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24화
이븐 시나.
풀 네임은 ‘아부 알리 알 후사인 이븐 압둘라 이븐 시나.’ 그녀를 칭하는 호칭은 수십 가지였는데 그중 대표적인 것만 꼽아보면 다음과 같다.
의술의 대가, 위대한 명의, 의학의 신, 역병 의사. 신조차 모독하는 사상 최대의 신의.
위의 호칭들에서 알 수 있듯이 그녀는 살아 움직이는 백신이자 기적 그 자체였으며 의사 클래스의 동료 중에서도 탑티어에 속했다.
그녀가 동료로 있는 한 병력들이 겪게 되는 상태는 딱 2가지밖에 없다.
죽거나 아니면 살거나.
거기에 그녀의 존재만으로 병력들이 질병에 걸릴 확률이 줄어드는 것은 물론이요 기본적인 위생 상태까지 올라간다. 또한, 그녀는 개인 주치의로 임명이 가능해서 플레이어를 케어해줌은 물론 언제나 최상의 상태를 유지하게 도와준다.
플레이어 역시 질병에서 자유롭지 못했는데 전염병에 잘못 걸리면 전투력이 감소하거나, 심하면 장애인이 되는 경우가 허다했고 재수 없으면 뒷목 붙잡고 돌연사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 때문에 보통 동료로 삼을 때 최우선 순위는 의사클래스였는데 혹여나 이븐 시나나 화타, 아스클레피오스 같은 인물을 동료로 삼으면 의사 클래스는 졸업했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런 그녀의 얼굴을 내가 보지도 않고 알아볼 수 있었던 건 원래 이븐 시나가 저런 모습으로 나오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녀는 굉장히 흉측한 모습을 하고 있었는데 얼굴에는 보자마자 절로 눈을 돌릴 정도로 끔찍한 흉터 자국이 낙인처럼 찍혀있었고 몸에는 진물이 날 정도로 처참한 화상 자국이 벽지처럼 도배되어 있었다.
지금도 그녀는 얼굴 전체를 가면으로 가리고 있었지만, 그 가면으로도 다 가리지 못하는 흉 자국이 가면 밑으로 드러나 있었고 슬쩍슬쩍 드러나 있는 피부 사이로 화상 자국이 적나라하게 박혀있었다.
저 모습만 봐도 알 수 있듯 이븐 시나를 공략하는 방법은 생각보다 간단했는데, 다정한 말과 함께 자존감을 세워주며 최종적으로 화상 자국을 치료할 방법을 구해서 그녀를 고쳐주는 순간 바로 맥스가 찍힌다.
타인의 아픔과 고통을 이용해서 등쳐먹는 느낌이 들기는 했지만, 실제로 그녀는 삼신의(이븐 시나, 아스클레피오스, 화타) 중에서도 호감도를 올리기가 제일 편하고 성격도 좋았기에 최우선 영입대상이었다.
화타는 허구한 날 대가리 좀 쪼개보면 안 되겠냐고 찡찡거리고, 아스클레피오스는 태생이 반신이라 그런지 그 자존심을 맞춰주기도 힘들었고 동료들과의 불화도 잦았다.
그런 면에서 그녀는 최고의 동료였는데 반대급부로 만나기가 힘들었다. 전 세계를 무력으로 다 통일하고 황제의 이름으로 그녀를 찾으려고 해도 찾기 힘든 게 이븐 시나다.
그런 그녀가 이렇게 내 눈앞에, 그것도 앨드레이라는 공작가의 영애로 둔갑해서 나타난 걸 보니 실로 당황스럽다. 확실히 앨드레이 공작가의 장녀인 아리아 앨드레이도 그녀처럼 가면을 쓰고 다니기는 하지만….
“무슨 일이신가요?”
불볕더위에 대지가 쩍쩍 갈라지는 듯한 목소리에 나는 정신을 차리며 그녀에게 예를 갖췄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이번에 레이디의 호위를 맡게 된 블라디미르 스바치치라고 합니다. 실례를 무릅쓰고 만나 뵙기를 청한 건 안전을 위해 호위 대상의 모습을 확실히 파악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내 말에 그녀는 자신을 가리키며 자조적으로 웃었다.
“그렇군요. 역시 믿음직스럽네요. 하지만 제 꼴이 이러니, 조금만 양해해주시겠어요?”
“물론입니다. 마이 레이디.”
나는 그녀에게서 물러났고 떨떠름한 표정으로 미카엘이라는 호위기사를 바라보았다. 그는 뭐 할 말 있느냐는 듯 어깨를 으쓱였고 나는 계약 조건을 조금 수정했다.
“영애께서 원하시니 경로 변경에 관한 건 그대의 뜻대로 하리다. 대신 추가로 늘어난 호위 기간에 대해서는 하루당 2.5배의 요금을 받을 것이오.”
“2.5배!? 그건 너무 많은 것 아니오? 1.5배로 합시다.”
“2.5배.”
“아무리 이쪽이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한다지만 어떻게 2.5배나 올린단 말이오. 2배. 2배로 합시다.”
“2.5배.”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오! 2.5배면 대체 얼마인지 아시오?”
