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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바이킹이 되었다-11화 (11/205)

▣ 011화

나는 힐데가 떠난 뒤로 낮에는 병력을 훈련하거나 간간이 탈다스의 일을 도우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기를 사흘째, 슬슬 때가 됐다고 생각한 나는 갑옷과 무기를 꺼내 들었다.

보통 뒷골목을 돌아다닐 때는 호위를 대여섯 명 끌고 다니는 게 일반적이지만 난 스스로의 무력을 믿고 있는 데다 굳이 이목을 끌고 다니고 싶지 않았기에 홀로 상단을 나섰다.

차가운 밤공기를 들이마시며 천천히 도시의 후미지고 찌끄러기들이 모이는 곳으로 향했다. 게임을 플레이하면서 수십 번이나 갔던 곳이지만 이렇게 내 발로 걸어가는 건 처음이었기에 흥미로워야 할 테지만 라그나르에게는 익숙한 곳이었는지 별다른 감흥은 느껴지지 않았다.

“술집에 경매장에 노예 상인에 사채업자에 도박장이라…좆만 한 도시에 있을 건 다 있군.”

생각했던 것보다 뒷골목의 규모가 큰 것에 놀랐지만, 어차피 내가 해야 할 일이 바뀌는 건 아니었기에 난 가볍게 몸을 푼 뒤 근처에 있는 도박장으로 걸어 들어갔다.

문 앞에 가드가 서서 떨거지들을 걸러내고 있었지만, 그는 내 행색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얌전히 비켜주었고 나는 천천히 안으로 들어갔다.

실내는 도박장치고는 꽤 세련되고 화려했는데 보면 한눈에 봐도 영주와의 커넥션이 있는 것 같았다.

이건 굳이 내가 고인물이라서 알 수 있는 게 아니라 상식적으로 허구한 날 단속반이 뜨면 도망치기 바쁜 놈들이 인테리어고 뭐고 할 시간이 어디 있겠는가.

그게 다 돈인 걸 감안하면 영주가 뒷골목 청소에 관심이 없거나 커넥션이 있는 게 분명했다.

다만 영주가 돈이 필요해서 노골적으로 탈다스에게 돈을 뜯어내던 걸 보면 영주가 뒷배로 있는 게 분명했다. 영주가 단속하는 시늉이라도 한다면 이딴 식으로 실내를 꾸밀 수가 없을 테니까.

“용병인가? 무기는 이곳에 반납하도록.”

“꼭 해야 하나?”

“친구. 이곳은 처음인가 본데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라고. 돈을 잃어서 눈 돌아간 놈이 무기를 휘두르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어?”

“그럴듯하군.”

논리적으로 완벽했기에 난 고개를 끄덕이며 허리춤에 매고 있던 도끼를 반납했고 칩 환전상은 도끼를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미묘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왜. 문제 있나?”

“아니, 그건 아닌데…뭐 좋아. 환전은 얼마나 할 거지?”

“일단 10두카트 정도만 하지.”

품속에서 금화를 꺼내 올려놓자 환전상은 기분 나쁜 미소를 실실 흘렸다.

“생각보다 많이 하는군. 혹여나 잃었다고 난동 피우지는 말라고.”

그는 돈을 받더니 능숙하게 칩을 분류해서 내게 건네주었고 난 칩을 한가득 든 채 주변을 둘러보다가 때마침 세븐포커를 하는 자리에 자리 하나가 비어있었기에 바로 합석했다.

“어서 오세요. 포커의 기본적인 룰은 알고 계시나요?”

도박장에 오면서 룰도 모르고 오는 놈이 어디 있겠는가. 이런 점은 알게 모르게 게임 같다고 생각하면서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딜러는 웃으면서 패를 돌리기 시작했다.

패를 돌리는 딜러의 손을 봤는데 딱히 밑장을 빼거나 허튼짓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기에 나는 느긋하게 테이블에 앉아있는 이들을 바라보았다.

이 게임에서 상대의 패를 가늠하는 요소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쉽게 판단할 수 있는 건 상대의 외적인 반응이다. 알게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간다거나 눈꼬리가 휘어진다거나 손을 쥐었다가 편다거나, 발을 떤다거나 등등.

물론 진짜 꾼들이 모인 곳에서는 어림도 없는 일이지만, 이런 조그만 도시에 출입하는 도박꾼들이 잘나 봐야 얼마나 잘났겠는가.

거기에 과거 도박꾼 컨셉으로 모든 도시의 도박장을 제패한 기억이 있는 나로서는 눈앞의 도박꾼들을 털어먹는 건 일도 아니었다.

결국, 카드패가 10번 넘게 돌아가자 함께 포커를 치던 이들이 한숨을 쉬며 손을 털었다.

“오늘은 행운의 여신이 내게 미소 지어주시지 않는군.”

