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10화
그렇게 징수관과의 일을 마무리 지은 나는 마지막으로 들른 마을에서 힐데에게 그간 있던 일을 간추려서 얘기했다. 조용히 듣고만 있던 그녀는 내 말이 끝나자 미간을 찌푸리며 나를 쳐다보았다.
“왜?”
“라그나르 당신이 그렇게 친화력이 있는 줄은 몰랐군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힐데가르트가 저런 말을 하자 나는 어이가 없어 코웃음 쳤다.
“농담이지? 솔직히 성격 나쁜 너를 받아주는 건 나 정도일걸?”
“혹시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나무란다는 속담을 알고 있으십니까?”
“나만큼 젠틀하고 지적인 야만인이 또 어디 있다고.”
“헛소리하지 말고 자빠져 잠이나 자는 게 어떻습니까? 혹시 제가 재워줬으면 하는 겁니까? 설마 당신이 그런 취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만… 어쩔 수 없지요.”
말을 마친 힐데는 침대의 한쪽 구석으로 이동하며 공간을 비웠고 나는 당황해서 되물었다.
“뭐야. 나도 같이 자자고? 진짜로?”
“뭡니까? 이전에도 같이 자놓고 이제 와서 뭘 부끄러워하고 있습니까?”
“뭐?”
“혹시 예전처럼 자장가라도 불러주고 싶으신 겁니까? 지금에서야 하는 얘기지만 당신의 노래는 솔직히 못 들어줄 정도입니다.”
“어…….”
“제가 당신의 노래를 들어주는 대가로 돈을 받아야 하는 수준이라고 하면 이해하시겠습니까? 뭐, 그래도 당신이 오직 저만을 위해 불러주겠다면 특별히 들어드리겠습니다.”
“음….”
내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어버버 거리고 있을 때도 힐데는 개의치 않고 자기 할 말을 했다.
“아니면 팔베개라도 해주고 싶으신 겁니까? 하긴, 이전에는 종종 해주곤 했지요. 딱딱해서 자기는 불편했지만요. 그 쓸데없는 근육 때문에 목침을 베고 자는 기분이었습니다.”
“아니….”
“그도 아니면 잘 자라고 이마에 키스라도 해주고 싶으신 겁니까? 이전이라면 몰라도 솔직히 지금은 좀 징그럽습니다만, 라그나르 당신이 꼭 해주고 싶으면 별수 없지요. 개인적으로 할 거라면 수염은 좀 깎아주십시오. 솔직히 닿을 때마다 아픕니다.”
“…….”
“농담입니다. 당신이 성격이 나쁘다고 하니까 심술 좀 부려봤습니다. 그럼 안녕히 주무십시오.”
말을 마친 힐데는 드물게 소악마처럼 미소 짓고는 고개를 돌린 채 잠을 청했고 나는 그런 그녀를 잠시 바라보다가 허탈하게 웃으며 방을 나섰다. 젠장. 성격 나쁜 년 같으니라고.
* * *
마지막 마을까지 도착해 물건을 전부 배달한 우리는 상행을 성공적으로 마무리 지었고 마침내 노바라로 다시 귀환할 수 있었다.
“정말 고생하셨습니다. 징수관님.”
“고생이야 자네가 다 하지 않았던가. 솔직히 이게 내 일이긴 해도 매 분기마다 영지를 돌아다니는 게 여간 고역이 아니었는데 자네와 함께하니까 시간이 술술 가더군.”
“그렇게 생각해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나중에 시간 되시면 사냥이라도 한번 가시지요.”
“하하하, 다시 이를 말인가. 내 기대하고 있겠네.”
징수관은 기사와 용병을 동경해서 그런지 그를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사냥을 좋아했지만, 사냥은 중세 기준으로도 돈이 꽤 많이 깨지는 고급 스포츠였다.
혹자는 그냥 활과 화살, 타고 다닐 말만 있으면 되는 거 아니냐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클라이밍을 좋아한다고 맨몸으로 산을 타지는 않는 것처럼 사냥도 많은 준비가 필요했다.
우선 기본적으로 사냥을 위해선 사냥감을 몰 몰이꾼도 필요했고 길잡이도 필요했으며 혹시 모를 불상사를 대비하기 위해 무장한 병력도 필요했다.
이런 인력을 동원하는 데 들어가는 돈의 양이 어마어마하다 보니 귀족 출신에 한 영지의 징수관을 담당하고 있다고 해도 1년에 한두 번밖에 즐길 수 없었다. 그 때문에 징수관은 욕구불만에 빠져있었는데 이번에 나와 함께 다니다 보니 평상시 즐기고 싶었던 사냥을 마음껏 즐길 수 있었다.
