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15화
“뒷정리는 끝났어?”
“얼추 마무리됐습니다.”
“우리 쪽 사상자는?”
“죽은 이는 없고 부상자들은 좀 있습니다. 다만 팔다리가 절단되거나 그런 건 아니고 몇 달간 요양하면서 몸조리만 잘하면 될 겁니다.”
그 정도면 나쁘지 않은 게 이런 이벤트를 겪을 때는 적을 격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함께 동조해서 싸운 마을 주민들의 피해 유무도 중요하다.
이건 굳이 게임이라서가 아니라 현실적으로 싸우다 다치거나 죽으면 우리에게 좋은 감정을 가질 리가 없지 않은가.
게임에서야 퀘스트 클리어 보상이 줄어드는 정도지만, 현실이 된 지금은 신경 써야 할 것 중 하나다.
실제로도 나는 도적들을 추격하는 것보다 마을 사람들을 보호하는데 사력을 다했고 그 때문에 전투가 길어지기도 했다.
“시체는 전부 처리했지? 그거 괜히 잘못 처리하면 전염병 도니까 싹 다 태워버려.”
“예, 안 그래도 마을 어귀 구석진 곳에 가서 전부 태우라고 명령했습니다.”
이제는 굳이 명령을 내리지 않아도 알아서 척척 해내는 힐데가 괜스레 기특해 보인다. 솔직히 초반에 이렇게 빠릿빠릿하고 다재다능한 동료를 만나는 건 거진 기적에 가까웠다.
“왜 그런 눈으로 쳐다보십니까?”
“아니, 너무 기특해서. 엉덩이라도 두들겨 줄까?”
“이제는 성희롱이 입에 붙었군요. 솔직히 저한테 성희롱하는 건 이제 그러려니 합니다만, 지난번처럼 다른 이들에게 그러다가 또 감옥에 갈까 봐 걱정입니다.”
“또?”
“일 년 전인가 의뢰주였던 백작의 영애에게 난봉꾼처럼 치근덕거리다가 백작에게 걸려서 감옥에 사흘간 갇혀있던 것 기억 안 나십니까?”
“글쎄, 잘 모르겠는데.”
솔직히 진짜 모른다. 내가 아닌, 이전의 라그나르가 그랬던 걸 내가 어떻게 알겠는가. 기억이라도 온전하면 모르겠지만 불완전한 기억이 동기화돼서 그런지 물에 번진 그림처럼 흐릿하다.
“당신의 치매는 이상하게 본인이 불리할 때만 걸리는 것 같군요. 제가 당신을 빼내기 위해서 얼마나 바쁘게 뛰어다녔는지 당신은 절대 모를 겁니다.”
“음….”
“아시겠습니까. 라그나르? 당신의 성희롱을 받아주는 여자는 온 세상을 뒤져도 저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다른 여자들을 상대로 헛짓거리할 생각은 하지 마십시오.”
힐데는 잘 걸렸다는 듯 내게 잔소리를 하기 시작했고 나는 내 잘못은 아니었지만, 왠지 모르게 죄를 지은 것 같아 얌전히 그녀의 잔소리를 듣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이나 설교를 늘어놓던 그녀는 지치는지 한숨과 함께 흐트러진 머리칼을 쓸어올리며 내게 물었다.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할 겁니까?”
“일단은 마을에 머물면서 이들을 지켜줘야겠지.”
게임이라면 보상만 받고 가면 그만이었지만, 이대로 우리가 떠나면 갈라이트 마을은 다른 도적들에게 습격당할 확률이 높았다. 의외로 도적놈들은 의리가 있는 데다 한번 공격당했던 마을이었던 만큼 도적들에겐 맛집 그 자체가 될 가능성이 농후했다.
거기에 이번에 우리가 소탕한 도적들이 전부라는 보장도 없으니 최소한 마을에 외벽을 세우고 자경단을 더 키워낼 시간을 우리가 벌어줘야 했다.
물론 이건 무료 봉사가 아니라 그 이후에 받게 될 대가를 생각해서 내가 베푸는 호의였다. 퀘스트로 비유하자면, 목표치를 초과 달성하는 느낌이었는데 여러 가지 일이 겹쳤던 만큼 일반적인 보상과는 궤를 달리할 거다.
거기에 마을과 호감도를 높여두면 나중에 반드시 어떤 식으로든 써먹을 수 있었다.
“시간이 너무 많이 잡아먹힐 것 같은데 괜찮겠습니까?”
“그러니까 그건 네가 맡아서 처리해줘. 하는 김에 마을을 습격했던 놈들 본거지도 토벌해서 숨겨놓은 물자도 좀 가져오고. 동굴에서 썩어가느니 우리가 유용하게 써줘야지.”
