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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바이킹이 되었다-37화 (37/205)

▣ 037화

세상에서 제일 재밌는 게 싸움 구경, 불구경, 물 구경이라고 하던가. 이 3대 구경 중에서 단연코 천하제일은 싸움 구경이라 생각한다.

물 구경도, 불구경도 재밌긴 하지만 단조로운 면이 없잖아 있다. 하지만 사람과 사람의 싸움이라는 건 변화무쌍한 건 기본이요 좆밥싸움마저 은근히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쫄깃쫄깃함이 있다.

특히 지금처럼 어부의 입장에서 조개와 도요새가 서로를 죽일 듯 싸우는 걸 보는데 어찌 즐겁지 않겠는가.

“제가 지금껏 상인으로서 수많은 거래를 행하고 계약을 성공적으로 이끈 경험이 있습니다만… 그 모든 것들이 오늘 라그나르 경께서 이룬 업적 하나에 비할 바가 못 되는군요.”

“하하, 과찬이십니다. 그래서 어떻게, 장사는 조금 쏠쏠하십니까?”

“안 그래도 덕분에 생필품을 비롯해 군수물자가 불티나게 팔리고 있습니다.”

원래는 볼프강의 장남과 차남의 싸움을 일주일 정도만 지켜보다가 강제로 개입할 생각이었는데 생각보다 밀고 당기며 치열하게 이어지는 모양새가 그럴듯해서 좀 더 지켜보기로 했다.

게다가 펠릭스가 편지에서 말하길 이대로 자신이 백작위를 차지한다고 해도 장남과 차남의 추종세력이 남아있으면 노바라를 다스리는 데 방해가 된다며 자기가 다 알아서 처리할 테니 개입을 조금만 미뤄달라고 했다.

애초에 그는 조선의 수양대군마냥 본인이 정변을 일으키는 게 아니라 차남을 보필하다가 칼리나의 개입에 의해 ‘억지로’ 백작위에 오르는 포지션이었다.

물론 본인도 아데우스의 피가 흐르고 있는 만큼 그가 그대로 백작위를 꿀꺽한다고 해도 누가 뭐라 할 순 없겠지만, 이 시대에는 명분과 사람들의 눈초리만큼 중요한 게 없다.

따라서 원칙대로라면 그는 어디까지나 차남이 성장할 때까지 자리를 맡은 섭정 정도로 만족해야 하는데 그럴 순 없기에 장남과 차남을 처리할 시간을 달라는 것이었다.

“그보다 펠릭스 그 양반도 머리 하나는 기깔나게 잘 쓰더군요.”

“동감입니다. 어쩌면 징수관 시절, 아니 자신의 몸에 흐르는 피를 자각한 순간부터 노바라의 백작이라는 작위를 노리고 있었을지도 모르지요.”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이 있다. 그는 겉으로는 웃으며 차남을 도와줬지만, 장남이 차남에게 밀릴 때쯤 암살 자작극을 펼쳤다.

킹메이커이자 노바라의 실세로 떠오른 펠릭스가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암살 미수를 겪게 되자 사람들은 자연히 그 범행의 배후자로 장남을 지목했다.

한 번은 내가 그의 의심을 풀고 시선을 돌리기 위한 자작극이요, 두 번째 암살미수는 그가 장남을 몰락시키기 위해서 만든 자작극이었지만 앞뒤 사정을 모르는 이들은 장남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가 입은 부상이 단순히 가벼운 골절이나 자잘 자잘한 생채기에 그쳤다면, 사람들도 펠릭스의 자작극을 의심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진짜로 몸에 바람구멍이 뚫릴 정도로 큰 상처를 입었다. 당연히 자작극이기에 최대한 생명에 지장이 없는 부위를 노렸다지만, 출혈도 상당했고 처치가 늦었다면 죽었을지도 모르는 큰 부상이었다.

스스로의 몸까지 희생하는 걸 보면 펠릭스의 권력에 대한 집착은 상상을 초월했다. 대체 지금까지 어떻게 그 욕망을 숨기고 살았나 신기할 정도로.