“2.5배.”
“허! 아무리 내가 영주님에게 전권을 받아왔다지만 이건 내 선에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오. 여행이 얼마나 길어질지 모르는데 허투루 계약서 찍었다간 백작가의 재정이 거덜 날 수도 있소. 재수 없으면 재정과 함께 내 목도 날아가겠지.”
“2.5배.”
“미치겠구만. 좋소. 이 부분은 내가 직접 영주님께 아뢰어서 조정하도록 하겠소. 그대가 여기서 배 째라고 2.5배를 앵무새처럼 읊어도 여기서 내가 더 해줄 수 있는 건 없소.”
“흠, 단순히 말만으로는 믿을 수 없고… 그대의 이름으로 된 계약서나 하나 써주시오.”
내 말에 기사는 인상을 찌푸렸으나 이내 일필휘지로 계약서를 썼고 인장을 찍었다. 내가 조심스레 품속에 계약서를 넣는 걸 보더니 질렸다는 듯 날 쳐다보며 비꼬았다.
“철저하시군.”
“용병으로 살다 보면 그럴 수밖에 없소. 그대도 알다시피 용병이라는 직업은 신뢰를 중요시하지만, 그 이상으로 중요시하는 게 눈앞의 보상이지. 용병에게 다음에, 나중에, 내일, 이후에라는 말만큼 의미 없는 단어는 또 없으니까.”
물론, 그것과는 별개로 조금 전의 일은 별 쓸데없는 기 싸움이었다.
애초에 저놈들은 이번 여행에서 날 담가버릴 생각으로 가득 차 있고, 나 역시 매한가지인데 10배의 요금을 물든 100배의 요금을 물든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저 상대는 이번 호위가 진짜 영애의 호위를 하는 것임을 어필하고, 나 역시 내가 이익과 보수에 목숨 거는 용병이라는 걸 어필하기 위한, 웃기지도 않은 해프닝일 뿐이다.
이후 길을 떠나면서 나는 종종 이븐 시나의 말동무를 해주었다. 애초에 나를 고용한 건 귀족 영애인 그녀의 말동무를 해주라는 의미도 있었기에 미카엘인지 머시기인지 하는 기사는 순순히 자리를 비켜주었다.
“영애님.”
“그렇게 딱딱하게 부르지 말고 아리아라고 불러주세요.”
“제가 비록 귀족이라지만 어찌 공작가 영애님의 이름을 사사로이 친구처럼 부르겠습니까.”
내 말에 자칭 아리아 앨드레이는 고개를 푹 숙였고 나는 그녀가 흥미를 보일 만한 이야기를 슬쩍 풀어놓았다.
“영애님도 아시다시피 저희 용병들은 대륙 여기저기를 떠돌아다니지 않습니까?”
“그렇지요. 그대가 듣기에는 사치라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때로는 그 자유로움이 부럽습니다.”
이 게임 내 최고의 떠돌이가 저런 말을 하니 느낌이 미묘했지만, 나는 진짜 공작가의 영애를 대하듯 이야기했다.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요,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 하지 않습니까. 무릇 각자의 삶은 가치가 있는 법이니 그 높낮음을 재단할 바는 아니지요.”
“세상을 오래 산 현자가 할 법한 얘기군요.”
“하하,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몇 년 전 겨울에 앨드레이 공작가에서 열었던 옥토버 페스트가 생각나는군요.”
나는 그녀의 가면을 확실히 벗겨내기 위해서 은근슬쩍 물었다.
“추, 축제 말인가요?”
“예. 그곳에서 원 없이 포도주를 마시고 다양한 종류의 치즈를 먹을 수 있었는데 죽기 전에 한 번 더 가보고 싶군요. 혹시 공녀님도 매년 참여하시나요?”
“글쎄요… 확실히 매년 화려하게 열긴 하지만, 제 몸이 이러다 보니 관심을 가지지 않게 되더라구요.”
그녀의 말에 나는 작게 탄식하며 바로 그녀를 향해 사과했다.
“아… 이런, 죄송합니다. 제가 배려가 부족했군요.”
“아니에요. 딱히 블라디미르 경을 나무라는 게 아니니 괘념치 마세요.”
당연히 괘념치 말아야겠지. 옥토버 페스트는 와인과 치즈가 아닌 맥주와 소시지가 나오며 1년이 아닌 2년마다 여는 축제다.
그걸 포도주와 치즈로 둔갑시키고 매년 연다고 말했는데도 별다른 정정이 없는 걸 보며 난 그녀가 아리아 앨드레이를 연기하는 이븐 시나임을 확신했다.
하지만 나는 그녀의 정체를 확신한 뒤에도 여전히 천연덕스럽게 그녀의 관심과 어그로를 끌 만한 얘기를 꺼냈다.
“제가 사죄의 의미로 공녀님께 도움이 될만한 이야기를 하나 해드리겠습니다.”
“그건 기대되는군요.”
“제가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다 운 좋게 민간요법을 알게 됐는데, 듣자 하니 숯을 만들 때 나오는 연기를 물처럼 모을 수 있다고 합니다. 그걸 피부에 바르면 아토피나 피부 관련 질환에 아주 좋아진다고 하더군요.”
