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28화
[친애하는 칼리나 여변경백에게
그대를 직접 만나지 못하고 이렇게 편지로만 안부를 전하는 걸 용서하게. 내가 염치 불고하고 그대에게 편지를 보내는 건 어떤 일을 해결하는 데 그대의 도움이 필요하기 때문이네.
현재 나는 노바라라는 마을의 레비아탄 상단의 탈다스 상단장에게 고용되어 그를 위해 일하고 있네. 탈다스는 믿을만한 사람이었고 내가 야만인이라고 무시하지도 않더군.
해서 한동안 그곳에 머물 생각이었지만 레비아탄은 최근 의도적인 방해와 내부의 문제 때문에 힘든 시기를 겪고 있었어. 용병으로서 그 원인을 찾다 보니 모든 게 영주의 개인적인 비리와 엮여있다는 걸 알게 됐지.
나는 평화적으로 일을 해결할 생각이었지만 일이 조금 잘못되어서 노바라의 영주인 볼프강과 적대하게 됐고 그의 기사와 병력들을 신께 보내드릴 수밖에 없었네.
해서 졸지에 도망자와 범죄자 신세가 되어버린 내가 생각하건대, 비천하고 불쌍한 야만인인 나를 구원하고 돌봐줄 이는 오직 그대밖에 없다고 생각되더군.
그대에게는 내가 과거의 편린에 불과하고 지워버리고 싶은 과거인 건 아주 잘 알고 있네. 지금 내가 이런 부탁을 하는 것 자체가 민폐인 것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지만, 옛정을 생각해서라도 내게 구원의 동아줄을 내려주길 간절히 바라고 있겠네.
아직 그대가 나를 친애하는 벗으로 생각하길 바라며.
라그나르 로드브로크가]
조용히 집사가 가져온 편지를 읽고 있던 칼리나는 코웃음을 치면서 편지를 내려놓았다.
“감히 나를 자기 필요할 때만 찾다니… 내가 어지간히도 쉽게 보이나 보군.”
언뜻 보기에는 오만한 말이었지만, 그녀는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었다. 인구 10만의 대도시인 밀라노와 인구 1만 5천 정도의 중소도시인 카노사와 투스카니를 다스리는 신성 제국 남부의 여변경백.
제국의 황제인 바르바로사, 제국 북부의 하인리히 사자공과 함께 제국을 떠받치는 세 개의 기둥 중 하나였으며 그녀가 이끄는 용기사단(Order of dragon)은 하인리히 사자공이 이끄는 사자 기사단과 함께 제국 최강이라 불리고 있었다.
“거절의 편지를 보낼까요?”
“아니, 아쉽지만 나는 쉬운 여자가 맞거든.”
물론 집사는 그런 그녀의 말에 속으로 쓰게 미소 지었다. 쉬운 여자라는 말과는 다르게 그녀는 사교회를 질색하며 나가지도 않는 데다 수많은 귀족들의 구애를 전부 쳐내고 있었다.
심지어 황제가 직접 자신의 아들과 결혼을 주선해봤지만, 그마저도 칼같이 거절했기에 레즈라는 소문이 날 정도였다.
그러니, 저 말은 편지를 보낸 ‘라그나르’라는 인물 한정으로 쉬운 여자라는 말이겠지.
“그나저나 라그나르가 내게 도움을 청하다니… 해가 서쪽에서 뜰 일이네.”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잠시 생각에 빠져있던 칼리나는 집사에게 편지를 내밀었다.
“자네도 한번 읽어보게.”
“예.”
집사는 공손하게 두 손으로 그 편지를 받으려 했지만 칼리나는 들고 있던 편지를 휙 돌리며 낮은 목소리로 경고하듯 이야기했다.
“손으로 잡지는 말고. 눈으로만 봐.”
“아… 예.”
자신의 주인이 변덕이 라그나르라는 인물에 한정해서 물 끓듯 변하는 건 잘 알고 있었기에 집사는 별말 하지 않고 멀리 떨어져 눈으로만 편지를 읽어내려갔다.
“어때 보여?”
그리 긴 내용은 아니었기에 집사는 주인의 질문에 바로 대답할 수 있었다.
“제가 알고 있는 정보와 동일합니다. 편지에 적혀있는 정보가 지극히 적어서 자세한 건 라그나르 경과 만나봐야 확신할 수 있겠습니다만….”
“그거면 됐어. 라그나르가 내게 거짓말을 할 사람도 아니고.”
자신의 주인이 이토록 무한한 신뢰를 보이는 상대가 있던가? 매사에 확인과 확인을 거듭하며 실패라는 가능성을 배제해가던 게 자신의 주인이 아니었던가.
