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35화
나는 품속에서 지도를 꺼내 잠시 살펴보았고 그런 날 보며 펠릭스가 긴장된 표정으로 물었다.
“정말 할 수 있겠나?”
“물론입니다. 생각 외로 경비가 단단하긴 하지만, 상정 범위 내고 이럴 때를 대비해서 이것저것 챙겨온 게 있으니까요.”
나는 가방에서 이것저것 꺼내서 늘어놓았고 펠릭스는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바닥에 놓인 물품들을 바라보았다.
그의 도움도 필요했기에 나는 순서대로 하나씩 용도를 설명해주었다.
“이건 화약을 이용한 폭탄입니다. 아실지 모르겠지만, 꽤 민감해서 특정 조건을 만족시켜주고 불을 붙이면 펑~ 하고 터집니다.”
사실 이 게임이 자유도가 높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기술테크는 냉병기에 국한되어 있다. 물론, 열병기 개발을 하려고 하면 못 할 건 없지만, 현실과 들어가는 화약의 제조법이 다르다.
원래 초석이랑 숯, 황을 적절히 배합하면 기본적인 흑색화약이 나오지만, 여기서는 금과 아연, 수은에 오닉스까지 섞어줘야 한다.
물론 여기 추가로 들어가는 물품들은 매번 바뀌는데 이를 알고 있는 건 연금술사 동료 중에서도 상위 티어 몇 명에 화학에도 조예가 깊은 이븐 시나 정도다.
그래서 그냥 현실처럼 초석이랑 숯, 황만 배합해서 화약을 만들면 폭발하지 않는다. 이게 뭔 개소리냐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여긴 알게 모르게 현실과 물리적, 화학적인 법칙이 다르게 통용된다.
애초에 상태창이 뜨고 단순히 기도문 몇 줄 외웠다고 버프가 생기는 것부터가 말이 안 되는 일 아니던가.
“음, 들어본 것 같네. 저 멀리 동부에 있는 국가에서 그런 걸 만들었다고 하던 것 같은데….”
아마 중국을 대체하는 국가를 얘기하는 거겠지. 물론 이 게임의 배경은 유럽이니만큼 따로 동아시아는 나오지 않지만, 지금은 어떻게 됐는지 모르겠네.
“아무튼, 이걸 이용해서 혼란을 일으킬 겁니다. 여기 심지를 이용해서 폭발하는 시간을 적당히 조절할 수 있습니다.”
“신기하군. 폭발의 강도는 어느 정도인가?”
“이 정도면… 여기 방 하나는 아예 날아갈 겁니다.”
“귀여운 크기에 비해서 위력적이군.”
“꽤 민감하니 조심해서 다뤄야 합니다. 재수 없으면 정전기에도 터지거든요.”
내 말에 펠릭스는 겁이 나는지 서둘러 바닥에 내려놓았고 나는 피식 웃으며 계획을 마저 설명했다.
“이건 징수관님의 집무실에 설치할 겁니다.”
“내, 내 집무실에 말인가?”
“예. 암살 대상을 징수관님인 것처럼 위장하는 거죠.”
“그렇게 해서 호위병들의 시선을 내게 끌어들이겠다는 건가?”
“그렇습니다.”
그럴듯하다고 생각했는지 징수관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몇 가지 물품을 더 꺼내 그의 신뢰를 끌어올리기로 했다.
“이건 연막탄인데 바닥에 던져서 터뜨리면 일시적으로 시야를 가릴 수 있는 연기가 피어오릅니다. 지속 시간이 길지는 않지만, 영주의 방까지 갈 시간 정도는 벌어줄 수 있을 겁니다.”
자세히는 모르지만, 흑색 화약을 터뜨렸을 때 장난 아니게 자욱한 연기가 피어오르는 데서 착안한 물품이다. 물론 이것 역시 온갖 추가 재료들이 들어가기에 단가가 장난 아니다.
“마지막으로 이게 제일 중요한 겁니다. 통칭 수면 가스라고 불리는 건데 휘발성이 강하니 허리에 매단 채 복도 곳곳을 돌아다녀 주십시오. 어차피 폭탄을 설치하고 나면 집무실에는 못 들어가실 거 아닙니까?”
