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12화
힐데가 오자마자 나는 읽던 서류를 집어 던지고 벌떡 일어나 그녀에게 다가가며 소리쳤다.
“힐데!!! 어서 와! 보고 싶었어!”
물론 그녀는 늘 그렇듯 눈살을 찌푸리며 톡 쏘듯 이야기했다.
“갑자기 뭡니까? 누가 보면 몇 년 동안 못 본 줄 알겠군요.”
하지만 난 그녀가 매도를 하건 말건 내게 안기라는 듯 양팔을 벌린 채 그녀에게 다가갔다.
“너도 내가 보고 싶었으면서 빼기는… 자, 이리 와서 좀 안아 보자!”
“절 보고 싶었던 게 아니라 단순히 성희롱을 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만… 뭐 좋습니다.”
힐데는 작게 한숨을 쉰 뒤 진짜로 내게 다가와서 나를 꼭 끌어안고 내 귓가에 들릴 듯 말 듯 작게 속삭였다.
“다녀왔습니다. 라그나르.”
“어? 어… 그래. 어서 와.”
솔직히 조금 놀려줄까 했는데 정작 상대가 이렇게 나오니까 당황스럽다. 반면 힐데는 그런 나를 보며 이상하다는 듯 이야기했다.
“예전에도 종종 이랬으면서 왜 그렇게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겁니까?”
예전에도 이랬다고? 확실히 힐데가 나를 대하는 걸 보면 남자라기보다는 연상의 무언가… 그래. 꼭 아빠를 대하는 것 같다.
실제로 그녀의 라그나르에 대한 헌신적인 행동이나 인식 같은 걸 생각해볼 때 둘이 부녀 사이라면 그녀의 모든 행동이 다 이해가 된다.
그녀가 아무리 제멋대로에 싸가지없고 불평불만에 가득 차 툴툴거리며 제멋대로 행동한다고 해도 어떤 게임의 왕자처럼 ‘썩시딩 유’라고 외치는 패륜아가 아닌 이상 아버지에 대한 존중과 예의를 보여줄 수밖에 없을 테니까.
근데 그러면 내 아내는? 설마 이게 쾌락 없는 책임인가? 아니, 그것보다 딸이 아빠한테 당신이나 라그나르 이렇게 이름을 부르던가?
아마 내가 우리 아버지한테 그렇게 불렀다간 미쳤냐면서 당장 귀싸대기가 날아올 텐데?
그렇다고 내가 힐데에게 직접 물어보기도 뭐한 게 만약 그녀가 진짜 딸이라면 아빠가 딸한테 ‘혹시 우리 부녀 사이니?’라고 묻는 꼴이지 않던가.
“라그나르… 라그나르!!!”
“어?”
“이제 좀 놔주시는 게 어떻습니까? 아무리 저라도 이렇게 계속 안겨있으면 조금 부끄럽습니다.”
“아… 어. 미안.”
나는 멍청하게 대꾸하며 그녀를 안고 있던 팔을 풀어주었고 힐데는 가져온 짐을 바닥에 내려놓은 뒤 침대에 주저앉으며 이야기했다.
“그래서, 제가 자리를 비운 동안 뭔가 소득이라도 있었습니까?”
“있긴 있었지. 사실 그것 때문에 너와 상의하고 싶기도 했고.”
나는 그녀의 옆에 앉은 뒤 뒷골목에서 가져온 문서를 건네며 그간 알아낸 것들을 이야기했고 조용히 듣고만 있던 힐데는 한숨을 내쉬며 무거운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하이르 앗 딘이라. 생각지도 못한 거물이 엮여있군요.”
그녀의 말대로 나는 하이르 앗 딘이 아닌, 신성 제국과 적대하는 다른 국가의 영주나 아니면 레비아탄과 적대하고 있는 상단에서 방해 공작을 했다고 생각했었다.
“내 말이 그 말이야. 생각해보면 레비아탄도 꽤 덩치가 큰 상단이고 상단장인 탈다스가 직접 상행에 나섰는데 그렇게 탈탈 털릴 정도였다는 건, 다 이유가 있던 거지.”
상단장인 탈다스 역시 자신의 여동생과 하이르 앗 딘, 그리고 이곳 노바라의 영주인 볼프강 사이에 커넥션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겠지. 그런데도 내게 별다른 말을 안 했던 건 내가 그들의 이름을 듣고 도망칠 걸 염려해서가 아니었을까?
“어쨌건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건 없으니 긴장을 늦추지 말고 탈다스 상단장의 다음 행동을 지켜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하… 혹시 정화교단에서 지원을 받을 수는 없어?”
“안타깝지만 그건 불가능합니다. 교단은 어디까지나 악을 멸하고 정화할 뿐 왕국과 영주의 일에는 관여하지 않습니다.”
