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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바이킹이 되었다-26화 (26/205)

▣ 026화

“하. 너는 볼프강의 말을 그대로 믿었나? 멍청할 정도로 순진하군.”

“그럼 그게 다 거짓말이라는 말씀이십니까?”

“상식적으로 그의 입장에서 비밀을 아는 자가 많아서 좋을 게 뭐가 있겠나?”

“그럴 리가 없습니다. 분명 저와 약속을 하셨습니다. 이렇게 계약서까지….”

그녀는 품 안에서 계약서를 꺼내 들었지만 난 코웃음 치며 그녀를 비웃었다.

“이쯤 되면 멍청한 게 맞는 것 같군. 너 같은 이교도 노예는 하루에도 몇 명씩 죽어 나가는 게 현실인데 거기에 숫자 하나 더 보탠다고 그가 눈 하나 깜짝할 것 같나?”

원래 악을 팔 때는 진실을 몇 방울 섞어야 한다. 미카엘이라는 기사를 죽일지 아닐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이븐 시나는 죽일 가능성이 컸다. 그녀가 신의(神醫)건 뭐건, 볼프강에게는 얼굴이 추하게 생긴 노예에 불과할 테니까.

“너와 지금은 변사체가 된 미… 미 뭐시기 기사가 날 죽이는 데 성공했어도 병력을 보내서 전부 죽여버렸겠지. 왜냐고? 영주는 날 죽이는 데 그치지 않고 레비아탄 상단을 조지고 싶어 하거든.”

“…….”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지만, 나는 조용하면서도 묵직하게 팩트를 내리꽂았다.

“목 위에 달린 게 장식이 아니면 잘 생각해 봐. 나도 죽고, 너도 죽으면 영주는 이런 식으로 발표하겠지.”

나는 가볍게 목을 가다듬은 뒤 나름 근엄한 목소리로 영주의 흉내를 냈다.

“블라디미르 스바치치라는 용병단장이, 돈에 눈이 멀어 앨드레이 영애를 납치했다. 블라디미르는 탈다스 상단장에게 고용된 바, 영주로서 그 둘의 관계를 철저히 조사할 것이다.”

뭐, 실제 앨드레이 영애는 멀쩡히 살아있으니 다른 적당한 핑계를 대겠지만 사실 그건 중요하지 않다. 요점은, 적당한 말로 이븐 시나를 압박하는 것이었고 예상대로 지금 그녀의 눈동자는 쉴 새 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영주는 네 죽음을 빌미로 레비아탄에 개입하고 온갖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상단장을 추궁하며 박살 낼 거야. 죽은 자는 말이 없는 법이니 아주 좋은 핑곗거리가 되겠지.”

“그, 그런….”

여전히 그녀는 혼란스러워하는 얼굴이었고 나는 악마가 속삭이듯 그녀를 꼬드겼다.

“그럼 이렇게 하자고. 혹시 일이 성공하면 따로 표시 남기기로 한 게 있지 않았나?”

그녀는 내가 그 사실을 알고 있다는 점에 놀란 듯했지만 체념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붉은 천을 4개 감아두고 기다리기로 했습니다. 그걸 발견하면 상대측에서 호각을 불어 확인했다는 신호를 보낼 겁니다.”

내가 힐데를 바라보자 그녀는 눈치 빠르게 수하들을 시켜서 붉은 천을 묶어놓았고 나는 도끼를 다시 허리에 걸며 그녀에게 얘기했다.

“어디, 누구 말이 맞을지 한번 지켜보자고.”

* * *

나는 혹시나 모를 이븐 시나의 돌발행동을 방지하기 위해 항상 힐데를 그녀에게 감시로 붙여놓았다. 내가 말리긴 했지만, 아직까지 이븐 시나에 대한 힐데의 적대감은 상상을 초월하니 감시를 잘 수행해 줄 것이다.

그동안 난 죽인 시체들을 땅에 묻고 물자들을 정리했는데 그 과정에서 이렇다 할 큰 소득은 없었지만, 미카엘이 입던 중갑과 질 좋은 장검을 획득할 수 있었다.

도적들이 들고 다니는 불순물이 잔뜩 섞여 있는 무기들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멋들어지고 고급스러워 보이는 무기였다.

물론 내 주 무기는 도끼지만, 당분간은 미카엘이라는 기사를 연기해야 했기에 그의 행동거지와 말투, 목소리를 최대한 흉내 내며 시간을 보냈다.

영주의 후속대가 온 건 사흘이 지났을 무렵이었는데 그들은 우리가 남긴 표식을 발견했는지 날카로운 호각소리가 산맥 곳곳에 울려 퍼졌고 이내 무장한 모습의 병력들이 천천히 우리를 향해 다가왔다.

“오, 진짜로 올 줄은 몰랐는데… 하긴, 뛰어봤자 부처님 손바닥 안이지.”

고인물 짬밥이 어디 가겠는가. 이제 막 백작이 된 애새끼가 쓰는 음모는 너무 뻔하다 못해 진부할 정도다.

