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17화
마법과 지혜, 광기와 분노, 전쟁과 폭풍의 신 오딘의 가호가 몸에 깃듭니다.
― 강렬한 투지와 분노가 몸속 깊은 곳에서 솟구쳐 오릅니다.
몸속에서 말릴 수 없는 충동과도 같은 강렬한 힘이 깃드는 걸 느끼며 나는 내 예측이 맞았음을 재확인했다.
힐데가 정화교단의 신인 아후라 마즈다의 힘을 쓰는 걸 보고 나도 바이킹들이 믿는 신들의 힘을 끌어 쓸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대로 들어맞은 셈이다.
다만, 이런 능력을 굳이 지금에서야 써보는 건 아무래도 야만인에 이교도로 배척받는 바이킹들의 신의 이름을 입에 담는 게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비유하자면 대한민국에서 알라후 아크바르를 외치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아무튼, 극단적으로 ‘오딘 만세!’를 외치거나, ‘헤으응, 오딘 님 날 가져요.’ 같은 말을 외쳐도 신성력은 발동하겠지만, 사실 이런 건 시전자의 경건한 마음도 중요하다.
애초에 신에 대한 기도 자체가 자기최면 같은 건데 섹스섹스를 외치면서 경건하고 신실한 마음을 가질 수는 없지 않은가.
“그나저나 투지라… 확실히 전쟁의 신이라 그런지 화끈하구만.”
사실 오딘은 북유럽신화에서 무력으로 이름 높은 신은 아니다. 당장 라그나로크에서 펜릴이 크아아앙 하고 울부짖으면서 오딘을 삼키자 호에에에엥 하면서 죽은 것만 봐도 알 수 있고 그의 전승을 봐도 무력과 연관된 얘기는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오히려 무력과 연관된 얘기는 토르가 전담하고 있으며 오딘은 굳이 비유하자면, 제갈량이나 사마의 같은 지력캐임과 동시에 멀린 같은 마법사라고 인식되는 게 대부분이다.
다만 그런데도 오딘이 전쟁의 신으로 추앙받는 건 그가 북유럽의 최고신이자 와일드 헌트를 이끄는 폭풍의 신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뭐, 더 자세한 건 게임 제작자의 머리를 뜯어봐야 알겠지만.
“바이킹들도 그렇고 게르만도 그렇고 주변 왕국들 다 두들겨 패고 다닌 이유가 있었네.”
사실 가호의 내용만 보면 북유럽 최고의 신인 오딘에게 받은 것치고는 버프가 너무 초라해서 이게 뭔가 싶을 텐데, 투지가 증가한다는 건 캐릭터를 수치화시킬 수 있는 모든 것들이 증가한다는 얘기다.
가령 공격력이니, 방어력이니, 체력이니 하는 것들부터 민첩, 신앙, 힘, 지력, 카리스마, 의지와 같은 스탯은 물론이요. 스킬들까지 그 효율이 증가해버린다.
이것뿐이면 말도 안 하련만, 마주하는 적들의 사기가 떨어지고 적의 네임드가 있다면 통솔력이 떨어지는 한편 적들이 와해되어 도망칠 확률이 증가하게 되니 게임상에 존재하는 버프들 중에서도 가히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사기 중의 사기. 그야말로 십사기 버프라고 할 수 있겠다.
다만, 스킬이라는 게 으레 그렇듯 쿨타임이 존재하고 뽕 맛에 취해 너무 많이 쓰다가는 가호가 약해지는 건 물론이요 플레이어를 죽음으로 몰아갈 수도 있다.
간단히 얘기해서 가호는 헌혈 같은 느낌이다. 3~6개월 정도 시간을 두고 가끔씩 헌혈을 하는 건 문제가 안 되지만, 하루가 멀다 하고 피를 뽑아내면 빈혈이 오거나 구토감, 어지럼증 같은 증상이 찾아오고 정도가 심하면 죽지 않던가.
