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36화
볼프강의 숨이 확실히 끊어진 걸 확인한 나는, 그의 시체를 방 한구석에 숨겨놓은 뒤 랜턴을 서재에 집어 던졌다.
갑갑한 랜턴 안에 갇혀있던 불꽃이 책더미를 먹이 삼아 조금씩 커져 나가자 나는 화약을 담은 병을 바닥에 내려놓고 곧장 방을 나섰다.
“자, 이제 어쩐다.”
사실 대부분의 암살은 죽이고 난 뒤가 문제인데 수많은 경비를 헤집고 살아서 나가는 건 꽤 힘든 일이다.
그럼 원 역사에서 있었던 수많은 암살들은 뭐냐? 라고 물을 수 있는데… 대부분의 암살자들은 자기가 죽을 걸 각오하고 상대를 암살하는 것이다.
그 때문에 오히려 경계가 삼엄해지는 밤보다 군중들 사이에 섞일 수 있는 백주 대낮에 암살이 행해지는 경우가 훨씬 많았다.
실제로 과격단체들이 길거리 한복판에서 무차별적으로 테러를 하는 이유는 사람들에게 언제 어디서든 죽을 수 있다는 공포를 심어주기 위함이었고 암살 역시 그러한 테러의 일부였다.
하지만 난 살아 돌아가야 했고 이대로 별다른 일이 없으면 내가 벌였던 소동도 가라앉음은 물론 상황도 정리될 테니 지금보다 혼란을 더 가중시켜야 했다.
그 때문에 잠시 고민하던 나는 다소 허술하지만 언제나 잘 먹히는 필살기를 외쳤다.
“불이야!! 불! 불이야아아아!!!”
현재 이 소란의 원인을 제대로 파악한 이들은 얼마 안 될 테니 ‘화재’라는 명확한 이유가 널리 퍼진다면 혼란이 커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애초에 야밤이라서 상황 파악이 안 되고 곳곳에 연기가 자욱하며 경비를 서던 이들이 쓰러져 있는 걸 보면 당연히 연기에 질식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거기에 내 말에 대한 신빙성을 더하기 위해 마지막 남은 연막탄을 바닥에 던져서 터뜨려주자 내 예상은 그대로 적중했다.
“불이야! 성에 불이 났다!!”
“빨리 물을 가져와!!!”
“영주님! 영주님은 어디에 계시는가!?”
“빨리 5층으로 진입해! 이 멍청한 새끼들아!”
급사의 옷을 입은 나는 불이 나서 어찌할 줄 모르는 소시민을 연기하다가 사람들의 시선이 분산된 틈을 타서 슬쩍 아래층으로 빠졌다.
저런 자리에서 괜스레 얼쩡거리다 걸리면 쓸데없는 의심을 살 테니 최대한 빠르게 도망치기로 했다. 펠릭스는 어린애도 아니니 지금쯤이면 작전이 성공했다는 것을 확신하고 알아서 조치를 취할 것이다.
거기에 병력들이 5층으로 올라가서 방을 뒤질 때쯤에는 내가 방 한가운데 놔둔 화약도 폭발할 테니 내가 도망칠 시간도 벌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3층까지 내려온 나는 창문을 열고 펠릭스가 묶어놓은 밧줄을 잡고 내려가기 시작했다. 남쪽은 내가 침입했던 북쪽과는 다르게 맨땅이 아니라 해자가 파여있었기에 나는 과감하게 밧줄을 놓고 해자로 떨어졌다.
풍덩!
거대한 물기둥이 솟구쳐 올랐지만, 나는 아픔을 느낄 새도 없이 아등바등 헤엄을 쳐 밖으로 기어 올라왔다.
“젠장. 내일은 근육통에 감기 확정이네.”
가볍게 혀를 차며 불만을 내뱉은 나는 바지와 윗도리를 벗어 물기만 가볍게 짠 뒤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이미 성안의 혼란이 마을 내부에도 전해졌는지 경비병들이 바쁘게 돌아다니고 있었고 지금의 나는 누가 봐도 수상해 보였으니까.
* * *
―노바라의 영주가 방에서 불에 타 죽었으며 징수관에 대한 암살 기도가 있었고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 소문은 노바라뿐만 아니라 근처에 있는 마을과 영지를 관통했다.
사람들은 둘 이상만 모이면 영주의 죽음에 관해 이야기했고 몇몇 호사가들은 고대의 암살자 집단인 ‘검은 형제단’이 다시 암약하기 시작했다고 떠들기 바빴다.
