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07화
“물론입니다. 헤어질 때 제게 깜짝 파티를 해주신다고 하셨었는데, 이런 식으로 선물을 주실 줄은 몰랐군요.”
“마음에 드셨다니 다행입니다.”
“일단 귀빈실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오랜 여행으로 여독이 풀리지 않으셨을 텐데 쉬고 계시면 하던 일을 마무리 짓고 찾아뵙겠습니다.”
나는 상단장의 호의를 받아들였고 힐데와 함께 귀빈실로 안내되었다. 아무래도 당분간은 힐데와 부부인 척해야 하기에 따로 방을 달라 하기도 애매했고 그녀 역시 그걸 이해했는지 별말이 없었다.
“역시 부자라서 그런가 고풍스러운데? 안 그래 힐데?”
“쓸데없는 돈 지랄입니다. 그것보다 라그나르. 당신이 말한 선물이라는 게 무슨 뜻입니까?”
그녀는 침대 한구석에 걸터앉으며 무표정한 얼굴로 물었고 나는 들고 있던 도자기를 내려놓고 맞은편 의자에 앉으며 간단하게 대답했다.
“선물이 선물이지 뭐가 또 있겠어.”
“그런 뜻으로 물은 게 아니잖습니까.”
역시 아직 성녀가 되기 전이라서 그런가 이런 미묘한 사안 같은 건 잘 모르는 눈치다. 하긴, 성녀가 되기 이전의 그녀는 정치와 모략 같은 거랑은 담을 쌓고 지내왔을 테니 모르는 것도 이해는 간다.
“잘 생각해봐 힐데. 내가 왜 굳이 귀족을 사칭했을까? 귀족을 사칭한다고 내가 귀족이 되는 것도 아닌데.”
“글쎄요… 처음에는 되지도 않는 허세를 부리고 싶은 게 아닐까 했습니다만… 상단장의 반응을 보니 그런 것만도 아니더군요.”
여전히 감을 못 잡는 모양새였기에 나는 차근차근 설명해주기로 했다.
“힐데. 세간에서 나에 대한 인식이 어떻지?”
“단장에 대한 인식 말입니까?”
“그래.”
그녀는 내 물음에 잠시 고민하더니 가감 없이 얘기했다.
“천박하고 무례하며 품위라고는 눈 씻고 찾아보려고 해도 찾아볼 수 없으며 여자만 보면 눈이 돌아가는 색욕의 화신이자 무식한 야만인 용병대장이 아닐까요?”
뭔가 사적인 의견이 굉장히 많이 들어가 있는 것 같지만 나는 애써 무시한 채 대꾸했다.
“그런 내가 신성 제국의 황제랑 알고 지낸다면?”
그 말에 그녀는 눈을 찌푸리고 잠시 고민하더니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이전과 다른 평가가 내려지겠군요. 귀족을 사칭한 것도 이것과 비슷한 맥락입니까?”
난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나는 이곳의 통치자는 물론이고 다른 모든 이들에게 탈다스가 귀족과 연을 맺고 있다는 걸 보여주려 한 것이다.
물론 당연히 중소 상단의 장인 만큼 진짜배기 귀족과도 인연이 있을 테지만 인맥은 많을수록 좋지 않던가.
현실에서도 누군가가 국회의원이나 판검사와 친분이 있다고 하면 보는 눈이 달라지지 않던가. 특히나 상인인 탈다스에게는 이러한 인맥들이 곧 힘이고 재산이다. 귀족 사칭은 거기에 내가 한 팔 더 보태준 거고.
“놀랍군요. 진심으로 감탄했습니다. 이전에는 모든 걸 힘으로 해결하려 들지 않았습니까.”
“사람은 늘 발전하는 동물이지.”
“인정합니다. 요사이 갑자기 사람이 바뀌어서 죽을 때가 다 된 건가 싶었는데 이전에 비하면 이게 오히려 더 낫군요.”
“새삼 반했나? 부부를 칭하고 있는 지금은 내게 안겨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을 텐데?”
내가 양팔을 벌리며 장난스럽게 얘기했지만, 거기에 돌아온 건 엄격함과 진지함, 근엄함이 담겨있는 딱딱한 대답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그 천박한 말투와 행동은 절대 고쳐지지 않을 것 같군요. 장담하건대 그 품위 없는 말투를 고치지 않는 한 진짜 귀족이 되기는 요원해 보이는군요.”
말을 마친 그녀는 한마디 더 덧붙였다.
“뭐, 그래도 이제야 본래 성격대로 돌아온 것 같아서 오히려 마음이 놓일 정도입니다. 당신은 언제나 그렇게 천박하고 오만하며 자신감 넘치는 모습이 어울리니까요.”
