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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바이킹이 되었다-9화 (9/205)

▣ 009화

“허, 그것참 골치 아픈 상황이군요.”

전혀 몰랐다는 내 반응에 징수관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혹시 모르고 있었나? 레비아탄 상단의 내분은 꽤 유명한 얘긴데?”

“아무래도 친구인 제게 그런 일을 말할 수는 없었겠지요. 오히려 친해서 얘기하고 싶지 않은 일들이 있지 않습니까?”

물론 탈다스의 경우 그런 게 아니라 내게 자신의 약점을 숨기고 싶었을 것이다. 그도 아니면 내가 시키는 일만 하는지, 아니면 그 이상을 해낼 수 있는지를 시험하는 걸 수도 있겠고.

애초에 나를 징수관에게 붙인 것도 단순히 뇌물 몇 푼 못 뜯어내게 하려는 게 아니라 내 힘으로 어디까지 알아낼 수 있는가를 확인하기 위함일지도 모른다.

“하긴, 자네 말이 맞겠군. 어차피 며칠만 지나도 알게 될 일이니 굳이 자기 입으로 말하고 싶지 않았겠지.”

“그나저나 여동생이라… 확실히 머리만 바꾼다면 영주님 입장에서는 말 잘 듣는 상단을 손아귀에 넣을 수 있고 여동생으로서는 잃어버렸던 자신의 것을 되찾을 수 있으니 쌍방간에 윈―윈이겠군요.”

“그런 셈이지. 사실 원칙만 지켜도 상단 입장에서는 번거롭지 않겠나. 이번에 그랬던 것처럼 오가는 물건을 전부 확인하기만 해도 손해가 막심하지.”

사실 말이 좋아서 원칙이지 세상을 살아가면서 모든 규정과 규율을 100% 지키면서 살아가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다만 영주 입장에서 이를 들먹이며 상단을 압박하면 상단 입장에선 할 말이 없다. 원칙과 법대로 하겠다는데 거기가 대고 뭐라고 항의할 수 있겠는가?

“반면 그 여동생의 추종세력에겐 검문은커녕 오히려 편의를 봐주며 밀어주니 탈다스 상단장에 대한 신뢰가 흔들릴 수밖에 없는 거지.”

현대라면 정경유착이라고 지탄받을 일이지만 여기는 중세고 영주가 곧 법인 시대다. 그게 꼬우면 영주를 끌어내려야 하는데 이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뭣보다 명분이 없기도 하고.

“확실히 탈다스 입장에서는 일이 제대로 꼬인 셈이군요.”

“판단은 자네 몫이겠지만 내 말을 가볍게 넘겨듣지는 말게나.”

“배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처럼 징수관과 친밀하게 붙어 지내다 보니 상단장이 내게 얘기해주지 않았던, 어쩌면 얘기해 줄 수 없었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다만 징수관이 내게 이런 얘기를 해주는 건 순수한 호의도 있겠지만, 현실을 적나라하게 얘기함으로써 내가 떠나기를 바라고 있을 것이다.

영주 입장에서는 자신의 계획에 차질을 빚을 수 있는 나라는 변수를 미리 통제하거나 없애고 싶을 테니까. 아마 눈앞에 있는 세금 징수관도 위에서 듣고 온 얘기가 있을 테지만 난 이대로 도망칠 생각은 없다.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 지금 레비아탄의 상황은 딱 그러했다. 이번 일만 잘 처리하면 나는 레비아탄의 2인자로 올라설 수도 있는데 이런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순 없지 않은가.

아무튼, 그 뒤로도 나는 징수관의 곁에서 가려운 곳을 살살 긁어주며 그의 비위를 맞춰주었고 그런 날 보며 힐데가 비웃음을 한가득 담아 한마디 툭 건넸다.

“단장님이 그렇게 아부를 잘하는 줄은 몰랐군요.”

“무식한 야만인이 살아남으려면 머리도 써야 하는 법이지.”

“자칭 아내에게 일을 다 떠맡기고 말입니까? 이런 걸 셔터맨이라고 하던가요?”

나름대로 쿨하게 대꾸했지만 힐데는 어림도 없다는 듯 받아쳤다. 결국, 아쉬운 건 나였으므로 나는 얼굴 한가득 미소를 담아 그녀에게 부탁했다.

“부탁 좀 할게. 이런 부탁할 수 있는 게 너밖에 없는 거 알잖아.”

“당신의 그런 막무가내에 무책임한 부탁을 거절 못 하는 걸 보면 저도 참 쉬운 여자인 것 같군요. 뭐 좋습니다. 애초에 당신의 뒤치다꺼리를 하는 건 익숙해져 있으니까요.”

확실히 툴툴대면서도 내 부탁을 전부 들어주는 걸 보면 틀린 말은 아니다. 평상시 게임 속에서 까탈스럽고 깐깐하면서 원리원칙만 지키는 모습밖에 못 봤었는데 솔직히 좀 의외다.

문제는 힐데가 라그나르에게만 저런다는 점이었는데 실제로 징수관이나 다른 이들과 만날 때는 지극히 사무적인 모습만 보여주고 있었다.

