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38화
펠릭스가 성으로 복귀한 뒤 노바라는 레이디 칼리나의 이름으로 교통정리가 시작되었다.
우선 볼프강의 장남은 볼프강 암살 및 펠릭스의 암살미수에 대한 죄로 처형당했고 그를 따르던 이들은 각 경중에 따라 징계를 받고 와해됐으며, 펠릭스는 노바라에 있는 모든 이들의 지지를 받으며 백작에 올랐다.
그런 그를 레비아탄이 조건 없이 후원하기로 했으며, 펠릭스 역시 지금까지와 다름없이 레비아탄 상단에 대한 막대한 지원을 약속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을 막후에서 조종한 나는 펠릭스와 칼리나에게 막대한 양의 물자와 말, 갑옷, 무기 등을 지원받았다.
원래는 병력들까지 지원받고 싶었지만, 이런 식으로 병력을 지원받게 되면 용병으로 편입되는 것이기에 플레이어에 대한 충성도가 폭락한다.
새롭게 유입된 병력들은 칼리나가 아닌, 야만인 용병대장에게 소속되어야 한다는 것에 대한 불만을 가지게 되고 기존의 병력들은 새롭게 편입된 병력들과 마찰이 일어나게 된다.
그렇게 충성도가 하락하게 되면 병력들의 전투력 감소는 물론이고 명령계통에도 문제가 생기게 되어 최후에는 플레이어를 떠나버린다.
설사 어찌어찌 이런 페널티들을 감안하고 끌어안는다고 해도 용병은 승급이 불가능하다. 장창병으로 영입했으면 죽을 때까지 장창병인 셈이다.
그 때문에 단기적으로는 강력한 병력들을 끌어모을 수 있을지 몰라도 미래를 보자면 용병의 영입은 손해다.
물론, 100% 게임이 아닌 만큼 어떻게 적용될지 모르지만, 굳이 도박을 하고 싶진 않다. 거기에 나는 아직까지 기병을 운용할만한 여력이 없다.
칼리나의 도움을 받는다면 돈 문제가 해결될지도 모르지만, 그래서야 그녀가 신성 제국 남부에서 쥐고 있는 패권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
그녀에게 빨대 꽂아서 기둥서방 되느니 차라리 필요할 때 지금처럼 한 번씩 도움을 받는 게 나을 것이다. 신성 제국 남부의 변경백이자 제국의 수호신이라는 뒷배경은 허투루 볼 게 아니니까.
“그나마 건진 게 이건가?”
― 칭호 ‘아싸씨노!’를 획득하셨습니다.
― 칭호 ‘비선 실세’를 획득하셨습니다.
“상태창.”
<상태창>
이름 : 라그나르 로드브로크
소속 : 레이븐 용병단의 용병단장
상태 : 활력
기벽 : 겨드랑이 애호
체력 : 난이도로 인한 열람 제한
스탯 : 난이도로 인한 열람 제한
<특성>
조금 무식한 야만인 : 조금이지만 글을 읽을 줄은 압니다.(이 특성은 글을 완벽히 배우게 되면 사라집니다.)
바이킹식 외교 : 바이킹의 외교는 지극히 합리적입니다. 네 것도 내 것, 내 것도 내 것 – 약탈과 관련된 행동 시 전리품 30% 추가 획득.
꺾을 수 없는 의지 : 당신의 의지는 강철과도 같습니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어냅니다.
냉철한 사냥꾼 : 당신은 어떤 상황에서도 냉정한 판단력을 내릴 수 있습니다.
약자멸시 : 당신은 약자에게 지독한 혐오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약자만 보면 투지가 끓어오르며 약자를 상대로 전투력이 엄청나게 증가합니다.
양민학살 : 당신은 약자를 괴롭히는 데 도가 텄습니다. 약자들과 전투를 할 시 사기가 일정한 수치 이상 떨어지지 않으며 적군의 사기를 떨어뜨리고 도망칠 확률을 올려줍니다.
