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30화
갑작스러운 포옹에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내 양손이 허공을 휘저었고 그를 옆에서 지켜보던 힐데의 눈가가 사정없이 씰룩였다.
한눈에 봐도 기분이 안 좋아 보였고 벌써부터 칼리나와의 만남이 끝난 뒤에 이어질 힐데의 잔소리가 귀에 들리는 듯했다.
‘라그나르. 당신은 늘 그렇지만 여자만 보면 눈이 돌아가는군요. 당신도 신체 건강한 사내이다 보니 생리적인 본능은 어쩔 수 없겠지만, 조금쯤은 스스로 절제해보는 게 어떻습니까?’
‘동물과 인간의 차이는 스스로의 욕구를 자제할 수 있느냐 아니냐입니다. 아시겠습니까? 제가 당신에게 무리한 부탁을 하는 게 아니잖습니까.’
‘제 말을 듣고는 있는 겁니까? 이게 다 라그나르 당신이 잘되라고 하는 소리입니다. 잔소리라 생각하지 마시고….’
힐데의 잔소리는 한번 시작하면 애국가 완창은 기본이요 앵콜 공연까지 들어가기 때문에 나는 칼리나를 조심스럽게 밀어낸 뒤 그녀의 앞에 무릎 꿇으며 예를 갖췄다.
“레이븐 용병단의 용병단장 라그나르 로드브로크가 존귀하신 제국의 변경백을 뵙습니다.”
“푸하하, 뭐야. 당신 라그나르 맞아? 갑자기 안 어울리게 뭐야 그건?”
내 열과 성을 다한 예법이 그녀에게는 우습게 보였는지 그녀는 어깨를 들썩일 정도로 웃더니 의자에 앉은 채 다리를 슬쩍 꼬았다.
시원스럽게 다리를 드러내는 그녀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눈이 따라갈 뻔했지만 힐데가 뒤에서 도끼눈을 치켜뜬 채 지켜보고 있는 게 느껴졌기에 애써 시선을 그녀의 얼굴에 고정시켰다.
“아… 덕분에 실컷 웃었네. 그래서 그건 어떻게 된 거야? 난 당연히 우리 첫 만남 때처럼 만나자마자 성희롱을 할 줄 알았는데…… 사제랑 다니다 보니 회개하기라도 한 거야?”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군요.”
대체 힐데도 그렇고 칼리나도 그렇고 왜 나에 대한 평가가 이렇지? 대체 라그나르는 뭔 짓을 하고 다닌 거지?
“딱딱하게 왜 그래? 우리 사이잖아. 말 편하게 해.”
“….”
“아, 혹시 다른 사람들 때문에 그런 거야?”
칼리나는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집사에게 턱짓했고 그는 기다렸다는 듯 이븐 시나와 힐데에게 다가가 공손한 말투로 얘기했다.
“동료분들은 두 분의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제가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이쪽으로 따라와 주시겠습니까?”
하지만 힐데는 불쌍한 집사의 말을 무시한 채 품속에서 휘장을 꺼내 들었다.
“본녀는 정화교단의 사제로서 레이븐 용병단장 라그나르 로드브로크와 계약을 맺은 사이입니다. 그 때문에 어떤 경우라도 그의 곁에서 함께 할 의무와 권리가 있습니다.”
정화교단이라는 말에 집사가 안절부절못하며 칼리나를 쳐다보았고 그녀가 입을 열기 전에 내가 힐데와 이븐 시나를 향해 나가보라며 작게 손을 흔들었다.
그 모습에 힐데는 썩은 미소를 짓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방을 나섰고 이븐 시나는 내게 고개 숙여 인사한 뒤 허겁지겁 그녀의 뒤를 따라서 퇴실했다.
집사는 물론이요 호위를 하던 경비병들까지 전부 나가자 이 넓은 방에 남은 건 오직 나와 칼리나 둘뿐이었다. 그녀는 그제야 편하게 의자에 몸을 기대며 비어있는 잔에 와인을 따랐다.
“저게 옛날에 주웠다는 꼬맹이야?”
“그렇습니다.”
“우리 사이에 자꾸 그렇게 남처럼 굴 거야?”
“무슨 사이를 말씀하시는 건지….”
내 태도가 마음에 안 드는 건지 칼리나는 내게 훅 다가오더니 귀에다 대고 작게 속삭였다.
“레이디의 처음을 가져가 놓고 그렇게 무책임하게 나오기야?”