보기에는 쌀쌀맞게 대답하는 것 같지만 난 이게 힐데 특유의 말투라는 걸 알고 있다. 그녀와 몇 달 동안 같이 지내다 보니 대강 알게 된 건데 적어도 그녀는 나에 대해서 무한한 신뢰를 가지고 있다.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말이다.
거기에 행복 회로처럼 보이겠지만, 실제로 반하지 않았다고는 한마디도 안 하지 않았나. 이걸 가지고 조금 더 그녀를 놀려볼까 하던 찰나 노크 소리와 함께 탈다스 상단장이 안으로 들어왔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단장님.”
“괜찮습니다. 오히려 이쪽에서 갑자기 찾아왔는데 이리 환대해주시니 감사할 따름이지요.”
“아무튼, 딱 좋을 때 와주셨습니다. 안 그래도 손이 많이 모자랐는데 덕분에 살았습니다.”
그는 잔뜩 피곤이 찌든 얼굴로 가져온 서류를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일단 이건 약속드린 증서입니다. 정확히 상단의 지분 5%이며 처분을 원하신다면 시세 가에 맞게 바로 처분해드리겠습니다. 현금이 아닌 물자로 가져가신다면 시세가에 10%를 더 쳐 드리겠습니다.”
글을 배우기는 했다고 해도 여전히 읽는 건 버거웠고 계약서라는 건 아 다르고 어 다른 법이다. 나는 서류를 슬쩍 힐데에게 내밀었고 그녀는 익숙한 듯 그것을 받아서 읽기 시작했다.
쓱 훑어본 그녀가 이상 없다는 뜻으로 서류를 내려놓자 나는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제가 이걸 파는 일은 없을 겁니다. 말했듯 저는 레비아탄 상단과 함께 커가고 싶으니까요.”
“그 말씀만으로도 든든하군요.”
“아무튼, 이런저런 시키실 일이 많으실 텐데 뭐라도 시켜주십시오. 뭘 시키든 완벽하게 처리해서 상단장님께 저 자신을 증명해 보이겠습니다.”
좋을 대로 부려 먹으라는 내 말에 탈다스는 이채를 띠며 미소 지었다.
“아주 시원시원해서 좋군요. 단장님이라면 그렇게 말씀하실 거라 믿고 있었습니다.”
그 말과 함께 그는 품속에서 서류 두 장을 꺼내 내게 내밀었다.
“이건 저희 상단이 취급하는 물자와 주로 사용하는 교역로를 간추려놓은 것입니다. 익혀두신다면 업무에 도움이 되실 겁니다.”
“알겠습니다. 시간 날 때마다 봐두도록 하지요.”
물론 익히는 건 내가 아니라 힐데가 될 것이다. 짬처리가 아니라 상단의 교역로 정도야 다 내 머릿속에 정리되어 있다. 물론 랜덤변수라는 요소가 있긴 하지만 상단이 제정신이라면 정비된 가도로 다니지 산길을 뚫고 다닐 리가 없잖은가.
“그리고 이건… 단장님께 드릴 의뢰입니다.”
상단장의 말에 힐데는 뭔가 할 말이 있는듯한 얼굴이었지만 내가 입을 다물고 조용히 있자 얌전히 서류만 훑어보고 있었다.
“마음 같아선 며칠 쉬게 해드리고 싶지만, 부탁 좀 드리겠습니다.”
“제가 아니면 처리하기가 조금 곤란한 일인가 보군요.”
“그렇습니다. 아실지 모르겠지만, 저희는 3개월에 한 번씩 노바라의 영지 내에 있는 마을들을 순회하며 물품을 팔고 있습니다.”
“소규모 마을들을 상대로 장사한다는 말입니까? 별로 돈이 안 될 텐데요?”
당연한 얘기겠지만, 물품을 운반하는 건 공짜가 아니다. 아무리 수요가 있다지만 운반비가 더 드는 곳으로 물건을 팔러 다닐 수는 없는 노릇 아니던가.
쉽게 말해서 수요가 꾸준하다지만 인구 1만짜리 마을 여러 곳에 택배 배달하는 것보다 인구 100만이 거주하는 도시에서 택배 회사 운영하는 게 더 돈을 많이 번다는 얘기다.
“그건 그렇습니다만 작은 마을에서는 자체적으로 생산해내는 물건 이외에는 물건을 구하기도 힘들고, 특산품이라고 해도 많은 양을 생산하는 게 아니고 산적들 때문에 운송 자체가 힘들지 않습니까?”
“그게 상단장님께서 자선 사업을 하는 이유는 아닐 텐데요.”
상인은 이익을 추구하는 집단이다. 물론 사람인 이상 기부도 하고 자선 사업을 할 수도 있지만, 그것도 자기가 감당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해야 하는 법이다.
