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 속 바이킹이 되었다-22화 (22/205)

▣ 022화

나와 힐데가 복귀한 건 새벽이었지만, 탈다스 상단장은 그 늦은 시간까지 자지 않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스스로 동생을 처리하라 명령한 만큼, 모든 일의 전말을 내게 듣고 싶은 거겠지.

“늦은 시간까지 고생 많으셨습니다. 일은 잘 해결됐습니까?”

“이미 전령에게 듣지 않으셨습니까?”

“하하, 그래도 용병단장님께 직접 보고를 들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피곤하시겠지만,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는 어쩐지 피곤해 보이는 미소를 짓고 있었는데 이미 탁자 위에는 와인 병 여러 개가 나뒹굴고 있었다.

“보고라고 할 것도 없습니다. 병력을 이끌고 기회가 올 때까지 요한나가 이끄는 상단을 미행했고 기회가 와서 처리한 것뿐입니다.”

“그렇군요. …증거는 확실했습니까?”

처리하라고 한 시점에서 증거 운운하는 게 웃기기는 하지만 어쨌건 고용주가 원하니 나는 적당히 대답해줬다.

“처음 며칠간은 몽펠리에로 잘 가더군요. 제가 생각했던 거점 도시에서 남하하지 않아서 조금 당황했습니다만, 결국 부르고스에서 일행이 갈라져서 니스로 남하하더군요.”

“으음….”

“아마 본 상단은 몽펠리에로 가서 실제로 거래를 시킬 생각이고, 본인은 니스에서 하이르 앗 딘을 만나 일을 처리할 모양이었던 것 같습니다.”

나는 그가 따라준 와인을 들이키며 숨을 고른 뒤 말을 이었다.

“그래서 뭐, 일단 뒤쫓고 있었는데 운 좋게도 산적들이 급습하더군요. 그래서 기회는 이때다 싶어서 급습했고 보시다시피 깔끔하게 일을 처리할 수 있었습니다.”

“요한나의 시체는 태웠습니까? 아니면 묻어주셨습니까?”

아무래도 정화교단의 힐데를 염두에 두고 한 질문인 듯한데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답변했다.

“죽이진 않고 적당히 겁줘서 쫓아 보냈습니다.”

오늘 점심 뭐 먹을래? 라는 것처럼 가볍게 얘기하는 내 모습에 상단장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약간 싸늘한 목소리로 날 취조하듯 캐물었다.

“제가 분명 처리하라고 말씀드렸던 것 같은데 왜 그러셨습니까?”

“처리라는 게 꼭 죽이라는 명령은 아니잖습니까. 그리고 죽였으면 죽인 대로 상단장님과 불편한 관계가 되지 않겠습니까?”

물론 이는 내 독단적인 생각이긴 했지만, 고인물이라 불릴 정도로 이 게임을 플레이했던 내 경험을 기반으로 내린 판단이었다.

거기에 내 판단이 잘못됐다고 하더라도 이미 모든 기반을 잃고 실각한 요한나가 대체 뭘 할 수 있단 말인가.

그 때문에 오히려 당당히 대꾸하는 내 모습에 상단장은 멍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헛웃음을 터뜨렸다.

“눈치가 빠르시군요.”

“고용주의 기분을 파악하는 것도 용병의 기본 덕목 아니겠습니까.”

“언제부터 아셨습니까?”

“알았다기보다는 습격에 대한 상단장님의 대응이 너무 미적지근하더군요. 제가 채 한 달도 안 돼서 요한나 레비아탄과 영주가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그럴진대 이곳에 기반을 잡고 있고 인맥도 많은 상단장님이 몇 년간 그 사실을 모를 리가 없지 않습니까?”

대부분의 사람은 자기가 부당한 일을 당했을 때 복수를 하고 싶어 한다. 심지어 그게 자기가 죽을뻔한 일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겠지.

그런데 인맥도 많고 들어오는 정보도 나보다 훨씬 많은 데다 여기저기 눈이 깔린 상단장이 아무런 대처도 안 한다? 이건 누가 봐도 구린내가 날 수밖에 없다.

