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20화
여동생을 처리하기로 마음먹었다고 해도 지금 당장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적진이라고 할 수 있는 노바라에서 사람들의 이목을 피해 여동생을 쓱싹하는 건 미친 짓이었으니까.
설사 어찌어찌 암살을 한다고 해도 수사망에서 피해 가는 건 힘들 것이다. 그러니 최소한 그녀가 이곳 노바라에서 벗어나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만한 곳에서 죽여야 한다.
나는 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얼마 전 상단장과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상단장님. 상단장님의 여동생… 그러니까 요한나 레비아탄이 직접 상행을 나가는 경우도 많습니까?”
“그리 많지는 않습니다. 다만, 지난번에 별로 이득도 안 나는 곳으로 상행을 나가겠다고 한 적은 있습니다. 문서들을 확인해보면, 아마 그때 하이르 앗 딘을 만나고 왔겠지요.”
“그러면 이번에도 그런 식으로 상행을 하려고 하겠군요.”
“그럴 겁니다. 지난번에는 동생이 스스로 제 살을 깎아 먹는다 생각해서 맘대로 하게 풀어줬습니다만, 이젠 어느 정도 제재를 해야겠지요.”
“차라리 가게 놔두십시오. 그래야 제가 처리하기가 쉬우니까요. 마음이 바뀐 하이르 앗 딘이 그녀를 죽이거나 오는 길에 도적들에게 당해서 죽었다는 게 가장 좋은 스토리 아니겠습니까.”
“알겠습니다. 허면, 추후 이 안건이 회의 주제로 올라왔을 때 용병단장님도 회의에 참가해 주십시오.”
그런 이야기가 끝난 지 벌써 일주일이 지났는데 아직 아무런 소식이 없다. 나야 이곳에서 놀고먹으면 편하지만 그래도 먹여 살려야 할 입들이 있는 이상 언제까지 놀고만 있을 수는 없다.
“힐데.”
“왜 그러십니까?”
“병력들은 다 푹 쉬고 있지?”
내 물음에 그녀는 읽던 서류를 내려놓고는 침대에서 뒹굴거리는 날 미묘한 표정으로 노려보더니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상단장이 지원을 제대로 해줘서 그런지 다들 만족하는 눈치입니다.”
“좋아. 그건 됐고… 이번에 상단장이 건네준 정보들은 어때?”
“대부분 평범한 정보들입니다. 한번 보시겠습니까?”
힐데는 서류뭉치를 들고 와 내게 건넸고 나는 침대에 누워서 문서를 하나씩 훑어보았다. 서류에는 요한나 레비아탄의 모습도 그려져 있었는데 그녀의 그림을 보며 나는 환호했다.
“휘유. 대단한데?”
굳이 뭐가 대단한지 말하지 않았음에도 힐데는 경멸에 가까운 눈초리로 나를 내려다보며 싸늘한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그럴 거라 생각은 했습니다만, 가슴 큰 여자만 보면 눈이 돌아가는군요.”
“에이, 특징이라잖아 특징. 키가 크다, 눈이 크다, 가슴이 크다. 이런 건 다 특징이라고.”
농담이 아니라 이런 게 다 특징이다. 특히 신체적인 특징은 상대가 변장을 했는지 안 했는지 일차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좋은 수단이다.
“그래서 갈라이트 마을에서 그렇게 촌장의 딸만 쳐다봤습니까.”
젠장. 그걸 들키다니! 힐데의 눈치가 보여서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고 일부러 힐끗힐끗 쳐다봤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대놓고 쳐다볼걸.
“글쎄… 무슨 소린지 잘 모르겠는데.”
“모르는 척하지 마십시오! 제가 얼마나 창피했는지 아십니까?”
매서운 눈초리로 날 비난하는 힐데를 보며 나는 슬쩍 말을 돌렸다. 빨리 이 주제를 벗어나지 않으면 그녀는 온종일 잔소리를 시전할 것이다.
“으음, 그나저나 힐데 내가 널 만난 지 몇 년이나 됐지?”
“제가 당신을 만난 게 15년 전이지 않습니까. 진짜 치매라도 온 것 아닙니까?”
그녀는 말을 돌리는 내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한 얼굴이었지만, 그래도 성실하게 내 말에 대꾸해주었다.