“그게 이곳에 자리 잡으면서 부여받은 의무였습니다. 물론 그 대가로 이런저런 혜택과 일부 품목에 면세 특권을 받긴 했지만요.”
말만 들어보면 별문제 없어 보이는 게 이는 현대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위탁과 같은 형태였다. 하지만 단순히 그것뿐이라면 상단장이 굳이 내게 와서 아쉬운 소리를 할 리가 없지.
“그 과정에서 문제가 생겼군요.”
“예. 아무래도 영지 곳곳을 돌아다녀야 하는 만큼 저희 단독으로 상행하는 건 무리인지라 노바라의 세금 징수관과 함께 행동하고 있습니다. 저희 쪽에서 호위병력 절반, 그쪽에서 호위병력 절반. 그리고 운송 비용은 이쪽에서 전부 다 대고 있고요.”
“세금 징수관 놈이 문제군요.”
“그렇습니다. 대놓고 저희에게 돈을 요구하는데 이게 물리치기가 굉장히 난감합니다. 안 그래도 이 짓 자체가 적자인데 저렇게 돈까지 뜯어가니 손해가 막심합니다.”
“영주…도 한통속인가 보군요.”
내 말에 탈다스는 힘없이 미소 지었고 나는 대강 사정을 짐작했다. 아무래도 레비아탄 상단은 내외적으로 꽤 힘든 시기를 겪고 있는 것 같다. 물론 그럴수록 내가 얻게 되는 입지와 보상은 더 커질 테지만.
“그래서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단 하나입니다. 귀족이신 단장님께서 적당한 선에서 상납을 커버해주십시오. 아예 한 푼도 주지 말라는 건 아니지만, 비용 절감을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는 내게 다 맡긴다는 듯한 말투였고 나는 은연중에 그가 나를 시험하는 것임을 깨달았다. 얼마나 비용을 절감하는지, 얼마나 세금 징수관과의 관계를 깎아 먹지 않는지 등등을 확인해보는 거겠지.
“쉬운듯하면서도 어려운 일이군요. 좋습니다. 상대에 대한 정보와 상단장께서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내어주십시오.”
“감사합니다. 그리고 호위 병력은 이쪽에서 지원해드리고 싶지만, 이전에 입은 피해가 아직 복구되지 않았습니다. 해서 이번 임무를 성공적으로 완수해주신다면 따로 보수를 챙겨드리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어려운 이야기가 끝나자 그는 나와 힐데를 저녁 식사에 초대했고 식사를 마친 뒤에는 삼 일간의 휴식을 부여받았다.
물론, 나도 그렇고 힐데도 그렇고 첫 의뢰이니만큼 허투루 처리할 생각은 없었고 사흘 내내 방에 틀어박혀서 상대에 대한 정보를 파악하는 데 시간을 쏟아부었다.
그렇게 사흘간의 시간이 지난 뒤 나는 힐데를 비롯한 휘하의 병력과 운반할 물자, 그리고 스바치치 가문을 뜻하는 포효하는 사자의 깃발을 내건 채 약속장소로 향했다.
실제로 스바치치 가문의 삼남인 블라디미르 스바치치는 용병 일을 하고 있기에 본인을 데려오거나 지인을 데려오지 않는 이상 들통 날 일은 없을 것이다. 들킬 때쯤에는 일을 마무리 지어놓을 테니 별문제 없을 테고.
약속 장소에는 이미 영주의 호위 병력과 세금 징수관이 먼저 와서 대기하고 있었는데, 우리가 약속 시각보다 30분이나 일찍 온 걸 생각해 보면 저들이 저렇게 빨리 온 이유는 너무나 명확했다.
뭐, 단순히 열정이 넘쳐서 미리 도착한 거라면 기특하다고 엉덩이라도 두들겨 줄 테지만 저렇게 얼굴에 심통과 심술이 덕지덕지 붙어있는 걸 보면 이걸 트집 삼아 내게 지랄을 하고 기선을 제압하기 위함이 틀림없었다.
물론, 굳이 최악의 첫인상을 만들 필요는 없었고 상대의 술수가 너무 뻔했기에 나는 먼저 선공을 치고 나가기로 했다.
“약속된 시간보다 훨씬 더 빨리 나와 계시다니. 귀하의 부지런함에 감탄했습니다. 본인은 스바치치 가문의 삼남. 블라디미르 스바치치라고 합니다.”
내가 약속 시각에 늦지 않았다는 걸 강조하며 웃는 낯으로 손을 내밀자 세금 징수관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내 손을 마주 잡으며 대꾸했다.
“만나서 반갑소. 본인은 노바라의 세금 징수관. 펠릭스 폰 가르옌이라고 하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