물론, 그것과는 별개로 그 개자식에게는, 반드시 이번 일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해 줄 생각이다. 그를 위해선 인간 병기라고 불리는 기사 놈들을 조져야겠지만, 다행히 기사는 둘뿐이었다.

하나는 내가, 하나는 힐데가 상대하고 기습의 묘미를 살린다면 별다른 피해 없이 처리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적을 방심시키기 위해 병력을 3명만 남기고 나머지는 전부 다 수풀에 매복시킨 뒤 투구를 뒤집어쓴 채 홀로 상대를 맞이하러 나갔다.

느긋하게 우리를 향해 다가오고 있는 무리 중 최선두에 서 있던 사내는 당연한 것처럼 날 향해 거만한 목소리로 물었다.

“수고했네. 미카엘. 그 귀족 사칭범 놈은 붙잡았나?”

대강 알고 있긴 했지만 내가 사칭을 한다는 증거를 잡은 모양이다. 어쩐지 지나치게 시일을 질질 끌더라니 그사이에 진위를 확인해 본 모양이군.

나는 내심 볼프강에 대한 평가를 한 단계 높인 뒤 미카엘의 목소리를 최대한 흉내 내며 공손하게 대답했다.

“안타깝게도 생포에는 실패했습니다. 마취에 걸려 헤롱거리면서도 괴물 같은 힘으로 저항해서 부득이하게 죽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쯧, 그건 아쉽게 됐군. 목은 확보해 놨겠지?”

“자른 뒤 소금에 절여서 보관해뒀습니다.”

“고생했네. 우리 귀하디귀한 ‘영애’님께선 어디에 계시나?”

“도망치지 못하게 천막에 가둬놨습니다. 제가 처리할까요?”

“아니, 내가 직접 하지. 희망이 공포로 바뀌는 순간을 보는 것만큼 즐거운 일도 없거든.”

세상에 둘도 없을 싸이코 변태 새끼였군. 뭐, 그럴수록 그녀가 느끼는 배신감이 클 테니 나로서는 두 팔 벌려 환영할 일이다.

기사는 ‘공작가의 영애’가 머무는 천막인데도 불구하고 거침없이 천막을 헤치고 들어갔다. 그 안에서 불안한 표정으로 앉아 있던 이븐 시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기사에게 다가갔다.

“휴스턴 경. 어떻게 됐습니까? 저도 상황을 알고 싶었는데 미카엘 경이 계속 이곳에만 있으라고 하셔서….”

“오, 대부분 잘 끝났습니다.”

“아, 그럼 저는 약속대로 자유가 될 수 있는 겁니까?”

“약속? 무슨 약속을 말하는 것인지 모르겠군.”

갑작스러운 하대와 바뀐 분위기에 그녀는 휴스턴이라 불린 사내의 눈치를 보며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보, 볼프강 백작님께서 직접 해 주신 약속을….”

“푸하하하, 어처구니가 없군. 영주님께서 비천한 노예와 한 약속을 왜 지켜야 하지?”

“그게 무슨…….”

“흐흐, 넌 이곳에서 죽는다는 말이다. 이 추하고도 역겨운 이교도 년아.”

대화는 이걸로 충분하다 생각한 것인지 사내는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 들었고 이븐 시나는 겁에 질린 모습으로 조금씩 뒷걸음질 쳤다.

뜬금없지만, 혹시 FPS게임을 해본 적 있는가? 게임을 플레이할 때 어떤 순간이 제일 위험하다 생각하는가? 허겁지겁 파밍을 할 때? 자기장이 줄어들어 도망쳐야 할 때?

아니다. 바로 저격총을 들고 상대의 대가리를 겨누고 있을 때다. 그때만큼은 자신이 포식자라는 생각에 빠져 누군가 자신의 대가리를 노리고 있다는 생각 자체를 못 하게 된다.

지금 휴스턴의 모습이 딱 그러했기에 나는 아주 천천히, 주변에 있는 모두가 눈치채지 못하게 오른손을 허리춤으로 가져갔다.

그렇게 내가 휴스턴의 등 뒤에 서게 되는 순간 나는 벼락같이 검을 뽑아 그의 투구와 목가리개 사이에 검을 쑤셔 박았다.

“끄아아아악!!”

단숨에 절명시킬 생각이었는데 칼이 조금 빗나갔는지 그가 구슬픈 비명을 내질렀지만, 다음번 공격은 여지없이 그의 목을 베어냈다. 아무래도 평상시에 대강 찍어도 끔살당하는 도끼를 쓴 데다 도끼살인마 특성 때문에 검술이 무뎌진 모양이었다.

휴스턴의 옆에 서 있던 기사는 뜬금없는 내 행동에 기겁하며 검을 뽑아 들었지만, 그의 애잔한 반항은 천막 구석에 숨어있던 힐데의 메이스에 의해 진압되고 말았다.

힐데는 그 가냘픈 체구와 어울리지 않게 통짜 쇠로 된 메이스로 상대의 투구를 내려찍었는데 어찌나 세게 후려쳤는지 상대의 머리는 호빵을 뗀 호빵맨의 머리와도 같은 모습이었다.