이쯤 되면 진짜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하긴 하다. 다만 과거를 캐묻다가 지뢰를 밟으면 힐데의 호감도를 떨구는 데 그치지 않고 용병단을 나가는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기에 나중에 차근차근 알아볼 생각이다.

원래 기계도 그렇고 사람 간의 관계도 그렇고 멀쩡한데 괜히 나서서 씹고 뜯고 맛보고 하다가 박살 나는 경우가 태반이지 않던가. 그 때문에 내가 무슨 짓을 해도 힐데가 나간다는 확신이 생기지 않는 한 현 상태를 유지할 생각이다.

“아무튼, 라그나르. 현 상황을 타개할 방법은 확실히 있겠지요?”

“물론이지. 내가 지금까지 실패했던 적이 있었나?”

내 말에 힐데의 눈이 가늘어지며 날 쳐다보는 눈초리가 미묘해졌다. 아마, 과거의 라그나르는 업무에 관해서는 꽤 신뢰받지 못했던 모양이다.

“당신이 그렇게까지 얘기하니 믿고 기다리겠습니다.”

“그래. 조금만 더 고생해줘.”

낭중지추라고 굳이 자기 PR을 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지 않아도 알아서 내 능력을 드러낼 때가 다가올 것이다. 그리고 그 기회는 내 생각보다 더 빠르게 다가왔다.

“안녕하신가 친구들.”

약방의 감초. 산길에서 안 보이면 오히려 불안한 놈들. 엠디모의 잡몹 담당. 그 이름도 찬란한 날강도 산도적 놈들이 마침내 모습을 드러냈다.

다만 평상시 그 숫자가 많아야 열댓 명이었던 거에 비해서 지금 우리의 앞에 모습을 드러낸 놈들은 거진 칠십 명에 육박하고 있었다.

어쩐지. 이곳까지 오면서 산적 놈들이 하나도 안 보이더라니 이렇게 다 모여있었나 보군. 물론 나로서는 떨거지들이 한 번에 모여있으니 처리하기 편해서 좋다.

약자멸시와 양민학살 특성에 제대로 된 정예 병력들이 뒤에서 날 받쳐주는 한 지고 싶어도 질 수가 없다. 반면 세금 징수관은 적의 숫자에 겁을 집어먹은 모양이다.

“브, 블라디미르. 괜찮겠나? 차라리 통행료를 내는 게….”

“괜찮습니다. 징수관님. 뒤에서 연극이라도 본다 생각하시고 느긋하게 구경하다 보시면 다 끝날 겁니다.”

나는 도끼를 어깨에 걸친 채 세 발자국 정도 걸어 나가 산적들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대낮부터 도적놈들이 무리 지어서 거리를 활보하다니, 간이 배 밖으로 나왔군. 그래. 우리를 불러세운 목적이 뭐지?”

“돈 또는 너희의 목숨.”

“오. 그래. 그 대사가 왜 안 나오나 했지.”

도적들의 시그니처와도 같은 대사를 들으며 나는 키득거렸다. 이제 곧 사람을 죽일 건데도 웃는 걸 보면 나도 어지간히 미친놈이지만, 솔직히 이젠 무덤덤하다.

난 당연히 돈을 줄 생각도 없었고 오히려 저놈들을 죽일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기에 협상은 결렬이었지만 혹시나 몰라서 물어봤다.

“가진 돈은 물론이고 입고 있는 옷까지 다 벗고 도망치면 목숨은 살려주지.”

“말보단 행동이지.”

하지만 도적의 우두머리는 들을 가치도 없다는 듯 일축했고 나 역시 동감하는 바였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힐데에게 명령했다.

“동감이야. 힐데. 저 가엾은 자들에게 마지막 기도나 올려다오.”

내 말이 떨어지자마자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 모닝스타와 방패를 꺼내 들고 살기 어린 목소리로 기도문을 읊조렸다.

“신이시여. 모시는 신은 다르지만 정의롭고 신실한 이가 정화 교단의 이름으로 이단자들을 단죄할 힘을 원하니 부디 그를 굽어살피소서.”

“그에게 정화자의 은총이 깃들기를 간절히 염원하나니, 오늘 적들은 죽음으로서 그 죄를 정화하게 될 것입니다.”

그녀의 기도가 끝나자마자 내 몸에서 신성력이 넘실거리더니 이내 그녀의 버프가 몸에 새겨지기 시작했다.

― 신의 가호가 라그나르의 몸에 깃듭니다.

― 무기에 정화자의 불길이 깃듭니다.

받을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그녀의 버프는 다른 버프들과 궤를 달리한다. 게임을 플레이하며 수많은 신을 섬기는 사제들의 버프를 받아봤는데 단연코 힐데만큼 전투에 특화된 버프를 걸어주는 사제는 없었다.