“그런 편리한 게 있다고? 아니, 그전에 나도 잠들지 않겠나?”
“이게 해독제입니다. 지금 드셔두면 견딜 수 있을 겁니다.”
그는 내가 내민 동그란 알약을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미심쩍은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으음… 효과는 확실하겠지?”
“신의(神醫)가 직접 고안한 제조법입니다. 못 믿으시면 할 수 없지만, 여기까지 와서 제가 징수관님께 거짓말을 할 이유가 어딨습니까.”
“으음, 그렇게까지 말하니 믿겠네. 그나저나 자네는 어떻게 할 생각인가?”
“저는 4층 빈방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폭발물이 터지는 순간 바로 올라와서 볼프강을 죽이겠습니다. 폭발과 연막탄이 시너지를 일으키면 혼란을 더 가중시킬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내가 이 수면 가스와 함께 암살자가 있다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면서 어그로를 끌어줘야 한다는 얘기겠지?”
“정확합니다. 중요한 건 암살자가 한 명이 아니라 여러 명인 것처럼 위장해주셔야 합니다.”
“알겠네. 그나저나 이런 것들은 다 어디서 구했나?”
“볼프강이 제게 제발 가지라고 가져다 바치더군요.”
틀린 말은 아니다. 생각지도 않던 이븐 시나를 볼프강 덕에 얻게 됐으니까. 그것도 영원한 충성 맹세를 받았으니, 내게 가장 도움이 된 NPC는 어찌 보면 볼프강이 아닐까?
물론, 이 일련의 과정을 모르는 펠릭스는 어리둥절한 표정만 지을 뿐이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때가 되면 알게 될 겁니다. 그보다 너무 시간을 끌면 의심할 테니 슬슬 나가시지요.”
“그래. 그러세.”
나는 적당히 서류를 잔뜩 뽑아 든 채 서고를 나서 펠릭스의 뒤를 따라 다시 4층으로 내려갔고 그의 집무실에 도착하자마자 바닥에 기름을 뿌려댔다.
“아, 이미 뿌리고 나서 얘기하기도 조금 그런데 혹시 여기가 다 타도 상관없습니까?”
“물론이네. 내가 가지고 있는 서류들은 전부 별채의 지하실에 복사본으로 만들어져 보관되어 있네. 당연히 거긴 영주만 들어갈 수 있지만, 자네가 날 영주로 만들어 줄 텐데 뭐가 문제겠나.”
“하하, 맞는 말씀입니다.”
방주인의 허락도 받았기에 나는 주변에 기름을 잔뜩 뿌린 뒤 방 한가운데 폭탄을 내려놓고 심지를 매우 길게 뽑아냈다.
“실험해본 결과 이 정도 길이의 심지가 다 타려면 3~5분 정도 걸릴 겁니다. 오차범위가 꽤 크니 터지기 전까진 여기 근처에 접근하지도 마십시오.”
“알겠네. 나도 내 목숨 중한 줄은 알고 있네.”
“그리고 이건 아까 말씀드린 연막탄입니다. 폭탄이 터지면 적당한 시점에 눈치껏 터트린 뒤 자해해 주십시오.”
“자, 자해라고?”
“적당히 가볍게 긋는 선에서 해주시면 됩니다. 요점은 암살자에게 급습을 당했다는 증거 정도면 됩니다.”
“스으으읍… 후우. 알겠네. 대의를 위해서 피를 흘리는 건 당연한 일이지.”
왠지 모르게 비장한 표정을 짓고 있기에 나는 노파심에 한마디 더 던졌다.
“칼로 미친 듯이 쑤시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말 그대로 가벼운 상처기만 하면 됩니다. 멋도 모르고 쑤셔서 근육이라도 상하면 평생 고생할 겁니다.”
“알겠네. 나만 믿게.”
“그렇게 시선을 끌어주시면 그때 제가 볼프강을 암살 후 탈출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혹시 남쪽 창문에 매어놓은 밧줄은 수거하셨습니까?”
“아니, 아직 안 했네. 북쪽부터 들렀다가 남쪽으로 갈 생각이었는데 자네가 북쪽으로 오지 않았나.”
