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33화
내 말이 꽤 충격적이었는지 펠릭스는 그대로 굳어버렸고 잠시 뒤 제정신을 차린 펠릭스는 말까지 더듬으며 내게 삿대질을 했다.
“어, 어, 어떻게 그걸….”
“아무렴 제가 그런 것도 모르고 징수관님을 찾아오겠습니까? 다만, 본격적인 얘기를 나누기 전에 다시 한번 제 소개를 해야 할 것 같군요.”
나는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머리를 가볍게 정리한 뒤 정중하게 나를 소개했다.
“천공신 오딘을 섬기는 바이킹들의 왕. 라그나르 로드브로크가 아데우스 가문의 진정한 계승자이자 정당한 후계자인 펠릭스 아데우스 경을 만나 뵙습니다.”
내 인사에 그는 여전히 굳은 얼굴로 내게 그 이유를 물었다.
“어쩐지 그 무위가 심상치 않다 싶더니 이유가 있었군. 그래서, 죽었어야 할 자네가 내 눈앞에 나타난 이유가 뭐지?”
“대강 짐작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본래 당신이 가져야 할 것을 돌려드리겠습니다.”
“그 대가는 뭐지?”
“볼프강의 몰락.”
구미가 당길 법도 하지만 펠릭스는 고개를 저으며 현실을 이야기했다.
“승산이 있다고 생각하나? 난 아무런 힘도 없는 징수관 나부랭이에 불과하고, 그대가 천하에 둘도 없을 장사이자 휘하의 병사들이 단련된 정병이라 하지만 그 숫자가 적지. 레비아탄 또한 많은 돈을 가지고 있다지만 볼프강에게 묶여서 아무것도 못 하고 있지 않나.”
“진실을 알기를 원하십니까?”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진실인지 모르겠군.”
“그건 직접 확인해보시고 결정하시지요.”
나는 품속에서 칼리나가 탈다스에게 보낸 감사 편지를 먼저 건네주었다. 편지의 외부에 찍혀있는 인장에 그는 흠칫 놀랐지만, 안의 내용을 확인하고는 이내 눈살을 찌푸렸다.
“이건 단순히 변경백 각하의 감사 편지가 아닌가? 확실히 탈다스와 볼프강이 완전히 갈라서게 된 계기가 그 알렉산드라이트라는 보석 때문은 맞지만, 고작 그거 가지고 칼리나 변경백 각하가 이 일에 끼어들 거라고 보나?”
“불가능하다 보십니까?”
“당연하지! 우리 편에 서주시기는커녕 중재만 해줘도 감지덕지할 걸세.”
“그렇군요. 그럼 하나 더 보시겠습니까?”
나는 다른 편지 하나를 더 보여주었고 펠릭스는 긴가민가한 표정으로 편지를 받았다. 그렇게 천천히 안의 내용을 읽어가던 그는 손을 부들부들 떨더니 흥분과 고양감에 가득 차 내게 소리쳤다.
“이게 정녕 사실이란 말인가!?”
“쉬잇. 목소리가 너무 큽니다. 징수관님.”
“미, 미안하네. 그보다 이 편지는… 대체 자네는 누군… 아니, 누구십니까?”
“그렇게 질문하실까 봐 아까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그리고 굳이 존대는 하지 않아도 됩니다.”
“으음… 알겠네. 그보다 이건 내가 감당하기가 힘들 것 같군.”
하지만 그런 말을 하는 그의 입과는 반대로 그의 눈은 웃고 있었다.
“이제 제가 어떻게 펠릭스 경의 비밀을 알았는지 이해하셨습니까?”
“이제야 전말이 대강 이해가 되는군. 애초부터 자네가 내게 접근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나?”
“말은 바로 하셔야지요. 제가 접근한 게 아니라, 경이 먼저 제게 접근한 게 아닙니까.”
“…….”
“뭐, 이해는 합니다. 볼프강이 시키는데 거절할 순 없었겠지요.”
“맞네. 나는 사생아였고 그렇기에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였지. 하지만 아버지는 그런 나를 어여삐 여기셨고 가르옌 가문의 양자로 들어가게 됐네.”
갑작스레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펠릭스의 모습에 나는 입을 다물고 조용히 그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그렇게 가르옌 가문에서 자라다가 아버지가 날 다시 부르더군. 그때부터 아데우스 가문과 아버지를 섬기며 일하게 됐지만… 그것도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로는 눈치 보이는 일이 됐네.”
“볼프강이 알아챘나 보군요.”
“맞아. 어떻게 알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놈은 날 양자로 들여주신 가르옌 가문의 양부모님들까지 들먹이면서 내게 온갖 더러운 일을 시키더군.”