“날강도 마인드군요. 하지만 동의합니다. 주인 없는 물건은 먼저 줍는 사람이 임자지요.”
주인이 없다기보다는 우리가 주인을 죽여서 없어진 거지만 말이다.
“네가 여기서 일 처리하고 있으면 내가 카메리에 잠입해서 해결하고 올게.”
대강 촌장에게 자초지종을 들어서 돌아가는 사정도 알고 어떻게 일을 해결해야 할지도 대강 견적이 나온다.
이런 경우에는 굳이 병력 끌고 가서 무력시위하면서 “나와라~ 나와라이~ 제발 나와라이~” 하고 노래 부르는 것보단, 잠입해서 암살하는 게 훨씬 깔끔하다.
“따로 떨어져서 행동을 하자는 겁니까?”
그녀는 탐탁지 않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한마디 덧붙였다.
“확실히 당신의 말대로 하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만, 혼자 행동하면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죽음이 두려웠다면 시골에 처박혀서 농사나 짓고 있었겠지.”
원래의 나라면 죽음을 두려워했겠지만, 라그나르 로드브로크라는 바이킹에게 죽음은 발할라로 가기 위한 과정에 불과했다.
“하긴, 당신은 원래 그런 사람이었죠.”
“솔직히 나는 나보다 네가 더 걱정인데… 최우선 순위는 힐데 너의 안위니까 위험한 일이 생기면 무조건 도망쳐. 무슨 말인지 알지?”
“걱정 마십시오. 제가 죽으면 누가 당신을 뒷바라지해주겠습니까.”
그녀는 평상시와는 다르게 희미하게 웃으며 얘기했고 나는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하, 딴에는 또 그러네. 아무튼, 믿고 있을게.”
“지금 바로 가실 겁니까?”
“그래야지. 안 그래도 시간을 많이 지체했잖아.”
자경단을 훈련시키느라 머문 기간과 도적들의 습격을 기다리던 시간까지 생각하면 거진 10일을 허공에 날린 셈이다. 일 처리하고 복귀하는 시간을 생각해보면 상단장이 얘기한 기한에 딱 맞춰서 처리할 수 있을 것이다.
“알겠습니다. 그전에 잠시 귀 좀 빌려주시겠습니까?”
내가 힐데보다 머리통 하나는 더 컸기에 나는 허리를 반쯤 숙이자 그녀는 그 어떤 예고도 없이 나를 꽉 끌어안았다.
그 모습이 꼭 가지 말라고 칭얼거리며 어리광을 부리는 아이 같았기에 나는 당황하지 않고 그녀를 토닥여 주었다.
가벼운 포옹이 끝나자 그녀는 살짝 붉어졌지만,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날 바라보며 얘기했다.
“이제 손 좀 주십시오.”
얌전히 그녀에게 오른손을 내밀자 그녀는 내 손등에 입을 맞추더니 작게 읊조리며 기도했다.
“신이시여. 당신의 종이 간절히 바라노니 그대의 가호로 라그나르를 보호하소서.”
― 정화교단의 전투 사제 빙옌의 힐데가르트의 가호가 몸에 깃듭니다.
“부디 몸조심하십시오.”
“행운의 여신의 키스가 함께 하는데 뭐가 두렵겠어. 안 그래?”
내가 장난스레 윙크하며 얘기하자 그녀는 좀 전과는 다르게 경멸과 비웃음이 섞인 얼굴로 내게 쏘아붙였다.
“하, 설마 그걸 로맨틱하다고 생각하면서 내뱉은 겁니까? 예전부터 생각했던 거지만, 당신의 기괴한 센스는 이해할 수가 없군요.”
젠장. 나름 먹힐 거라고 생각해서 내뱉은 건데. 내가 창피함에 아무런 말도 못 하고 고개만 숙이고 있자 힐데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한마디 덧붙였다.
“역시 당신을 죽을 때까지 보살펴주고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은 자애와 봉사의 삶을 살아가는 사제인 저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힐데의 의기양양한 얼굴에 괜히 심술이 난 나는 나중에는 꼭 그녀를 울려주겠다고 마음속 깊이 다짐하며 말 위에 올라 마을을 빠져나갔다.
* * *
혼자 말을 타고 쉼 없이 달려서 그런지 카메리에 도착하는 데는 사흘이면 충분했다. 다만 정정당당히 내 신분을 밝히고 안에 들어갈 순 없었기에 나는 휴식을 취하며 밤이 되기를 기다렸다.
그렇게 새벽이 되자마자 타고 온 말을 먼 곳에 묶어두고 입고 온 갑옷과 거추장스러운 무장을 전부 해제한 뒤 쫙 달라붙는 가죽옷과 필요한 물품을 담은 작은 배낭, 단검과 갈고리만 가지고 조심스럽게 성벽에 접근했다.