다행히 사전에 그가 내게 도움을 요청했고 곧장 이비를 보내줬기에 후유증 없이 한 달 정도의 요양만으로 몸을 추스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한 달이라는 요양 기간 동안 모든 일에서 손을 뗀 채 칩거했고 그걸 본 장남 측은 바로 차남을 공격해 마침내 차남을 처형하는 데 성공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멍청하다 못해 뇌가 없는 짓이었지만, 그때 당시에는 펠릭스의 지원을 등에 업은 차남의 공세에 처참하게 밀리고 있던 장남 측에서 생각할 수 있던 최선의 수였다.

누가 했는지는 모르지만, 펠릭스는 병상에 누워서 오늘내일하고 있고, 차남과 그 어미라는 자는 갑작스러운 펠릭스의 공백에 휘하 가신들의 동요도 제대로 추스르지 못하고 있었으며, 그 모습에 중립을 외치면서 눈치만 보고 있던 이들은 슬금슬금 자신에게 붙고 있었다.

정확히는, 펠릭스가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도록 판을 깔아놓은 거였지만, 절망에 빠져있던 장남이 볼 때는 그야말로 신이 내린 기회였다.

그렇게 여세를 몰아 차남을 죽이는 데 성공했지만, 게임은 장남이 생각했던 것처럼 차남을 죽이는 데서 끝나지 않았다.

오히려 펠릭스가 누워있을 때 공격을 했기에 사람들의 의심은 확신이 되었다. 심지어 과거 불에 타 죽은 볼프강 영주의 죽음이 석연찮은 구석이 있다 생각한 이들은 영주 역시 장남에게 암살당한 것이라며 수군거렸다.

고작 열 살을 조금 넘긴 어린아이의 흉계라고 하기엔 너무나 잔악했기에 의문을 품는 사람도 있었으나, 동생을 처형할 만큼 냉혹한 것은 명백했기에 여론은 곧 한쪽으로 쏠렸다.

결국, 그 판단과 행동으로 인해 장남은 백작위를 위해 동생은 물론이요 제 아버지까지 죽인 희대의 쓰레기이자 패륜아로 낙인찍혔다.

그렇게 되자 민심은 징수관에게 향했고 펠릭스는 때맞춰서 자신의 진짜 신분을 밝혔다.

펠릭스 폰 가르옌이 아닌, 펠릭스 아데우스.

그 찬란하면서도 영광된 이름이 드러나자 전세는 순식간에 뒤집혔으며 사람들은 모든 일의 자초지종을 알 수 있었다.

볼프강의 장남은 어떤 경로로 펠릭스가 아데우스 가문의 사생아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런데 아버지가 자신이 아닌 펠릭스를 후계자로 점찍을 낌새를 보이자 아버지와 펠릭스를 한 번에 죽이려고 했다.

하지만 그 암살계획은 반만 성공했는데 볼프강 백작을 죽이는 데는 성공했지만, 펠릭스를 죽이는 건 실패하고 말았다.

결국, 내전이 벌어지게 됐고 장남은 상황을 뒤집기 위해 다시 한번 암살을 모의한다. 하지만 운명의 장난인지 펠릭스는 살아남았고, 그는 더 이상 참지 않고 자신의 진짜 신분을 밝혔다.

진정한 거짓은 진실을 뒤섞을 때 완성된다고 하던가. 어설프긴 했지만, 앞뒤가 맞아들어가는 데다 원체 장남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았기에 장남 측은 어떻게 손 쓸 새도 없이 소문에 먹혀버리고 말았다.

그에 따라 장남을 지지하던 레비아탄 상단이 손을 뗀 채 펠릭스에게 무릎을 꿇었고, 장남을 지지하던 귀족들이 펠릭스의 앞에 용서를 빌었으며, 시민들은 정의가 구현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칼리나가 병력을 이끌고 노바라를 침공했다.

난생처음 보는 대군세와 검은색의 갑주로 무장한 채 늘어서 있는 용기사단을 본 사람들은 전부 공포에 벌벌 떨었다.