“그랬던가? 그래도 15년 전 일이면 잊을 법도 하잖아.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글쎄요. 저는 지금도 당신을 처음 만났을 때의 일을 못 잊습니다.”
힐데는 갑자기 슬픈 표정을 지으며 나를 바라보았고 나는 갑작스레 변한 분위기에 감을 잡지 못하고 이리저리 눈동자만 굴려댔다. 확실히 분위기를 바꾸고 싶긴 했지만, 이런 분위기를 원한 건 아니었다.
“이 상처는… 15년이 지났건만 아직도 남아있군요.”
힐데는 천천히 내게 다가와 침대에 걸터앉더니 손을 뻗어 내 뺨의 상처를 어루만졌고, 그 순간 머릿속이 암전했다.
― 빙옌의 힐데가르트와의 인연 수치가 일정 수치에 도달했습니다. 과거가 일부 해금됩니다.
시스템 창의 말을 채 이해하기도 전에 눈앞이 번뜩인다 싶더니 갑작스레 시점이 뒤바뀌었다.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 같았지만 나는 이게 종종 게임에서 과거의 기억을 보여주는 환영이라는 걸 알고 있기에 당황하지 않고 주변을 바라보았다.
―습격을 당한 건가?―
내가 서 있는 곳은 어디에나 있을법한 대지였지만, 눈앞에 보이는 건 사람들의 피와 시체, 부서진 마차와 죽어가는 말뿐이었다.
그 순간 저 멀리서 말발굽 소리가 들렸고 까마귀 깃발을 흔들며 최선두에서 달려오는 이를 본 나는 본능적으로 저자가 라그나르 로드브로크임을 깨달았다.
그는 말 위에서 주변을 둘러보더니 인상을 찌푸리며 작게 혀를 찼다.
“끔찍하군.”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대장. 의뢰주가 죽어버리는 건 저도 처음인데요.”
“이래서야 돈 받기는 글렀는데… 살아있는 이는 없는 건가?”
“한번 수색해보겠습니다.”
“수색하면서 쓸만한 건 전부 챙기도록.”
“시체들은 어떻게 합니까?”
“시체들도 한곳에 모아라. 도의적으로나마 수습은 해줘야지.”
라그나르의 말에 부하들이 근방을 수색하기 시작했고 라그나르 역시 시체 더미들을 헤집으며 생존자를 수색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수색하기를 십여 분. 마침내 라그나르는 죽은 여인의 품속에 안겨있는 작은 여자아이를 발견할 수 있었다.
“허, 오딘께서 보우하신 게 틀림없군.”
다행히 아이는 상태는 생각보다 좋아 보였고 라그나르는 겁먹은 표정의 아이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이리 나와보렴.”
분명한 선의가 담긴 행동이었지만, 아직 어린아이에게 다가오는 선의와 악의를 구분하는 건 힘든 일이었고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아이는 품속에 숨기고 있던 날붙이를 휘둘렀다.
생각지도 못한 공격에 라그나르의 뺨에는 작은 선혈이 새겨지더니 피가 뚝뚝 흘러내렸고 그 모습을 보던 용병들은 곧장 무기를 뽑아 들었다.
하지만 손을 들어 수하들을 제지한 라그나르는 미소와 함께 아이를 꼭 끌어안아 주며 부드럽게 속삭였다.
“이제 괜찮단다. 아이야.”
라그나르의 다정한 말에 아이는 날붙이를 떨어뜨린 채 라그나르의 품에 안겨서 엉엉 울었고 그 모습을 끝으로 다시 한번 시야가 뒤집혔다.
“나르… 라그나르!”
그리고 내가 정신을 차렸을 땐, 힐데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어. 힐데. 무슨 일이야.”
“무슨 일이 아닙니다. 갑자기 멍한 얼굴로 허공을 응시하고 있지 않았습니까.”
“아니, 그냥 잠깐 옛날 일 좀 생각하고 있었어.”
이런 식으로 그녀와 인연 수치를 올리다 보면 과거의 일을 완전히 알 수 있게 되는 시스템이군. 이번에 새로 개편됐다고 하던데 개인적으로 괜찮은 것 같다.
