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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바이킹이 되었다-23화 (23/205)

▣ 023화

세금 징수관에게 편지를 받은 지 근 1주일이 지났지만, 특별한 일 없이 시간은 흘러갔다. 현 상황은 평화로움 그 자체였지만 이는 폭풍전야에 불과했고 그 예상은 상단장이 어두운 얼굴로 날 호출하면서 현실이 되었다.

“부르셨습니까. 상단장님.”

“아, 오셨습니까. 일단 앉으시지요.”

난 힐데를 뒤에 세워둔 뒤 바로 상단장 앞에 마주 앉았지만, 그는 내가 착석한 걸 확인하고도 입을 열지 않았다.

저게 단순히 긴장감을 조성하기 위해서인지, 차마 내게 말을 하기에는 민망한 내용이라서 그런 건지 구분이 가지 않았기에 나 역시 입을 다물었다.

그 어색하고도 불편한 침묵의 시간을 먼저 깬 건 상단장이었다. 다만, 그는 맨정신으로는 말을 못 하겠는지 와인을 연거푸 2잔이나 들이켠 뒤 입을 열었다.

“용병단장님도 아시겠지만, 현재 저희 상단은 노바라의 영주인 볼프강 백작과 사이가 좋지 않습니다. 최근에 벌어진 일들도 원인이라면 원인일 수 있겠지만,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과거 제가 백작이 아닌 백작의 남동생을 후원했기 때문일 겁니다.”

“괴롭힘에는 원인이 있다 뭐 이런 말이군요.”

“그렇습니다. 그래서 종종 과거에 그의 남동생이 아닌 백작을 후원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후회를 하곤 합니다.”

상인들도 그렇고 정치인들도 그렇고 혀로 먹고사는 놈들은 이래서 마음에 들지 않는다. 쓸데없이 사족을 붙이고 감성팔이를 해대며 이야기를 질질 끌면서 사람을 지치게 만든다.

특히 외교관 놈들이랑 대화할 때는 탁자에 놓여있는 와인병이 뚝배기를 깨버리라고 놓여있는 게 아닌가 하는 합리적 의심이 들 정도다.

“뭐, 지금 와서 누가 잘했느니 못했느니 잘잘못을 가리는 게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과거에 집착하기보다는 눈앞에 당면한 일을 헤쳐나가는 게 중요하지요.”

“하하, 맞습니다. 과거에 그런 선택을 한 덕분에 라그나르 로드브로크라는 걸출한 영웅을 만날 수 있었지요. 이걸 보면 왜 과거의 현인분들이 인생사 새옹지마라 얘기했는지 이해가 갑니다.”

“상단장님께서는 제 얼굴에 금칠하는 재주가 있으시군요. 하지만 상단장님께서 저와의 관계를 돈독히 다지기 위해서 절 부르신 건 아니겠지요.”

괜히 감성 팔지 말고, 밑밥 깔지 말고 할 말만 하라는 내 말에 상단장은 난감하게 웃으면서도 바로 본론에 들어갔다.

“하하하, 역시 용병단장님 앞에선 아무것도 숨길 수가 없군요. 실은 볼프강 백작이 저희에게 호위 임무를 맡겼습니다.”

“호위요? 자기 휘하 기사랑 병력들은 다 엿 바꿔 먹었답니까?”

용병이 잘 싸우고 어쩌고 해봤자 용병은 용병 나부랭이일 뿐이다. 물론 바랑기안 가드나 란츠크네히트, 제노바 쇠뇌병 같은 엘리트 용병집단도 있지만, 극소수에 불과하다.

“정확히는, 용병단장님을 고용하고 싶다고 하더군요.”

“아니, 그게 뭔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립니까. 그쪽은 상도덕 개념도 없답니까?”

영주가 용병을 고용하는 건 대부분 귀찮은 일을 처리할 때뿐인데 현대로 비교하자면 대기업이 주는 하청이라고 할 수 있겠다.

건수가 크고 남의 손에 맡기기 애매하며 돈 되는 것들은 자신들이 처리하고 도적 토벌이나 범죄자 체포, 멧돼지나 호랑이, 고라니, 너구리 같은 해수 사살, 마을에 대한 대민지원이나 사소한 분쟁 해결같이 귀찮고 더러운 일들은 용병들에게 떠맡기는 식이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병들 입장에선 나름 짭짤하게 돈을 만질 수 있게 기꺼이 그 일들을 떠맡는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영주가 날 고용하려 하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나는 이미 상단장과 계약을 맺고 있지 않던가. 용병이 신뢰성을 최우선 가치로 삼는 걸 생각해봤을 때 아무리 영주라도 이건 선을 넘는 일이었다.

“그 때문에 제게 양해를 구하는 편지를 보낸 거겠지요. 뭐, 말이 양해지 반쯤 협박이지만요.”

상단장은 품속에서 곱게 접힌 편지를 꺼내 내게 내밀었다.

