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31화
칼리나와의 면담을 마친 나는 집사의 안내를 받아 동료들이 머무는 방으로 들어갔다. 그 안에서 초조한 얼굴로 날 기다리고 있던 힐데는 벼락같이 다가와 내 몸을 여기저기 살피기 시작했다.
“그 미친년한테 뭔 짓 안 당했습니까?”
“아무 짓도 안 당했어. 그러니까 냄새 맡는 건 좀 멈춰봐. 솔직히 부끄럽거든?”
힐데처럼 예쁘장하게 생긴 여성이 킁킁거리면서 냄새를 맡는 건, 무슨 벌칙인가 싶다.
살며시 그녀를 밀어내는 날 보며 힐데는 게슴츠레하게 눈을 뜨더니 이내 고개를 획 돌렸는데 하는 모양새가 고양이가 따로 없다.
“주군, 혹시 안에서 따로 먹거나 드신 게 있으십니까?”
“그냥… 와인? 칼리나도 마셨으니 별문제 없을 거야.”
“혹시 모르니 간단히 몸 상태 좀 확인해보겠습니다.”
그렇게 말한 이븐 시나는 찬찬히 내 몸 여기저기를 살피기 시작했고 별 이상이 없는 걸 확인하고는 차가 담긴 찻잔을 내밀었다.
“독소를 배출해주고 정신을 맑게 해주는 허브티입니다.”
“고마워. 잘 마실게.”
“별말씀을. 마땅히 제가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
이렇게 사근사근하게 대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니 뭔가 감회가 새롭다. 원래의 그녀… 그러니까 영원한 충성의 맹세를 한 게 아닌 상태로 합류한 이븐 시나는 힐데 못지않게 성격이 지랄맞다.
세상을 떠돌면서 별의별 꼴을 다 봤을 테고 그 외모로 인해 불이익을 본 경우가 많을 테니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삐딱하고 뒤틀리는 건 당연하다면 당연한 얘기였다.
그래서 호감도 바닥 찍고 플레이어를 떠날 때도 ‘너도 결국 날 이용만 하는군. 함께해서 더러웠고 다신 만나지 말자.’라는 말과 함께 떠나간다.
“근데 그거 계속 쓰고 있으면 갑갑하지 않아? 나랑 있을 때는 벗어도 상관없어.”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하지만 흉물스러운 모습을 주군께 보여드릴 수 없는 제 마음을 이해해 주십시오.”
사실, 그녀의 원판이 못생겼냐고 하면 그건 또 아니었다. 물론 지금의 모습이야 보기만 해도 혐오감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올 정도지만, 상처를 치료하고 난 그녀는 여리여리하면서도 날카로운 인상을 지닌 미녀였다.
한마디로 그녀는 긁지 않았지만, 당첨이 확실한 복권이었고 그런 그녀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기에 현재의 모습을 봐도 별다른 생각이 들지 않았지만, 그녀는 아닌가 보다.
“네가 불편하면 어쩔 수 없지. 마음이 바뀌면 언제든지 벗어도 좋아. 말했듯 난 네 능력을 높이 산 거니까.”
내 말에 이븐 시나는 조용히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했고 그녀가 내준 차를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싹 비운 나는 둘을 바라보며 칼리나와 나눴던 얘기를 풀었다.
“미쳤습니까? 왜 굳이 암살을 하려는 겁니까.”
“주군.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당연히 둘에게서는 온도 차는 다르지만 날 걱정하는 말이 나왔고 나는 걱정하지 말라는 듯 가슴을 탕탕 두들겼다.
“황제를 암살하는 것도 아니고 애송이 하나 암살하는 건 식은 죽 먹기지.”
한참 컨셉질을 할 때는 고위급 귀족이나 왕은 물론이요 황제들 목까지 따고 다녔던 게 나다. 한번은 황제에 오르는 족족 목을 따줬더니 NPC들이 황제위에 오르는 걸 기피하는 현상까지 생겼던 적도 있었다.
물론 그때는 암살에 치중된 스탯과 특성들을 가지고 있었고 난이도가 지금보다 낮기는 했지만, 어차피 지금 내 암살대상은 인구수 3천도 안 되는 소도시의 지도자에 불과하다.
“이비. 혹시 마비독이나 졸음을 쏟아지게 만드는 약들이 있나? 암살에 도움이 되는 뭐 그런 것들.”
“물론 있습니다. 헌데 그 이비라는 건….”
“애칭이야 애칭. 딱딱하게 이븐 시나라고 부르는 것도 좀 그렇잖아?”
원래 이븐이라는 게 ‘~의 아들’이라는 표현이긴 하지만, 무슨 상관이던가.
