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34화
펠릭스라는 내부자까지 포섭한 나는 다시 야간에 담을 넘어 레비아탄 상단으로 복귀했다.
내가 대낮에 버젓이 다닐 수 없는 걸 상단장도 알고 있기에 내 방은 물론이요 상단장의 방까지 활짝 열려있었다. 물론 나는 오늘 얻은 성과로 상단장에게 받을 게 있었기에 그의 방으로 넘어갔다.
상단장 역시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양초를 켠 채 업무를 하고 있었다.
“오늘은 기다리고 계셨군요.”
“조금 피곤하더라도 깨어있는 게 자다가 도끼에 협박당해 일어나는 것보단 낫지 않겠습니까?”
“푸하하하, 상단장님의 농담도 제법 들어줄 만하군요.”
나는 그의 반대편에 마주 앉으며 오늘의 성과를 꺼내놓았다.
“이건 징수관의 필체가 아닙니까?”
“맞습니다. 오늘 그와 진솔한 대화를 통해 협조를 얻어 냈습니다.”
“재주도 좋으시군요. 설마 그 도끼로 대화를 나누신 건 아닐 테고….”
상단장의 눈길이 내 허리춤에 매여있는 도끼로 향했고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의 것을 되찾게 도와준다고 했지요. 뭐, 자세한 건 일이 다 끝나고 나면 알게 될 겁니다.”
그는 궁금하다는 표정이지만 내가 말해주지 않자 굳이 더 캐묻지 않았고 대신 그 역시 테이블 한구석에 있던 자루를 내게 건넸다.
“여기 용병단장님께서 요구하셨던 물품들입니다.”
나는 굳이 대꾸하지 않고 자루를 받아 안의 내용물들을 살폈다.
“저도 어지간하면 최상품으로 구해드리고 싶었지만, 시간 제한이 있던 터라 여기저기서 긁어왔기에 질이 조금 안 좋을 수도 있습니다.”
“뭐, 이 정도면 충분할 것 같네요. 고생하셨습니다.”
어차피 이런 도구는 보조수단에 불과하다. 암살 시에 믿을 건 내 몸뚱이와 판단력, 그리고 철저한 사전 준비뿐이다.
재료들을 챙긴 나는 반쯤 비어있는 와인을 병째로 들이킨 뒤 육포를 씹으며 물었다.
“그래서 상단장님께선 우리 잘나신 볼프강 님과는 좀 어떻게 얘기가 됐습니까?”
“아,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상단장은 드물게 아이처럼 키득거리며 오늘 있던 일을 얘기했다.
“저희 쪽에서 단장님과의 계약은 아데우스 가문과 계약을 하는 시점에서 이미 파기됐다고 얘기하자 그쪽 얼굴이 꽤 볼만하더군요.”
저게 무슨 소리인가 싶을 텐데 상단장의 말을 해석하면 다음과 같다.
―원래 블라디미르가 나랑 계약했던 건 맞는데 너희가 빌려달라고 해서 나는 계약을 파기했다. 따라서 그 이후에 일어난 일은 블라디미르와 계약을 맺은 너희의 잘못이지 우리는 하등 관계가 없다. 괜히 엉뚱한 데다 화풀이하지 말아라.―
탈다스는 지금까지 나에 대한 소식도 모르고 황제에게 연락을 하려고 해도 3달 이상의 시간이 필요했기에 레비아탄의 존속과 자신의 안위를 위해 볼프강에게 간이고 쓸개고 다 내줄 것처럼 굽신거리고 있었다.
볼프강은 볼프강대로 백기 투항하는 탈다스를 보며 어떻게 뜯어먹을까 고민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탈다스가 중지 손가락을 치켜들며 개 같은 소리 지껄이지 말라고 철벽을 치니 볼프강 입장에선 닭 쫓던 개꼴이 된 것이다.
물론 애초에 허점이 많은 변명이었기에 저쪽에서 각 잡고 압수수색이나 내부관계자를 포섭해 진실을 듣게 된다면 전부 들키게 될 테지만, 어차피 지금 당장 필요한 건 시간이었다.
나와 탈다스가 알고 지내던 사이라는 걸 물고 늘어질 수도 있겠지만, 그건 탈다스 개인에 관계된 문제지 상단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얘기다.
즉, 뭘 어떻게 하든 레비아탄이 볼프강의 손에 넘어가고 탈다스가 몰락하기 전에 볼프강의 목이 먼저 떨어진다는 소리다.
“제대로 엿을 날리셨군요.”