아니, 상단장이 가만히 있어도 상단의 구성원 중 상단장을 따르는 일원들이 어떻게 해서든 배후를 파내서 조지려고 할 것이다.

그런데 아무런 액션도 없는 걸 보면 상단장이 통제하고 있다는 얘기밖에 더 되겠는가.

이런 점들로 짐작할 수 있는 건 결국 한 가지였다. 탈다스 상단장이 요한나 레비아탄을 굳이 죽이고 싶어 하지는 않았다는 것.

그가 나에게 처리를 요청한 것은 결국 어쩔 수 없이 내린 결단이었을 것이다.

“용병단장님의 눈은 못 속이겠군요. 어쨌든 모든 걸 실각한 채 자기 살길을 위해 떠났으니 차라리 잘된 일입니다.”

상단장은 그녀와의 추억을 회상하듯 잠시 눈을 감더니 씁쓸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사실 요한나는 절 배다른 오빠로 알고 있지만 원래 그녀는 제 동복 여동생입니다. 가문의 사정상….”

말이 길어지는 게 꼭 사람의 감성을 자극하는 신파극 하나가 뚝딱 나올 기세였기에 나는 바로 손을 들어 상단장의 말을 차단했다.

“상단장님.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저는 용병입니다. 상대가 누구건 돈을 주면 충성을 바치며 주어진 일을 처리하지요. 그런 만큼 용병이 알아야 할 일이 있고, 몰라야 할 일이 있는 법입니다.”

일개 용병에게 가문의 치부가 될 수도 있는 얘기를 풀지 말아라, 나는 네 개인사에 깊게 관여하고 싶지 않다고 에둘러서 표현하자 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죄송합니다. 제가 술에 취해서 그런지 큰 실수를 할 뻔했군요.”

비어버린 와인이 몇 병 굴러다니긴 하지만 이 정도로는 접대로 단련된 상단장의 주량에 미치지 못할 게 뻔했다.

괜스레 술에 취했다고 둘러대는 모양새였지만, 그걸 트집 잡아봤자 싸우자는 얘기밖에 안 되기에 나는 적당히 고개를 끄덕여줬다.

“오늘 일은 정말 고생하셨습니다. 며칠간 푹 쉬십시오.”

“배려에 감사드립니다만… 볼프강 영주와의 일은 어떻게 처리하실 겁니까? 염료길드와 요한나 레비아탄이라는 패가 전부 없어졌으니 분명 어떤 식으로든 반응을 할 텐데요.”

“일단은 지켜봐야겠지요. 아니꼽고 수틀린다고 병력 끌고 영주성으로 쳐들어갈 수도 없지 않습니까.”

조금 과격하지만 틀린 말 하나 없었기에 나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말 그대로 그는 귀족이자 노바라의 영주였고 그런 그를 공격한다는 건 반역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 * *

화려한 장식들과 값비싼 재료들로 꾸며진 방의 한가운데에서 기품있게 고기를 썰고 있던 20대 후반의 청년은 인상을 찌푸리며 자신의 옆에 서 있는 집사에게 물었다.

“요한나 레비아탄도 연락이 되지 않는다고?”

“그렇습니다. 백작 각하.”

모르는 사람이 봐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자신의 주인은 기분이 나쁘다는 티를 팍팍 내고 있었기에 집사는 최대한 부드러우면서도 조곤조곤한 어조로 대답했다.

“벌레들이 방해를 하고 있는 건가??”

“염료길드의 길드장도 연락이 끊긴 걸 보면 탈다스가 손을 쓴 것 같습니다.”

“쯧. 멍청한 놈이 끝까지 발악을 하는구나.”

노바라의 영주인 볼프강은 레비아탄의 상단장인 탈다스를 떠올리며 불쾌한 듯 미간을 찌푸렸다. 그 씹어먹어도 시원치 않을 놈은 자신의 금전 지원 요청을 거부함과 동시에 그를 아버지에게 고했던 빌어먹을 개자식이었다.