“애칭이라… 누군가 절 그렇게 불러주는 건 주군이 처음이군요.”
“맘에 안 들어? 별로야?”
“아닙니다. 그저….”
그녀는 목이 메는지 끝까지 말을 잇지 못했고 그 모습을 보던 힐데는 작은 목소리로 내게 속삭였다.
“그러고 보니, 이전에 저한테도 저런 식으로 막무가내로 애칭을 붙였었죠.”
“싫어?”
물론 싫을 리가 없겠지. 처음에야 싫었겠지만, 나중에 왜 힐데라고 안 부르고 타인처럼 힐데가르트냐고 부르냐며 징징거렸으니까.
“싫다고는 한마디도 안 했습니다.”
그렇게 얘기한 그녀는 사소한 반항의 표시로 내 옆구리를 툭 쳤다. 그런 힐데의 모습이 귀여워 가볍게 머리를 쓱쓱 매만진 나는 마음을 추스른 듯한 이븐 시나를 보며 물었다.
“그래서, 좀 진정이 됐나?”
“예. 추태를 보여 죄송합니다. 주군.”
“추태랄 게 뭐 있나. 아무튼, 그 부분은 이비 자네가 알아서 준비해주고….”
나는 칼리나에게서 받아온 지도를 꺼내 들었다. 혹시 노바라 쪽의 지도가 있느냐고 물었더니 조감도는 물론이요 내부 시설과 지하도까지 그려져 있는 지도를 건네주었다.
“이쪽에 비상구가 하나 있더군. 솔직히 고대 제국의 영향권 아래 있던 지역이라 나도 어딘가 지하도가 있을 거라고 예상만 하고 있었는데….”
당연하겠지만 고대 제국은 로마를 말하는 거였고 로마는 상·하수도를 운용하던 국가였으니 제국의 영향권에 있던 노바라에도 그런 지하시설이 있는 게 당연했다.
단지, 제국이나 왕국의 수도나 인구수 10만 이상을 넘기는 대도시라면 그 구조가 크게 변하지 않지만 수백, 수천에 불과한 도시들은 매번 그 구조가 바뀌기 때문에 찾아내려면 여간 귀찮은 게 아니었다.
해서 맨땅에 헤딩하는 것처럼 일일이 뒤질 생각이었는데 칼리나 덕분에 그 시간을 줄일 수 있게 됐다. 역시 든든한 빽을 하나 두고 있으니 일하기가 훨씬 편하다.
“문헌으로만 들어봤던 것 같은데 진짜 있나 보군요. 현재도 사용 중입니까?”
“사용 중이긴 한 거 같은데 관리는 안 되는 것 같아.”
“그래서, 여기로 잠입할 생각입니까?”
“맞아. 그러니까 내가 따로 편지를 보내면 여기서 대기하고 있다가….”
나는 지도를 손가락으로 짚으며 대략적인 개요를 설명했고 둘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확실히, 그럴듯하군요.”
“주군의 명대로 하겠습니다.”
“그럼 부탁 좀 할게.”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나는 그 길로 밀라노를 떠나 노바라로 향했다. 이번 작전은 서로 호흡이 유기적으로 딱딱 맞아야 했기에 나는 지체하지 않고 노바라의 지하시설로 향했다.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기술력 하나는 끝내주네.”
지하수로는 여기저기 허물어지고 이끼가 끼고 관리가 안 돼서 녹이 슨 부분들도 많았지만, 하수 시설은 여전히 동작하고 있었다.
“어디 보자. h―3 구역이면 분명 이쯤일 텐데….”
횃불로 지하 여기저기를 비추며 다닌 끝에 마침내 저 멀리서 반쯤 지워진 h―3이라는 표식을 찾을 수 있었다.
“이거 아직도 움직이려나 모르겠네.”
잔뜩 녹이 슨 태엽기계와 봉처럼 솟아있는 스위치를 여기저기 훑어봤는데 녹이 너무 심하게 슬어서 이대로는 스위치가 부러지거나 곧 죽어도 태엽이 움직이지 않을 가능성이 컸다.
나는 커다란 배낭에 담겨있는 기름을 꺼내 태엽과 스위치에 들이부었고 충분히 기름을 머금었다고 생각되자 조심스럽게 스위치를 당겼다.
꼼꼼하게 내부 기관에까지 기름을 부은 보람이 있었는지 스위치는 삐걱거리면서도 움직였고 내가 들어갈 만한 틈이 만들어졌다.
문제는 내 목적지로 가기 위해선 흘러 내려오는 오수에 발을 담가야 했는데 솔직히 거부감이 들었다. 당장 풍겨오는 썩은 내와 우중충한 물의 색깔을 보니 속이 메스꺼워졌다.
