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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바이킹이 되었다-25화 (25/205)

▣ 025화

내가 슬슬 영주 쪽에서 본색을 드러낼 거라고 예상한 건 이븐 시나의 행동 때문이다.

그녀의 외모만 봐도 알 수 있듯 타인에게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 자체를 극도로 혐오하는 성격이지만,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나와의 이야기를 즐기고 있다.

이건 요사스러운 혀 특성과 더불어 내가 그녀를 편안한 분위기로 리드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단순히 그것만으로 그녀가 저렇게 생글생글 웃으며 사람을 대할 리가 없다.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라고 했던가? 극단적이긴 하지만 저 말은 사람의 본질이 그리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런 관점에서 이븐 시나를 관찰해보면 답은 의외로 금방 나왔다.

“단장님. 여기 차 드세요.”

지금처럼 그녀는 종종 직접 차를 달여서 내게 건네줬는데 내가 비록 의학에는 문외한이라지만 서당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 법이다.

내가 고인물로서 만 시간을 넘게 플레이하면서 이븐 시나를 동료로 들였던 시간이 얼마나 된다고 생각하는가?

직접 만들지는 못해도, 약초 중에서 뭐와 뭐를 섞으면 어떤 효능을 낸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그녀가 달인 뒤 몸에 좋은 거라며 내게 건네는 차에는 마비독이 아주 미량 담겨있었다.

다만, 극소량이기에 지금 당장 내 몸에 무슨 일이 생기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걸 꾸준히 복용하고, 일정 시점을 넘어가면 전신마비에 걸린 것처럼 움직일 수 없겠지. 그럼 그때가 곧 내가 죽는 때가 될 것이다.

사실 이게 이 게임의 개 같은 점인데 플레이어가 독에 당하면 당한다고 로그가 뜨거나 상태창에 나와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그게 아니니 플레이어들이 능력 있는 의사 동료에게 목을 매는 것이다. 막말로 사람인 이상 삼시 세끼를 꼬박꼬박 먹어야 했고 그 수많은 식사 중에 단 한 번만 독이 들어있어도 골로 갈 테니까.

“감사합니다. 영애님. 요새 잠을 제대로 못 자서 그런지 몸이 찌뿌둥하고 마음먹은 대로 안 움직이는군요.”

내가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초기 마비증세를 얘기해주자 그녀는 이때다 싶었는지 차를 내게 한 잔 더 권유했다.

“그럴 줄 알고 심신을 안정시켜주는 약초를 조금 넣어봤어요.”

“확실히 영애님이 타주시는 차를 마시면 몸에 활력이 돌긴 하더군요. 물론 맛은 쓰다 못해 떫지만요.”

“몸에 좋은 약은 입에 쓰다고 하잖아요?”

저건 개소리인 게 몸에 좋든 안 좋든 약은 다 쓰다. 체감상 몸에 안 좋은 약이 더 썼던 것 같다.

“하하, 감사히 잘 마시겠습니다.”

나는 차를 마신 뒤 잠깐 화장실에 가겠다며 빠져나와 풀숲에서 마신 것들을 전부 다 토해냈다.

“그웨에에에엑.”

안 그래도 쓴 약이, 위산과 뒤섞이며 혀를 마비시킬 정도로 쓴 액체로 변모했고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바닥을 붙잡고 고해성사를 시작했다.

그렇게 고뇌의 시간을 거친 나는 입안을 물로 헹궈냈다. 물에 묘하게 붉은색이 섞여 있고 입안에서 비릿한 철 맛이 나는 걸로 봐서 하도 토악질을 하다 보니 식도 쪽에 상처가 난 모양이다.

“후우… 그냥 싹 다 엎어버리고 싶네.”

하지만 이븐 시나는 이런 고생을 하는 한이 있더라도 동료로 삼을만한 가치가 있었기에 기왕 참은 거 조금만 더 참기로 했다.

그렇게 이틀이 더 지났다. 그간 몸 상태가 안 좋다며 식사까지 걸렀기에 지금의 나는 누가 봐도 병자 그 자체였다.

내 상태가 눈에 띄게 안 좋아지자 스스로를 미카엘이라고 소개했던 호위기사는 비웃음과 동정이 뒤섞인 얼굴로 내게 다가와 조롱했다.

“쯧쯧. 용병이라는 자가 자기 몸 관리도 못 한단 말이오?”

“미안하게 됐소. 뭘 잘못 먹어서 탈이 난 모양이오.”

“됐소. 아픈 사람한테 뭐라 하는 것도 못 할 짓이지. 불침번은 내가 대신 서줄 테니 몸조리나 잘하시오.”

“고맙소. 이 은혜는 꼭 갚으리다.”