“이건 볼프강 백작이 보낸 편지의 원본입니다. 한번 확인해 보시지요.”

내가 직접 읽을 수도 있었지만 나는 보지도 않고 뒤에 열중쉬어 자세를 취하고 있는 힐데에게 넘겼고 힐데는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안의 내용을 낭독했다.

〖친애하는 레비아탄 상단의 상단장 탈다스에게.

슬슬 날씨가 추워지는데 잘 지내고 있나 모르겠군. 나는 그대가 얼마 전에 바친 담비 가죽 덕분에 겨울을 따뜻하게 날 수 있을 것 같네.

다른 게 아니라 내가 이렇게 편지를 보낸 건 염치 불고하고 그대에게 부탁을 하나 하고 싶어서네. 듣기로 그대 휘하에 있는 블라디미르 스바치치라는 용병단장의 실력이 매우 뛰어나다더군.

자네와 계약을 맺은 건 알고 있네만 잠깐이나마 나를 도와주면 안 되겠나? 내 이번에 친한 친우의 영애가 이곳에 머물고 있다가 이제 돌아가게 됐는데 그녀를 호위하는 데 블라디미르 단장을 고용하고 싶다네.

원래 이런 일은 본 가문의 병사들과 기사단으로 호위를 하는 게 맞는 일이지. 하지만 부끄럽게도 최근 노바라와 그 근방의 치안이 나빠져서 병력을 빼는 게 불가능하다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고귀한 영애를 모시는데 호위를 소홀히 할 수도 없는 일 아닌가. 대체할만한 인물이 누가 있을까 고민하던 찰나에 블라디미르 단장이 행실이 좋고 평판이 좋으며 실력 또한 뛰어나다 하니 그가 적임자라고 생각되더군.

더군다나 그는 귀족이라서 예법에도 바르고 레이디에 대한 배려심도 있으니, 기나긴 여행을 하는 동안 간간이 그녀의 말동무도 해줄 수 있지 않겠나.

부디 바라건대 이번만큼은 내 간절한 청을 거절하지 말아 주게나.

노바라의 영주. 볼프강으로부터.〗

“끝입니다. 따로 추신 같은 건 없습니다.”

낭독을 마친 힐데는 편지를 탁자 위에 내려놓은 뒤 아무 일 없다는 것처럼 뒤에 기립하며 날 호위했고 상단장은 씁쓸하게 웃었다.

“왜 제가 라그나르 경을 호출했는지 이해가 가십니까?”

“흠….”

원래 영애나 귀부인 호위 같은 퀘스트가 있기는 하다. 볼프강이 보낸 편지도 내용 자체만 놓고 보면 딱히 문제 될 것도 없고.

하지만 이건 구린내가 너무 심하게 풍기지 않던가? 내가 요한나와 염료길드의 길드장을 찍어냈던 것처럼 영주 역시 레비아탄 상단을 공격하기 전에 나부터 찍어내겠다는 의도로 보인다.

그게 아니고서야 굳이 나를 딱 지목해서 호위해달라고 할 이유도 없고, 제 얼굴에 침 뱉기나 다름없는 치안이 안 좋다는 얘기를 굳이 몇 번씩이나 강조할 이유도 없지 않은가.

결국, 치안이 안 좋은 것을 빌미로 상행 중에 네놈을 쓱싹해버리겠다는 얘기나 다름없었다.

“거부한다고 해도 딱히 해결책이 보이지는 않는군요.”

이미 한 영지의 영주가 찍어내겠다 다짐했는데 거기서 벗어나는 게 가능할 리가 없다. 물론 돈이고 뭐고 다 내버려 두고 다른 영지나 타국으로 도망치면 그도 날 더 굳이 쫓지는 않겠지만, 빈털터리로 쫓겨나는 건 사양이었다.

“승낙해주시겠습니까?”

“우리는 이미 한배에 타지 않았습니까? 다만, 우리가 맺은 계약의 일부를 조금 수정해야 할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나라고 땅 파서 먹고 사는 건 아니다. 내가 지금은 계약을 맺고 그를 위해서 일하고 있지만, 결과적으로 나와 탈다스가 만난 건 채 3달이 되지 않는다.

3달이 짧은 시간은 아니지만, 그 기간 동안 동료라는 유대감을 심기에는 턱없이 모자란 시간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내가 믿을만한 인물은 오직 힐데가르트뿐이다.

그러니 나는 용병으로서 탈다스 상단장에게 정당한 내 몫의 보상을 요구할 권리가 있다.

“으음… 좋습니다. 마침 요한나가 가지고 있던 지분이 붕 뜨게 됐는데 이를 일부 나눠드리겠습니다. 다만, 이를 매도하실 때는 타인이 아닌 무조건 제게 파셔야 합니다.”