요사스러운 혀 : 당신의 뱀과 같은 교활하고 달콤한 언변으로 남을 설득할 확률이 늘어납니다.
도끼 살인마 : 도끼를 다루는 실력이 늘어나며 치명적인 일격을 가할 확률이 늘어납니다.
아싸씨노!(new!) : 귀족을 암살하고 탈출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기습 시 크리티컬 확률 증가.
비선 실세(new!) : 어둠 속에서 판을 쥐고 흔드는 음모와 계략의 대가입니다. 적을 상대로 계략을 펼칠 시 성공확률이 소폭 증가하며 음모를 꾸밀 시 중립세력의 동조율이 소폭 증가합니다.
“개판이네.”
원래 모든 캐릭터의 최종진화는 잡탕이라지만, 초반부터 이러면 별로 좋은 징조는 아니다.
물론 없는 것보다야 낫고 맨손부터 시작한 게 아니기는 하지만 효율적인 육성과 추후 진로를 위해선 하나에 특화된 캐릭터가 더 좋다.
“일단 바이킹 애들부터 모아야 할 거 같은데… 하.”
특성 자체에 바이킹과 연관된 것들은 없지만 아마 바이킹들을 수하로 얻게 되면 특성들이 새롭게 생겨날 것이다. 지금껏 게임에서 각 민족 및 국가와 관련된 영웅들이 새롭게 추가될 때는 늘 그래 왔으니까.
가령 폴란드―리투아니아를 배경으로 한 영웅인 얀 3세 소비에스키를 플레이할 시 기병을 윙드 후사르로 진화시킬 수 있으며 오스만과 전투 시 ‘레흐스탄의 사자’ 같은 특성이 개화된다.
바이킹들의 왕이며 죽음으로서 이교도 대군세를 이끌었던 라그나르라면 분명 바이킹들을 이끌었을 때 그 잠재능력을 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현재 내가 있는 신성 제국에서 바이킹들이 살았다는 북부로 가려면 거진 2달은 북상해야 하는데 솔직히 말해서 북부에는 아무것도 없다. 괜히 바이킹들이 먹을 것과 정착할 땅을 찾아 남부로 내려왔던 게 아니다.
뭐가 문제냐고 할 수 있는데 북부에 올라간다는 건 사막에 가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사시사철 한파가 몰아치고 병력들의 사기는 언제나 개판이 나 있으며, 식량을 보관하기도 쉽지 않고 전투력은 늘 급감해있다.
그 와중에 설원 도적놈들은 허구한 날 습격을 해대고, 대도시는커녕 인구 2천 이상의 소도시를 찾는 것조차 힘들었으며 바닷길은 해적들이 장악하고 있었고 심심하면 늑대와 불곰들을 마주치는 게 북부의 일상이었다.
괜히 인간병기 소리 듣는 바이킹들이 ‘힝힝, 이렇게는 더 못살아! 내려갈 거야!’ 하면서 남하한 게 아니다.
그렇다고 마냥 북부가 병신같은 땅은 아닌 게 시간이 흐르며 추위가 조금 가시고 농업혁명으로 북부의 인구도 늘어나면 해적들이 소탕되면서 무역의 중심지로 변모한다.
그게 세계사에도 이름을 널리 남긴 한자동맹이고 당연히 이곳에도 구현되어 있긴 하지만, 아직 한자동맹이 나오려면 한참 있어야 했다.
그 때문에 이대로 북부로 올라가는 게 맞는 선택인가라는 고민에 빠져있을 때 칼리나가 강아지처럼 생글거리며 내게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건넸다.
“라그나르. 혹시 어디로 가서 뭘 할지 정했어?”
“아니, 아직 고민 중이야. 차라리 남부의 아이유브 왕조로 가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은데.”
아이유브는 아직 누르 앗 딘이 다스리고 있을 것이다. 다만, 누르 앗 딘 사후 대인배로 유명한 살라흐 앗 딘이 정권을 찬탈하게 된다.