하긴, 강력한 힘을 가진 교단이 왕국과 영주를 자기 멋대로 악이라 단정하고 공격하게 되면 그건 내정간섭은 물론이요. 선전포고나 다름이 없다. 물론 한 왕국의 국교로 선포된 종교라면 또 모르겠지만 그게 아닌 이상 교단으로서도 조심할 수밖에 없다.
“갈수록 태산이네.”
나도 여러모로 생각해 봤는데 힐데의 말대로 지금 당장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없다. 용병이라는 건 의외로 상인과 통하는 부분이 있었는데 바로 신뢰다. 용병은 이미 한번 계약을 한 이상 상대에게 큰 과실이 없는 한 계약을 파기할 수 없다.
물론 탈다스가 내게 모든 진실을 얘기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거짓을 말하진 않았다. 가령, 알바를 하는데 고용주가 만 원을 준다고 했다가 최저 시급을 주는 것과 잘 챙겨줄 거라고 얘기하고 최저 시급만 맞춰서 주는 건 결과는 같아도 과정이 다르다는 얘기다.
따라서 시스템이 판단할 때 나는 탈다스와 정당하게 계약을 맺었고 그를 내가 일방적으로 파기하는 순간 엄청난 페널티를 받게 될 것이다. 이게 현실이라면 그냥 도망치면 되겠지만, 게임을 기반으로 한 현실이기에 시스템상으로 불이익을 받게 되고 이는 어지간해서는 떨쳐내는 게 불가능하다.
“젠장. 이래서 계약서는 잘 읽어보고 도장을 찍어야 하는 건데.”
나는 툴툴거리듯 내뱉었지만, 오히려 몸 안 깊숙한 곳에서는 나도 모르게 희열을 느끼고 있었다. 이렇게 리스크가 클수록 내 손에 들어오는 게 많아지는 법이었고 고인물인 내게 이 정도 페널티는 오히려 게임을 즐겁게 만드는 조미료에 불과했으니까.
* * *
그렇게 사흘이 더 지난 무렵, 상단장은 나와 힐데를 응접실로 불렀다. 레비아탄 상단의 응접실은 쓸데없이 컸는데 상단장을 포함해 고작 3명만 앉아있어서 그런지 묘하게 기분 나쁜 적막이 느껴졌다.
그 불편한 침묵을 깬 건 상단장이었는데 그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말문을 열었다.
“그간 편히 쉬셨습니까?”
“상단장님이 배려해주신 덕분에 편히 쉴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다른 게 아니라, 이번에 급하게 용병단장님께 부탁할 일이 하나 생겼습니다.”
일이라… 일도 좋지만 그 전에 하나 못 박아둘 게 있다.
“그것보다 상단장님.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오, 얼마든지 물어보셔도 괜찮습니다.”
여전히 부드럽게 미소 짓고 있는 탈다스를 보며 나는 차를 들이켠 뒤 깍지를 끼고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사람과 사람 간에는 신뢰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물론입니다.”
“특히나 용병과 상인에게 있어서 가장 최우선 가치는 신뢰가 아닙니까?”
“…그렇지요.”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깨달았는지 탈다스의 표정이 살짝 굳었지만 내는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사람이 말을 할 때는 해야지 가만히 있으면 호구 되기 십상이다.
“상단장. 혹시 우리 사이의 계약이 잘못됐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만일 그대가 이번 일을 잘 처리해준다면 섭섭하지 않게 재계약을 해드리겠습니다.”
“좋습니다. 그럼 이 이야기는 이쯤하고, 본론을 얘기해주시겠습니까.”
“으음… 사실 의뢰 자체는 별거 아닙니다.”
탈다스는 나와 힐데에게 내용이 정리된 문서를 건넸고 나는 일부러 글을 못 읽는 척 힐데에게 쓱 내밀었다. 힐데는 눈치 좋게 문서를 챙긴 뒤 꼼꼼하게 검토하기 시작했고 상단장은 참을성 있게 힐데가 문서를 다 읽을 때까지 기다렸다.
“보셔서 아시겠지만, 저희와 염료를 거래하던 길드에서 염료의 거래 및 양도를 거부했습니다. 이것뿐이라면 저쪽에서 위약금을 물고 끝내면 되는 일입니다만, 문제는 레비아탄에서 이미 저쪽에 염료에 대한 대가를 지불했다는 점입니다.”
뭔가 많이 축약된 듯한 상단장의 설명에 난 손을 들어 그의 말을 제지하고 물었다.
“그러니까 저기에서는 레비아탄이 대금을 냈음에도 불구하고 염료를 못 주겠다며 배 째라 버티고 있다는 얘기입니까?”