“혹시 노바라의 사태에 개입할 생각이십니까?”
“그런데?”
뭐 그리 당연한 걸 묻느냐는 주인의 대답에 집사는 당황해서 말까지 더듬었다.
“구, 굳이 그렇게 하실 필요까지는… 볼프강은 반(反)황제파에 속해 있는데 그를 숙청한다면 행여나 다른 귀족들로부터 황제파라는 의심을 살 수도 있습니다.”
“내가 그딴 잡것들의 시선까지 신경 써야 하나?”
“…….”
“내가 힘든 시기에 날 도와준 건 오직 라그나르뿐이었다. 내가 이룬 모든 것과 나의 검, 나의 의지. 나의 충성을 받을 수 있는 건 다른 누구도 아닌 오직 라그나르뿐이다.”
광기마저 느껴지는 주인의 대답에 집사는 입을 다물었다. 아마, 자신의 주인은 상황이 어떻든 간에 라그나르가 원한다면 뭐든 들어줄 모양인 것 같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그가 비리를 저지르고 있던 건 명백한 사실이었기에 명분 자체는 충분하다는 점이었다.
“그나저나 우리 야만인께서 이런 격식 있는 편지를 쓸 리는 없을 테니… 필경 날벌레 한 마리가 붙어있겠네.”
칼리나가 기억하는 라그나르 로드브로크는 바이킹 야만인 그 자체였다. 계획도 없고, 거침도 없으며, 경박한 데다, 한 대쯤 때려주고 싶은 능글능글한 얼굴과 넉살까지.
“날벌레 말씀이십니까?”
“그래. 저쪽 북부에서 꼬맹이를 하나 주워서 데리고 다녔던 걸로 기억하는데, 아직도 데리고 다니나 보군.”
콰직.
방금 한 말 중 대체 어느 부분에서 분노할 대목이 있었는지는 몰랐지만, 주인의 심기를 살피는 것도 집사의 의무였기 때문에 그는 침묵을 유지했다.
“아… 이런 젠장!”
스스로도 자각하지 못했는지 그녀는 화들짝 놀라며 자신의 손아귀에서 잔뜩 구겨진 편지를 빼냈다. 그러더니 그게 보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조심스럽게 펼치더니 집무실 한켠에 있는 금고에 집어넣었다.
저 금고가 ‘목숨보다 더 소중한 것’들만 보관하는 금고라는 걸 알고 있으며 그 금고에 있는 물건들의 지분 중 95%가 라그나르와 관련돼 있다는 걸 알고 있는 집사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과연 야만인 용병이 적은 편지가 저 금고에 들어갈 정도로 가치가 있던가? 황제가 내려준 검이나 망토가 집무실에서 방치되어 나뒹굴고 있는 걸 보면 자신의 주인에게는 저 편지가 그 정도로 가치가 있다는 거겠지.
“답신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내가 직접 써서 보내도록 하지. 아니, 이왕 이렇게 된 거 내가 직접 병력을 끌고 그를 맞이하러 가도록 하지.”
청천벽력과 같은 주인의 말에 집사는 최대한 반항을 해보았다.
“외람된 말씀이지만 백작 각하. 당장 오늘 오후에 라인하르트 공작 각하와 식사가 잡혀 있으며 그다음 날에는 홀랜드 상단 연합과의 만남이….”
“일주일간은 모든 일정 다 취소시켜.”
물론 집사의 반항은 씨알도 먹히지 않았고, 그렇게 스케쥴을 정리한 칼리나는 소녀처럼 미소 지은 채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옷은 뭘 입어야 하나… 요새 피부도 너무 거칠어졌지. 듣기로 동방에서 들여온 향료가 좋은 게 있다고 하던데?”
“예. 가져오라고 할까요?”
“아니, 내가 가서 직접 고르도록 하지.”
칼리나는 항상 시니컬한 표정을 짓고 있던 것과는 다르게 그 어느 때보다 밝은 얼굴로 자신의 집무실을 나섰고, 그녀의 집사는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의 주인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새로운 주인을 모신 기간이 그렇게 길지는 않지만, 그녀가 저런 표정을 짓는 걸 본 적은 난생처음이었으니까.
* * *
전령에게 편지를 보낸 나는 근처에 있는 도시에서 머물고 있었다. 게임이라면 내가 어디에 있든 전령이 찾아올 테지만 현실은 다르지 않던가.