그러니 떡상할 게 확실한 살라딘을 일찌감치 도와 아이유브의 술탄 자리에 오르는 것을 도와준다면 명성은 물론이요 남부에서 큰 영향력을 차지할 수 있을 것이다.
심지어 난 기독교인도 아니니 이교도라고 까이긴 할 테지만 그 정도가 심하진 않을 것이다. 더군다나 살라딘이 그런 것 가지고 차별할 위인도 아니고.
“그것도 나쁜 선택은 아니지만, 그것보단 내 부탁을 들어주는 게 어때?”
“부탁? 일단 들어보고.”
“별건 아니고, 얼마 전 제국 북부의 경계지대에서 사소한 다툼이 발생했어.”
“북부면 폴란드 왕국인가?”
폴란드는 신성 제국과 경계를 맞대고 있긴 하지만 그 영역이 그렇게 길지는 않을 텐데….
“맞아. 솔직히 계기는 엄청 사소했어. 원래부터 사이가 조금 안 좋아서 티격태격하긴 했는데 이번에 우리 쪽에서 그쪽 마을에서 방목해놓은 양들을 훔쳐 왔거든.”
“거 참, 그래서?”
“당연히 상대측에선 눈깔 뒤집혀서 쫓아왔고 고함치며 말다툼하다가 유혈사태로 번진 거야.”
“어이가 없네. 근데 그래도 대강 주동자 처벌하고 미안하다 사과하면서 적당히 보상해주면 끝나는 문제 아니야?”
“그렇게 안 했으니까 문제가 됐겠지?”
그래. 맞는 말이다. 서로 말이 통하고 상호 간에 품격있게 예의를 갖춘다면 전쟁은커녕 다툼조차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대강 알 것 같으니까 요점만 얘기해봐.”
“사실 거기까지만 해도 별다른 문제는 없었어. 근데 우리 위대하고도 훌륭하신 황제 폐하께서 황제의 권위를 바로잡고 싶었나 봐?”
“폴란드가 바르바로사를 개 좆으로 보긴 했는데… 설마 기강 잡겠다고 전쟁이라도 하겠대?”
내가 알고 있는 설정이 맞다면 과거 바르바로사는 황제에 오르자마자 병력을 동원해서 폴란드를 침략했다.
그는 그 야심만큼 뛰어난 지휘관이었기에 항복을 받아낼 뻔했지만, 끝내 폴란드의 저력을 이겨내지 못했다. 결국 그는 점령했던 땅들을 다 뱉어내고 한참이나 퇴각한 뒤 내・외부의 압박에 못 이겨 화의를 해야 했다.
이 굴욕적인 패배로 인해 바르바로사는 폴란드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정도로 뼈에 사무친 원한을 가지고 있었으며, 폴란드는 바르바로사를 ‘전쟁이 뭔지도 모르는 코흘리개 애송이’라며 병신 취급하고 있었다.
다만, 바르바로사를 위해서 조금 쉴드를 쳐주자면 아군이었던 사자공이 통수를 친 것에 가까운 데다 생각지도 못한 장마로 인해 보급이 지연되면서 패배한 거긴 했지만, 어쨌든 승부의 세계는 냉혹한 법이었다.
그렇게 하루하루 복수의 칼날을 갈고 있던 와중에 폴란드와 시비가 터졌으니 바르바로사가 이걸 그냥 넘길 리가 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미 전쟁은 벌어졌어. 그 미친놈이 군사 작전을 벌이겠다고 병력을 소집했고 며칠 전 내게도 편지가 도착했어.”
그녀가 내민 편지를 쓱 훑어보니 온갖 미사여구를 제외하고 딱 3줄로 요약할 수 있었다.
― 폴란드 왕국이 아국에 대해 적대적인 행위를 했다.
― 본 황제는 폴란드 왕국의 이런 무도하고 비열하며 불명예스러운 행동을 넘길 수 없다.