물론 이건 말짱 헛소리다. 목초액은 강산성으로 피부 질환에 좋기는커녕 오히려 피부를 망가뜨릴 수 있다.
“그, 그렇군요. 저도… 돌아가면 한번 시험해봐야겠네요.”
“예. 실제로 이 방법을 알려준 이들은 산속 깊은 곳에 사는 이들이었는데 하나같이 피부가 백옥같은 게 굉장히 매끄러워 보이더군요.”
내 말이 끝나자마자 비록 가면을 쓰고 있지만, 그녀의 표정이 일그러지는 게 눈에 선했다. 그야말로 한 분야의 전문가 앞에서 잘못된 지식이나 내뱉고 있으니 얼마나 지적하고 싶을까.
나는 그런 그녀의 모습을 상상하며 마음속으로 미소 지은 뒤 이번에는 그녀가 좋아할 만한 이야기를 꺼냈다. 어그로를 한 번 끌었으면 흥미를 유지해야 하지 않겠는가.
“아, 그리고 이거는 제가 실제로 겪었던 일인데 국가마다, 각 지역마다 음식에 특색이 있지 않습니까?”
“그렇지요. 추운 북부에서는 국물이나 탕과 같은 음식이 발달하고 남부에서는 음식을 상하지 않게 보존하는 종류의 음식들이 발달했으니까요. 술만 해도 북부의 술들이 훨씬 더 독하지요.”
“맞습니다. 그렇게 여러 곳의 지역적인 음식을 먹다 보면 종종 음식이 맞지 않아서 배탈이 나는 경우가 자주 있습니다만, 이때 말린 모과를 달여서 차로 마시면 꽤 효과가 좋습니다. 저도 한번 효과를 본 뒤로는 늘 말린 모과를 가지고 다니고 있습니다.”
이건 민간요법이긴 하지만 어느 정도 효과가 있는 방법이다. 감기에 걸렸을 때 칡즙을 먹는다든가, 돼지고기가 중금속 제거에 좋다든가 하는 것처럼 말이다.
“아, 죄송합니다. 영애께는 너무 지루한 이야기였나요?”
“네!? 아뇨! 아닙니다. 아주 유익한 이야기였어요. 사실 단장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모과를 그렇게 달여 먹는 것도 좋지만, 모과를 꿀에 재워서….”
그녀는 신이 나서 이것저것 설명하기 시작했고 나는 조용히 그녀의 말을 경청했다. 그렇게 한참을 떠들던 그녀는 문득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는지 멋쩍은 웃음을 흘렸다.
“하하…하. 죄송해요. 제가 갑자기 흥분해버렸네요.”
“아닙니다. 그보다 영애께서 의학에 이렇게 깊은 소양을 가지고 계실 줄은 몰랐습니다.”
“제 몸이 이렇다 보니 싫어도 관심이 가게 되더군요.”
그녀는 적당한 시점에서 도저히 반박할 수 없는 가불기를 시전하며 내가 깊숙이 파고드는 것을 방지했다.
물론 나 역시 굳이 깊게 파고 들어가지 않고 그녀와 대화를 나누는 데 힘을 쏟았다. 나는 그녀가 지루해하지 않게 종종 주제를 전환하면서도 의학과 의술이라는 큰 틀을 벗어나지 않게 대화를 이끌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그녀와 붙어있을 수밖에 없었는데 힐데는 그게 불만스러웠던 모양이다. 불침번을 교대할 때 마침 힐데가 내 후번이었고 그녀는 부루퉁한 표정으로 얘기했다.
“라그나르. 요새 입꼬리가 귀에서 내려오질 않더군요.”
“갑자기 밑도 끝도 없이 그게 무슨 소리야?”
“당신 취향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는 겁니다.”
“내 취향이라… 혹시 내가 이븐… 아리아랑만 얘기하니까 삐진 거야?”
나는 말을 길게 늘이며 힐데를 바라보았고 그녀는 드물게 얼굴을 붉히며 날 노려보았다.
“삐지지 않았습니다. 그보다 아리아라니. 만난 지 며칠이나 됐다고 친한 척을 하는 겁니까?”
“힐데 넌 항상 삐져있을 때 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는 거 알아?”
“….”
“거기에 넌 자각하지 못하겠지만, 습관적으로 주먹을 쥐었다 펴더라.”
그 순간 그녀는 손을 자신의 주머니에 집어넣은 뒤 나를 매섭게 노려보며 쏘아붙였다.
“변태입니까? 믿을 수가 없군요. 저조차도 모를 버릇을 간파해내는 걸 보니 당신이 온종일 저를 관음하고 있다는 건 잘 알겠습니다.”
“그게 그렇게 되나? 아무튼, 난 자러 갈 테니까 경계 좀 철저히 해줘.”
나는 힐데의 머리를 가볍게 툭툭 두들긴 뒤 그녀만 들을 수 있게 속삭였다.
“며칠 안에 저놈들이 본색을 드러낼 거야. 대비하고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