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16화
“자, 이제 내가 네 입을 막고 있던 손을 풀어줄 건데 소리를 지르면 바로 죽일 거야. 이해했지? 이해했으면 눈을 세 번 깜빡여.”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는 정신없이 눈을 깜빡였고 난 피식 웃으며 그의 입에서 손을 떼고 침대 밑으로 내려왔다.
길드장은 온전히 자유를 얻었음에도 내 협박에 겁을 먹었는지 그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은 듯 이리저리 날 쳐다보고만 있었다.
“자자, 그렇게 겁먹지 마. 친구. 내가 자네를 죽이고 싶었으면 굳이 이렇게 일을 번거롭게 처리할 리가 없잖아. 그렇지?”
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그를 달래듯 부드럽게 이야기했다.
“내가 누군지 알지?”
그는 자신의 목숨이 위협받고 자다 깨서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내 정체를 짐작한 모양이었는지 용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지금 이 시점에서 새롭게 취임한 길드장에게 암살자를 보낼 사람이 한정되어 있기는 하지.
“그럼 내가 왜 왔는지도 알고 있을 테고.”
그가 이번에도 고개를 끄덕이자 나는 인상을 팍 쓴 뒤 목소리를 깔며 다그쳤다.
“우리 친구 벙어리야? 나는 입 아프게 얘기하고 있는데 그쪽은 건방지게 고개만 까딱이는 거야? 내가 지금 너무 빡쳐서 손발이 막 떨리는데 우리 친구 죽음인지 감수성이 좀 모자란 것 같아. 도끼 맛 좀 볼래?”
“아, 아닙니다. 저기, 그… 이, 입을 열어도 된다고 얘기하지 않으셔서….”
그랬던가? 아. 확실히 눈만 깜빡이라고 그러긴 했다. 새끼. 의외로 착실하군.
“하하하하, 괜찮아. 괜찮아. 살다 보면 실수할 수도 있지.”
나는 그의 어깨를 툭툭 치며 호탕하게 웃은 뒤 탁자 위에 놓여져 있는 와인을 한 모금 들이켰다. 알싸하면서도 뒷맛이 달달하고 쓴맛이 없는 걸 보면 꽤 값나가는 와인인 모양이다.
“이거 맛 괜찮은데? 돈이 좋긴 좋아. 이런 비싼 것도 마실 수 있고.”
“나중에 선물로 싸드리겠습니다.”
“뭐? 푸하하하하하.”
길드장의 센스 넘치는 대답에 나는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고 이내 들고 있던 단검을 품속에 집어넣었다.
지도자의 좋은 자질은 뭘까? 사람마다 생각의 기준은 다르겠지만 난 개인적으로 배짱과 임기응변이라고 생각한다. 이 세상 모든 일이 계획적으로만 돌아간다면 좋겠지만, 한 치 앞도 못 보는 게 현실이고 특히나 전쟁터는 수많은 변수가 판치는 곳이다.
그렇기에 용병단장의 최고 덕목은 생존이었고 이를 위해 필요한 능력은 임기응변이었다. 그리고 내 눈앞의 길드장은 배짱과 더불어 뛰어난 임기응변 능력을 보여주었고 그게 내 호감과 호기심을 끌어냈다.
“눈치도 있고 배짱도 있으니 내가 뭘 원하는지도 잘 알고 있겠군. 참고로 나는 고문에도 일가견이 있다는 것만 알아두게. 자네도 알겠지만, 정화교단은 범죄자들에게 꽤 잔혹하거든.”
네가 협력하지 않아도 상관없다는 말투로 정화교단을 언급하자 그는 내 말이 농담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는지 한층 더 공손해진 어투로 얘기했다. 누가 보면 내가 상급자라도 되는 줄 알겠군.
