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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바이킹이 되었다-27화 (27/205)

▣ 027화

영원한 충성이라는 말에 나는 마음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사실 당사자를 앞두고 할 만한 얘기는 아니지만, 이븐 시나는 원래도 꼬시기가 쉬웠다. 아무런 접점이 없어도, 다소 적대적인 상태라고 해도, 적당히 그럴듯한 말과 함께 그녀의 상처와 흉터를 고쳐주겠다고 하면 기꺼이 동료로 합류한다.

단, 죽을 때까지 따라다니는 게 아니라, 대강 1년 정도의 시간제한이 붙는다. 그녀에 대한 대우가 좋다면 그 기한을 조금 더 늘릴 수 있겠지만, 눈에 보이는 효과가 없다면 대부분은 6개월에서 1년 사이에 플레이어를 떠난다.

당연히 그녀의 상처를 치료할 약을 근시일 안에 찾기는 힘들었고 끝내 못 구하거나 동료 간에 알력이 생겨 떠나는 경우가 태반이었는데 그녀의 외모는 대부분의 동료들에게 악영향을 끼치니 어쩔 수 없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플레이어들은 그녀를 초반부를 넘기는 용도로 많이 사용했는데 적당히 꼬셔서 굴리다가 그녀가 떠날 때쯤 그녀보단 못해도 적당히 대체 가능한 의사를 뽑아서 내보내는 경우도 많았다.

단물만 쪽쪽 빨아먹는 데다 타인의 고통과 아픔을 이용한다는 양심의 가책이 느껴지긴 할 테지만, 그 정도로 그녀는 초반부에 한해 메리트가 컸다.

다만 그것과는 별개로 히든 조건을 잘 맞추면 지금처럼 그녀로부터 영원한 충성을 받을 수 있었는데 히든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겠지만, 그 조건이 굉장히 까다로웠다.

일단 기본적으로 그녀의 신분이 노예에, 내 생명을 노린 적이 있어야 하며, 심리적으로 몰려있어야 하고, 나에 대한 호감도와 함께 죄책감을 느끼고 있어야 했다.

신분을 노예로 만들거나 심리적으로 몰아가는 거야 플레이어가 의도적으로 환경을 조성할 수 있지만, 나에 대한 죄책감을 가지게 만들거나 날 죽이게 만드는 건 꽤 힘들었다.

이번에 내게 마비 독을 쓴 것만 봐도 그렇지만 의사인 그녀는 사람을 죽이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뭐, 애초에 사람 죽이는 걸 좋아하는 건 싸이코밖에 없겠지만.

뭐, 어쨌건 나는 운칠기삼으로 위의 조건들을 전부 만족시켰다. 저것만으로도 충분한데 이븐 시나는 영주에게 배신당했다는 분노와 복수하겠다는 열망을 가지고 있었고 그를 이뤄줄 수 있는 건 나뿐이었다.

그와 동시에 날 죽일 뻔했다는 죄의식과 내게 목숨을 빚졌다는 부채의식을 가지고 있으니 이븐 시나를 꼬시는 건 일도 아니었다.

장담컨대 그녀가 가진 죄책감은 스스로를 옭아매는 쇠사슬이 될 테고 그 쇠사슬은 절대 풀리지 않는 새로운 낙인이 될 것이다.

그런 만큼 힐데와는 다르게 그녀와는 주종관계를 맺게 되겠지만, 그게 무슨 상관인가. 어차피 나는 그녀의 상처를 치료해줄 생각이었고 그 이후로는 날 섬기는 게 최고의 행복이 될 텐데.

“그대를 얻으니 천군만마를 얻은 것 같군. 일어나라.”

“예. 주군.”

주군이라는 호칭에 절로 벌어지는 입꼬리를 애써 단속한 나는 바로 그녀에게 첫 명령을 내렸다.

“일단 아군 부상병을 돌보고 있도록. 필요한 물품은 얼마든지 가져다 써도 좋네.”

“명을 받들겠습니다.”

이븐 시나는 내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물러났고 그 광경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힐데는 날 쳐다보며 비아냥거렸다.

“하, 진정한 의미로 사람을 노예로 만드는 능력은 어디 안 가는군요.”

“뭣하면 직접 노예의 기분을 느껴보는 게 어때?”

내가 오른발을 쓱 내밀자 그녀는 눈을 찌푸리며 대꾸했다.

“이미 절 노예처럼 굴리고 있으면서 그런 말을 하는 겁니까? 혹시, 제게 그런 굴욕적인 행동을 강요해서 남들에게 말 못 할 자신의 음습한 욕망과 자아, 욕구를 채우고 싶은 겁니까?”

솔직히 말해서 힐데의 그런 모습을 조금 보고 싶기는 했지만, 지금 당장 급한 건 따로 있었기에 나중을 기약하기로 했다.

“그것도 나쁘진 않지만 꺼야 할 급한 불이 있으니 조금 미뤄두도록 하지.”