비결은 생각보다 간단했는데 무장한 병사들은 내 휘하의 병력들이 있었고 위험한 역할인 몰이꾼들은 붙잡은 포로들을 굴렸기에 그는 원할 때마다 실컷 사냥을 즐길 수 있었다.
가끔 멧돼지나 노루 같은 큰 사냥감을 잡았을 때는 온종일 싱글벙글 웃고 다니면서 그 무용담을 늘어놓을 정도였다. 물론 나를 비롯해 마을의 촌장이나 유지들은 그의 무용담을 들어주느라 고역이었지만 말이다.
“아, 그리고 이건 제 감사의 마음을 담은 선물입니다.”
내가 힐데에게 손짓하자 그녀는 품속에서 아주 자그마한 병을 꺼내서 징수관에게 건넸다.
“이게 뭔가?”
그는 병을 위로 들고 안에 있는 내용물을 햇빛에 비춰보며 말했고 나는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정화 교단의 성수입니다. 양이 적긴 하지만 순도가 높으니 물에 한두 방울씩 타서 사용하시면 됩니다.”
“허어, 이렇게 귀한 걸 주다니… 고맙네! 아내가 정말 좋아하겠군.”
그는 술이나 옷과 같은 선물을 받았을 때보다 눈에 띄게 좋아했는데 그도 그럴 게 성수는 돈을 주고도 구하기 힘든 물품이었다. 성수가 피부관리 및 노화에 특효약이라는 걸 생각해보면 애처가로 이름난 그에게는 저것보다 더 좋은 선물은 없겠지.
거기에 성수에는 숨겨진 성능이 하나 더 있었고 나는 나지막하게 그의 귀에다 대고 속삭였다.
“징수관님께서도 종종 복용하시면, 밤이 즐거울 겁니다.”
“크흠… 큼. 고맙네. 내 유용하게 사용하도록 하지.”
“그럼 살펴 가십시오. 다음에 종종 시간 나는 대로 찾아뵙겠습니다.”
“그래. 자네도 정말 고생했네. 내 자네의 일이라면 꼭 편의를 봐주도록 하지.”
그렇게 징수관을 비롯해 영주의 병력들과 화기애애하게 헤어진 우리는 각 마을에서 산 특산품을 가득 실은 수레를 끌고 상단으로 돌아왔다.
“고생하셨습니다. 라그나르 단장님. 미리 마중을 나갔어야 하는데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상단장님. 일이 바쁘면 그럴 수도 있지요.”
아닌 게 아니라 그의 책상에는 온갖 서류들이 쌓여있었고 그의 얼굴은 한 달 전보다 더 퀭해 보이는 게 보는 내가 안쓰러울 지경이었다.
“대강 징수관과 좋은 관계를 맺은 것은 물론이고 상행을 성공적으로 끝마쳤다는 얘기는 들었습니다만… 단장님의 입으로 직접 얘기를 듣고 싶은데 괜찮겠습니까?”
“물론입니다.”
원래 일을 마쳤으면 보고하는 게 당연한 거다. 워낙 간단한 일이라 보고할 것도 없지만 상단장 입장에서는 여러 가지로 듣고 싶은 게 많겠지.
“긴 여행으로 피곤하실 텐데 허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귀빈실에서 조금이나마 여독을 풀고 계시면 식사시간에 맞춰서 사람을 보내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나는 병력들을 해산시키며 자유시간을 부여했고 힐데 역시 피곤했는지 방으로 돌아갔다. 난 씻고 난 뒤 의자에 걸터앉아 현 상황을 분석하고 추후 행동에 대해 생각했다.
일단, 지금까지 알아낸 정보를 종합해보면 레비아탄 상단은 내부적으로는 탈다스 상단장의 여동생과 경영권 분쟁을 겪고 있고 외부적으로는 노바라의 영주인 볼프강에게 압력을 받고 있다.
레비아탄의 지분을 가진 주주들은 아직 탈다스와 그의 여동생 사이에서 간을 보고 있지만, 시간이 흐르면 상황은 영주의 지지를 받는 여동생에게 넘어갈 게 분명했다.
그 때문에 탈다스에게는 상황을 반전시킬 카드가 필요했고 그가 선택한 건 다름 아닌 나였다.
이게 레비아탄 상단의 현 상황이고 나는 이미 탈다스의 사람으로 인식됐으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가 승리할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다.
최종적으로는 영주와 맞서게 될지도 모르지만, 솔직히 지금처럼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는 힘들고 경영권만 제대로 가져올 수 있게 만들어주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다.
그를 위해선 일단….
“블라디미르 경. 모시러 왔습니다.”
이후의 행보에 대해 고민하고 있을 때 상단장이 보낸 사람이 도착했고 그의 뒤를 따라 식당에 도착하자 값비싸고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음식들이 잔뜩 올라와 있었다.