그녀의 말에 나도 모르게 정신이 번쩍 들었다. 대놓고 얘기하지는 않았지만 저게 뭘 뜻하는지 모를 정도로 난 멍청하지 않다.
남자는 3끝을 조심해야 한다는데…… 젠장. 이게 쾌락 없는 책임인가?
그녀는 화들짝 놀란 내 얼굴을 보고는 만족했는지 키득거리며 가볍게 윙크했다.
“농담이야.”
“농담치고는 꽤 무서웠어.”
“그래. 그 어울리지도 않는 존대를 집어치우니 훨씬 낫네. 근데 마냥 농담은 아니야. 내가 당신에게 한 약속은 언제나 유효하다는 걸 알아줘.”
“참고하지.”
“그리고, 난 더 늙기 전에 결혼하고 싶다는 것도.”
“…그것도 참고하지.”
대체 원래의 라그나르는 무슨 짓을 했기에 칼리나를 이렇게 흐물흐물하게 녹여놓은 거지? 힐데도 그렇고 칼리나도 그렇고 라그나르는 카사노바 기질이라도 있는 건가?
따지고 보면 원역사의 라그나르도 아내와 자식들이 굉장히 많은 걸로 알고 있기는 한데… 설마 그게 일부 반영된 건가?
“솔직히 말해서 당신을 만나면 할 말이 굉장히 많았거든? 화도 내고 싶고, 불평도 하고 싶고, 투정도 부리고 싶었는데 당신의 얼굴을 보니 불만이 사르르 녹아버리네. 어떻게 생각해?”
“미안하게 됐어.”
“뭐, 원래 반한 사람이 지는 거라고 하잖아? 애초에 당신은 그게 매력인 사람이기도 했고. 그러니까 과거에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날 도와준 거잖아?”
“글쎄… 추억은 언제나 미화되는 법이지.”
“아니. 똑같아. 난 아직도 기억하고 있어. 내가 고통과 굴욕에 빠져있을 때 오직 당신만이 내게 손을 내밀어 줬지. 조금 무례하긴 했지만 말이야.”
“야만인이잖아. 예법을 모르는 건 어쩔 수 없지.”
“푸하하핫. 확실히, 그때의 당신은 귀족인 나를 보고서도 꿀리지 않고 자신감 넘치는 모습을 보여줬었지.”
자신감 넘친다기보다는 똥배짱처럼 보이긴 하는데… 아무튼 그녀가 좋게 봐줘서 다행이다.
“그리고 그 요사스러운 혀로 내 귀에 대고 달콤한 말을 속삭였잖아.”
“내가 그랬다고? 무슨 소린지 모르겠는데.”
“부끄러워서 모른 척하는 거야? 7년 전 일이지만 난 그때 당신이 내게 해줬던 말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기억하고 있어. 분명….”
그녀는 잠시 생각하더니 내 목소리를 흉내 내면서 얘기했다.
“마이 레이디. 내가 너의 모든 빈자리를 채워주마. 그 자리가 아버지든 동료든 스승이든 간에.”
흠. 라그나르가 생각보다 중2병 감성이 넘치는 친구였군.
“그래서 나는 남편의 자리를 채워달라고 했는데… 당신이 도망가버렸지 뭐야?”
“…….”
도무지 저 대화를 못 따라가겠다. 어떻게 아버지와 동료와 스승이 남편이 될 수 있는 거지?
“이런 젠장. 생각해보니 열 받는데 솔직히 나 정도면 괜찮은 신붓감 아니야?”
칼리나는 슬쩍 자신의 가슴을 모으며 물었고 나는 시선을 돌렸다. 그런 내 모습이 신선한지 그녀는 아이처럼 키득거리더니 내게 와인잔을 내밀었다.
“잡담은 일단 여기까지만 할까? 맘 같아서는 지금 당장이라도 당신을 끌어안고 키스하며 내 마음대로 유린하고 싶지만… 그래서야 당신이 싫어하겠지. 안 그래?”
음… 아무리 생각해도 좋을 것 같은데?
하지만 그 말을 꺼낼 순 없는 노릇이기에 나는 침묵으로 일관했고 그녀는 예상했다는 듯 다리를 반대쪽으로 꼬면서 말을 이었다.
“난 당신이 싫어할 만한 일은 하고 싶지 않아. 하지만 내 인내심이 그렇게 길지만은 않다는 걸 알아둬.”
“…명심하지.”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서… 내가 뭘 어떻게 해주길 원해?”
“말했듯 날 도와줘.”
“당신이 원한다면 얼마든지. 기사단이랑 병력 끌고 노바라 침공이라도 할까?”