“그렇군요. 이건 뭐 빼도 박도 못 하게 영주와 전쟁을 벌이겠다는 뜻이니까요.”

영주의 병력은 물론이요 기사들까지 몽땅 죽여버렸다. 이건 뭐 선전포고를 넘어서 일본이 미국의 진주만을 습격한 것과 같을 정도로 미친 짓이었다.

그리고 지금에서야 하는 말이지만, 이렇게 극초반에 영주와 전면전을 벌이는 건 미친 짓이었다. 승리는커녕 살아서 도망치기만 해도 ‘야, 잘했네.’ 소리를 들을 정도인데 싸워서 이긴다?

그건 고인물이 아니라 고인물 할애비가 와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특전사라고 맨몸으로 탱크와 맞짱 떠서 이길 순 없지 않은가.

이번에 거둔 승리도 적이 방심한 틈을 타서 승리한 거지 기사들이 갑주를 걸치고 말에 올라 제대로 진형을 갖추고 격돌했다면 아마 내 휘하 병력 중에서 살아있는 건 반도 안 됐을 것이다.

“일단 전리품부터 챙기고 뒷정리부터 하면서 생각해보지.”

이미 벌어진 일에 대해서 발을 동동 굴러봤자 변하는 건 없다. 그 때문에 난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을 하기로 했고 그건 다름 아닌 전리품 획득이었다.

휴스턴인지 보스턴인지 하는 머시깽이가 타고 온 준마는 물론이요, 번쩍번쩍한 갑옷과 윤기가 흐르는 검, 병력들이 쓰는 창과 무구, 마차에 실려있는 생필품과 식량은 도적들을 약탈하고 얻은 전리품과는 궤를 달리했다.

“이 맛에 도적질하는 거지.”

전투의 흔적을 지우고 시체들도 다시 파내서 싹 다 태워버리고 피나 옷가지 같은 것들을 전부 정리하면서 증거 자체를 없애버린 나는 조금 여유가 생기자 바로 힐데를 천막으로 불렀다.

“바쁜데 뭡니까?”

“슬슬 이후의 행보를 결정할 생각인데 네 의견을 듣고 싶어서.”

일단 영주와는 완전히 척을 졌으니 어떻게든 내가 유리한 위치에 있을 때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노바라와 거리가 있는 만큼 지금 당장은 이 참사에 대해 모를 테지만, 시간이 흐르면 영주도 전말을 알게 될 테니 그전에 무슨 수를 써야 했다.

물론 힐데는 왜 굳이 그딴 걸 물어보느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꾸했다.

“싸우는 것 이외에 방법이 있습니까?”

“그거야 그렇지만 어떻게, 뭘 이용해서, 언제 싸울지는 생각해둬야겠지.”

사실 영주와의 트러블을 해결하는 방법은 생각보다 많다. 세상의 진리라고 불리는 돈을 왕창 건네줘서 무마하거나, 아예 영주의 힘이 닿지 않는 곳으로 도망치거나, 그도 아니면 영주를 갈아버리거나. 이 셋 중에 하나를 택해야 한다.

다만 사안이 사안인 만큼 돈으로 해결될만한 일은 아니고, 두 번째 방법은 결국 이곳에서 쌓아놓은 기반을 전부 버려두고 도망치는 거니 제외해야 한다.

그렇게 하나씩 제거하다 보니 결국, 세 번째 방법만 남게 되었다.

“라그나르.”

“왜?”

“그 말을 꺼낸다는 건 그녀를 이용할 생각이십니까?”

“그녀?”

“레이디 칼리나 말입니다.”

아니, 갑자기 그 미친 얀데레 년 이름이 왜 튀어나와? 생각지도 못한 인물의 이름에 나는 인상을 팍 쓰며 되물었다.

“칼리나? 그 미친년?”

“레이디 칼리나가 라그나르 당신에게 집착하는 미친년이라는 건 동의하지만, 귀족을 향해 그런 식으로 말을 내뱉었다간 불경죄와 귀족 모독죄로 잡혀갈 겁니다.”

“너도 그랬잖아.”

“저는 정화교단의 사제라서 괜찮습니다.”

“이런 개 씹 불공평한 세상을 봤나. 이건 명백한 야만인 혐오야.”

“스스로가 야만인임은 자각하고 계셨습니까? 당신이 자아 성찰도 할 수 있었다니, 실로 놀랍군요.”

“아니, 잠깐만. 그보다 칼리나가 나와 연이 있다고?”

모든 동료 NPC가 처음부터 플레이어에게 마냥 호의적인 건 아니다. 플레이어를 암살하려는 암살자도 있고 적대하는 영주도 있는 등 온갖 미친놈들이 즐비하다.

개중에 칼리나… 정확히 칼리나 디 카노사 여변경백이라고 불리는 NPC는 원래 시작부터 플레이어에게 증오에 가까운 감정을 가지고 있는 NPC다.