노바라에 사는 이들은 당연히 영주가 죽었으니 안정되어 있던 영지가 다시 요동치는 것을 두려워했고 다른 영지에선 볼프강의 죽음으로 인해 혹여 자신의 영지에 불똥이 튀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의 걱정은 현실이 되었다.
원래 모든 사람은 태어나면 죽는 게 당연하듯, 영주 하나 죽는다고 영지도 운명을 함께하는 건 아니었다. 문제는 볼프강의 나이가 서른밖에 안 됐다는 점이었고 그의 아들들은 장남이 이제 막 10살 된 꼬맹이라는 점이었다.
볼프강은 설마 자신이 죽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는지 자신의 적장자를 후계자로 세우기는 했지만, 그에 따른 지지 기반을 따로 만들어둔 건 아니었다.
그 때문에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둘째 부인 소생의 아들들에게도 기회가 되었고 펠릭스는 재빨리 자신을 믿고 따르는 이들을 끌어모아 둘째 부인 소생의 차남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다.
일이 이렇게 되자 백작의 자리를 뺏기고 내쫓기게 된 장남과 첫째 부인은 남편의 심복들을 끌어모아 펠릭스에게 대항했고 지금 노바라는 내전이 일어나기 일보 직전이었다.
“흠, 정말 라그나르 당신의 뜻대로 되었군요.”
“척하면 척이지.”
“솔직히 놀랐습니다. 그냥 대책 없이 볼프강만 죽이면 모든 게 끝난다고 믿고 암살을 하러 가는 게 아닌가 싶었습니다만…… 지금의 당신은 이전과는 확실히 다르군요.”
“난 학습하는 야만인이거든.”
“어련하시겠습니까.”
힐데의 말대로 나는 단순히 볼프강을 암살하는 데서 그치지 않았다. 물론 그 이후 내가 직접적으로 뭔가를 한 건 아니었지만, 적당히 판을 짜놓았고 지금 노바라는 내 손바닥 위에 있었다.
“좀 더 칭찬해도 좋아.”
“주군이라면 분명 저희는 감히 생각도 못 할 혜안을 가지고 있을 거라 믿고 있었습니다.”
“하하하, 이비 네가 뭘 좀 아는구나.”
내가 그녀의 어깨를 팡팡 두들기며 대꾸하자 힐데는 뚱한 표정을 지었다. 뭔가 톡 쏴주고 싶긴 한데 어쨌건 이번 건에 한해서는 내 생각대로 맞아들어갔기에 딱히 할 말이 없는 모양이다.
“칼리나한테는 연락 없었어?”
“안 그래도 라그나르 당신이 자고 있을 때 편지가 왔습니다. 보안을 위해서 읽어보지는 않았습니다만, 편지를 전하러 온 전령이 벌벌 떨면서 꼭 답장 좀 해달라더군요.”
“답장? 네가 읽어보고 적당히 답변해주면 되는 거 아니야?”
“안 그래도 제가 뜯어보려고 했습니다만… 전령이 벌벌 떨면서도 저 편지는 오직 라그나르 당신이 뜯고 당신이 직접 답장을 써야 한다고 하더군요.”
“거 참… 줘 봐.”
내가 손을 내밀자 힐데는 기다렸다는 듯 편지를 건넸다. 물론 그러면서 한마디 샐쭉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대체 당신 같은 사람이 뭐가 좋다고 그렇게 집착을 하는지 모르겠군요.”
“뭐야. 질투하는 거야? 귀엽기는.”
내가 힐데의 머리를 헝클며 얘기하자 그녀는 내 손을 쳐내며 날카롭게 대꾸했다.
“질투?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십시오. 저는 그저 당신이 어렸을 때 저를 구해준 것에 대해 보답을 하는 것뿐입니다. 아시겠습니까? 지금에서야 하는 말이지만 칼리나 변경백과 관련된 일만 해도….”
왠지 모르게 또 잔소리가 시작될 것 같았기에 나는 적당히 그녀의 말을 끊었다.
“오구오구. 그랬어요. 우리 힐데? 관심 안 가져줘서 힐데 화나쪄요?”
어린아이를 어르고 달래는 듯한 내 말에 약을 만들고 있던 이비가 풉 하고 웃음을 터뜨렸고 날 죽일 듯 노려보던 힐데는 이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후…… 됐습니다. 제가 말을 말아야지요.”
툴툴대는 힐데를 보며 빙긋 미소 짓고 있자니 옆에서 날 진찰하고 있던 이븐 시나가 내게 약을 건넸다.
“검진은 끝났습니다. 주군. 원체 몸이 튼튼하셔서 하루 이틀 정도만 쉬면서 몸 관리만 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내가 몸 하나는 또 튼튼하지.”