그를 시작으로 여기저기서 비명이 들려왔고 나는 당당히 밖으로 걸어 나갔다. 예상대로 비명의 주인은 영주의 병력들이었다.

그들은 방어구와 무기까지 바닥에 내팽개친 채 히히덕거리며 쉬고 있었기에 아군의 급습에 제대로 된 반항조차 하지 못하고 전부 끔찍한 모습으로 죽어있었다.

그렇게 죽음으로써 모두의 입을 틀어막은 나는 힐데에게 붙들려 있는 이븐 시나를 향해 물었다.

“내 말이 맞는 것 같은데 자네 생각은 어떤가?”

그녀는 눈앞의 광경이 믿기지 않는 것인지, 아니면 그다음 차례는 자신이라는 공포에 휩싸여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침묵으로 답했고 나는 그런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네가 제법 쓸만한 의사라 들었다. 맞나?”

“정화교단의 고문 방법을 몸으로 깨우치고 싶지 않다면 이번에는 입을 여는 게 좋을 거야.”

이븐 시나가 대답을 하기도 전에 힐데가 으르렁거리며 협박했고 그게 제대로 먹혔는지 그녀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였지만 성실하게 내 물음에 답했다.

“조, 조금 관심을 가지고 있는 정도입니다.”

사실 그녀의 의술 실력은 몇 번이나 말했듯 신의라고 불릴 정도였지만 그 외모 때문에 다른 영주나 귀족들에게도 중용 받지 못했다.

실력이랑 외모랑 무슨 상관이냐고 할 수 있는데 의사라는 자가 저런 외모를 가지고 있으면 당연히 거부감이 들지 않겠는가.

헬스 트레이너라는 사람이 살이 뒤룩뒤룩 찐 돼지라면 무슨 생각이 들겠는가? 자기 몸 관리도 못 하는 새끼가 무슨 남의 몸을 관리한다고? 지랄도 유분수지. 라고 생각하지 않겠는가. 똑같은 이치다.

하지만 나는 그녀의 진면목을 알고 있으니 거리낄 게 없다. 애초에 이런 쌩쇼를 한 것도 전부 그녀를 얻기 위해서가 아니었던가.

“살고 싶다면 날 섬겨라.”

“살려만 주신다면 뭐든 못 하겠습니까? 하지만 제 얼굴을 보고도 그렇게 말씀하실 수 있겠습니까?”

그 말과 함께 그녀는 천천히 자신의 가면을 벗었고 옆에 서 있던 힐데는 그녀의 얼굴을 보자마자 인상을 찌푸렸다.

“확실히 끔찍하군.”

그 얼굴이 드러난 건 한순간이었지만, 그 찰나의 순간에도 알 수 있을 정도로 그녀의 얼굴은 끔찍하고 흉측했다.

어찌나 끔찍했는지 마치 신의 온갖 악의가 뒤섞여서 인간으로 빚어졌다면 딱 저런 모습일 거라고 당당하게 얘기할 수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나는 이미 몇 번이나 그녀의 맨얼굴을 봐왔기에 기분 나쁘기는커녕 오히려 반가울 정도였다.

“하지만 난 네 얼굴이 필요한 게 아니라 네 의술이 필요한 것뿐이다.”

“…….”

“침묵은 긍정인가? 하지만 웬만하면 그대의 입으로 직접 듣고 싶군. 마지막으로 묻겠다. 나를 섬길 텐가?”

“그 전에 하나만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얼마든지.”

“블라디미르 경께서는….”

“라그나르다.”

“예?”

“내 이름은 라그나르 로드브로크다.”

영특한 그녀라면 굳이 더 설명하지 않아도 이해할 것이다. 실제로 그녀는 내 이름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는 듯 내게 되물었다.

“라그나르 경. 경께서는 제 의술을 원한다고 하시지만, 저보다 뛰어난 이들은 수도 없이 많습니다. 혹여 제 흉측하고, 역겨운 외모에 동정심을 느끼셔서 저를 거두시려는 겁니까?”

“그대는 모든 것에 이유를 찾고 싶어 하는군.”

지금 그녀는 내게 합리적이면서도 납득 가능한 이유를 요구하고 있었다. 아마, 그녀는 평생을 살면서 이유 없는 호의를 받아보지 못했겠지.

나는 천천히 숨을 고른 뒤 가면 아래 숨겨진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얘기했다.

“내가 너의 능력을. 너의 힘을. 너의 모든 것을 원한다. 다른 이유가 더 필요한가?”

내 말에 그녀는 한 치의 머뭇거림도 없이 자신의 가면을 벗고 내 앞에 무릎 꿇은 뒤 조심스레 내 발등에 입을 맞추었다.

그런 그녀의 행동이 뭘 뜻하는지 나는 알고 있었기에 그녀를 제지하지 않았고, 이내 그녀는 벅차오르는 목소리로 내게 충성을 맹세했다.

“아부 알리 알 후사인 이븐 압둘라 이븐 시나. 저의 이름을 걸고 당신께 영원한 충성을 맹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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