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29화
칼리나라는 이름을 듣자마자 나는 병력들을 집합시킨 뒤 영주성의 성벽 위로 올라갔는데 그 위에는 나 이외에도 징집되어 끌려 나온 사내들이 공포에 떨고 있었다.
“으으… 이게 무슨 일이야 대체.”
“시발, 이러다 우리 다 죽는 거 아니야?”
“용기사단은 무적이라는데….”
사람들 사이에서 피어오르는 공포심은 사방으로 전염되었고 영주의 병사와 기사들 역시 공포에 좀먹히고 말았다. 아마, 내가 영주였다면 지금쯤 시스템창이 아군의 사기가 폭락하고 있다는 로그로 뒤덮였겠지.
“겁먹지 마라! 이 성벽은 무적이다! 성벽 위에만 있다면 우리는 안전하다!”
징집관으로 보이는 이들이 병력들의 동요를 최대한 줄이기 위해 애쓰고 있었지만, 저게 말도 안 되는 얘기라는 건 누구나 다 알고 있을 것이다.
애초에 성벽 위에서는 누군들 용감해지지 않겠는가. 적이 공성병기 가져오고 기병 전력이 없어서 입구 봉쇄 당하고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는 게 문제인 거지.
성벽 밖에는 수많은 기마대가 도열해 있었고 그 한가운데는 칼리나의 가문을 뜻하는 불을 뿜는 용이 새겨진 깃발들이 바람에 휘날리고 있었다.
“시발, 기병이 몇 마리야.”
지금 당장 그녀가 끌고 온 병력을 돌격시키면 인구수가 이천 언저리인 이 작은 도시는 반나절도 안 돼서 박살 날 게 뻔했다.
칼리나가 어지간히 미친년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저건 도를 넘은 미친 짓이었다. 그리고 저런 병력을 끌고 온 건 백 프로 나 때문이다.
이게 다 내 잘못이다. 저년이 얼마나 미친년인지 그간 게임을 플레이하면서 수도 없이 겪어봤는데 너무 안일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애초에 편지를 보내고 고작 10일이 지났다. 전령이 가는 데 6일 정도 걸렸을 걸 감안해보면 칼리나는 편지를 받자마자 출병을 준비해서 이곳까지 주파하는 데 고작 4일이 걸렸다는 얘기다.
그녀의 병력이 성벽을 향해 다가올수록 내 귓가에는 모 게임의 촉수 몬스터가 내뱉는 명대사가 울리고 있었다.
―그 판단 때문에 너의 심장은 터지리라.―
젠장. 진짜 여기서 게임 오버 당하는 거 아니야? 이대로 지하실에 끌려가는 건 아니겠지?
이전에 게임을 플레이할 때 가끔 그녀를 동료로 삼은 뒤 일부러 방치하고 질투를 유발하는 등 컨셉질을 한 적이 있었다.
어떻게 됐냐고? 기존의 동료들이 하나둘씩 없어지더니 어느 순간 밀라노의 영주성 깊숙한 지하실에 갇히는 엔딩이 떴다. 엔딩 이름이 ‘완전한 사육’이었던가.
그때의 광경이 머릿속에 떠오르며 등 뒤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혹여 내가 늑대를 피해 호랑이 굴로 찾아온 게 아닐까?
난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그녀의 상태창을 켰다. 동료 NPC라고 해도 기본적인 호감도 작이 되어있지 않으면 아무 정보도 볼 수 없었지만, 현실은 무참히 내 기대를 배신했다.
<상태창>
이름 : 레이디 칼리나 디 카노사 여변경백
소속 : 밀라노, 카노사, 투스카니의 정당한 지배자. 신성 제국의 변경백
상태 : 기쁨, 희열
기벽 : 집착, 의부증, 소유욕, 순애보, 과대망상
체력 : 난이도로 인한 열람 제한
스탯 : 난이도로 인한 열람 제한
<특성>
뛰어난 지휘관 : 패배할 전투도 승리하게 하는 명장. 전투를 이끄는 것만으로 아군의 사기가 폭등한다.
재빠른 반사신경 : 인간을 초월한 반사신경은 난전에서 특히 더 효력을 발휘한다.
광적인 집착 : 특정 대상에 대해 엄청난 소유욕과 집착을 가지게 된다. 그 집착은 때론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기도 한다.
질투의 화신 : 가질 수 없다면 부숴버리겠어!
“에반데.”