“물론입니다. 다만 원하시는 물건은 금고로 가야 합니다. 존귀하신 분께서도 아시다시피 그렇게 중요한 물품을 이리 보안이 허술한 곳에 보관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은근슬쩍 날 죽이면 너도 원하는 걸 못 얻는다고 어필하는 상대가 난 더욱 마음에 들었다.
“좋아. 안내하게.”
그는 아주 천천히 내게 적의가 없음을 보여준 뒤 앞장서서 걸었고 나는 느긋하게 그의 뒤를 뒤따라 걸었다. 물론 그가 블러핑을 치는 걸지도 모르지만, 그러면 그때 가서 죽이면 그만이다.
경찰 열 사람이 도둑 한 사람을 못 막는다고 한때 컨셉질로 각국의 국왕을 암살하며 어쌔신 크리드를 찍었던 내게 눈앞의 길드장 하나 암살하는 건 일도 아니었다.
안전한 곳에 물품을 보관한다는 그의 말은 허언이 아니었는지 그는 지하실 깊숙한 곳으로 내려갔고 작은 금고의 앞에서 멈추었다. 그는 내가 볼 수 있도록 살짝 옆으로 비켜선 뒤 천천히 금고의 문을 조작했고 그 안에 들어있던 수십 장의 서류를 꺼내 내게 건네주었다.
다만 서류 더미를 건네주는 그는 손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는데 떨리고 있던 건 그의 손뿐만이 아니라 목소리도 매한가지였다.
“원하는 걸 얻었으니 이제 절 죽이실 겁니까?”
“글쎄… 일단 장부 좀 보고 얘기하지.”
“알겠습니다.”
나는 지하실 근처에 있는 의자에 걸터앉은 뒤 느긋하게 서류를 뒤지기 시작했다. 사실, 아직 글을 빠르게 읽지 못해 천천히 읽는 것에 불과하지만, 길드장 입장에서는 애간장이 탈 것이다.
물론 나는 일부러 그런 분위기를 의도하고 있었기에 여유롭게 문서를 읽기 시작했고 원하는 내용을 찾자 읽던 문서를 내려놓으며 길드장을 향해 물었다.
“자네 바지사장이었군.”
내가 갈라이트 마을에서 알게 된 정보와 각종 장부 및 편지, 문서를 조합해본 결과 눈앞의 사내는 바지사장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일의 전말을 간단히 정리해보자면, 원래 염료길드를 이끌던 길드장은 투자가 실패로 돌아가서 망할 위기에 처했는데 이때 레비아탄 상단을 뒤흔들기를 원했던 노바라의 영주는 그에게 자금을 지원해주는 대가로 레비아탄과의 관계를 끊을 것을 요구했다.
다만, 이대로 처리하면 너무 구린내가 나기에 길드장은 눈앞의 사내를 바지사장으로 내세우는 한편 이전 길드장과의 거래가 잘못됐다는 식의 명분으로 거래를 끊으며 어물쩡 넘어가려 했던 것이다.
물론 이조차 따지고 보면 어거지에 가까운 명분인 데다 면밀히 따지고 들면 허점이 많은 얘기였지만, 이는 탈다스 상단장을 끌어내리면 해결될 문제였다.
그렇게 탈다스의 여동생이 자신의 오빠를 밀어내고 상단장에 오르는 순간 원래의 길드장이 복귀하는 한편 끊었던 거래를 다시 체결한다는 게 이번 일의 전모였다.
거기에 영주의 입김까지 있으니 남아있는 이들은 진실을 캐지도 못할 테고 설사 모든 전말을 안다고 하더라도 입도 뻥긋 못할 테니 아주 잘 쓰인 한편의 시나리오라고 할 수 있겠다.
“그렇습니다. 존귀한 분이시여.”
“하긴, 그러니까 이렇게 간이고 쓸개고 다 내줄 것처럼 군 거겠지.”
아무런 실권도 없는 바지사장에 올랐는데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목숨까지 바치며 충성하겠는가. 거기에 눈앞의 사내가 말하는 꼴을 보아하니 원 길드장에 대한 충성심이 썩 높아 보이지도 않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자네가 마음에 드네.”