아마 스탯창이 보이지는 않지만, 거진 두 배 정도는 올랐을 것이다. 더 무서운 건 힐데가르트의 버프가 대인이 아니라 군대를 상대로 특화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실제로 다른 동료 다 버리고 힐데 원툴로 밀고 나가는 공략법도 있을 정도였다. 물론 허점도 많고 공략에 애로사항도 많았지만, 그 정도로 힐데의 능력이 십사기라는 뜻이었다.

“저, 정화 교단….”

“으으….”

정화 교단의 악명이 꽤 자자했는지 힐데의 방패에 새겨진 정화 교단의 문장을 본 도적들은 겁을 집어먹고 주춤거리는 모양새였다. 로그로 뜬 건 아니지만, 적들의 사기가 저하되고 있다고 판단한 나는 곧장 징수관을 향해 소리쳤다.

“징수관님. 공격명령을 내려주십시오.”

사실 내 임의로 돌격명령을 내려도 상관없었지만, 어쨌거나 이곳의 총책임자는 징수관이었다. 괜히 내가 먼저 멋대로 나서서 미운털 박힐 필요는 없잖은가.

“어? 아아. 크흠. 모두 도적들을 소탕하라!!”

징수관의 공격명령에 나는 가장 앞장서서 두 자루의 도끼를 들고 포효하며 적들을 향해 달려나갔다. 강철로 된 도끼날은 변변찮은 방어구도 없는 도적들의 살을 가르고 뼈를 부쉈다.

적들의 피가 전장에 흩뿌려질수록 내 몸은 붉게 물들었고 비릿한 혈향이 향수처럼 내 몸에 끈적하게 달라붙을 때쯤 전투는 끝났다.

사실, 전투라고 부르기도 어려운 게 아군의 피해는 전무했지만, 적들은 제대로 된 저항 한 번 못해보고 그 자리에서 진압당했다.

그러자 일부는 전투 의지를 잃어버린 채 뒤도 보지 않고 도망쳤으며, 몇몇은 동료들이 순식간에 죽어 나가자 그 즉시 무기를 내려놓으며 항복했다.

“오랜만에 땀을 흘리니까 좋군.”

“확실히 가끔은 몸을 움직여 주는 것도 나쁘지 않군요.”

내가 도끼에 묻은 피를 털며 얘기하자 힐데는 동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을 죽이고 나서 할 만한 얘기는 아니었지만, 시대가 이런 것을 어쩌겠는가.

이 모든 게 나와 힐데에게는 익숙한 광경이었지만 징수관에게는 아니었는지 그는 허겁지겁 내게 다가와 피가 묻어서 끈적거리는 손을 붙잡고 어린아이처럼 흥분한 얼굴로 얘기했다.

“하… 하하하. 자네 대단하구만! 정말 대단해!”

“하찮은 재주일 뿐입니다.”

“하찮다니! 고작 10분도 안 걸리는 시간에 저들을 전부 때려눕히지 않았던가. 내 자네의 모습에서 두 눈을 뗄 수가 없었다네. 자네의 모습은 꼭 옛이야기에 나오는 영웅을 보는 것 같았다네.”

“과찬이십니다. 그 전에 몸을 좀 닦아도 되겠습니까? 아무래도 이대로 피가 굳으면 정비가 힘들어지는지라….”

“오오, 물론이지. 뭣들 하는가!? 서둘러 물과 기름, 타월을 가져와라!”

그의 어린아이처럼 빛나는 눈을 보고 있자니 나는 내 작전이 먹혔음을 깨달았다. 사실 도적놈들 때려잡는 데 굳이 내가 나설 필요는 없었다.

오히려 지금의 내게 도적들은 변변찮은 경험치도 안 되는, 말 그대로 잡몹에 불과한 데다 산적만 조지면 강약약강 특성이 붙어서 노답이 되어버린다. 특성이라는 게 꼭 좋은 것만 있는 건 아니지 않던가.

그 때문에 내가 직접 나서기보단 후방에서 병력들을 지휘 및 지원하면서 싸우는 게 경험치 분배 측면에서 이득이었지만, 이번에 내가 직접 나선 건 징수관을 의식했기 때문이었다.

그도 그럴 게 상행을 나서기 전 탈다스가 가져온 문서에는 징수관에 대한 인적사항도 적혀있었는데 그곳에는 징수관이 용병이나 기사에 대한 동경을 가지고 있다고 적혀 있었다.

물론 그 동경은 본인이 기사가 되고 싶다는 얘기가 아니라 도시에 사는 사람이 귀농을 그리워하는 것과 같은 의미였다.

실제로 귀농을 그리워하는 사람 중 실제로 귀농을 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아마 징수관 역시 그런 영웅담과 피를 끓게 만드는 이야기를 좋아하는 것에 불과하겠지.

하지만 효과는 확실했는데 징수관 앞에서 내가 보여준 압도적인 힘과 퍼포먼스는 그를 매료시키기에 충분했고, 징수관은 이전보다 더 살갑게 나를 대했다.

내 경험으로 미루어 볼 때 NPC가 이 정도로 호의를 보인다는 건 꽤 강한 신뢰의 표시였다.

“이 정도면 이제 통수 맞을 일은 없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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