“나도 마찬가지야. 오늘은 여기까지만 해야겠어.”

“허, 천하의 도박꾼들이 먼저 자리를 뜨다니… 나도 뜨겠네.”

같이 하던 사람들이 순식간에 자리를 뜨자 딜러가 난감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지만 나는 뭐가 문제냐는 듯 어깨를 으쓱이며 얘기했다.

“패 안 돌리고 뭐 하나?”

“저 손님, 이쯤 하시면 많이 따신 것 같은데 돌아가시는 게 어떻습니까?”

딜러쯤 되면 저 사람이 도박을 잘하는지 못하는지는 기본적으로 판단할 수 있어야 하고 자신이 볼 때 나를 감당할 수 없다고 여긴 모양이다.

객관적으로 자신을 판단할 수 있는 건 좋은 자세지만 그래서야 내가 이곳에 온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

“도박장이 손님을 내친다는 얘기는 처음 들어보는데… 자네 선에서 해결 안 되면 다른 딜러를 데려와. 설마 안 된다고 하지는 않겠지?”

가끔 돈이 부족할 때 따는 거라면 몰라도 지속적으로 도박을 하게 되면 도박사, 도박꾼, 사기꾼 같은 특성을 얻게 되는데 이것들은 바이킹인 내가 메인 퀘스트를 수행하는 데 도움이 되기는커녕 방해만 될 것이다.

귀족이 심심풀이로 도박을 하는 것과 비천하고 천박한 야만인 도박꾼이 귀족이 되는 것과는 뉘앙스가 현저하게 다르니까. 그러니 이왕 온 거 딸 수 있을 때 잔뜩 따가야 하지 않겠는가.

“그게…….”

내 말에 딜러가 어찌할 줄 모르고 안절부절못하고 있을 때 떡대 하나가 다가와서 딜러를 구원해 주었다.

“손님. 안쪽으로 모시겠습니다.”

“흠, 이곳의 주인이 누군지는 모르지만, 제법 머리가 잘 돌아가는 친구군.”

일반적이라면 떡대들이 찾아와 날 겁박하며 쫓아내려고 했을 텐데 이렇게 날 안쪽으로 초대한 걸 보면 내 정체를 알고 있는 모양이다. 나는 이곳의 주인에 대한 평가를 한 단계 상향조정 하며 떡대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물론, 날 안쪽으로 끌어들여서 없애려는 속셈일 수도 있겠지만, 그거야말로 내가 바라던 바다. 그렇게 되면 명분은 이쪽에 있으니 상대를 영혼까지 털어먹을 수 있을 테니까.

사실, 내 입장에서도 굳이 이들과 쑥덕쑥덕거려 뒷말 나오게 하는 것보다 두들겨 패고 원하는 걸 얻어 내는 게 더 좋았다.

코앞의 떡대가 알게 되면 기겁할만한 생각을 머릿속으로 펼치고 있을 무렵 목표했던 곳에 도착했는지 떡대는 가볍게 문을 두들긴 뒤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난 열린 문 안으로 당당하게 안으로 들어갔고 그곳에는 검은색 드레스를 우아하게 차려입은 중년의 여성이 내 맞은편에 앉아있었다. 나는 여성이 뭐라 말을 꺼내기도 전에 그녀의 맞은편에 주저앉은 뒤 입을 열었다.

“날 부른 게 그대인가?”

“그렇습니다. 고귀한 분이시여.”

“오, 내 정체를 알고 있다니 대단하군. 이곳에 머문 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모르면 장사 접어야지요.”

“그래, 그건 그렇다 치고… 이렇게 날 부른 이유가 뭐지?”

“오히려 제가 묻고 싶군요. 고귀한 귀족분께서 이곳까지는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여인의 물음에 나는 피식 웃으며 의자의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다리를 탁자 위에 올렸다. 다소 무례한 행동이었지만, 미리 얘기가 되어있던 건지 호위를 서고 있던 건달들은 미동도 없었다.

“도박장에 도박하러 오지 왜 오겠나. 혹여 나 같은 귀족은 오면 안 된다는 규칙이라도 있나?”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어둠을 가까이하면 그자 또한 검어진다 했습니다. 막말로, 이곳이 고귀하신 분께서 오실만한 곳은 아니잖습니까.”

“딴에는 그렇군. 그럼 반대로 물어보지. 자네는 내가 왜 왔을 것 같나?”

“…….”

내가 역으로 되묻자 그녀는 입을 다물었고 나는 피식 웃으며 한마디 더 보탰다.

“눈알 돌리지 말고, 머리 굴리지 말고 자네 생각을 있는 그대로 얘기해보게.”

“저희에게 사고 싶으신 정보가 있으시군요.”