더 개 같은 건 플레이어는 각종 스킬과 가호의 정확한 쿨타임을 알 수 없다. 현실에서야 피를 많이 뽑으면 빈혈이나 어지럼증 같은 증세가 나타나지만, 게임은 아니지 않은가.
이 때문에 개발사는 유저들에게 이게 뭔 병신같은 짓이냐며 수많은 항의를 받았지만, 개발사는 꼬우면 하지 말라는 식으로 일축해버렸다. 아마 플레이어들이 줄어든 이유에는 게임사의 저런 막장대응도 한몫하지 않았나 싶다.
“그게 이 게임의 병신같은 점이면서 매력이지만.”
그 때문에 커뮤니티에서도 ‘캐릭터가 풀피였는데 갑자기 죽었습니다. 뭐죠?’라는 게시글이 올라오면 그 원인은 십중팔구 가호나 스킬의 난사 때문이다.
그럼 이게 뉴비들한테만 해당하는 얘기냐면 그건 또 아니다. 고인물인 나도 대강 이 정도면 괜찮지 않을까~~라고 생각하면서 사용할 뿐이다. 대략적인 안전선 정도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지만 그게 또 절대적인 지표가 되는 건 아니다.
가령 똑같은 바이킹이어도 각자의 신앙 수치에 따라 그 효율이 바뀌는 데다 고난이도에서는 스탯창을 열람하는 게 불가능하고 과거의 행적이 랜덤 변수로 인해 플레이어의 통제를 벗어났기 때문에 그 어떤 것도 확신할 수 없다.
그래서 스스로의 한계를 명확히 알며 광역 버프와 단일 버프를 걸어 줄 수 있는 힐데가르트 같은 동료가 영입순위 0티어가 되는 것이다.
그나마 지금은 게임 속의 화면이 아닌, 현실이 되었기에 과부하가 걸린다면 어느 정도 신체적으로 신호가 올 테니 돌연사하는 건 방지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튼, 이 정도의 효율이라면 그래도 가끔은 써줄 만하겠네.”
물론 정말 급할 때 말고는 쓰지 않을 생각이다. 가호라는 게 신의 힘을 빌려 쓰는 것인 만큼 운이 좋으면 오딘의 가호를 받는 와중에 운 좋게 에인헤랴르나 와일드헌트, 발할라의 영광과 같은 S급 특성을 얻을 수도 있다.
하지만 특성이라는 게 다 좋은 것만 있는 것도 아니고 좆망겜이 다 그렇듯 이 게임은 랜덤이라는 얘기가 나오면 3:7의 비율로 나쁜 경우가 더 많이 발현된다.
가령 새가슴이나 의지박약, 자폐 같은 거라도 걸리게 되면 캐릭터가 순식간에 병신 되는 건 일도 아니다. 게다가 그것과는 별개로 재수 없으면 신성 의존이나 신성 중독 같은 게 걸릴 수도 있다.
저런 거 하나 잘못 걸리면 진짜로 힐데가르트의 말마따나 교단의 요양원에 평생을 틀어박혀서 살아야 한다. 물론 게임이니만큼 그를 지울 수 있는 아이템도 있지만, 지금 내 위치에서 그런 템을 구하는 건 꿈같은 얘기다.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걱정하는 건 바보나 하는 짓이지.”
나는 스스로의 뺨을 가볍게 치며 마음을 다잡은 뒤 들고 있던 투척용 도끼를 경계를 서고 있는 적에게 투척했다. 힘을 머금은 도끼는 살벌한 파공성을 내며 날아갔고 나는 명중을 확신하며 또 다른 적에게 도끼를 내던졌다.
도끼가 박히는 소리가 시간차를 두고 들려오자 나는 배틀액스를 뽑아 들고 거리낌 없이 괴성을 내지르며 적들에게 달려들었다.
“적의 급습이다!!”
“호각을 불어!”