물론 나는 은혜를 원수로 갚을 생각이다. 애초에 저쪽에서 이미 통수 칠 생각으로 가득 차 있는데 골프공도 아니고 뒤통수를 후려달라고 기다리는 것만큼 멍청한 짓이 어디 있겠는가.

그렇게 밤이 됐고 나는 힐데를 비롯한 병력들에게 무기를 침낭 안에 숨긴 채 깨어있는 채로 대기할 것을 명했다.

내가 거동조차 힘들어하는 걸 확인했으니 굳이 더 시간을 끌지 않고 오늘 거사를 치를 것이다. 실제로 불침번을 서는 인원들 목록을 보니 대부분 영주 휘하의 병력들인 데다 저녁에 영애가 하사하는 거라며 술과 고기까지 내린 걸 보면 더 볼 것도 없었다.

그렇게 체감상 새벽 3시 정도가 됐을 때쯤, 밖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고, 자다가 들으면 안 되는 소리 2위에 랭크된 검집에서 검을 뽑는 소리가 나지막하게 울려 퍼졌다.

나는 가늘게 실눈을 뜨며 침낭 안쪽에 숨겨둔 도끼를 손이 으스러져라 움켜쥔 뒤 기회를 노렸다. 미카엘은 내 앞까지 다가오더니 칼을 치켜들며 고해성사와도 같은 말을 읊조렸다.

“그대에게 별다른 원한은 없지만 영주님께서 명하시니 어쩔 수 없구려. 부디 날 원망하지 마시오.”

“물론. 그러니 네놈도 날 원망하지 말도록.”

“헛! 무, 무슨!”

곤하게 자고 있을 거라 생각한 사람에게서 대답이 튀어나오자 당황한 그는 서둘러 칼을 내려쳤지만, 나는 몸을 날려 피한 뒤 작은 손도끼를 있는 힘껏 휘둘렀다.

평상시에 그를 지켜주던 갑옷은 소음 때문에 벗고 왔는지 입고 있는 건 천과 가죽으로 된 옷과 그 밑에 있는 연하디연한 살점뿐이었다.

“끄아아아악!!!”

강철의 도끼날이 그의 살을 파고들자 고통에 가득 찬 비명이 울려 퍼졌고 나는 마저 도끼를 휘둘러 그대로 그의 목을 따버렸다.

그의 머리가 바닥을 구르는 소리와 함께 몸이 무너져 내렸지만 난 굳이 더 지켜보지 않고 막사 밖으로 나갔다.

이미 그의 단말마가 신호가 됐는지 여기저기서 단말마가 울려 퍼지고 있었고 나는 신선한 피가 뚝뚝 떨어지는 도끼를 치켜든 채 소리쳤다.

“모조리 죽여 버려라!!!!”

미리 습격에 대해 얘기가 된 데다 원래 이쪽의 숫자가 더 많아서 전부 제압하는 데는 1분도 걸리지 않았다.

애초에 인질을 잡을 생각도 없었기에 병력들은 거리낌 없이 무기를 휘둘렀고 힐데 역시 피가 뚝뚝 떨어지는 메이스를 들고 무표정한 얼굴로 내게 보고했다.

“영주의 호위병들은 모조리 참살했습니다.”

“고생했어. 혹시 사망자는 있어?”

“사망자는커녕 부상자도 없습니다.”

그 믿음직스러운 대답에 나는 고생했다는 의미로 힐데의 어깨를 툭툭 쳐준 뒤 횃불을 들고 이븐 시나가 머무는 천막으로 향했다.

당연히 그녀 역시 이 소란통에 깨었는지 어느새 얼굴에 가면을 쓰고 있었다. 야심한 새벽이지만, 내 도끼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확인한 그녀는 기겁하며 비명을 내질렀다.

“블라디미르 경! 이게 대체 무슨 짓입니까!?”

“무슨 짓인지는 그대가 더 잘 알 거라 믿소.”

“그게 무슨….”

“내게 개처럼 끌려오기 전에 순순히 제 발로 나오는 게 신변에 좋을 것이오.”

“무, 무엄하다. 나는 앨드레이 가문의 장녀. 아리아 앨드….”

그녀의 말에 나는 코웃음 치며 심드렁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아리아 앨드레이라… 언제부터 네가 그런 귀족이 됐지? 이븐 시나?”

“힉!”

정확히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내 모습에 이븐 시나는 그대로 얼어붙었고 내가 고갯짓하자 수하들이 다가가 그녀를 끌고 온 뒤 내 앞에 무릎 꿇렸다.

“평민 따위가 외국의 귀족을, 그것도 감히 공작가의 영애를 사칭하다니… 네년이 정녕 간이 배 밖으로 나왔구나.”