“이참에 할 말을 한 거죠. 거기에 오죽 얕보였으면 추적대로 보낸 병력들과 기사들까지 전부 죽었냐고 슬쩍 도발하자 게거품을 물면서 욕설을 하더군요.”
“뒷감당이 되겠습니까?”
아마, 탈다스로서는 내게 자신을 배신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을 심어주고자 한 행동이겠지만, 솔직히 조금 과한 게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뭐 어떻습니까? 전부 다 용병단장님께서 해결해주실 게 아닙니까.”
“어깨가 너무 무겁군요.”
내가 어깨를 두들기며 약한 척을 하자 탈다스는 피식 웃으며 한마디 더 건넸다.
“아무튼, 오늘 일로 꽤 화가 났는지 이쪽에 대한 견제가 꽤 강력하게 들어오더군요.”
뭐, 현대도 그렇지만 국가가 각 잡고 기업 조지려고 하면 얼마든지 조질 수 있다. 아마, 볼프강도 정공법으로 조질 생각이겠지.
“당장 오늘 저녁에 나가야 할 물품도 온갖 트집을 잡아 반출을 금지할 정도였습니다. 아마, 내일 중에 세무조사도 들어올지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병력을 차출한 덕에 영주성의 경계는 이전보다 더 소홀해졌을 겁니다.”
“좋습니다. 내일 새벽에 볼프강의 목을 따러 갈 테니 상단장께선 혼란에 대비하고 계십시오.”
“좋은 소식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 * *
상단장과의 대담이 끝난 뒤 난 낮에는 잠을 자며 체력을 비축하고 오후에는 이비가 건네준 제조법대로 필요한 물품을 만들었다.
제대로 효능까지 검증을 한 뒤 그날 자정이 되자마자 나는 검은색 옷을 입고 준비해뒀던 보조 물품, 그리고 가벼운 단검 몇 자루만 지닌 채 상단 지하에 있는 비상 대피로를 통해 밖으로 나갔다.
그도 그럴 게 영주가 탈다스가 도주할 우려가 있다며 레비아탄 상단을 철저히 감시하고 있고 내부에 배신자들이 얼마나 있을지 몰랐기 때문이다.
“흐음.”
그렇게 지하에서 지상으로 올라온 나는 주변에 있는 집의 벽을 타고 올라가 지붕에 납작 엎드렸다. 펠릭스로부터 경비병들의 순찰 루트를 이미 받아놓긴 했지만, 또 언제 어떻게 바뀌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렇게 30분 동안 쥐죽은 듯 엎드린 채 지도를 보며 경비병들의 순회 루트를 확인한 나는 변동이 없는 걸 확인하자마자 머릿속에서 가볍게 이동 루트를 재점검했다.
“음… 지금 북쪽으로 가기는 너무 늦었고… 남쪽으로 넘어 들어가야겠군.”
이미 순찰 루트에 이어 영주성 내부의 지도를 받은 것도 모자라 오늘은 성에서 펠릭스가 숙직을 하고 있었기에 침입하는 건 누워서 떡 먹기였다.
그렇게 벽을 타고 올라간 나는 그가 미리 열어둔 3층 창문을 통해 성안으로 넘어 들어갔다.
“어후, 시벌. 라그나르가 고소공포증 없는 게 다행이네.”
한숨과 함께 아래에 묶여 있던 밧줄을 푼 나는 바로 옆에 있는 방의 문을 락픽으로 따고 몸을 숨겼다.
어차피 이곳은 창고 용도로 사용되기에 경비도 없고 사람들도 오지 않는다고 했으니 이동 루트를 다시 점검하기에는 최적의 장소였다.
“볼프강이 5층에 머문다고 했었지.”
나는 지도와 펠릭스가 건네준 순찰로를 확인하며 이동로를 점검했다. 단순히 계산하면 한 층만 올라가면 되지만, 당연히 거기에는 경비들이 있을 것이다.
때려눕히려면 얼마든지 때려눕힐 수 있었지만, 조금이라도 실수해서 소리를 치거나 호각이라도 부는 순간 암살은 끝이다.
아니, 사실 암살이라는 게 다 죽여서 목격자를 전부 없애면 그것도 암살이긴 하지만, 그 과정에서 내 정체가 들킬 수도 있기에 최대한 조용히 처리할 생각이었다.
―똑똑
그 순간 누가 문을 두들겼고 나는 숨을 삼킨 채 단검을 뽑아 들었다. 그렇게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문 뒤에 숨어 상대가 들어오기만을 기다릴 때 작지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펠릭스일세. 혹시 이곳에 있나? 라그나르?”
