다.

애초에 그녀에게는 광신도라는 타이틀이 붙어있기도 하고…….

“잠깐만.”

“예?”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미심쩍은 표정을 짓는 힐데의 시선을 애써 피하며 나는 그녀의 상태창을 띄웠다.

이름 : 빙옌의 힐데가르트

소속 : 정화교단, 레이븐 용병단의 전투 사제

상태 : 피곤, 지침

기벽 : 독설, 냉소, 독점욕, 끝없는 욕망 (추후 해제), (추후 해제)

체력 : 난이도로 인한 열람 제한

스탯 : 난이도로 인한 열람 제한

[특성]

광신도 : 광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는 존재입니다.

지식인 : 글을 읽고 쓸 줄 알며 교양이 있습니다.

강인한 정신력 : 강인한 멘탈의 소유자입니다. 어지간한 일로 흔들리지 않습니다.

넘치는 신성력(new!) : 엄청난 양의 신성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전투광(new!) : 전투에 돌입하면 눈이 돌아갑니다.

아니, 왜 이상한 특성들이 달라붙은 거지? 그보다 독점욕? 끝없는 욕망? 저 기벽들은 뭐지?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저런 건 못 봤던 것 같은데?

아니 애초에 저기 저 광신도라는 거… 혹시 나에 대한 신앙심을 말하는 건 아니겠지?

“라그나르?”

날 부르는 그녀의 목소리에 왠지 모르게 오한이 들었지만, 난 애써 태연한 얼굴로 대답했다.

“왜?”

“무슨 생각에 빠져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밖에 궁정백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뜬금없는 그녀의 대답에 헐레벌떡 문을 열자 과연 문 앞에는 헤어진 지 삼십 분도 안 된 콘라드가 멋쩍은 표정으로 내 앞에 서 있었다.

“편히 쉬시는데 죄송합니다. 라그나르 경. 다른 게 아니라, 폐하께서 지금 당장 라그나르 경과 만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 * *

“칼리나. 대체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군.”

얼굴을 몇 번 보진 않았지만, 그녀는 여자의 몸에 용과 같은 기운을 지닌 여성이었다.

가문이 몰락했는데도 불구하고 자신의 손으로 재건하는 것도 모자라 그 이전보다 더 큰 영지를 본인의 손으로 쟁취했다.

그뿐이면 그저 운이라 치부할 수 있었겠지만, 그녀는 라틴 제국의 보니파시오가 대규모 침공을 했을 때도 훌륭하게 막아낼 뿐 아니라 추적해서 전멸시키기까지 했으니 그녀의 능력은 의심할 바가 아니었다.

그 능력이 탐이 나 자신의 아들과 혼인을 시키려 했지만, 그녀는 단칼에 거절했다. 솔직히 그녀가 당장 승낙하지 않으리라는 건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고민을 해본다거나, 아직은 결혼에 대해 생각하고 있지 않다거나, 영지의 사정이 안정되어 있지 않다거나 등등 일말의 여지를 남겨놓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녀는 말 그대로 ‘싫다’면서 자신의 혼담을 거절했다.

“뭐, 편지를 보면 알 수 있겠지.”

바르바로사는 기대와 궁금함이 뒤섞인 얼굴로 봉인을 해제한 뒤 편지를 펼쳤다.

[신성 제국의 주인이자 정당한 지배자인 프리드리히 바르바로사 황제 폐하에게.

폐하께서 이 편지를 펼치실 때쯤이면 제가 고용한 용병단장을 만나보셨겠군요. 그를 보고 폐하께서 처음 느끼시는 감정은 당황스러움과 분노일 것입니다.

어쩌면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을 터트릴지도 모르고 그를 보낸 제게 분노를 느끼실지 모르겠군요.

하지만 제 목숨과 모든 것을 걸고 단언컨대 그는 저나 제 휘하의 용기사단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용맹한 전사이며 그 혼자서 전쟁을 뒤집을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난 인재입니다.

그러니 폐하께 바라옵건대 그에게 전투의 선봉에 설 수 있는 영광과 승리를 거두었을 때 얻게 될 명예와 명성을 누릴 수 있는 영예를 약속해 주십시오.

그리해주신다면 저는 폐하의 하해와 같은 은혜에 감동해 적어도 폐하의 앞길을 방해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폐하께서 이 미천한 여인의 소원을 들어주실 거라 간절히 빌면서 이만 편지를 줄이겠습니다.

황제 폐하의 위대한 업적과 명예로움이 전설로 남기를 기원하며.

밀라노와 투스카니, 카노사의 정당한 지배자. 칼리나 디 카노사가]

“어처구니가 없군.”

칼리나 여변경백이 누군가를 이렇게 높게 평가한 적이 있단 말인가? 그녀의 눈에는 자신이나 북부의 하인리히 사자공 역시 차지 않을 터였다.

그런 그녀가 이렇게 극찬을 하는 걸 보니 자신도 모르게 그 야만인 용병단장에게 관심이 가기 시작했다.

“혹시 저 사내가 남부에서 칼리나를 도왔던 사내란 말인가?”

그렇게 생각하면 모든 아귀가 딱딱 맞아떨어진다. 그게 아니고서야 칼리나가 보여주는 믿음과 신뢰를 설명할 수가 없을 테니까.

“뭐, 만나보면 알게 되겠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