“감사합니다. 존귀한 분이시여.”
나는 피식 웃으며 길드장을 바라보았고 그는 겁먹은 표정을 지으면서도 결코 내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 배짱이 마음에 들었기에 나는 그에게 거부하지 못할 제안을 내밀었다.
“그래서 나는 자네에게 기회를 줄 생각이야. 우선 자네의 행동거지나 말투를 보아하니, 원 길드장에게 썩 좋은 감정이 있는 것 같지는 않네만… 맞나?”
“그렇습니다. 솔직히 실권도 없는 길드장 자리에 오르고 싶지도 않았지만, 그가 강권해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누가 봐도 좋을 대로 써먹다가 팽하겠다는 의도가 보이지 않습니까?”
하긴, 원 길드장이 복귀한 뒤 눈앞의 바지사장이 살아있을 확률이 얼마나 될까? 원래 비밀을 유지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비밀을 아는 자신 이외의 모든 이들을 죽이는 거다.
길드장의 여동생이나 영주를 죽이는 건 불가능하지만, 눈앞의 바지사장을 죽이는 건 일도 아닐 것이다. 이 세계에선 꽤 많은 수의 사람들이 하늘을 나는 새가 되기 위해 발버둥 치다 죽은 경우가 허다하니까.
“거기에 그 때문에 오늘 이렇게 죽을 뻔했는데 어떻게 좋은 감정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그 덕에 이리 존귀한 분을 만나게 됐으니 새옹지마라는 게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이젠 대놓고 나를 빨면서 누구에게 충성하는지를 보여주는 그를 보자 웃음이 새어 나왔지만 내색하지 않고 얘기했다.
“사실 나는 자네를 암살할 생각이었네만, 자네가 이리 협조적으로 나오고 진범이 따로 있으니 그쪽을 죽여야겠지. 내가 전 길드장을 암살하면 자네가 염료 길드를 접수하게. 할 수 있겠나?”
“존귀한 분이시여. 제가 그러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지만, 전 길드장도 제가 배신할 걸 염두에 두고 실권을 전부 뺏어가거나 제한해 뒀기에 제가 직접적으로 뭘 하기는 힘듭니다.”
“자네가 싫다면 강요하진 않겠지만, 이대로 이용만 당하다 죽을 생각인가? 이번 일만 성공하면 그놈이 가지고 있던 모든 건 자네 게 되는 거야.”
내 말에 바지사장의 눈이 순식간에 탐욕으로 물들었고 나는 교활한 뱀처럼 그를 부추겼다.
“형식적이긴 해도 그는 자네에게 공식적으로 길드장 지위를 넘기지 않았나? 일이 마무리된 뒤에 팽당할 걸 자네도 모르진 않았을 테니 나름대로 대비를 하고 있었을 텐데… 내가 자네를 너무 과대평가한 건가?”
아마, 그는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목숨을 연명할 비장의 한 수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당장 내게 증거라면서 그가 건네준 편지와 문서, 장부만 봐도 알 수 있다.
“사람은 살면서 여러 번 기회가 온다고 하지만 그 기회를 잡는 이는 얼마 없네. 그대는 찾아온 기회를 걷어차는 병신인가. 아니면 어떻게든 붙잡는 독종인가?”
내 말이 결정타가 됐는지 그는 결의를 굳힌 눈으로 내게 무릎 꿇으며 선언했다.
“존귀한 분이시여. 저를 믿고 일을 맡겨 주신다면 결코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습니다.”
‘내 귀에 캔디’ 업적을 달성하셨습니다.
― 당신은 적대적인 상대를 달콤한 말로 꼬드겨 조직을 배신하게 만들었습니다. 요사스러운 혀 특성이 추가됩니다.
― 요사스러운 혀 : 당신의 뱀과 같은 교활하고 달콤한 언변으로 남을 설득할 확률이 늘어납니다.