그 말에 나는 여전히 몸을 숨긴 채 조용히 잠금장치를 풀었고 이내 삐끄덕거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펠릭스는 랜턴을 들고 방 안으로 들어와 여기저기 둘러보다가 문 뒤에 숨어있는 나를 보고는 헛숨을 들이켰으나 이내 나라는 걸 확인한 뒤 가슴을 쓸어내렸다.
“후우, 정말 잠입해왔군.”
“혼자 오셨습니까?”
“잠시 자료 좀 찾아본다고 하고 왔네. 호위병들이 쫓아온다는 걸 말리느라 얼마나 진땀 뺐는지 아나?”
“말이 경비지 감시목적도 있지 않겠습니까.”
내가 정곡을 찌르자 펠릭스는 쓰게 미소 짓더니 주변을 둘러보며 말을 돌렸다.
“혹시 여기에 숨어있던 건 내가 호위병을 데리고 왔을 때를 대비하기 위함이었나?”
“그렇습니다. 혹시 모를 미연의 사태도 방지해야 했고요.”
물론 그 미연의 사태가 펠릭스가 날 배신하는 경우를 뜻했기에 그는 입술을 달싹이며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한배를 탄 사이에 그런 말을 면전에서 들으니 조금 서운하긴 하지만, 그런 철두철미한 성격이 지금까지 자네가 살아남을 수 있던 요인이겠지.”
“그렇게 생각해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런데 제가 입을 옷은 챙겨오셨습니까?”
“물론이네.”
그는 방 안을 여기저기 뒤적이더니 내게 옷을 건넸다. 성 내부에서 일하는 급사가 입는 옷이었는데 언제 내 사이즈를 쟀는지 남거나 모자라는 부분 없이 딱 맞았다.
“자네 혼자 5층을 갈 순 없을 테니 저 짐 더미를 들고 날 따라오게.”
일단은 5층의 동태를 살피고 경비 인력을 확인하는 게 우선이었기에 나는 군말하지 않고 그의 뒤를 따랐다. 중간중간 경비병들을 만났지만, 펠릭스의 뒤에서 서류 더미를 들고 있다 보니 별다른 제지는 없었다.
하지만 5층으로 들어가는 입구는 예외였다.
“징수관님. 현재 이곳은 영주님께서 주무시고 계십니다. 영주님이 주무시고 계실 때는 출입 금지인 걸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나도 그걸 모르는 건 아니네만, 세액 계산이 조금 잘못되어서 전년도의 자료를 확인해봐야 하네. 돈과 관련된 모든 문서는 영주님이 머무시는 5층 서고에 있는 걸 자네도 알지 않나.”
“내일 하시면 안 되겠습니까?”
“영주님께서 당장 내일까지 해놓으라고 하셨네. 그게 아니면 왜 내가 내 차례도 아닌데 오늘 당직을 자청했겠나.”
“으음… 허면, 저 급사라도 두고 가시지요. 이건 보안상 어쩔 수 없습니다.”
“자료가 많을 텐데 자네가 다 들고 와 줄 텐가? 그러겠다면 나도 상관없네. 비리비리한 급사보다야 빠릿빠릿한 자네가 더 낫지.”
대놓고 부려 먹겠다는 말에 그건 또 싫었는지 그는 난처한 얼굴을 짓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최대한 빠르게 갔다 오셔야 합니다.”
경비병의 허가가 떨어지자 나는 5층으로 올라갔고 그곳에는 절로 한숨이 새어 나올 정도로 많은 병력들이 경계를 서고 있었다.
우선, 영주가 머무는 것처럼 보이는 방에 두 명의 병사가 경계를 서고 있었다. 저 정도야 당연히 예상하긴 했지만, 그의 방을 기준으로 열 명 이상의 병력들이 순찰을 하며 철통같이 지키고 있었기에 다 처리하는 건 무리였다.
숫자가 다섯 명 이하라면 지금 당장 다 처리하고 볼프강을 조질 테지만 아무래도 열 명 이상은 무리였다. 물론, 전부 다 조질 수 있냐 없냐고 묻는다면 가능하지만, 지금 내 목표는 볼프강을 죽이는 거지 그 휘하의 조무래기들을 죽이는 게 아니다.
“자기 목에 저 정도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이게 게임이었다면 멍청한 AI를 이용해 적당히 하나둘씩 꼬드겨서 조졌을 테지만, 이건 현실이었기에 하나둘씩 꼬시거나 병사로 변장하는 건 불가능했다.
상식적으로 밑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서 확인하고 온다고 했던 동료가 갑자기 뒤통수에 바코드 찍혀있는 대머리로 변해서 돌아오면 무슨 생각이 들겠는가.
물론, 그렇다고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