영지 하나를 지도에서 지워버리겠다는 말을 저렇게 쉽게 얘기하는 걸 보면 현실감이 없지만, 말했듯 그녀는 한다면 하는 성격이었다.
“아니. 내가 원하는 건 뒤처리뿐이야. 나는 내 여자에게 모든 걸 맡기는 셔터맨이 아니거든.”
“내 여자라니, 눈치 없고 둔하며 배려심 없는 당신치고는 기분 좋은 말도 할 줄 아네.”
“그렇게 문명인이 돼 가는 거지.”
“아쉽네. 나는 당신의 그 야만인과 같은 정열적인 모습이 좋았는데… 뭐, 침대에서만 정열적이면 상관없지. 안 그래?”
“…글쎄.”
저 입에서는 성희롱이 한시라도 튀어나오지 않으면 가시가 돋는 건가? 아니, 그녀의 말을 들어보면 내가 첫 만남부터 성희롱을 했다는데 혹시 나한테 배운 건가?
“뭐 좋아. 당신이 직접 해결하겠다는데 믿고 기다려 줘야겠지. 생각해둔 방안은 있어?”
“암살을 할 거야.”
“암살이라… 그게 말처럼 마냥 쉽지는 않을 텐데 괜찮겠어?”
사실 칼리나의 말과는 다르게 암살 자체는 그리 힘들지 않았다. 애초에 기계가 아닌 이상 24시간 내내 긴장하면서 살 수는 없는 노릇 아니던가.
암살의 문제는 목표를 죽이고 난 뒤에 탈출하지 못하면 99.9%의 확률로 죽는다는 점과 암살을 실패라도 했다간 뒷감당이 안 된다는 점이었다.
게임이라면 세이브&로드라도 가능하지 여기서 한 번 실패했다간 그대로 교수형이었다. 아마 암살에 성공한다고 해도 몸 성히 살아나오기는 힘들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암살을 기도하는 건 탈다스를 비롯한 내부의 협력자도 있고 내가 똥을 싸질러도 얼마든지 치워줄 칼리나라는 뒷배경이 있기 때문이다.
“암살만큼 일을 간단히 처리할 방법이 또 있겠어?”
“하긴, 매듭이 안 풀리면 매듭을 잘라버리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지.”
물론, 암살 자체는 지탄 받을 일이고 내가 했다는 사실이 걸리면 난 희대의 개쓰레기가 될 테지만 나라고 아무 생각 없이 암살을 시도하는 건 아니었다.
요점은 명분이었다. 칼리나의 이름으로 전쟁을 벌이느니 차라리 노바라의 볼프강이 정체 모를 누군가에게 암살당해서 혼란에 빠진 틈을 타서 남부의 변경백인 칼리나가 노바라를 접수했다는 스토리가 가장 바람직했다.
물론 급조한 계획이니만큼 틈은 많지만, 칼리나는 그 의심을 덮을만한 힘이 있다.
대한민국도 높으신 분들이 범죄를 저지르면 수사가 강제로 종결되거나 덮이는 일이 많지 않은가. 민주주의 국가도 그럴진대 중세는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다.
애초에 칼리나의 뒤를 캔다는 것 자체가 그녀와 척을 진다는 얘긴데 밀라노와 카노사, 투스카니에 이어 노바라까지 다스리게 될 강력한 변경백과 맞선다? 미치지 않고서야 그럴 리가 없을 것이다.
설령 진실을 알아낸다고 해도 대부분은 못 본 척, 모르는 척 넘어갈 테고 진실을 입에 담을만한 이는 바르바로사 황제나 북부의 하인리히 사자공 정도다. 하지만 그 둘 역시 지금의 균형을 깨고 싶지는 않겠지.
한마디로 ‘저 새끼가 했어!’와 ‘저 새끼가 한 거 아니야?’는 다르다는 말이다.
“뭐 좋아. 당신은 언제나 미친 것 같은 계획을 내기는 했지만, 결과적으로 다 성공했으니까. 이제 와서 내가 하지 말라 한다고 안 할 것도 아니잖아?”
“날 너무 잘 아는데?”
“그럼. 누구보다도 당신을 잘 알고 있지, 그 정화교단의 꼬맹이보다 내가 더 당신을 잘 안다고 자부할 수 있어.”
“그것 참. 소름 끼치게 기쁜 얘기네.”
그녀의 특성과 기벽들을 생각해보면…… 아마 나 자신보다 나를 더 잘 알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