고대의 하수와 현대의 하수는 다르긴 하지만, 관리가 안 된 만큼 어딘가에 시체가 썩고 있을지도 몰랐고 온갖 역병의 근원인 쥐들이 살고 있을 게 뻔했다.
게임에서야 내가 아닌 캐릭터가 들어가는 것이니 발을 담그는 건 물론이요 헤엄까지 칠 정도였지만 현실에서 그랬다가는 살아 움직이는 역병 그 자체가 될 확률이 높았다.
“으으… 이거 나중에 병 걸리는 거 아닌지 모르겠네.”
하수에 들어가기는 죽기보다 싫었지만, 노바라 성 내부에 들어가려면 이게 제일 안전했기에 나는 장화로 갈아신은 뒤 얼굴을 있는 대로 찌푸리면서 오수에 발을 집어넣었다.
그렇게 질색팔색을 한 얼굴로 횃불을 든 채 한참을 걸어 올라간 나는 위로 향하는 사다리를 발견했고 목적지에 온 것을 깨달았다.
“올라가다가 뚝 끊어지지만 않았으면 좋겠네.”
사다리는 그렇게 높지 않았기에 중간에 올라가다 떨어져도 다칠 정도는 아니었지만, 횃불이나 옷이 젖는 순간 장르가 생존으로 바뀌기에 나는 사다리를 이리저리 만져보며 강도를 확인했다.
돌다리를 두들기듯 몇 번이나 사다리를 살핀 나는 천천히 올라가기 시작했고 조심스럽게 하수도의 뚜껑을 살짝 들어 주변을 살폈다.
다행히 하수도 자체가 후미진 곳에 있는 데다 이미 해가 한참 전에 떨어져 있었기에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고 나는 서둘러 뚜껑을 치우고 위로 올라갔다.
“냄새가 몸에 배는 건 아니겠지?”
상상만으로도 끔찍했기에 나는 서둘러 배낭을 뒤져 가져온 물로 간단하게 몸을 씻은 나는 깔끔한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
하지만 그래도 냄새는 남아있었기에 이비에게서 받아온 냄새를 제거하는 약초와 액을 온몸에 바른 뒤 향수를 뿌려 냄새를 중화시켰다.
그렇게 소독에 가까운 일련의 과정을 거친 나는 필요한 것들만 빼고 전부 다 하수도 아래로 떨어뜨려서 뒤처리를 한 뒤 조심스럽게 레비아탄 상단을 향해 움직였다.
일단 탈다스를 만나서 자초지종을 얘기하고 그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볼프강을 암살하는 것도 중요했지만, 그 이후의 일 처리도 중요했으니까.
나는 검은색 망토를 뒤집어써 내 모습을 철저히 숨긴 뒤 순찰을 도는 경비병들을 피해 레비아탄 상단으로 향했다.
체감상 12시를 훌쩍 넘겼는데도 상단장의 방은 여전히 불이 켜져 있었고 1시를 넘어서야 불이 꺼졌다. 다른 곳들도 불이 꺼진 걸 확인한 나는 그대로 도약해 담을 뛰어넘은 뒤 건물을 타고 오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상단장이 머무는 4층까지 올라간 나는 조심스럽게 창문을 열었다. 다행히 창문을 잠그지는 않았는지 창문은 부드럽게 열렸고 난 곧장 안으로 침입했다.
이미 몇 번이나 회의 때문에 상단장의 방에 들어와 본 적이 있었기에 나는 그가 잠에서 깨기 전에 바로 침대로 가서 그의 입을 틀어막고 도끼를 빼 들었다.
“우웁!!!”
“쉬이이이잇. 진정하십시오. 상단장. 라그나르입니다.”
내 말에 상단장의 눈이 커다래졌고 나는 작게 속삭였다.
“손을 뗄 테니 조금만 조용히 해주십시오. 이해했으면 눈을 두 번 깜빡이시고.”
깜빡. 깜빡.
그제야 나는 그의 입을 틀어막고 있던 손을 떼주었고 탈다스는 거칠게 숨을 내쉬더니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얘기했다.
“라, 라그나르? 정말 라그나르 단장이 맞소?”
“맞습니다. 라그나르 로드브로크. 당신이 고용한 레이븐 용병단의 용병단장입니다.”
“대, 대체 지금까지 어디에 있었소?”
“흠, 그 이야기를 하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은데 괜찮겠습니까?”
“물론이오.”
그는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상단장에게 그간 내가 겪은 일과 자초지종을 전부 이야기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