귀족들에 대해 잘 알지 못해도, 관심이 없어도, 제국을 수호하는 수호신 중의 한 명인 레이디 칼리나와 그녀가 이끄는 용기사단을 모를 수가 없기 때문이다.

특히, 몇 년 전 라틴 제국 남부의 대공인 보니파시오가 신성 제국을 침공했을 때 그들을 격퇴한 일화는 너무나 유명했기에 음유시인들이 노래로 만들어 부르고 다닐 정도였다.

그들은 칼리나의 치명적인 아름다움과 업적을 칭송했는데 실제로 호전적이었던 보니파시오는 그 패배의 여파로 향후 몇 년간 아무것도 못 하고 자신의 영지에 처박혀 있어야 할 정도였다.

이때의 승리를 기점으로 칼리나는 제국의 수호신이 되었으며 그녀는 물론이고 그녀가 이끄는 용기사단도 타국에 이름을 떨치게 되었다.

그런 그녀가, 그 이름 높은 기사단을 이끌고 노바라로 왔다. 그 누가 겁을 집어먹지 않겠는가.

“나는 자랑스러운 신성 제국의 변경백이자 밀라노와 투스카니, 카노사의 지배자이며 카노사 가문의 가주 칼리나 디 카노사다.”

“본 변경백은 더 이상의 혼란을 막기 위해 지금 이 시간 이후로 노바라의 사태에 개입할 것이다. 그러니 지금 즉시 문을 열고 나를 맞이하라.”

“이것은 권유나 제안이 아닌 명령이다. 지금 즉시 성문을 열어라. 거절한다면, 오늘 지도에서 노바라라는 이름은 지워질 것이다.”

이 거절할 수 없는 제안에 사람들이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고 있을 때 오직 펠릭스만이 성문을 연 채 홀로 나아갔다.

* * *

“오랜만입니다. 징수관님. 아니, 이제는 노바라의 펠릭스라고 불러드려야 할까요?”

“하하, 이 모든 게 라그나르 경과 칼리나 변경백께서 신경 써주신 덕분입니다.”

지나치게 비굴해 보이는 표정을 짓는 펠릭스를 보며 칼리나는 관심 없다는 듯 손을 내저었고 나는 쓰게 웃으며 테이블 한쪽에 있는 와인을 따라주었다.

“일단 와인이나 한 잔 드시죠.”

“감사합니다. 안 그래도 상처 때문에 주치의가 당분간 술은 절대 금지라고 해서 많이 그리웠거든요.”

“하하, 그러고 보니 상처는 좀 괜찮으십니까?”

“라그나르 경께서 시기적절하게 주치의를 보내주신 덕에 살았습니다. 솔직히 흉터나 장애 정도는 남을 거라 생각했는데 가히 신의라고 할 만하더군요.”

난 그렇게 그와 그동안 밀려있던 대화를 나누었고 종종 뒤에서 우리를 보고 있을 관객들을 향해 적당한 쇼를 해주기로 했다.

“그 뭐냐, 사람들 시선이 있으니 칼리나의 부당한 처우에 대해서 항의하거나 저항하는 모습도 필요할 것 같은데 테이블 내려치며 화내는 모습도 좀 보여주시지요.”

“예, 팔도 좀 휘저으시면서 열정적으로 옹호하는 듯한 모습도 보여주시고요.”

“아, 좋습니다. 마지막으로 노바라를 위해 자존심을 버리고 무릎 꿇으시는 장면까지 보여주면 딱이겠네요.”

펠릭스는 성실하게 내 말을 따랐고 그렇게 노바라를 지키기 위해 나섰다는 명분과 칼리나와 좋은 관계를 맺었다는 실리를 챙긴 펠릭스는 희희낙락하며 성으로 귀환했다.

그리고 그 회담을 빙자한 쇼를 앉아서 와인만 홀짝이며 바라보던 칼리나는 날 바라보며 사뭇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라그나르.”

“왜?”