이미 특성이랑 기벽을 보니까 갈 데까지 간 모양이다. 다만, 통상 칼리나가 저런 특성이 있을 정도면 무슨 짓을 써서라도 주인공을 추적하기 마련인데 지금까지 조용히 있던 걸 보면 뭔가 특이점이 있는 것 같긴 하다.
내가 칼리나와 라그나르와의 관계에 대해 고심하는 사이 칼리나는 기사단을 물려둔 채 당당히 홀로 성벽 아래로 다가왔다.
고작 단기였지만, 그녀가 풍겨내는 위압감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여기는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칼리나 각하.”
이름 모를 영주가 애써 침착을 가장하며 그녀에게 물었고 칼리나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나의 것을 가지러 왔다.”
“신께 맹세코 저를 비롯해 제 가문은 칼리나 각하의 가문과 아무런 은원도 없습니다.”
영주는 자신과 칼리나 사이에 아무런 일도 없음을 강조하며 그녀에게 합당한 명분이 있는가를 묻고 있었다.
물론 영주가 무슨 소리를 한들 칼리나가 귀 막고 ‘에베베베~’ 거리면서 갈아버리면 이 영지는 갈릴 테지만, 명분 없는 전쟁은 추후 그녀에게 악영향을 끼칠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나 역시 그대와의 은원이 없는 건 알고 있네. 물론, 이 영지를 공격할 생각도 없고.”
“허면 무슨 일로 찾아오셨는지요.”
“말했듯, 나의 것을 찾으러 왔다.”
“이런 작은 곳에 각하의 관심을 끌 만한 게 있는지 모르겠군요.”
“‘입은 재앙을 부르는 문이고, 혀는 목을 베는 칼이다.’라는 얘기가 있지. 내가 자네의 의견 따위나 듣자고 이곳까지 온 줄 아나? 아니면 그대는 내가 만만한가 보지?”
영주의 대답에 칼리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대꾸했고 순식간에 분위기가 가라앉자 영주는 곧장 저자세로 나가며 자신의 무례한 행동을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각하. 제가 크나큰 실례를 범했습니다.”
“내가 강제로 성문을 열지 않게 도와주게. 웬만하면 자네 성문의 처녀는 지켜주고 싶거든.”
그녀는 앳된 외모와는 다르게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영주를 능욕했지만, 영주는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하며 화를 눌러 담았다.
하긴, 본인이 먼저 말실수를 하기도 했고 화를 안 참으면 성벽이고 지랄이고 다 박살 나게 생겼는데 안 참으면 어쩔 텐가.
명분이니 뭐니 하지만 그런 것도 압도적인 힘 앞에선 하찮아지는 법이었다. 사람이 개미를 밟아 죽일 때 명분을 내걸지는 않잖은가.
그렇게 영주를 도발하던 그녀는 찬찬히 성벽 위를 훑어보다가 날 발견하곤 이내 눈이 초승달처럼 휘어졌다.
젠장. 저 광기에 휩싸인 눈동자는 봐도 봐도 적응이 안 되는군.
하지만 난 굳이 그녀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고 슬쩍 칼리나를 떠보기 위해 힐데와 이븐 시나의 어깨에 손을 두르는 대범함까지 보여주었다.
순간 그녀의 눈매에 살기가 깃들었지만 이내 고혹적인 미소를 짓더니 가볍게 혀로 입술을 핥았다. 먹잇감을 노리는 저 암사자와도 같은 모습을 보니 나도 모르게 오한이 느껴졌다.
생각해보면 내가 칼리나를 만난 건 처음일 텐데 절로 거부감이 드는 걸 보면 원래의 라그나르도 그녀에게 꽤 시달린 모양이다.
“내가 원하는 건 이미 찾았으니 이제 돌아가도록 하지.”
그렇게 한참이나 날 쳐다보던 그녀는 영주 입장에선 영문 모를 말을 내뱉더니 미련 없이 바로 기수를 돌렸다.
재앙과도 같았던 그녀와 그녀의 기사단이 썰물처럼 빠져나가자 그녀가 왜 이곳에 왔는지에 대한 궁금증보다 살아남았다는 안도의 감정이 병사들에게서 넘쳐흐르고 있었다.
물론, 나는 마냥 기뻐할 수는 없었다. 그녀가 굳이 이곳까지 와서 내 눈도장을 찍었다는 건 자신의 성으로 오라는 초대장을 건넨 것과 똑같은 얘기일 테니.
“주군. 혹시 밀라노의 칼리나와 인연이 있으십니까?”
“오래된 인연이 있긴 하지.”
“악연이겠지요.”
