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32화
“……해서, 지금에 이르게 된 겁니다.”
나는 거진 2시간 동안 이야기를 떠들었고 조용히 듣고만 있던 상단장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젓고 있었다.
“믿어지지가 않는군요. 볼프강이 단장님을 죽이려 하는 건 알고 있었고, 그를 이용해 저를 압박하리라는 것도 알고 있었지만, 설마 단장님께서 칼리나 변경백 각하와 아는 사이였다니.”
하긴, 나라도 동남아에서 온 응우옌이라는 별 볼 일 없어 보이는 사람이 사실은 대기업 오너나 국회의원이나 대통령과 안면이 있다고 하면 믿기 힘들겠지.
“이전에 조금 인연이 닿았던 것뿐입니다.”
“그렇다고는 해도….”
여전히 상단장의 얼굴에는 의심스러운 표정이 깃들어 있었기에 나는 증거물을 꺼냈다. 원래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하지 않던가.
“백 번 듣는 것보다 한 번 보는 게 낫다지요? 상단장께서 당연히 그런 반응을 보일 줄 알고 칼리나의 친필편지도 가져왔습니다.”
아무리 그가 여러 귀족과 연이 닿아있는 상단장이라고 해도 칼리나는 그 급이 다른 귀족이었기에 탈다스는 조심스럽게 편지를 받아서 펼쳤다.
나도 편지를 읽어보긴 했는데 이런저런 귀족적 수식어를 제외하면 ‘자신은 라그나르 로드브로크와 친분이 있으며 그가 하는 일을 전적으로 지원할 테니 라그나르를 믿어라.’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보내는 사람이 사람인 만큼 상단장은 몇 번이나 편지를 다시 읽으며 자신이 알아채지 못한 부분이 있나 확인했다. 그렇게 안의 내용을 외울 정도로 읽은 뒤에야 탈다스는 상기된 얼굴로 내게 이야기했다.
“변경백 각하께서 저희의 뒷배가 되어주신다면, 더는 두려울 게 없겠군요.”
“이제 믿어주는 겁니까? 제가 그 편지를 사칭할 수도 있는데?”
내가 슬쩍 던져본 말에 탈다스는 피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난 뒤 자신의 서랍에서 편지 하나를 꺼내왔다.
그 편지는 수집품이라도 되는 것 마냥 여러 겹으로 포장되어 있었는데 그는 조심스레 포장을 하나씩 풀며 내게 얘기했다.
“이전에 제가 알렉산드라이트라는 보석을 칼리나 각하께 팔았던 적이 있습니다. 그게 캣츠아이 효과를 내기도 하고 크기도 꽤 커서 나름 희귀한 보석이었던 터라 칼리나 각하의 이름으로 감사 편지를 하나 받았던 적이 있습니다.”
그래. 그리고 그것 때문에 볼프강 영주와 사이가 갈라졌다고 했지. 원래 그 이전부터 사이가 안 좋긴 했지만, 저 사건이 도화선이 되긴 했을 것이다.
칼리나 역시 그를 기억하고 있고 나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기에 칼리나의 편지를 가져온 것이다. 그가 멍청이가 아니라면 그 편지를 버렸을 리가 없을 테니까.
“물론 제가 받은 편지는 변경백 각하의 친필이 아니라 이 편지와 직접 비교할 수는 없겠습니다만….”
그는 두 편지의 말미에 찍혀있는 인장을 비교해보면서 미소 지었다.
“두 개의 인장이 이리 정확하게 일치하지 않습니까? 아무리 용병단장님의 간이 커도 감히 칼리나 각하의 인장을 사칭할 리가 없잖습니까.”
“말했듯, 제가 상단장님께 굳이 거짓말을 할 이유는 없지요.”
“맞습니다. 다만 너무나도 믿기 힘든 이야기라 제가 재차 확인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을 너그럽게 이해해 주십시오.”
“당연히 이해합니다. 아무튼, 서로 확인할 것도 확인했으니 이제 본격적인 대책을 논의해 보지요. 다만 그전에… 레비아탄의 현 상황은 어떻습니까?”
내 말에 상단장의 얼굴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굉장히 안 좋습니다. 단장님께서도 짐작했겠지만, 볼프강은 용병단장님을 비롯해 자신의 병사와 기사들의 소식이 전부 끊기자 기다렸다는 듯 그 책임을 저희에게 돌렸습니다.”
“알만하군요. 명분은 뭡니까?”
“볼프강이 말하기를 ‘귀족 사칭범’이 돈을 노리고 ‘귀족 영애’를 납치했다고 하더군요.”
“푸하핫, 함께 호위하던 병력들이 죽었단 얘기는 안 합니까?”
“창피해서라도 병력이 죽었단 소리는 못 하지 않겠습니까.”