또한, 그는 아예 자신과 척을 지기로 결심했는지 노골적으로 남동생을 지지했고, 그 때문에 당연히 자신의 것이라고 여겼던 백작의 자리가 위협을 받게 되었다.

아버지가 우.연.찮.게 일찍 돌아가시지 않았다면, 동생이 불.행.한 사고로 죽지 않았다면 백작의 자리는 자신의 동생에게 돌아갔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때의 원한을 잊지 않고 언젠가 탈다스를 한번 제대로 짓밟아 주겠다고 마음먹고 있었고 목전까지 왔건만, 공든 탑이 무너지게 생겼다.

아무리 자신의 노바라의 영주이자 백작이라지만, 애초에 노바라가 큰 영지도 아니고 자신의 아버지 때부터 노바라를 크게 키우는 데 일조한 레비아탄 상단을 상대로 명분도 없이 가산을 적몰하거나 싸움을 걸 수는 없었다.

이 세상은 강력한 힘으로 찍어 눌러서 통제가 되는 놈이 있고 그게 아닌 놈이 있다. 볼프강은 그 감각 하나만은 뛰어났고 이를 바탕으로 백작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요한나의 행방을 가지고 탈다스를 압박할 수는 없나?”

“저희 쪽에서 굳이 요한나의 이름을 들먹이며 그를 캐묻는 것도 그림이 이상하지 않습니까.”

“쯧, 요한나만 한 체스말이 없었는데 아쉽게 됐군.”

사실, 탈다스를 몰아붙일 수 있었던 것도 레비아탄 상단 내부의 일원이라고 할 수 있는 요한나를 이용해서 흔들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이르 앗 딘 그 멍청한 개자식이 첫 번째 급습에서 탈다스를 죽이기만 했어도 이럴 일은 없었을 텐데… 그래서, 탈다스가 직접 손을 쓴 건가?”

“일을 지시한 건 탈다스지만 실제로 그 임무를 수행한 건 현재 용병으로 레비아탄에 머무는 블라디미르 스바치치로 사료됩니다. 요한나나 염료길드의 길드장이나 저희가 직접 통제하기에는 위험부담이 너무 커서 느슨하게 목줄을 쥐고 있었는데 그 틈을 파고든 모양입니다.”

집사의 말대로 이번 일은 백작인 자신의 이름을 걸고 진행할 수가 없던 만큼 명령 체계가 길어질 수밖에 없었는데 그 틈을 제대로 찌른 모양이다.

“블라디미르는 얼어 죽을. 이름도 제대로 모르는 야만인 잡것이라 하지 않았나?”

“예. 스바치치 가문의 사람을 통해 인상착의를 확인해본 결과 저희가 알고 있는 얼굴과는 다르다고 합니다. 물론 직접 본 게 아닌 데다 용병 일을 하면서 인상이 바뀌었을 수도 있으니 정확히 장담을 하지는 못합니다만….”

“귀족 사칭범일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군.”

“그렇습니다. 백작 각하.”

“흐음, 하지만 그를 이용해서 잡아들이려면… 시간이 꽤 걸리겠지.”

“그가 블라디미르 스바치치가 아니라는 걸 입증하기 위해서 스바치치 가문에 사람을 보내고, 그쪽에서 여기까지 사람이 오는 걸 감안해보면 어마어마하게 시간이 걸릴 겁니다. 스바치치 가문에서 저희의 요청을 들어줄지도 미지수고요.”

“그러니까 자네 말은 그 빌어먹을 개자식이 일부러 저 먼 북부의 귀족 가문 중에서도 본 가문과 접점이 없는 가문을 사칭 대상으로 골랐다는 거군.”

“그렇습니다. 애초에 스바치치 가문 입장에선 그걸로 자신들이 직접적인 손해를 입은 것도 아니고, 고작 사칭범 하나 잡자고 남부까지 인원을 내려보낼 이유도 없고요.”