갑작스러운 기습이었지만. 적들은 제대로 훈련이 된 병력이었는지 호각을 불고 지원을 요청하는 등 기민하게 대응했다. 하지만 나는 그러거나 말거나 눈앞의 적들을 베어냈고 적들이 제대로 된 대응을 갖추기 시작했을 때는 이미 다섯 명이나 희생된 후였다.
눈앞의 용병 나부랭이들을 잡는 건 식은 죽 먹기였지만, 지금 중요한 건 전 길드장의 암살이었기에 나는 더 이상 달려들지 않고 이리저리 눈알을 굴리며 병력들이 움직이는 걸 유심히 바라보았다.
남은 병력들이 어디로 몰려가는지, 어디를 지키려고 하는지, 날 죽이려고 하는지, 아니면 시간을 끌려고 하는지 등 이 모든 것들을 짧은 시간에 파악한 나는 적의 위치를 특정하자마자 배틀액스를 움켜쥐고 적들에게 달려들었다.
“겁먹지 마라. 적은 고작 한 명이다! 물러서지 마!”
병력들은 나름대로 오랜 기간 합을 맞춰봤는지 지휘관은 그럭저럭 괜찮은 진형을 갖추며 날 막으려 했지만, 오딘의 가호가 깃든 나를 기병도 아니고, 중무장한 보병도 아니고, 그냥저냥 구색만 갖춘 용병들이 막아내는 건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다.
전차가 달려드는데 인간 몇 세워둔다고 막을 수 있는 건 아니잖은가. 그 정도로 그들과 나의 격차는 확연했고 나는 양 떼 속에 뛰어든 늑대처럼 적들을 도살했다.
“흐어억!”
“으아아악!”
도끼날이 번뜩일 때마다 적의 선혈이 아침 이슬과 뒤섞여 빨갛게 물들었고 날 막아서는 이들은 그들의 팔이나 다리였던 것이 사지에서 뚝뚝 떨어져 나가며 고통스러운 비명과 함께 죽어 나갔다.
솔직히 역겹고 구토감이 나오는 광경이었지만, 라그나르는 진성 바이킹이었는지 오히려 적을 베어 넘기고 그들의 피를 뒤집어쓰자 나는 마음 한구석에서 솟구쳐 오르는 광기를 억누르지 못하고 포효했다.
“오딘이시여! 저를 승리로 이끄소서!”
“바, 바이킹….”
오딘이라는 이름에 오딘을 섬기는 게 누구인지 아는 용병들은 떨리는 다리를 진정시키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해야 했다. 야만인에 무식하고 천박하다고 욕을 할지언정 바이킹의 용맹함과 호전성은 누구나가 인정하는 부분이었으니까.
실제로 과거 비잔틴 제국이 라틴한테 털려서 삼등분 되기 전에 그들의 황제를 지키던 바랑기안 가드들의 충성심과 용맹함은 용병 중에 제일이었다.
또한, 비잔틴 제국이 신성제국과 라틴 제국의 공격에 수도가 함락당할 때 고작 천 명도 안 되는 인원으로 수만의 병사들을 며칠 동안 막아냈으며 한 명도 남김없이 황제를 위해 장렬하게 전사했던 이야기는 굉장히 유명했다.
그런 무지막지한 전투력을 가진 흉악하고 잔인한 살인 기계가 자신의 눈앞에서 입가에 묻은 피를 할짝대며 천천히 다가오는데 오줌을 지리지 않는 게 오히려 이상할 정도였다.
“으으… 으으으으.”
내가 앞을 가로막는 용병들을 하나씩 해체시키며 천천히 걸어가자 용병들의 얼굴은 절망과 공포감으로 물들었다. 극한까지 차올랐던 그들의 공포심은 자신들을 지휘하던 대장의 목이 뎅겅 잘려나가자 폭발했는데 그들은 비명을 내지르며 무기를 내버린 채 도망치기 시작했다.
아무리 약하다고 해도 징집병이나 도적 떼가 아닌, 그래도 돈을 받고 의뢰주와 계약을 한 용병들이 도망치는 건 굉장히 드문 일이었는데 그런 그들까지 공포심에 잠식시켜 와해시키는 걸 보며 나는 새삼스레 오딘의 가호에 감탄했다.