“악연도 인연이라면 인연이니까.”
“그래서, 밀라노로 가실 겁니까?”
힐데의 물음에 나는 이곳에서 밀라노까지의 루트를 떠올린 뒤 어깨를 으쓱였다.
“고귀하신 변경백께서 부르는데, 미천한 용병이 무슨 힘이 있다고 거절하겠어. 거기에 지금 당장 아쉬운 것도 우리고.”
“당신이 정 싫다고 하면 정화교단으로 가도 상관없습니다.”
“그랬다가는 종교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를 텐데?”
농담이 아니라 칼리나는 한다면 하는 여자다. 보통 영주들도 그렇고 교단들도 그렇고 서로 소 닭 보듯 하는 관계지만 한번 부딪히면 어중간하게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이게 은근히 화약고와 같은 문제인데 특히 종교 같은 경우는 현대와 별반 다를 게 없다.
그리고 당연하겠지만, 각 종교의 교리에 따르면 서로가 서로를 용납하지 못하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당장 카톨릭만 해도 신께서 ‘나 이외의 신은 믿지 말라’라고 하지 않았던가.
서로가 서로를 이교도라고 칭하며 다툼이 일어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단지, 서로 목숨을 걸고 싸웠다가는 피를 보는걸 알기에 자중하고 있는 것뿐이다.
거기에 여러 국가들 역시 특정 종교만 일방적으로 믿는 건 아니다. 특히, 신성 제국처럼 소규모로 영주들이 난립해 있는 국가는 각자 믿는 신이 다르기에 영주들도 굳이 종교를 건드리지는 않는 편이다.
즉, 한번 삐끄덕하면 현실판 십자군 전쟁이 벌어질 수도 있다는 얘기다. 뭐, 그 틈을 노려서 하이르 앗 딘 같은 도적놈들이 날뛰는 거긴 하지만.
“뭐, 너무 걱정하지마. 칼리나가 내게 해코지를 할 리가 없잖아.”
“지금 얼굴 한 번 보겠다고 어지간한 도시를 박살 내버릴 수 있는 기사단을 끌고 오는 여자가 제정신이라고 하는 겁니까?”
“그렇게 얘기하면 또 할 말이 없기는 한데….”
“주군. 저도 두 분의 관계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최대한 조심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혹시나 음식이나 음료 같은 걸 드실 때는 제게 먼저 말씀해 주십시오.”
“그래. 부탁할게.”
둘에게 걱정 아닌 걱정을 받으며 나는 밀라노로 향했고 미리 얘기가 돼 있던 건지 별다른 통행증을 제시하지 않아도 경비병들은 우리를 정중하게 맞아주었다.
밀라노는 칼리나가 머무는 도시답게 깔끔해 보였는데 특이하게 길거리에 오가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아무리 지금 시간대가 아침이라고 해도 사람 하나 없다는 게 말이 안 되는 얘기였기에 나는 우리를 호위하던 경비병에게 말을 건넸다.
“실례가 안 된다면 뭐 하나만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내 질문에 경비병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조아렸다.
“말씀을 낮춰주십시오. 존귀한 분이시여.”
저게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는지 경비병이 식은땀까지 흘려가며 몸을 떨었다. 대체 칼리나가 뭐라고 얘기를 해놨기에 저러는 건지 모르겠네.
“아… 음. 그러지. 다른 게 아니라 도시의 규모에 비해서 사람들이 하나도 안 보이는데 다 어디에 있지?”
“영주님께서 라그나르 경을 맞이하는 동안은 혹시 모를 위협에 대비해 전부 집 밖으로 나오지 말라고 엄명을 내리셨습니다.”
그 말에 힐데는 ‘이런 미친년’이라며 욕지거리를 내뱉었고 이븐 시나는 가면에 얼굴이 가려져 있긴 하지만 얼추 그 표정을 짐작할 수 있을 정도였다.
차라리 바르바로사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게 맞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올 때쯤 영주성에 도착했고 경비병들과 교대로 기사들이 우리를 호위했다.
병력들은 안내에 따라서 따로 쉬게 한 뒤 나는 힐데와 이븐 시나를 이끌고 응접실로 이동했고 그곳에는 화사한 드레스를 입은 칼리나가 와인을 홀짝이고 있었다.
일하러 나간 주인을 기다리는 강아지처럼 무료한 표정을 짓고 있던 그녀는, 나를 보자마자 성큼성큼 다가와 나를 꼭 끌어안았다.
“오랜만이야. 라그나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