“뭐, 제가 그런 개인의 사정까지 깊게 관여할 문제는 아니지요. 중요한 건 볼프강이 징수관님과 저의 공통된 적이라는 거죠.”
“그래. 거기에 칼리나 각하의 도움이 있다면 승산이 높아질 테지. 하지만 편지를 보아하니 칼리나 각하가 직접적으로 개입하는 건 아닌 것 같은데….”
“명분이 없지 않습니까.”
“하긴, 그러니까 자네가 날 찾아온 거겠지. 나로서는 오히려 행운이라고 해야 하나?”
침묵은 긍정이라고 했던가. 나는 그저 빙긋 웃으며 그를 바라보았고 그게 마음에 안 들었던 건지 펠릭스는 심술궂은 표정을 지으며 내게 물었다.
“하지만 내가 자네의 제안을 거절할 수도 있지 않나? 그럼 어쩔 생각이었나?”
“글쎄요. 도끼는 답을 알고 있지 않을까요?”
“살벌하게 이해가 잘 되는군.”
“뭐, 제 제안에 징수관님께서 어떤 선택을 하실지는 자유입니다만, 굳이 침몰하는 배에 타고 있을 정도로 징수관님께서 멍청하지는 않잖습니까?”
“칭찬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고맙네.”
“거기에 제가 죽으면 노바라는 분노한 칼리나의 군대에 짓밟히게 될 겁니다. 아마 노바라에 사는 모두가 죽고 잿더미만 남지 않을까요?”
“설마 그렇게까지야… 아니, 잠깐만. 설마 자네가 과거 칼리나 변경백의 복위를 도와줬던 용병단장인가?”
“예?”
생각지도 못한 징수관의 말에 나는 멍청한 얼굴로 반문했고 그런 내 반응에 징수관은 잊으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아, 미안하네. 내가 착각했나 보군.”
“아니요. 그 얘기 좀 자세히 해 보십시오.”
“으응? 나도 소문만 들은 것뿐이네.”
“상관없습니다.”
어쩌면, 나와 칼리나의 관계를 확인할 수 있는 실마리였기에 나는 그를 취조하듯 캐물었고 징수관은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도 순순히 입을 열었다.
“알겠네. 한 10년 전쯤인가? 카노사 가문이 밀라노의 대영주였던 발데크 가문과 갈등이 일어났네.”
본편에서는 시작부터 밀라노와 카노사, 투스카니의 대영주로 나왔는데 지금 하는 얘기를 들어보니 카노사만 가문의 영지였던 모양이다.
“갈등이라 하심은?”
“뭐,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내가 듣기로는 약혼 과정에서 문제가 불거졌다고 들었네. 남부로 세력을 뻗치고 싶었던 밀라노의 영주는 카노사 가문의 장녀와 약혼을 제안했네.”
“그걸 거절했나 보군요.”
“그러네.”
“결혼 동맹을 맺게 되면 카노사 가문이 더 이득 아닙니까? 카노사가 작은 도시는 아니지만, 밀라노와 비교될 정도는 아니잖습니까.”
괜히 귀족들이 정략결혼을 하는 게 아니다. 저 정도라면 쌍방 간에 이득일 텐데 상대 쪽에서 제시한 제안이 별로 마음에 안 들었던 모양이다.
“그게 정상적인 약혼이라면 상관없었겠지만, 당시 발데크 가문의 가주는 50살이 넘은 인물이었고 칼리나 영애는 15살인가 그랬을 걸세.”
“허, 날강도 새끼가 따로 없네.”
“동감하네. 더 웃긴 건 정식 부인으로 맞이하는 것도 아니고 첩으로 들이는데 누가 귀한 딸을 그런 늙다리에게 가져다 바치겠나. 당연히 카노사 가문의 영주는 거절했지.”
“거기에 앙심을 품은 모양이군요.”
“이유야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네.”
고작 결혼 제의했다가 거절당한 것 가지고 대귀족이 무슨 앙심을 품느냐고 의아해할 수도 있는데 귀족이라고 이야기 속에 나오는 것처럼 판에 박은 악역만 있는 것도 아니고 영화에나 나오는 고귀한 이들만 있는 것도 아니다.
그들 역시 한 명의 사람에 불과하고 그 때문에 대부분의 문제는 이런 사소한 계기에서 시작된다. 하지만 내 생각은 조금 달랐는데 애초에 발데크 가문의 가주는 카노사에 눈독을 들이고 있었을 것이다.
밀라노의 대영주쯤 되면 눈치가 없는 건 아닐 텐데 자기 아들이나 손주도 아니고 자신과 결혼하자는 제안을 카노사의 영주가 받아들이지 않을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테니까.