“입맛에 맞으실지 모르겠군요,”
“하하, 용병에게는 거친 빵조각과 밍밍한 수프도 최고의 만찬입니다.”
나는 웃으며 식기를 들었고 가벼운 이야기로 시작해 징수관과의 썰을 풀었다. 물론 그 와중에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될 내용은 적당히 숨기며 지극히 사무적으로 그에게 보고했고 상단장은 단 한 번도 내 말을 끊지 않고 그 자리에서 경청했다.
“확실히 제가 생각하던 것 이상을 해주셨군요.”
“운이 좋았습니다.”
“운도 실력이라는 말이 있지요. 아무튼, 정말 고생하셨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이번 상행에 대해서 대가를 지급하도록 하겠습니다.”
뭐, 그 부분은 굳이 내가 모양 빠지게 얼마 줘 얼마 줘 하지 않아도 탈다스가 알아서 잘 지급할 것이다. 그로서도 고작 돈 몇 푼 때문에 나와 척지고 싶지는 않을 테니까.
“아, 상단장님. 그리고 혹시 별다른 일이 없다면 2주 정도만 쉬어도 되겠습니까?”
“2주라… 그 정도면 상관없습니다. 휴식 중에 원하시는 게 있다면 손 닿는 선에서 최대한 지원해드리겠습니다.”
사실 나야 별로 고생한 게 없었지만, 현장에서 직접 업무를 뛴 수하들의 사기가 많이 떨어졌기에 이를 다시 끌어올리기 위해선 시간이 필요했다.
거기에 레이븐 용병단에서 날 제외하면 최강의 전력인 힐데가 정화 교단에 볼일이 있다고 했기에 강제로 2주 정도 쉬어야 했다.
확실히, 이런 부분이 힐데를 동료로 삼기에 문제가 되는 부분이었다. 이랬거나 저랬거나 힐데가르트에게 최우선 순위는 플레이어보다는 종교였으니까.
인게임에서 대규모 전투를 앞두고 갑자기 볼일이 있다고 휑하니 가버리면 플레이어로서는 복장이 터지지 않겠는가.
물론 지금의 힐데에게 내가 가지 말라고 바닥에 드러누워 떼를 쓰면 들어주긴 할 테지만, 굳이 이런 일로 호감도를 까먹고 싶지는 않다.
“아, 그리고 상단장님. 쉬는 동안 노바라의 뒷골목을 좀 정리하고 싶습니다.”
“음… 굳이 그러실 필요가 있습니까?”
탈다스는 눈살을 찌푸리며 탐탁잖은 표정을 지었다. 그도 그럴 게 탈다스에게 있어서 뒷골목은 길거리에 떨어져 있는 쓰레기와 같았다.
쓰레기가 자기 집 안에 떨어져 있다면야 당연히 무슨 수를 써서라도 치우겠지만, 길거리에 있는 쓰레기를 굳이 나서서 치워야 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거기에 길바닥 인생이 다 그렇겠지만, 잃을 게 없는 놈들이라 괜히 들쑤시고 싶지 않다는 생각도 한몫했을 테고.
“꼭 필요한 일이라서 그렇습니다.”
“음… 용병단장님께서 하시겠다니 말리지는 않겠습니다만, 이 일로 인해 불이익을 당해도 상단에서 도와드릴 수는 없습니다.”
물론 그것과는 별도로 불미스러운 일이 생기면 싸잡아서 상단도 묶일 수 있으니 그의 입장에선 최대한 하지 말라고 하고 싶겠지만, 나와의 관계를 고려해 저렇게 얘기하는 게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대답일 것이다.
“레비아탄에 민폐를 끼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까지 얘기하시니 믿어드려야지요.”
사실 내가 뒷골목을 정리하려는 건 단순히 정보를 얻기 위해서다. 물론 뒷골목이나 선술집에 떠도는 소문이 대부분 그렇듯 헛소문에 쓸모없는 것들이었지만, 그래도 거르고 거르다 보면 하나둘 정도는 쓸만한 소문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른바 질보다 양인 셈이다.
사실 힐데를 데리고 다니면 순식간에 정리할 수 있을 테지만, 그녀는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너무 눈에 띄었기에 그녀가 없는 틈을 타서 일을 처리하기로 했다.
혼자라도 상관없는 게 뒷골목 떨거지들이 가지고 다니는 무기는 기껏해야 조그만 단도에 불과했고 그런 하찮은 무기로는 내가 입고 있는 갑옷에 흠집조차 낼 수 없었다.
거기에 약자멸시와 양민학살은 도적보다 뒷골목의 부랑아나 깡패들한테 극한의 효율을 보여주는 특성이었기에 지금의 나는 말 그대로 일당백도 가능했다.
“일주일이면 떡을 치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