그런 그녀를 동료로 삼기 위해서는 남만왕 맹획마냥 칠종칠금을 해줘야 한다. 문제는 저 붙어있는 칭호들을 보면 알겠지만, 세력이 어마어마하게 크고 넓은 친구라 한 번 박살 내는 것도 힘든데 그 짓을 일곱 번이나 해야 해서 초반부에 동료로 삼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아무튼, 그렇게 한 번씩 두들겨 패고 놓아주면서 칼리나는 조금씩 플레이어에 대한 증오를 희석시키는 한편 자신을 패배시킨 플레이어에게 흥미를 가지게 된다.

시간이 흐를수록 흥미는 관심으로 바뀌고 관심은 곧 집착으로 바뀌며 집착은 이내 뒤틀리고 일그러진 애정으로 바뀌게 되는데 흔히들 말하는 얀데레 캐릭터가 레이디 칼리나의 정체성이었다.

다만 그녀는 공략 난이도에서 알 수 있듯 동료로서의 의미보다 업적과도 같은 의미가 강한 NPC였고 집착이라는 단어만 봐도 알겠지만, 그녀를 동료로 삼게 되면 굉장히 피곤한 경우가 많았다.

“진짜 머리가 어떻게 된 겁니까? 아니면 과거의 일을 과거에 묻어두기로 한 겁니까?”

과거에 내가 그녀와 싸운 건가? 젠장. 돌겠군. 생각해보면 힐데도 그렇고 칼리나도 그렇고 어딘가 문제 있는 것들이랑만 부딪히는 것도 나름 능력이라면 능력이네.

“으음… 사실 일시적으로 기억상실에 걸린 것 같아.”

“그건 또 무슨….”

힐데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날 바라봤지만 난 어깨를 으쓱였다.

“내 입으로 말은 안 했지만, 너도 대강 짐작은 하고 있잖아. 사실 지난번 전투의 패배 이후로 조금 기억이 빈 것 같아.”

“흐음, 많이 심각합니까?”

“그 정도는 아니야. 너랑 지내다 보면 조금씩 기억이 떠오르는데 그걸 보면 간헐적인 기억상실 같아.”

“뭐, 좋습니다. 사실 제가 지금 말씀드리는 것도 이전의 라그나르 당신에게 들은 이야기입니다. 그걸 그대로 얘기하는 거니, 제게 뭐라고 하지는 마십시오.”

“알았으니까 얘기나 해봐. 근데 내가 그런 얘기를 너한테 했어?”

“라그나르 당신이 죽어도 신성 제국은 오기 싫어하길래 캐물었더니 이런 과거가 있었다고 얘기해 줬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힐데는 이야기꾼처럼 과거의 일을 풀기 시작했다.

* * *

<5년 전>

“야, 힐데.”

“힐데가르트입니다.”

“하하하, 너무 딱딱하게 그러지 마. 어렸을 때는 그렇게 귀여웠는데.”

“헛소리 지껄이지 마십시오.”

“아… 밤에 무섭다고 같이 자 달라고 엉엉 울면서 달려왔던 귀여운 아이는 어디로 가버린 건지.”

“악… 악의적인 왜곡은 그만두십시오.”

어렸을 때부터 함께 지냈던지라 소위 흑역사를 전부 알고 있는 라그나르와 말싸움을 벌여봤자 질 게 뻔하기에 힐데는 의도적으로 말을 돌렸다.

“그나저나 왜 신성 제국에 가기 싫어하는 겁니까?”

자신의 물음에 라그나르는 드물게 얼굴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미친년 하나가 날 쫓아오고 있거든. 농담 한번 잘못했다가 기둥서방 되게 생겼어.”

“기둥서방?”

“기둥서방이라는 건 음… 아직 너한테 말하긴 좀 그런데 아무튼 그런 게 있어.”

* * *

“대강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아마 당신이 얘기했던 그 미친년이 레이디 칼리나겠지요. 실제로도 그 이후 칼리나가 어쩌고저쩌고 얘기한 적도 많으니까요.”

“음… 그렇단 말이지?”

“그녀를 염두에 두고 일을 벌인 게 아니었습니까?”

원래는 신성 제국 황제인 바르바로사에게 도움을 요청할 생각이었다. 물론 황제인 그가 내가 도움을 요청한다고 들을 리는 없지만, 나는 황제의 눈과 귀가 어디서 어떻게 활동하는지 알고 있었고 거기에 접촉할 생각이었다.

바르바로사는 황권 강화에 평생을 바친 황제였던 만큼 비리로 얼룩진 볼프강을 고발하면 본보기 삼아서 그를 조질 게 확실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칼리나가 아군이 된다면 더 빠르고 안전하게 일을 처리할 수 있을 테니 곧장 그녀에게 편지를 쓰기로 했다. 힐데의 말을 들어보면, 어쨌거나 연은 있는 것 같으니 적당히 도와달라고 부탁하면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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