“머리는 제법 잘 굴러가는군. 솔직히 용병 일을 하면서 꽤 많은 뒷골목을 돌아다녔지만, 자네처럼 머리가 잘 굴러가는 친구는 처음이야.”

“칭찬으로 들어도 되겠습니까?”

“그럼. 대부분은 나랑 대화할 때 무릎 꿇고 하거나 어디 하나가 병신 돼서 했거든.”

“…….”

“하하하하, 농담이니까 그런 표정 지을 거 없네. 아무튼, 자네 생각대로 나는 알고 싶은 게 하나 있어.”

“정보를 사고 싶으시다면 정석적인 방법을 쓰셔도 될 텐데 왜 굳이 이런 방법을 쓰셨는지 모르겠군요. 저희의 뒤에 누가 있는지 모르시진 않을 텐데….”

“그럼 자네는 내 뒤에 누가 있는지 아나?”

“…….”

“뭐, 치졸하게 누구 백이 더 크네 어쩌네 하는 것도 참 창피한 일이야. 안 그런가?”

“그렇지요.”

“그러니까 서로 볼일만 보고 쿨하게 헤어지자고. 내가 알고 싶은 건 레비아탄 상단장의 여동생에 대한 정보다. 뭐든 좋으니 정보라는 정보는 전부 다 가져와.”

원래는 영주에 대해 알아 오게 시키려고 했지만, 영주의 끄나풀임이 분명해 보이는 놈들에게 그런 일을 시킬 순 없지 않은가. 서두르지 않아도 탈다스의 여동생을 추적하다 보면 영주와의 커넥션도 캘 수 있을 것이다.

“저희보단 고귀하신 분의 친구분께서 누구보다 더 잘 아실 텐데요.”

“여동생쯤 되면 오빠에게 숨기는 이런저런 비밀이 많지 않나? 막 사춘기에 접어든 것처럼 말이야.”

“사춘기를 겪을 나이는 한참 전에 지난 것 같습니다만….”

“말장난은 그쯤이면 됐다. 그래서? 가능한가?”

“물론입니다. 허나 고귀하신 분께선 저희에게 대가로 뭘 지불하실 수 있으십니까?”

“대가? 하하하하, 너희들의 목숨으로는 부족한가 보지?”

광포하고도 오만한 내 말에 그녀는 날 바라보더니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이런 일은 두 번 다시 없을 겁니다.”

“그래그래. 원래는 나도 젠틀한데 이번에는 좀 일이 급해서 말이야.”

그녀는 뒤에 서 있는 건달을 향해 손짓했고 그는 방을 나가더니 꽤 많은 양의 문서를 가지고 다시 돌아왔다. 사실 대부분 다 내가 알고 있거나 필요 없는 게 태반일 테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 아니던가.

“고맙네. 다음에 기회가 되면 내가 좋은 자리에서 술이나 사도록 하지.”

“부디 그날이 오기를 고대하고 있겠습니다.”

그렇게 단 하루 만에 돈과 정보를 한가득 안고 다시 상단으로 돌아온 나는 그 즉시 내 방에 틀어박혔다. 생각했던 것보다 양이 꽤 많아서 조사하고 분류하는 데만 일주일은 걸릴 것 같다.

양도 양이지만 더 큰 문제는 내가 아직 글을 제대로 읽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아직까지는 영어를 읽는 느낌으로 떠듬떠듬 읽는지라 당연히 내용을 읽고 해석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릴 수밖에 없었다.

글에 능통한 힐데가 있다면 하루 이틀 만에 끝낼 수 있는 작업이었지만, 그녀는 정화교단의 지부로 떠났으니 나 혼자서 노가다를 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탈다스에게 얘기해 인력을 지원받을 수도 있지만, 내부에 누가 탈다스의 사람이고 누가 여동생의 사람인지 모르기에 함부로 도움을 받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리고 그런 내 눈물겨운 노력은 거진 1주일 만에 빛을 볼 수 있었는데 상단장의 여동생은 예상 밖의 거물이 엮여있었다.

“하이르 앗 딘을 만났다고? 그 도적 새끼를 대체 왜? 설마 탈다스가 습격당한 것과 연관이 있는 건가? 그러면 문제가 좀 커지는데….”

나는 아직 좆밥이었고 하이르 앗 딘은 지금 내게는 도저히 넘을 수 없는 벽이었다. 아무리 내가 고인물이라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다.

하이르 앗 딘이 이끄는 세력은 이 게임을 활보하는 도적 집단 중에 가장 강력한 집단이었는데 그들을 토벌하려면 병력을 천 단위로 굴려야 했다.

그런 거물의 이름이 튀어나왔으니 나는 여기서 발을 빼야 하나를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야반도주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을 때 벌컥 문이 열리더니 예의 차가운 표정의 힐데가 나를 바라보며 얘기했다.

“다녀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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