그 순간 그의 말이 거짓이 아님을 증명해주듯 시스템 창이 떠올랐고 나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요사스러운 혀는 어감은 좋지 않아도 괜찮은 특성인 데다 다른 건 몰라도 시스템의 로그는 거짓말을 하지 않으니까.
적어도 이번 일에 관해서 바지사장이 나를 배신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다만, 한번 얻은 업적은 또 깨는 게 불가능하므로 이렇게 업적 시스템을 이용해 설득과 상대의 배신 여부를 확인하는 건 다시 써먹기 힘들 것이다.
하지만 그때는 요사스러운 혀 특성이 내 설득력을 높여줄 테니 크게 신경 쓸 건 없다.
“일단 전 길드장이 머무르는 곳부터 알려주게.”
그는 기다렸다는 듯 묻지도 않은 정보까지 술술 털어놓았는데 애초에 이 거래가 자체가 바지사장에게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었다.
일단 본인이 살아남은 데다 내가 전 길드장을 암살하는 데 성공하면 본인이 길드장이 될 수 있었다. 설사 내가 실패한다고 해도 그 책임을 내게 몰 수 있으니 그의 입장에서 보면 손해 볼 게 없는 거래인 셈이다.
그렇다고 내가 일방적으로 손해를 보는 것만도 아닌 게, 나 역시 염료 길드의 길드장을 내가 세운 만큼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그러면 자연스레 레비아탄 내에서 나의 영향력과 지분 또한 올라가게 될 테고 이는 모든 일이 끝난 뒤에도 나의 위상은 흔들림 없이 확고해짐을 의미했다.
본래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는 것처럼 이 게임에서 한 개인이나 집단에 대한 영향력이라는 건 신경을 안 쓰게 되면 자연스레 떨어지게 되어 있었다.
다만 종종 그 법칙을 무시하는 경우가 몇 가지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대상을 상대로 막대한 업적을 세우는 것이었고 이번 일은 그 업적을 위한 첫걸음이었다.
물론, 이 장밋빛 미래를 위해선 내가 전 길드장을 죽여야 한다는 전제조건이 붙지만, 난 충분히 해낼 자신이 있었다. 다른 건 몰라도 라그나르는 사람 조지는 것 하나는 타고난 인물이었으니까.
* * *
바지사장의 배웅까지 받으며 카메리를 떠난 나는 이틀 만에 전 길드장이 숨어있는 은신처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하긴, 너무 멀면 혹시 모를 변고가 발생했을 때 개입하기가 어려울 테고 또 너무 가까우면 탈다스가 눈치챌 수 있으니 이 정도 거리가 딱 적당했겠지.
나는 일단 얌전히 몸을 숨긴 채 주변 지형지물을 파악하며 적의 동태를 살폈는데 전 길드장은 바지사장과는 다르게 본인의 안위에 꽤 신경을 썼는지 호위병들이 24시간 그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대강 눈에 보이는 숫자만도 열댓 명이 넘는 것 같았지만, 적들의 무장상태를 보아하니 그렇게 티어가 높은 놈들로는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근 하루 만에 정찰을 끝마친 나는 습격 시기를 고민하다 밤까지 기다리지 않고 곧장 전투에 임하기로 했다. 교토삼굴이라고 교활한 토끼는 여러 개의 굴을 파두는 법이다.
괜히 시야 확보도 힘든 야밤에 습격했다가 목표를 죽이지 못하면 끝이었다. 그런 부담을 안고 전투에 임하느니 차라리 시야가 탁 트여 있을 때 단숨에 달려가서 죽이는 게 더 현명한 선택지였다.
결단을 내리자 나는 두 자루의 도끼를 뽑아 들고 힐데가 자신의 신에게 기도하던 것처럼 바이킹의 신에게 경건한 목소리로 기도를 올렸다.
“오딘이시여. 그대의 전사를 전투의 영광으로 이끄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