“정확히는 저쪽에서 길드장이 바뀌었고 새롭게 등극한 길드장은 레비아탄과의 거래를 이전 길드장이 단독으로 진행한 문제이기 때문에 자신들이 책임을 질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배 째라는 소리 맞긴 하군요. 흠, 배를 째는 게 제 특기이기는 합니다만,”
“차라리 단장님 말대로 속 시원하게 배를 째면 되겠지만 의심 가는 점이 한둘이 아닙니다.”
“구린내가 난다는 말이군요.”
“그렇습니다.”
말을 마친 상단장은 품에서 종이를 두 장 꺼내서 나와 힐데의 앞에 펼쳤다.
“이건 염료 길드에서 몰래 빼 온 거래 명세서입니다. 보시면 아시겠지만, 저희 레비아탄 길드와 반이 넘는 양을 거래하고 있습니다.”
힐데가 슬쩍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고 상단장은 바로 옆에 지도를 펼치며 펜으로 몇 군데를 마킹했다.
“그리고 이건 이 근방에서 저희를 대신해 염료를 취급할 수 있는 상단의 목록입니다.”
직선 거리상으로는 레비아탄보다 더 가까운 곳들이 보이긴 했지만, 제대로 된 도로가 난 곳은 이곳 노바라뿐이었다.
“몇 군데가 있긴 한데… 운반비가 더 들겠군요.”
“정확히 보셨습니다!”
상단장은 박수까지 치며 내 말에 동의했고 이내 열정적으로 설명하기 시작했다.
“당장 염료를 처분해 줄 상단이 있는 것도 아니고, 설사 있다 하더라도 굳이 레비아탄을 적으로 삼으면서까지 욕심낼만한 곳도 아닙니다. 물론 이 거래로 저희 상단도 꽤 큰 매출을 내고 있지만, 대체재가 없는 것도 아니니까요.”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행동이라는 건데… 혹시 이것 이외에 더 아는 정보가 있으십니까?”
“지금 말씀드린 것 이외에는 저도 아는 게 없습니다. 사실 이번에 부탁드리는 건 이 문제를 해결해달라는 의미보다 일의 전말에 대해 조사를 해주셨으면 하는 겁니다.”
“굳이 안 봐도 배후가 짐작이 가기는 하는데….”
“저도 그렇습니다만 확실한 증거가 있는 건 아니니까요.”
상단장도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당연히 배후가 있음은 물론 누군지도 짐작하고 있을 것이다.
“가서 처리할 수 있게 되면 처리해도 되겠습니까?”
“그에 대해서는 용병단장님의 판단을 믿겠습니다.”
말이 좋아서 맡기는 거지 본인은 책임에서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놓겠다는 거군. 뭐, 아직 우리가 등을 맡길 정도로 친밀해진 건 아니니 이해한다.
“좋습니다. 바로 착수하도록 하지요.”
“감사합니다. 덕분에 한시름 놓을 것 같군요.”
상단장은 호탕하게 웃으며 내게 악수를 청했고 나는 그와 악수를 하며 잊었다는 듯 한마디 덧붙였다.
“아, 그리고 저는 개인적으로 한 번은 실수지만 두 번은 실력이라 생각합니다. 상단장님이 부디 두 번째 실수를 하지 않기를 마음속 간절히 빌고 있겠습니다.”
“…명심하겠습니다.”
분명 그는 유능한 상단장이니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했을 것이다.
* * *
“라그나르. 최근의 당신은 볼 때마다 놀랍군요.”
“뭐가? 새삼스럽게 반하기라도 한 거야?”
“그런 천박한 부분은 이전과 달라진 게 없어 보입니다만…아니, 오히려 이전보다 더한 것 같군요. 아무튼, 저 없는 사이에 뭐라도 잘못 먹었습니까?”
“왜?”
“평상시의 당신이라면 도끼부터 꺼내 들지 않았습니까.”
힐데가 말하는 걸 보면 라그나르는 바이킹 그 자체였던 모양이다. 확실히 야만인들에게 예절이 중요하긴 했지. 아닌 놈들은 다 머리에 도끼가 찍혀서 두개골이 두 동강 났을 테니까.
“네 말대로 지적인 야만인이 되기로 했거든.”
“그런 것치고 재미있는 농담은 아니군요. 당신의 말에 웃기는커녕 말을 섞어주는 건 장담컨대 저 말고는 아무도 없을 겁니다.”
힐데의 힐난이 이어졌지만 이미 익숙해졌기에 난 어깨를 으쓱이며 물었다.
“그보다 점심을 먹는 대로 출발할 건데. 준비는 다 됐지?”
“물론입니다. 당신이 원한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출발 가능합니다.”
힐데의 믿음직한 답변에 나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가서 실컷 돈이나 뜯어보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