사실 이는 처음부터 외통수였는데 볼프강은 내가 호위를 하는 과정에서 죽든, 아니면 자신의 병사들을 물리치고 도망치든 상관없었을 것이다.
그에게 필요한 건 탈다스 상단장을 탄압하고 휘저을 수 있는 명분이었고 내가 모습을 감추자 있지도 않은 죄를 뒤집어씌워 그 책임을 고용주인 상단장에게 돌린 것이다.
말도 안 되는 억지일지도 모르지만, 이건 그나마 볼프강이 좆밥 영주니 이런 가짜 ‘명분’이라도 만든 것이다. 솔직히 칼리나 정도 되는 대영주라면, 그냥 힘으로 찍어누르는 게 가능하다.
단지, 얻는 것에 비해 뒷말이 나오고 자신의 명성과 명예에 흠집이 가며 다른 귀족들에게서 이를 빌미로 정치적인 공격을 받을 수가 있으니 그러지 않는 것뿐이다.
“볼프강 입장에선 나쁘지 않은 수였지만 두 가지 간과한 게 있으니 하나는 제가 이렇게 살아남았다는 것과….”
“용병단장님께서 무려 변경백과 친밀한 사이였다는 점이지요.”
정확히 요점을 집어내는 상단장을 보며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사실 저도 굳이 칼리나의 힘을 빌릴 생각은 없었습니다. 원래는 바로 황제 폐하께 고할 생각이었는데 그녀의 도움을 받는 게 좀 더 나을 것 같아서요.”
내가 황제 머릿속에 사는 것도 아니고 그저 바르바로사가 어떤 성향이라는 것만 알고 있지 그가 내 제안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일지까지 예측할 순 없다.
큰 틀에서의 성향만 동일하지 랜덤 변수로 세부적인 사항이 조금씩 바뀌는 데다 사람이라는 게 단어 하나로 정의할 수 없지 않던가.
가령 힐데가 내게 까칠하게 굴면서도 신경 써주고 아낀다고 타인에게도 그렇게 대하는 건 아니니까. 그 때문에 어떻게 나올지 모르는 바르바로사보다는 칼리나의 도움을 받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한 것뿐이다.
“그 머릿속에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를 황제보다야, 칼리나가 더 낫지 않겠습니까?”
“음, 저는 솔직히 멀리 떨어져 있는 황제 폐하가 더 낫다고 생각되지만, 단장님께서 칼리나 각하와 그렇게까지 친밀하고 가까운 사이라면 당연히 칼리나 각하가 훨씬 낫지요.”
“적어도 입 닦고 쓱싹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믿고 있겠습니다. 아무튼, 이렇게 단장님께서 무사히 돌아와 주셔서 다행입니다.”
“제가 가진 레비아탄의 지분이 몇 프로인데 죽겠습니까?”
내가 가볍게 농담을 던지자 그는 드물게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웃음을 터뜨렸다.
“푸핫, 사실 일주일 정도만 더 기다려보고 소식이 없으면 단장님께서 사망했다 판단하고 직접 제 연줄을 통해 황제 폐하께 고할 생각이었습니다.”
“제가 살아 돌아왔으니 상단장님께서 그런 수고를 할 필요는 없게 됐군요.”
“맞습니다. 그래서 라그나르 경. 제가 뭘 해드리면 되겠습니까?”
역시 머리가 잘 돌아간다. 내가 이곳에 온 게 단순히 근황 보고 때문만은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다. 하긴, 상단장쯤 해 먹으려면 당연히 머리가 잘 돌아야겠지.
“앞서 말씀드렸듯 영주를 암살하기 위해선 어느 정도 혼란이 필요합니다. 최대한 영주와 마찰을 일으키면서 그의 신경을 돌려주십시오.”
“흠, 그 정도야 충분히 할 수 있지만, 최근에 호위를 늘렸다고 하는데 괜찮겠습니까?”
“도둑 한 사람을 경비 열이 못 막는다 하지 않습니까.”
“알겠습니다. 제가 가진 인맥을 이용해 최대한 그에게 반항하며 신경을 긁어두겠습니다.”
“그리고 여기 적혀있는 걸 준비해 주십시오.”
나는 말과 함께 품속에서 이비가 적어둔 재료가 적힌 종이를 내밀었다. 원래는 완제품을 가지고 오려고 했는데 휘발성이 강한 데다 만든 지 3일 안에 효과가 사라지기에 제조법만 받아왔다.
“음… 알겠습니다. 더 필요하신 건 없습니까?”
“영주 초상화와 그에 대해 알고 있는 모든 정보가 필요합니다.”
“말씀하신 물품까지 해서 전부 이틀 안에 준비해드리겠습니다.”
“좋습니다. 믿고 기다리겠습니다.”