하지만 아직 전투가 끝난 건 아니었기에 나는 가볍게 도끼를 휘둘러 날에 묻은 피를 털어낸 뒤 아까 봐두었던 동굴로 향했다.
여기서 더 지체했다간 목표가 도망쳐 버릴 테니 나는 빠르게 동굴을 수색하기 시작했다. 물론 채 열 발자국도 가지 않아서 온갖 함정들이 동작했지만, 나는 가볍게 무시했다.
솔직한 말로 지금의 내가 화살 한두 대 꽂힌다고 죽을 것도 아니었고 애초에 고인물인 내게 이런 허접한 함정을 파훼하는 건 숨을 쉬는 것보다 쉬운 일이었다.
적들이 대처나 도주 방법은 수없이 다양하지만, 함정이라는 테마만 떼어놓고 보자면 그 방법이 한정되어 있기에 파훼법은 무척이나 쉬웠다.
특히 자원이 무제한인 것도 아니고 함정기술자가 있는 것도 아닌 데다 레벨도 안 되는 병력들이 파놓을 수 있는 함정은 한도가 있는 법이다. 해변에서 모래성이나 만들던 아이들이 피라미드를 만들 순 없지 않겠는가.
그렇게 조금 아파 보인다 싶은 함정은 회피하고 맞아도 괜찮겠다 싶은 건 몸으로 분쇄하며 성큼성큼 동굴 안으로 걸어갔고 곧 막다른 길에 도착할 수 있었다.
밖에서 보던 것과는 다르게 생각보다 짧은 곳에서 막다른 곳이 나오자 나는 면밀하게 주변을 살폈고 주변과 조금 다른 부분을 찾아낼 수 있었다.
“아하~”
누가 봐도 수상해보이는 부분이었기에 나는 깊게 숨을 들이마신 뒤 눈앞의 벽을 있는 힘껏 걷어찼다.
쾅!!!
일반적으로 돌이나 암벽을 걷어차면 박살 나는 건 내 발이었겠지만 지금만큼은 아니었다. 뭉게뭉게 피어오른 연기가 걷히고 그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건 나무로 만들어진 문이었고 나는 히죽 웃으며 천천히 문 앞으로 다가갔다.
당연하겠지만, 문 안에서는 당황한듯한 인기척이 들렸고 나는 내가 뽑은 제비가 당첨 제비임을 확신했다. 그리고 그 확신은 도끼로 문을 내려찍자 진실이 되었다.
콰직!!
“버, 벌써 왔잖아? 용병 놈들은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야!?”
콰지직!
“이, 이 머저리 같은 놈! 뭘 꾸물대고 있는 거야? 빨리! 빨리 돌을 옮겨 멍청한 놈아!”
대강 보아하니 비상탈출용 입구를 돌로 막아둔 모양이다. 멍청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원래 비밀 입구는 감춰놓는 게 정상이다. 누구나 다 알아서야 비상탈출용이라는 의미가 퇴색되니까.
으드드득!!
목표가 도망치기 전에 문을 박살 내야 했기에 나는 쉴 새 없이 도끼로 문을 찍어 내렸고 마침내 내 노력이 빛을 발했는지 안쪽을 살펴볼 수 있을 정도로 크게 구멍이 났다.
이 상태로 몇 번만 더 찍어 내리면 문의 잠금장치가 풀릴 테지만 나는 그러는 대신 박살 난 문틈에 얼굴을 욱여넣었다.
그 안에는 기를 쓰며 장애물을 치우는 사람 두 명이 보였는데 사신이 쫓아오는 소리와도 같던 도끼질 소리가 들리지 않자 값비싼 옷을 걸친 이가 덜덜 떨면서 고개를 돌렸고 이내 나와 눈이 마주쳤다.
그런 그를 향해 나는 웃어주면서 인사를 건넸다.
“히얼스 바이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