“경영권 때문에 그러시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내가 탈다스를 온전히 믿지 못하는 것처럼 그 역시 나를 온전히 믿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니 저런 단서를 달아놓은 것일 테고 그것까지 뭐라고 할 생각은 없다.

“굳이 팔 생각은 없지만, 그래야 상단장님이 마음이 놓이신다면 편할 대로 하십시오.”

“감사합니다. 허면 볼프강 백작에게 제안을 승낙한다고 답신을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승낙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인 뒤 자리에서 일어나 내 방으로 향했고 방에 오자마자 힐데는 인상을 쓰며 내게 조언했다.

“너무 대놓고 함정이 아닙니까?”

“원래 제일 악랄한 함정은 함정인 걸 알면서도 걸릴 수밖에 없게 만드는 거지.”

“괜찮겠습니까?”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 들어가야 하지 않겠어?”

조금 이르긴 하지만 언젠가는 볼프강과도 부딪칠 생각이었으니 나쁘진 않다. 거기에 나는 이 게임의 고인물이 아니던가.

* * *

탈다스가 이번 호위 임무에 한해 나를 임시로 빌려주겠다는 의사를 보이자마자 영주 측에서는 쌍수를 들며 계약서를 들이밀었다.

계약은 영주 측에서 파격적으로 양보하며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 진행됐고 그렇게 나는 내 휘하의 병력에 상단장이 추가로 지원해준 병력까지 포함해 총 25명의 병력을 이끌고 호위대의 대열에 합류했다.

저쪽에서도 나름 생색을 내려고 했는지 병력을 보내긴 했는데 말 탄 기사 두 명에 보병 대여섯 명이 전부였다. 하긴, 병력이 모자란다는 핑계를 대면서 수십 명을 호위로 붙일 수는 없겠지.

“만나서 반갑소. 레이븐 용병단을 이끄는 블라디미르요.”

“미카엘이오.”

나는 웃으며 그에게 손을 내밀었지만, 그는 별로 악수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는지 간단하게 자기소개만 했고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내밀었던 손을 거둬들였다.

“까칠한 양반이시군.”

뭐, 상대가 까칠하건 아니건 나는 내 할 일만 하면 그만이었기에 나는 그에게 영주 측에서 제공한 지도를 내밀며 물었다.

“이동 전에 하나 확인하고 싶은데 호위 행렬의 이동 경로는 이게 맞소?”

“아, 안타깝지만 그건 폐기요. 오늘 아침에 경로가 바뀌었소.”

“뭐요? 그에 대해서는 들은 게 없는데?”

내가 눈살을 찌푸리며 묻자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뭘 그런 걸로 화내느냐는 듯 대꾸했다.

“나도 오늘 아침까지는 들은 게 없었소만 영애님께서 들르기를 희망하고 계시오.”

“그딴 식으로 나오면 일하기가 힘든데….”

“뭐, 뭣? 설마 계약을 파기할 생각이시오?”

“용병에게는 신뢰가 생명인데 그딴 태도로 나오면 내가 얼마나 기분이 좆같겠소? 아니면 내가 좆만 한 영지의 삼남이니까 좆밥처럼 보이시나 보군.”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거칠게 으르렁거리자 상대측에서도 영주에게 들은 게 있는지 바로 태도를 바꿨다.

“으음… 미안하오. 화나는 건 이해하지만, 부탁 좀 드리겠소. 솔직히 나도 당황스러워서 그대에게 조금 화풀이를 한 것 같소. 정식으로 사과하리다.”

내가 귀족이 아니라는 걸 분명 듣고 왔을 텐데 저렇게 고개를 숙이는 걸 보면 주인에 대한 충성심 하나는 끝내주는 기사인 모양이다.

“한 번은 실수지만 두 번부터는 고의라는 말이 있지. 주의하시오.”

“미안하오. 헌데 영애께서 그렇게 얘기하는데 우리가 무슨 힘이 있다고 그걸 반대하겠소?”

미카엘은 은근슬쩍 영애에게 잘못을 몰아가며 자신도 피해자임을 어필했고 그렇게 포커스를 잡으니 내가 또 할 말이 없었다.

“그거야 그렇지만… 그럼 내가 영애를 뵙고 한번 설득해보리다.”

“…좋소.”

차마 그것까지 거절할 명분은 없었는지 미카엘은 마차에 다가가 영애와 몇 마디 주고받더니 이내 나를 마차로 데려가 그녀를 소개해 주었다.

“앨드레이 공작 가문의 아리아 앨드레이 영애시오. 예를 갖춰주시오.”

사실 진짜로 자칭 영애를 설득할 생각은 없었다. 영주가 애써 파놓은 함정인데 설득당할 리가 없잖은가.

그 때문에 그냥 호위 대상의 얼굴이나 한번 확인해두자는 생각이었는데 나는 그녀의 얼굴을 보자마자 표정을 굳힐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게 내 눈앞의 상대는 내게 너무나도 익숙한 얼굴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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