사실, 귀족임을 증명하는 객관적인 지표는 없다. 제일 확실한 건 귀족 가문에서 자신들의 일원임을 인정해주는 거지만, 그게 힘드니 귀족 사칭을 하는 놈들이 생겨나는 것이다.

그 때문에 귀족 사칭죄는 반역죄에 준하는 참형으로 다스리고 있지만, 애초에 잡아내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물론 개나 소나 귀족을 사칭하는 건 아니고 귀족임을 주장하려면 최소한 그에 걸맞은 부와 힘을 가져야 했다. 누더기 같은 옷을 입고 다니며 자신이 부자라고 주장한들 누가 들어나 주겠는가.

“영악하다고 해야 할지, 간이 크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군.”

“하는 꼴을 보아하니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닌 것 같은데 재수 없으면 그 전에 그가 눈치채고 이곳을 빠져나갈지도 모릅니다.”

“야만인 새끼 하나 때문에 일을 그르치는구나.”

“저희가 쓸 수 있는 패인 염료길드의 길드장과 요한나를 못 쓰게 된 지금, 다시 처음부터 일을 시작하려면 오랜 시간이 걸릴 겁니다. 탈다스 상단장도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제대로 방비를 할 테니 공작하기가 쉽지만은 않을 겁니다.”

“내가 자네에게 듣고 싶은 말은 안 된다, 힘들다, 불가능하다가 아니네. 대책을 얘기해봐.”

백작의 말에 집사는 주변을 살펴보더니 그의 귀에 대고 조용히 속삭였다. 눈을 감은 채 그의 얘기를 경청하던 백작은 이내 무릎을 탁 치며 호탕하게 웃었다.

“푸하하하하, 그대의 계책이 아주 신묘하군. 좋아. 그대로 시행하게.”

“명령을 받들겠습니다.”

백작이 자신의 제안을 마음에 들어 하자 집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런 집사를 바라보던 백작은 아무 일 없다는 듯 고기를 마저 썰다가 문득 생각난 것처럼 경고했다.

“그리고 말인데… 내가 이 이상 그대에게 실망하는 일이 없었으면 하네. 내 말, 무슨 말인지 이해했겠지?”

“물론입니다. 백작 각하.”

“기억하게. 내 인내심에도 한계가 있다는 것을.”

* * *

유급휴가를 받아 한가롭게 쉬고 있던 일요일 오후. 힐데마저 정화교단의 지부로 떠났기에 나는 슬라임처럼 침대에 늘어져서 쉬고 있었다.

그때 상단원이 내 문을 두드린 뒤 누군가 전해달라 했다며 쪽지를 건네줬다. 뭔가 해서 받아보니 세금 징수관이 내게 보낸 편지였다.

〖친애하는 블라디미르 스바치치에게.

최근 영주성에서 돌아가는 기운이 심상치가 않네.

레비아탄 상단과 탈다스 상단장의 이름은 물론이고 자네의 이름까지 거론되고 있어.

순전히 내 감이네만 별로 느낌이 좋지 않아.

나도 상황이 상황인지라 당분간은 몸을 숙여야 할 것 같네.

부디 다시 만날 때까지 몸조심하게.

그대의 친우. 펠릭스 폰 가르옌〗

“흐음… 생각보다 의리 있는 양반이군. 나중에 뭐라도 챙겨줘야지.”

생각지도 못한 편지였지만, 이 편지로 인해 영주가 곱게 넘어가지 않으리라는 예상은 현실이 되었다. 하긴, 호구가 아닌 이상 이렇게 두들겨 맞았는데 가만히 있지만은 않겠지.

“나도 보험 하나는 들어둬야겠네.”

세이브, 로드가 없는 만큼, 운과 요행에 모든 걸 기댈 수는 없다. 이 현실의 기반이 게임인 만큼 죽으면 부활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런 불확실한 일에 내 목숨을 걸고 시험할만한 배짱은 없었으니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