그렇게 답신이 올 때까지 힐데에게 글도 배우고 이런저런 시시콜콜한 얘기도 하면서 시간을 죽이고 있었는데 갑자기 머물고 있던 여관이 소란스러워졌다.
“또 술 처먹고 싸우는 건가?”
내가 머무는 여관은 1층이 선술집도 겸하고 있었는데 밤에는 늘 그렇듯 고된 하루를 끝마치고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술을 마시는 놈들로 북적거렸다.
그 때문에 술에 취해 주먹다짐하는 멍청한 놈들이 있기 마련이었고 나는 나가서 손 좀 봐줄까 하다가 그냥 참기로 했다.
어차피 자정쯤 되면 소란도 가라앉을 테다 지금은 힐데가 내 허벅지를 베고 누워있었으니까. 물론 내가 해주겠다고 한 건 아니고 그녀가 드물게 어리광을 부렸기에 들어준 것이다.
다만, 자기가 요청한 것과는 다르게 그녀는 내 허벅지를 베자마자 불평을 내뱉었다.
“이전에도 그랬지만 여전히 딱딱하군요.”
“부드러우면 그건 그것대로 문제가 아닐까?”
“푸흡. 확실히, 그건 상상이 안 가는군요.”
힐데는 작게 키득거리며 웃더니 이내 말없이 내 허벅지에 자신의 뺨을 비볐다. 그렇게 한참을 어린아이처럼 어리광을 부리던 그녀는 이내 날 올려다보며 물었다.
“이러고 있으니 옛날 생각나지 않습니까?”
“그래, 그러고 보니 네가 아직 꼬맹이였을 무렵에는 항상 같이 잤었지. 때때로 이렇게 무릎베개도 해줬었고. 뭐, 조금 크니까 부끄럽다며 각방을 썼지만.”
“쓸데없는 건 잘도 기억하는군요.”
그녀는 반항의 의미로 가볍게 내 허벅지를 때렸고, 나는 피식 웃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러고 보면, 머리도 원래 단발이었는데 내가 한번 길러보라고 하니까 길렀었지.
이처럼 힐데와 시간을 보내다 보니 내가 겪은 게 아닌데도 불구하고 직접 겪은 것처럼 생생한 기억들이 머리에 떠오른다.
처음 내가 라그나르에게 빙의됐을 때의 불완전한 기억이 시간이 흐르면서 풀려나가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라그나르’의 과거가 기억난다는 건 좋은 징조였다.
“음… 그래서 하는 말이지만 라그나르. 혹시 용병에서 은퇴할 생각은 없습니까?”
“갑자기?”
“지금 당장 은퇴하라는 얘기는 아닙니다. 단지, 이런 위험한 일을 하는 게 아니라 어딘가 한적한 곳에서 예전처럼 함께….”
쾅쾅쾅!
“잠시만.”
그녀의 말이 채 다 끝나기도 전에 누군가가 거칠게 문을 두들겼고 나는 조심스레 힐데의 머리를 침대에 눕힌 뒤 문을 열었다.
문밖에는 완전 무장을 한 사내가 서 있었는데 그는 내게 서류문서를 들이밀며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긴급사태로 인해 현 시간부로 영주님의 명령 아래 15세 이하, 60세 이상의 늙은이와 싸우지 못하는 장애인을 제외하고 신체 건강한 모든 남성들을 강제로 징발하도록 하겠다.”
“야밤에 사람 짜증 나게 하는군. 거절한다면?”
“즉결처형이다.”
“재밌는 소리를 하는군. 본인은 귀족이자 레이븐 용병단을 이끄는 용병단장이다. 네놈이 나와 적대한다면 외부의 적과 싸우기 전에 나와 싸우게 될 텐데 자신 있나?”
귀족에 용병단장이라는 말에 징집관은 당황했는지 말까지 더듬으며 내게 사죄했다.
“귀, 귀족이셨습니까? 죄송합니다. 부디,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몰랐을 테니 내 넓은 아량으로 용서하도록 하지. 그래서, 이 야심한 밤에 이게 무슨 소란이지?”
“예. 실은, 지금 외부에 적들이 쳐들어와 있습니다. 그 때문에 영주님의 명령으로 병력들을 징집하던 중이었습니다.”
국가 간에 전쟁이 일어나는 것도 흔한 일이었고 신성 제국처럼 작게 쪼개져 있는 나라는 영주들끼리의 영지전도 꽤 흔했다.
“적이라고? 대체 누가 쳐들어왔지?”
내 말에 징집관은 마치 말해서는 안 될 자의 이름이라도 얘기하듯 작게 그 이름을 얘기했다.
“레이디 칼리나입니다.”
…허미 시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