“4… 아니 5m 정도인가?”
멀리서 봤을 때는 대강 4m 정도 됐던 것 같은데 가까이 와서 보니 그것보단 높아 보였다. 생각보다 조금 높긴 하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충분히 타고 오를법한 높이다.
거기에 풍화돼서 그런지 돌과 돌의 틈새가 벌어져 있었고 단검으로 디딤대를 만들기에도 충분했다. 다만 단검만 믿고 오르기에는 불안했기에 미리 준비해온 갈고리를 조심스럽게 돌린 뒤 성벽 위로 던졌고 운 좋게 첫 시도 만에 턱에 걸 수 있었다.
“후우… 좋아.”
줄을 잡아당겨 확실하게 고정된 걸 확인한 나는 가볍게 심호흡한 뒤 천천히 성벽을 오르기 시작했다.
아직 해가 뜨려면 한참이나 남았기에 한 발자국, 한 발자국 조심스럽게 발을 내디뎠고 타고 오를 때마다 흔적을 없애기 위해 단검에 묶어놓은 줄을 잡아당겨 회수했다.
그렇게 대여섯 걸음을 올라가자 마침내 성벽의 꼭대기가 손에 잡혔고 나는 구렁이 담 넘어가듯 성벽을 넘어갔다.
고작 5m 언저리인 성벽이었지만 들키는 순간 인생 종 치는 건 불 보듯 뻔했기에 옷은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하지만 여기서 지체할 시간은 없었고 나는 품속에서 지도를 펼쳐 주변을 둘러보았다. 야간이라 시야 확보가 어려웠지만 나 같은 고인물에게는 해당이 안 되는 얘기였다.
건물들의 배치나 주요 NPC들이 사는 집의 위치도 매번 바뀌긴 하지만,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가 바뀌는 건 아니었기에 지도를 보고 위치만 확정할 수 있으면 찾아가는 건 일도 아니었다.
그렇게 중간중간 순찰을 도는 경비병들을 피해 도시 안으로 잠입한 나는 마침내 새롭게 취임한 염료길드의 길드장이 사는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주변의 집들에 비하면 크긴 하지만 그것뿐이었고 딱히 앞에 경비병이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나는 바로 락픽을 꺼내 들었다.
물론, 숙달되지 않은 데다 시야 확보가 힘들어 락픽을 3~4개 정도 분질러 먹었지만 여유분도 충분했고 하다 보니 감이 돌아와 여유롭게 문을 열 수 있었다.
끼이이익.
아직 새벽이라 그런지 문 열리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기에 나는 최대한 빠르게 잠입했다.
이미 집 구조는 머릿속에 들어가 있기에 나는 주변을 둘러보며 함정이나 소리가 날 만한 것들을 체크한 뒤 조심스럽게 집 안으로 들어갔다.
다행히 다른 방범 장치나 애완동물도 없었고 덕분에 무사히 나는 길드장이 머무는 방문 앞에 도달할 수 있었다.
다행히 문은 열려있었고 그 사이로 길드장의 코 고는 소리가 우렁차게 울리고 있었다.
혹시 다른 사람이 있을까 싶어 다른 방들도 뒤졌지만, 다행히 길드장 이외에는 아무도 없었고 나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사실 암살을 하려면 지금이 최고의 적기였지만, 죽이는 건 언제든지 할 수 있었고 그의 입을 통해서 들어야 할 정보도 있었기에 조금 번거롭더라도 제압하기로 했다.
생각을 정리하자마자 나는 곧장 배낭에서 입마개와 밧줄, 그리고 단검을 들고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갔다.
다행히 길드장은 한번 잠들면 누가 업어가도 모를 정도로 깊게 자는 모양인지 내가 그의 코앞까지 다가가는데도 무방비하게 자고 있었다.
“흐읍!!!!”
나는 양 무릎으로 그의 팔을 짓누른 뒤 동시에 왼손으로 길드장의 입을 틀어막으며 순식간에 제압했고 그는 물 위로 끌려 나온 물고기처럼 퍼덕거렸다.
“으읍!! 읍!”
몸이 마음먹은 대로 움직이지 않자 뭔가 싶어서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던 길드장은 번뜩이는 단검을 들고 있는 나를 보고는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상식적으로, 야밤에 칼을 들고 남의 집을 방문하는 사람이 암살자 말고 누가 있겠는가. 그의 눈동자는 공포로 이리저리 뒤흔들리고 있었고 나는 그런 길드장을 향해 유쾌한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서프라이즈 마더 퍼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