“그럼 그곳으로 탈출하겠습니다. 그 밑에는 해자도 있으니 여차하면 뛰어내릴 수도 있겠죠.”
“알겠네. 이번에 실패하면 꼬리가 밟혀 내가 추궁받을 테니 반드시 성공해야 하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 사전에 실패란 없으니까.”
“무운을 빌겠네.”
나는 배낭에서 필요한 물건들을 챙긴 뒤 4층의 빈방에 숨어들었고 펠릭스는 심지에 불을 붙인 뒤 허겁지겁 수면 가스가 든 통을 들고 방을 나섰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슬슬 터질 때가 된 것 같은데 라는 생각과 혹시 조합이 잘못된 건가 하는 생각이 공존하게 될 때쯤 천지가 개벽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퍼어어어어엉!!!!!!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성이 흔들렸고 그와 함께 펠릭스의 비명 소리가 복도를 뒤흔들었다.
“끄아아아악!! 암살자다! 경비병!!!! 경비병!!”
징수관의 처절한 비명 소리에 계단을 오르내리는 다급한 발소리가 울렸고 나는 속으로 삼십 초를 센 뒤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이 소란 통에도 외부에 병력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대부분 혼란에 빠져있었기에 나는 그들 사이에 섞여 5층으로 뛰어 올라갔다.
4층의 소동 덕분에 5층에 있던 경비병들 일부가 밑으로 내려가긴 했지만, 여전히 경비병들 일부가 남아서 볼프강의 방을 호위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수가 채 다섯이 되지 않았기에 나는 그들을 가볍게 제압한 뒤 볼프강의 방문을 걷어찼다.
쾅!
“누, 누구냐!?”
“참 희한하지. 어떻게 된 게 암살을 위해 찾아가면 하나같이 하는 소리가 그거더라. 그걸 물어본다고, 내가 누구인지 안다고 바뀌는 게 있나?”
본래는 대화를 나눌 생각은 없었지만, 아주 약간의 여흥을 즐기기로 했다. 저놈 하나 죽이겠다고 이 고생을 했는데 그 대가는 받아야 하지 않겠는가.
“겨, 경비!!!”
“내가 경비를 다 죽였으니까 여기에 서 있는 게 아닐까?”
“이이… 으아아아아!”
손에 든 단검을 빙글빙글 돌리며 다가오는 내 모습에 겁을 집어먹은 건지 그는 옆에 놓여있던 와인병을 내게 집어 던졌지만, 내게 닿지도 않았기에 굳이 피할 것도 없었다.
“네 이놈! 지금 네놈 앞에 서 있는 게 누구인지 알고 있는가!?”
“볼프강 아데우스. 아데우스 가문의 적장자이자 이곳 노바라를 다스리는 영주가 아닌가?”
“감히 그걸 알면서 내게 대적하려 드는가!?”
겁을 집어먹었지만 애써 위엄을 차리려는 볼프강의 모습에 난 미소 지으며 천천히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걸 누구보다 잘 아니까 널 죽이러 왔다는 생각은 안 해봤나?”
내가 볼프강에게 다가갈수록 그는 죽음의 공포에 질려서 돼지처럼 꽥꽥 소리 질렀다.
“오, 오지 마라! 가까이 오지 마!!!”
“시간이 별로 없어서 그건 힘들 것 같은데… 그래도 유언을 남길 시간 정도는 줬으니 나 정도는 자비로운 것 아닌가?”
“사, 살려다오. 뭐든 네가 원하는 건 다 주겠다.”
“흠, 뭐든지?”
내가 혹하는 얼굴로 되묻자 그는 동아줄이라도 잡은듯한 얼굴로 애절하고 처절하게 소리쳤다.
“그래. 뭐든지! 돈이든, 백작의 작위든 다 줄 테니 살려만 다오!”
“이상하군. 네가 가진 백작의 작위도, 너의 재산이라 주장하는 돈도 전부 다 펠릭스의 것이 될 텐데.”
“아아… 아아아아!!”
내 대답에 그는 실성한 사람처럼 울부짖었고 나는 그런 그를 비웃으며 단검을 치켜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