이븐 시나에게 아리아 엘드레이라는 가명은 신데렐라의 구두와도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신데렐라의 마법이 12시가 되면 풀리는 것처럼, 이븐 시나가 뒤집어쓰고 있던 아리아 앨드레이라는 가면 역시 진실 앞에서 무력하게 깨질 뿐이었다.

“아아… 읏….”

자신의 가면이 깨져버리고 난 그녀는 나약함 그 자체였다. 그녀는 저항할 의지를 잃어버렸는지 고개를 푹 숙인 채 흐느꼈고 힐데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 모습을 바라보다 날 향해 물었다.

“헌데 라그나르. 오늘 적들이 급습할 거라는 걸 대체 어떻게 알았습니까?”

나는 이번 작전을 시행하며 모두를 완벽하게 속이기 위해 힐데에게도 대략적인 개요만 얘기했을 뿐 자세한 얘기는 하지 않았다.

그렇게 내게 모든 전말을 들은 힐데는 분노에 찬 목소리로 이븐 시나를 노려보며 메이스를 치켜들었다.

“감히!”

평상시 특유의 무표정하면서도 시니컬해 보이는 얼굴과는 다르게 지금의 그녀는 여과 없이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고 있었다.

분노. 수많은 감정 중에서도 오직 분노만이 그녀를 감싸고 있었다. 힐데가 뿜어내는 살기가 가시화되어 요동쳤고 그녀는 순식간에 이븐 시나에게 달려들어 한 손으로 그녀의 멱살을 쥔 뒤 들어 올려 나무에 메다꽂았다.

“커헉!!”

“네년이 감히!!!!!!”

그녀의 목을 쥐고 있는 힐데의 손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고 나는 저러다가 진짜로 사람을 잡을 것 같았기에 서둘러 힐데의 손을 잡고 그만하라는 뜻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하지만 그런 내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힐데는 울 것만 같은 표정으로 날 쳐다보았다.

“라그나르. 전 당신을 잃고 싶지 않습니다.”

“나도 힐데 너를 잃고 싶지 않아.”

내가 그만하면 됐다는 뜻으로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자 그녀는 이븐 시나를 내팽개치며 바닥에 집어 던졌다.

“케흑!”

이븐 시나는 마른 나뭇가지처럼 힘없이 바닥을 굴렀고 나는 그런 그녀의 앞에 쭈그리고 앉아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속삭였다.

“자네처럼 현명한 자라면 알겠지. 알고 있는 걸 전부 얘기해. 대답이 마음에 들면 살려주지.”

일반적이라면 상대의 자비에 기대는 협상 따위는 하지 않을 테지만, 이븐 시나는 생생한 죽음의 공포와 거리낌 없이 사람을 죽이는 우리의 모습에 겁을 집어먹고 모든 걸 토설했다.

“저, 저는 원래 아이유브 왕조 출신의 의사입니다. 제 얼굴과 몸에 나 있는 흉터들을 고치기 위해 세상을 떠돌다가 노예로 붙잡혔고 노바라의 영주가 절 구매했습니다.”

“계속 얘기해봐.”

“영주는 자신의 사업에 방해가 되는 인물이 있다며 이번 일을 성공시키면 풀어주고 노잣돈까지 두둑이 준 뒤 고향으로 돌려보내 준다고 했고 선택의 여지가 없던 저는 그 일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 영주가 너를 고른 거지?”

“보시다시피 얼굴의 흉터 때문에 가면을 쓰고 다니는지라 얼굴 표정을 숨길 수 있고 어색한 목소리도 목이 다쳤다는 핑계를 댈 수 있습니다.”

“그럴듯하군.”

“거기에 몸이 이러다 보니 요양을 위해 여기저기를 떠돌고 있다는 핑계도 댈 수 있고 실제로 아리아 앨드레이 영애도 천연두를 앓고 난 뒤 생긴 흉터 때문에 저처럼 가면을 쓰고 다니기에 적합하다고 얘기했습니다.”

“그래서 날 죽이는 데 가담하려 한 건가?”

“주, 주, 죽이려는 건 저도 몰랐습니다. 그저 자기 일에 거슬리니 협박해서 쫓아낼 생각이었다고 했습니다. 의사인 제가 어떻게 사람을 죽이는 일에 가담하겠습니까?”

하긴, 실제로 그녀가 쓴 마비독은 하루 이틀 정도 앓고 나면 나을만한 정도였고 그마저도 한 번에 섭취시킨 게 아니라 꾸준히 극소량씩 섭취시켜서 몸에 장기적인 악영향을 끼치는 것도 아니었다.

일의 전말을 전부 파악한 나는 슬슬 그녀에게 약을 팔기로 했다. 병은 의사에게, 약은 약사에게라는 말도 있지 않던가. 나는 그녀에게 거하게 약을 팔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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