“지금이라도 당신이 원한다면, 나는 당신에게 백작의 자리를 줄 수 있어.”

“백작이라… 사람에게는 분수에 맞는 자리가 있는 법이야.”

“하긴, 당신에게 백작 따위의 자리로 성이 찰 리가 없지. 그러니까 나와의 결혼도, 변경백이라는 자리도 전부 다 거절한 거잖아?”

“글쎄….”

솔직히 그건 내가 한 일이 아니라서 뭐라 대답하기가 힘들다. 그나저나 원래의 라그나르도 인물이긴 하군. 야만인으로서 출세할 수 있는 기회였는데 그걸 걷어차다니.

“그래서 이제 뭘 할 셈이야?”

“여기저기 떠돌아다닐 거야.”

“뭐!? 저기 라그나르. 내가 이런 소리 들으려고 이런 하찮은 연극에도 어울려주고 휘하 귀족들이 이러시면 안 된다고 눈물로 읍소하는 거 다 때려치우고 여기까지 온 줄 알아?”

“음….”

“당신은 내 거야. 지금껏 내가 몇 년을 참은 줄 알아? 그런데 또 날 떠나는 걸 내가 가만히 바라만 보고 있을 것 같아?”

칼리나의 눈동자는 진심이라는 듯 활활 타오르고 있었고 나는 머릿속으로 말을 고르기 시작했다. 여기서 말 한 번 잘못하면 원치 않는 지하실 엔딩이 될지도 모른다.

물론 이대로 그녀의 기둥서방이 되어서 사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만… 아니, 원래의 나라면 그런 선택을 할지도 모르지만, 라그나르는 그걸 거부하고 있었다.

라그나르는 투사였고, 전장에서 죽기를 원하는 바이킹이었으며, 스스로를 불태우는 전사였다.

그 때문에 나는 지금 여기서 승부수를 던지기로 했다.

“칼리나. 내가 여기서 멈출만한 남자가 아니라는 건 알잖아? 고귀한 여변경백의 남편이 되려면 적어도 일국의 왕 정도는 돼야 하지 않겠어?”

“뭐? 푸하하하.”

내 말에 상상도 못 했다는 듯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이내 즐겁다는 듯 박장대소하며 나를 바라보았다.

“하긴, 당신은 그런 남자였지. 그러니까 내가 그렇게 매달려도 매몰차게 날 차버리고 떠난 거잖아?”

부드러운 그녀의 목소리에 난 내 승부수가 통한 걸 깨달았다. 솔직히 그녀가 닥치고 날 구속하면 난 아무것도 할 게 없다.

“말에 좀 어폐가 있군.”

“그게 그거지 뭘. 내가 지금까지 거절한 혼담 요청만 해도 백 건이 넘어가는 거 알아? 심지어 잘나신 황제가 자기 아들이랑 혼인 제의까지 했는데 그걸 거절한 게 나야. 그런 나의 청혼을 몇 번이나 거절하는 건 라그나르 당신밖에 없을걸?”

“영광으로 생각하고 있어.”

“그래? 그러면….”

그녀는 내가 반응하기도 전에 나를 끌어안고 거칠게 키스했다. 내가 도망치지 못하게 내 허리를 꽉 끌어안은 뒤 그녀는 혀로 자신의 입술을 핥으며 내게 얘기했다.

“이번에는 이 정도로 만족해주겠어.”

그리고는 저 멀리서 죽일 듯이 날 노려보는 힐데를 쓱 바라보고는 내 귓가에 대고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그리고… 어차피 당신이 내게 돌아오기만 한다면 잠깐의 외도 정도야 얼마든지 봐줄 수 있어.”

“어른스러운걸?”

“솔직히 지하실에 가둬두고 죽을 때까지 당신과 함께 있고 싶지만… 그래선 날 싫어할 거잖아? 난 당신이 나를 좋아해 줬으면 좋겠어.”

반쯤 진심으로 보이는 그녀의 말에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지만 나는 애써 덤덤한 얼굴로 대꾸했다.

“노력해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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