― 따라서, 폴란드와 전쟁을 선포하니 제국의 모든 제후들은 병력을 끌고 모이라.
“정신 나갔군. 그래서 칼리나 너는 내가 이 정신 나간 전쟁에 참여했으면 좋겠다는 거야?”
“맞아. 라그나르 당신도 알다시피 전쟁이야말로 당신과 같은 용병이 활약할 수 있는 최고의 무대잖아?”
“흠….”
칼리나의 말이 틀린 건 아니다. 한나라가 무너지고 황건의 난이 일어났기에 조조가 있고 유비가 있을 수 있었다.
난세와 전쟁이 아니었다면 조조는 공무원으로 살다 죽었을 테고 유비는 누상 촌에서 짚신이나 짜다 죽었을 것이다.
“당신이 본인의 이름으로 뭔가를 이루고자 한다면 정당성이 필요해. 그뿐만 아니라 명예와 명성까지 필요하지. 이참에 용병대장으로 전쟁에 참전해서 황제를 비롯한 모두에게 눈도장을 찍어둬.”
“흠, 날 고용하겠다는 거야?”
“물론. 가능하면 평생 고용하고 싶지만….”
“칼리나.”
“농담이야. 아무튼, 이게 내가 당신에게 하는 제안이야. 어차피 황제를 위해 복무하는 기간은 40일 정도니 오가는 시간을 포함해 길어야 3달 정도겠네.”
말을 마친 그녀는 언제 준비해뒀는지 내게 계약서를 내밀었다.
나는 찬찬히 계약서를 훑어보며 머릿속으로 내가 얻을 수 있는 이득과 이로 인해 포기해야 하는 것들에 대해서 가늠해 보았다.
“나야 나쁘지 않지만 너는 지금껏 중립을 지키고 있었잖아. 변경백인 네가 굳이 황제를 위해 병력을 보내야 할 의무도 없는데 괜한 오해를 살 수 있지 않겠어?”
“당신이 내 걱정을 해주다니… 해가 서쪽에서 뜰 일이네.”
“나야 언제나 네 걱정뿐이지 칼리나.”
“흥, 그런 주제에 내가 자존심이고 뭐고 다 팽개치고 가지 말라고 애원하는데도 날 버리고 가버려?”
“음….”
“농담이야.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에는 당신이 날 떠난 이유도 알 것 같으니까.”
정작 당사자인 나는 모르겠지만, 어쨌건 본인이 적당히 넘겨짚고 이해해줘서 다행이다.
“아무튼, 내 걱정은 할 필요 없어. 사실 당신이 야만인이라 걱정할 필요가 없는 거지만.”
뭐지? 무슨 뜻이지? 내가 못 배워 처먹은 야만인이라고 능욕하는 것인가? 자신이 문명인임을 과시하는 것인가? 자기과시?
그런 내 표정을 읽었는지 그녀가 내 눈치를 보며 의기소침한 표정으로 한마디 덧붙였다.
“오해할까 봐 말해두는데 그 사람들 입장에서 내가 야만인인 당신을 보냈으니 오히려 별로 신경을 쓰지 않을 거라는 얘기야.”
“아, 그런 깊은 뜻이 있었군.”
사실 알고 있었지만, 그녀를 한번 놀려보고 싶었던 것뿐이다. 애초에 내가 지원군으로 가면 그걸 본 사람들이 할 생각은 뻔하다.
황제가 칼리나에게 도우우우우우움!!을 외치면서 병력지원을 요청하니 보내기는 싫은데 마냥 무시할 순 없으니까 적당히 용병단 고용해서 보낸 것이다! 라고 이해하겠지.
“그렇다고 황제에게까지 무시 받으면 곤란하니 편지를 한 장 써줄게. 내가 보내는 거니 독대할 기회가 있을 거야. 그때 건네줘.”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가 건네준 편지를 품에 갈무리했다. 그리고 며칠 뒤, 나는 신성 제국의 황제인 프리드리히 바르바로사가 머무는 뉘른베르크로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