이건 괜히 하는 말이 아니라 지금까지 노숙을 몇 달이나 했는데 딱히 상태창에 디버프가 뜨거나 컨디션이 나빠진 일이 한 번도 없었다.
“아무튼, 검진하느라 고생했어. 힘들면 방에 가서 쉬어도 돼.”
“괜찮습니다. 전 주치의로서 가능한 한 언제나 주군 옆에 붙어있고 싶습니다.”
“뭐, 이비 네가 그게 편하다면야.”
본인이 좋다는데 더 권하는 것도 그래서 나는 약을 들이켰다.
“으으으. 이거 너무 쓴 거 아니야?”
“아시겠지만, 원래 몸에 좋은 약은 입에 쓴 법입니다.”
“그것보다 더 좋은 약은 몸에도 좋으면서 달달한 약이 아닐까?”
내 말이 그럴듯하다 생각했는지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순순히 수긍했다.
“정론이군요. 다음에 달일 때는 감초를 더 첨가하겠습니다.”
“그래서 대강 내용은 짐작이 갑니다만… 그 편지는 무슨 내용입니까?”
“읽어 볼래?”
“사양하겠습니다.”
“음… 이게 무슨 내용이냐면….”
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다시 편지를 펼쳤다. 중간중간 깨진 글자들이 있어 편지를 전부 다 알아볼 수 있는 건 아니었지만, 대강 보이는 문맥만으로도 그 의미를 알기에는 충분했다.
‘당신의 영원한 반려자’로 시작된 칼리나의 편지는 ‘언젠가 카노사 대신 칼리나 로드브로크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를 간절히 바라며’라는 맺음말만 봐도 안의 내용을 다 본 것과 다름이 없었다.
하지만 이걸 그대로 얘기할 순 없기에 난 적당히 뇌내 필터링을 거친 뒤 그녀에게 얘기했다.
“소문이 퍼져서 내용은 알겠는데 혹시 모르니 자세한 내용을 얘기해달라는군.”
“우리보다 더 잘 알고 있으면서 웃기지도 않는군요.”
펠릭스가 아데우스 가문의 사생아라는 것까지 알고 있을 정도였으니 힐데의 말대로일 것이다. 애초에 이게 큰일이기는 해도 이렇게 소문이 퍼지는 데는 분명 칼리나가 휘하의 정보단체를 통해서 부추긴 면도 없잖아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렇게 편지를 보냈다는 건 이를 빌미로 내게 편지를 보내고 그 답장을 받고 싶다는 의지의 표현이겠지.
“하하, 어쨌든 다 계획대로 되고 있으니 다행이지 뭐. 지금은 둘째한테 힘이 쏠리고 있다던가?”
“예. 아무래도 징수관이 생각보다 신망이 있던 모양입니다.”
“거참. 내가 옆에서 부추기긴 했지만, 그렇게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체스말들을 조종하는 걸 보면 그 양반도 참 대단한 양반이야.”
지금이야 둘째 부인과 차남에게 백작이 될 수 있다며 잔뜩 바람을 불어넣고 있지만, 결과적으로 백작위는 펠릭스에게 돌아갈 것이다.
결국, 장남뿐만 아니라 차남도 이 어이없는 쇼를 위한 희생양이 될 텐데 그걸 알면서도 저렇게 철면피처럼 차남을 지지하는 걸 보면 절로 감탄이 나올 정도다.
따지고 보면 볼프강의 차남이나 장남이나 펠릭스의 조카인 셈인데 역시 권력 앞에선 가족이고 나발이고 없는 모양이다.
“징수관에게 연락해서 적당히 균형을 맞추라고 할까요?”
“아니, 레비아탄의 탈다스 상단장에게 연락해서 적당히 지원해주라고 전해. 어차피 내전이 날 거라면 크게 나야 칼리나가 개입할 명분이 되지.”
사실 제일 좋은 건 적당히 힘겨루기만 하며 대치 상태를 이어가는 거지만 내전에서 누가 이기든 상관없다. 어차피 칼리나의 말 한마디면 모든 게 뒤바뀔 테니까.
“그리고 전령한테는 오늘 저녁 전에 내가 답장을 써서 준다고 전해줘.”
“알겠습니다.”
불쌍한 전령은 하루라도 빨리 답장을 받아오라는 칼리나의 독촉을 떠올리며 덜덜 떨고 있을 것이다. 그녀의 성격을 보면 안 봐도 뻔하지.
“적당히 감사와 애정, 사랑을 담아서 쓰면 되겠지.”
뭐, 지금의 칼리나는 내가 뭐라 쓰든 좋아할 테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