“정말입니까? 혹시 어디 아픈데 제게 숨기고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럴 리가. 내가 지금까지 너한테 거짓말한 적 있어?”
“너무 많아서 셀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만.”
“크흠. 그럴지도 모르지만, 이번에는 진짜야.”
“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까? 말하는 걸로 봐서는 저와 만났던 일조차 잊어버렸던 것 같은데.”
내 대답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여전히 미심쩍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고 난 그녀의 의심을 지우기 위해 은근슬쩍 과거의 이야기를 흘렸다.
“글쎄, 네가 어렸을 때 이불에 오줌싸고 엉엉 울던 거?”
“그, 그런 적 없습니다!”
“흠, 그래? 그러면 나한테 혼날 때 착한 아이가 될 테니까 제발 버리지 말아 달라고 엉엉 울던 걸 내가 잘못 기억한 건가?”
“쓸데없는 건 잘도 기억하는군요.”
그렇게 힐데와 노닥거리며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상단장에게서 회의가 진행되니 경비대장으로 참여해달라는 연락이 왔다.
“아무래도 요한나가 움직일 생각인가 보군.”
하긴, 그때 습격이 실패한 뒤로 몇 달 동안 제대로 된 타격을 입히지 못했으니 몸이 한껏 달아올라 있을 것이다.
때문에 나는 상단장의 연락을 접하자마자 바로 갑옷을 차려입은 채 회의장으로 향했고 그곳에서는 이미 회의가 진행되고 있었는지 고성이 오가고 있었다.
나는 문 앞을 지키던 경비병에게 가볍게 인사한 뒤 안으로 들어갔고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내게 쏠렸다. 물론 나는 그 모든 시선을 무시한 채 상단장에게 가볍게 묵례한 뒤 그의 뒤에 가서 열중쉬어 자세를 취했다.
그 일련의 광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바라보던 요한나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상단장을 향해 불만을 토해냈다.
“오라버니. 지금 이게 뭐 하자는 겁니까? 절 겁박하시는 겁니까?”
“단순히 안전을 강화하기 위해서 내가 부른 것뿐이다. 문제 될 게 있나?”
“저자는 용병이 아닙니까. 외부인을 가문의 회의에 끌어들이겠다는 겁니까?”
“말하지 않았나. 회의에 참여하는 게 아니라 단순히 경호를 위해서 부른 거라고. 아니면, 저자를 부르면 안 될 이유라도 있나? 들어보고 타당하다면 내보내도록 하지.”
요한나는 굳이 이런 주제로 탈다스와 말싸움을 하며 힘을 빼고 싶지 않은지 한 발짝 물러서며 원래의 주제로 돌아갔다.
“뭐, 좋습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왜 제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겁니까?”
“몇 번이나 말하지 않았느냐. 상품성이 부족한 제안이라고.”
“결국, 제 제안은 쓰레기 같다는 말이군요.”
“그렇게까지 얘기하지는 않았다. 다만, 굳이 그렇게까지 해서 사업을 확장해야 하는가에 대해 고민해볼 필요는 있다는 거지.”
나름 논리정연한 상단장의 말에 요한나는 두 눈을 가늘게 뜨며 그를 도발했다.
“그렇게 잘난 오라버니가 상단장에 취임한 뒤로 상단이 나날이 몰락해가는 건 알고 계시나요?”
그게 다 여동생 때문이라는 알면서도 탈다스는 포커페이스를 유지한 채 평온한 어조로 얘기했다.
“그래서 나 역시 현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여러 가지로 노력 중이다.”
“무르군요. 그러니까 아버지 때부터 거래해왔던 염료길드도 연을 끊는 겁니다.”
“그렇게까지 얘기한다면… 좋다. 너 하고 싶은 대로 해보도록. 하지만 결과가 신통치 않으면 그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이제야 말이 통하는군요.”
원하던 말을 듣자 요한나는 회의 안건에 대해 적당하게 대처했고 그 덕에 회의 자체는 빨리 끝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회의를 주관한 탈다스는 지치는지 자신의 얼굴을 한 번 쓸어내리며 내게 부탁했다.
“다 들어서 아시겠지만… 적당히 말 안 나오게 처리해주십시오. 처리 방법은 단장님께 맡기겠습니다.”
“맡겨주십시오. 결코, 실망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