어느새 조금씩 동이 터오고 있었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내 모습에 상단장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혹시 따로 하실 일이 있습니까? 별일 아니라면 저희가 도와드리겠습니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그냥 저희 일을 도와줄 친구 좀 만나고 올 생각이라서요.”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게 심복이 돌아서는 거라지? 어디, 볼프강이 얼마나 사람 관리가 잘 되어 있는지 확인해 볼 시간이다.
* * *
최근 노바라 영지의 세금 징수관 펠릭스 폰 가르옌은 죽을 맛이었다. 노바라의 주인이자 자신이 섬기는 영주 볼프강이 대놓고 자신을 찍어내려는 움직임이 보였기 때문이다.
“후우… 억울해서 미칠 것 같군.”
아니, 억울한 걸 넘어서서 원통할 정도였다. 좀 더 그럴듯한 이유도 아니고 단순히 블라디미르 스바치치라는 귀족… 뭐, 볼프강 왈 귀족 사칭범이라는데 어쨌든 그와 친하게 지냈다는 것 하나로 자신을 찍어내려고 하는 게 말이 되던가.
처음부터 블라디미르와 친해지라고 명령했던 건 볼프강이었고 인제 와서 고작 그런 걸로 찍어내기에는 명분이 너무 구차하지 않던가.
“시팔… 거기에 뭐가 어쩌고 어째? 뇌물 수수 및 공금 착복이랑 배임 혐의라고?”
마음속 깊숙한 곳에서 볼프강에 대한 참을 수 없는 분노와 울분이 끓어 올라왔다. 위에 언급된 혐의들은 전부 다 레비아탄 상단과 관련된 일이었다.
당연하겠지만, 그간 레비아탄 상단에 가해졌던 말도 안 되는 트집부터 해서 검열이나 불시검문과 같은 온갖 개지랄은 철저히 볼프강의 명령과 묵인하에 이뤄졌던 일이었다.
애초에 고작 세금 징수관인 자신이 노바라 경제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레비아탄 상단을 상대로 감 놔라 배 놔라 한다는 게 말이나 되던가?
결국, 자신의 병사들까지 희생한 대가로 레비아탄 상단을 사냥할 수 있었고 이제 사냥이 끝났으니 필요 없어진 사냥개를 삶아버리겠다는 얘기겠지.
“시발… 시발…… 시발!!!!”
굳이 볼프강을 거스르기 싫어서 그간 그를 대신해 온갖 더러운 일을 도맡아 하지 않았던가. 근데 인제 와서 모든 책임을 자신에게 뒤집어씌우다니… 술이라도 마시지 않으면 제정신을 유지하지 못할 것 같았다.
“징수관님이 그렇게 거친 말을 하실 줄 몰랐군요.”
어디선가 들어봤던 목소리에 소름이 돋은 펠릭스는 벌떡 일어나 뒤를 돌아보았고 그곳에는 이곳에 있어서는 안 될 이가 자신만만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블라디미르? 어떻게 자네가!?”
“잘 지내셨습니까? 징수관님. 말씀하시는 걸 보니 별로 좋아 보이시지는 않습니다만….”
“나, 날 어떻게 할 셈인가?”
그가 어떻게 자신의 집에 침입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저, 그가 왜 자신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는가가 중요할 뿐이다.
그리고 그와 자신의 위치를 고려해봤을 때 별로 좋은 목적으로 방문했을 거라곤 생각되지 않는다. 비록 자신과 관계가 나쁜 건 아니지만, 공은 공이요 사는 사니까.
“별로 어떻게 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냥 징수관님과 이야기를 좀 하고 싶어서요.”
하지만 그는 진짜 이야기하려는 게 용건인지 뚜벅뚜벅 걸어와 자신의 앞에 마주 앉더니 반쯤 비어있는 술병을 통째로 벌컥벌컥 들이켰다.
“크으, 역시 징수관님의 와인 취향은 끝내주는군요.”
“아니, 와인이고 지랄이고 지금 자네 때문에 난리가 난 건 알고 있는가?”
“잘 알고 있습니다. 분명 제가 공작가의 영애를 납치했느니 죽였느니 하는 뭐 그딴 소리가 나돌고 있겠지요? 그 와중에 저도 죽었다는 얘기가 떠돌 거고요.”
“….”
그 말 그대로였기에 펠릭스는 입을 다물었고 그는 술병을 내려놓으며 자신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얘기했다.
“볼프강이 무슨 개소리를 지껄였는지는 모르지만, 제가 모든 진실을 알려드리겠습니다.”
“때론 모르는 게 약일 때가 있는 법이네.”
“틀린 말은 아닙니다만, 아데우스 가문의 사생아이자 볼프강의 형제인 당신은 알아야 할 겁니다. 펠릭스 아데우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