그런 내 생각과는 별개로 펠릭스는 말을 이어갔다.
“밀라노의 영주는 카노사 가문을 단죄하고 박살 내기 위해 당시 투스카니를 다스리던 발리에르 가문을 이용했네. 둘 다 남부에 있어서 그런지 서로 사이가 굉장히 안 좋았으니.”
“둘은 또 왜 사이가 안 좋았답니까?”
“그건 나도 모르네. 단지 선조 대에서부터 사이가 안 좋았다고 하더군. 아무튼, 본격적으로 마찰이 일어나게 된 건 발리에르 가문이 카노사 가문이 후원하는 상단을 습격한 데서 시작됐네.”
“상단 습격이라… 간이 제대로 부었군요.”
이 시대의 상단 습격이라는 건 현대로 비유하자면 선전포고나 다름없었고 그걸 주도한 놈들은 소말리아 해적보다 더한 쓰레기 취급을 받았다.
십자군 전쟁 시기에 십자군들이 계속 캐러밴들을 습격하자 살라딘이 빡쳐서 대영주였던 샤티용의 레이놀드를 직접 참수해버린 건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뭐, 밀라노의 영주가 뒤를 봐주겠다는데 무서울 게 뭐가 있겠나? 아무튼, 그렇게 숨긴 것도 아니고 대놓고 발리에르의 이름으로 상단을 조져놨으니 카노사 가문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네.
당연히 병력을 끌고 발리에르 가문의 영지를 침략해서 마을을 불태우고 주민들을 노예로 잡아갔네. 그럼 발리에르 가문은 그걸 보고 가만히 있겠나?”
“결국, 영지전이 벌어졌겠군요.”
원래 말로 안 되면 주먹이 나가는 법이다. 싸움이라는 게 내가 하기 싫다고 안 벌어지는 게 아니지 않은가.
“정확하네. 사실, 카노사 가문은 체면치레만 하는 선에서 적당히 마무리 짓고 싶었던 모양이지만 발데크 가문이 불을 지피며 갈등은 더 심화됐네. 결국, 두 영지의 병력들 사이에서 유혈사태가 벌어졌고 대규모 영지전이 벌어지게 됐지.”
“그 전투에서 카노사 가문은 대패했네. 단 한 번의 영지전으로 병력과 기사들이 전멸했고 그들이 가지고 있던 이권을 전부 잃어버렸지.”
“밀라노의 병력이 개입했군요.”
“그게 아니고서야 그 대패가 설명될 리가 있겠나. 하지만 한 번의 패배에 대한 대가는 너무도 가혹했는데 카노사 가문의 가주는 모든 책임을 지고 자살했네. 정확히는 자살 당한 거지.”
“뭐, 흔한 얘기군요.”
“흔하다면 흔한 얘기지. 그리고 그 멸문의 위기 속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칼리나 영애는 가문을 일으키기 위해 제국의 북부로 도망쳤네.”
“거기서 만난 게 예의 그 야만인 용병입니까?”
“정확하진 않지만, 소문이 그러네. 칼리나 여변경백은 그의 조력을 받아 카노사 영지를 재탈환함은 물론 투스카니까지 점령하고 발리에르 가문을 멸족시켜버렸지. 게다가 밀라노까지 점령해 발데크 가문까지 박살 내 버렸네.”
“그때 함께했던 게 그 야만인 용병이라는 말씀이십니까?”
“그렇다네. 이미 그 전쟁에 참전했던 이들은 다 죽어서 진실을 알고 있는 건 칼리나 변경백과 그 휘하의 병력, 그리고 야만인 용병뿐이겠지만.”
“흠… 그렇군요.”
듣고 나니 대강 칼리나와 라그나르의 관계가 예상된다. 그녀가 내게 얘기했던 말들이나 지금의 이야기를 보면 아마 80% 정도는 진실이겠지.
나머지는 칼리나와 함께 있다 보면 알기 싫어도 알게 될 것이다. 힐데와의 과거도 그녀와 함께 지내다 보니 저절로 기억나고 알게 됐으니까.
“이 얘기의 용병이 혹시 자네 아닌가?”
“글쎄요. 그것보다 볼프강 암살을 도와주실 겁니까?”
별로 답하고 싶지 않다는 내 말을 알아챘는지 펠릭스는 굳이 더 캐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 말고 내가 살아날 방법은 없지 않나.”
“걱정 마십시오. 펠릭스 경의 공적은 칼리나에게 아주 잘 얘기해줄 테니.”
“자네만 믿고 있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