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06화
마차를 타고 이동하는 건 정말 재미가 없었다. 게임에서야 로딩 중이라는 창 하나로 해결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도로는 제대로 정비가 안 됐는지 상태가 영 별로였으며 마차의 덜컹거림은 멀미를 유발했고 창밖의 풍경은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사실, 굳이 여기서부터 마차를 탈 이유는 없지만 어느 정도 습관을 들이기 위해서다. 귀족 사칭을 하려면 최소한 귀족의 품위는 가지고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불편해도 이런 것들을 무의식중에 몸에 배게 만들어야 한다.
그 때문에 나는 시간을 때울 것을 찾아야 했고 마차 안을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며 둘러보다가 힐데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마차의 벽에 기대서 자고 있었는데 이런 불편함에도 잘도 자는 걸 보면 대단하다는 말밖에 안 나온다.
이윽고 내 시선은 그녀의 옆에 놓여 있는 책에 닿았는데 근래 들어 그녀는 시간이 날 때마다 저 책을 읽고 있었다. 지금 졸고 있는 것도 어제 밤새 저 책을 읽다가 그랬던 것 같은데 왠지 모르게 호기심이 일었다.
“음….”
난 작게 헛기침하며 힐데가 깨어나지 않나를 살폈고 그녀에게서 별다른 반응이 없자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며 조심스럽게 책을 가져왔다.
역시나 내 눈에는 온통 깨져있는 문자들로 보였고 나는 머릿속의 기억을 떠올리며 암호를 해석하듯 천천히 글을 읽어나갔다.
“에… 타르한… 아니 르가 아니라 락이었나?”
이 게임을 처음 했을 때야 내가 직접 하나하나 번역을 했다지만 나중에 가면 이것도 귀찮아져서 자동 번역을 해주는 패치툴을 받아서 썼기에 실력이 상당히 녹슬어 있었고 나는 떠듬떠듬 읽을 수밖에 없었다.
“이건 수고 이거는 넌? 아니… 녀 같은데.”
아무래도 사제인 힐데가르트가 읽는 책이라서 그런지 사용된 글자들이 자주 쓰거나 쉬워 보이는 글자들은 아닌 것 같다. 그야 일반적으로 자주 쓰는 글자들이라면 아무리 녹이 슬어도 술술 읽을 테지만 잘 안 쓰는 글자들은 나도 읽기가 힘들다.
“타락한 노르…드… 수녀?”
탁!
“어?”
갑작스레 책이 눈앞에서 사라지고 대신 언제 깼는지 살짝 상기된 표정의 힐데가 나를 매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봤습니까?”
“어… 어어?”
그 눈빛이 워낙 살벌해서 난 제대로 된 대꾸도 못 하고 어버버 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책의 내용을 봤냐고 물어보고 있는 겁니다.”
“아니, 그… 난 봐도 모르는 까막눈이잖아.”
내 말에 힐데는 안심한 듯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군요… 아무튼 남의 책을 허락도 없이 마음대로 읽진 말아 주십시오.”
“미안해. 그냥 심심해서 뭐라도 보고 싶어서 그랬어.”
난 미안한 척 얘기를 하면서도 정신이 없었다. 왜냐면 내가 알기로 저 책은 적발의 신실한 수녀가 금발 태닝남에게 능욕당하면서 타락 조교 당하는 내용이었으니까.
하지만 난 굳이 내색하지 않고 모른 척 넘어가기로 했다. 그야, 사람의 취향은 존중해줘야 마땅하지 않겠는가?
물론 성격 더럽고 냉혹하기로 소문났으며 신에 대한 믿음 하나는 신실하기로 소문난 힐데가르트가 저런 책을 읽는다는 사실은 꽤 의외였지만 말이다.
“심심하시면 자기 수양이라도 하는 게 어떻습니까?”
자기 수양. 자기 수양이라… 그러고 보니 통상 이 게임에서 글을 배울 때는 수도원에서 배우거나 사제, 수녀들에게 배우는데 마침, 내 앞에는 그 당사자가 떡하니 앉아있었다.
“그럼 네가 글이나 가르쳐 주는 게 어때?”
“글 말입니까?”
“왜?”
힐데가 묘한 표정으로 물었고 나는 찝찝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몇 달 전에도 제게 가르쳐 달라고 했다가 싫증 나서 때려치우지 않았습니까.”
몇 달 전이라고 해도 처음 이 게임 속으로 들어왔을 때 이전의 기억은 제대로 기억도 나지 않는 데다가 내가 직접 행한 일이 아니었기에 뭐라고 얘기하기가 난감했다.
“이번에는 다를 거야.”
“지난번에도 그렇게 얘기했던 건 기억 안 나십니까?”
“…….”
내가 아무 말도 못 하고 멋쩍은 표정을 짓고 있자 그녀는 한숨을 내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후… 좋습니다. 사실 저도 당신에게 언젠가는 글을 꼭 가르쳐야겠다고 다짐하고 있었습니다. 말이 나와서 하는 얘긴데 용병 계약을 할 때마다 절 대동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아무래도 그간 계약을 할 때마다 힐데를 데리고 갔던 모양이다. 원래 용병 계약은 다 계약서를 작성하는데 내가 글을 모르니 상대방이 무슨 장난질을 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내가 그만큼 너를 신뢰한다는 뜻이야. 네가 나를 배신할 리가 없잖아?”
“다른 건 모르지만 그 혀 놀림 하나는 볼 때마다 감탄스럽군요.”
본인이 글을 모르게 되면 대리인, 나 같은 경우 힐데를 전적으로 신뢰해야 하므로 용병 계약을 대리인을 통해서 한다는 건 무한한 신뢰의 표시와도 같았다.
“항상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
“고맙다는 얘기를 듣고 싶은 게 아닙니다. 이런 게 다 본인 위신이랑 명성을 깎아 먹는 일입니다. 전 당신이 남들 뒤에서 수군거리는 말이나 소문을 듣고 싶지 않습니다.”
“노력해볼게. 근데 교재는 거기 그 책으로 해도 될까?”
“이, 이것 말입니까?”
당당하게 얘기하던 힐데는 갑자기 드물게 말을 더듬었고 나는 그런 그녀의 표정을 보며 조금 놀려주고 싶어졌다.
“응. 그거.”
“이, 이건… 이건…… 안 됩니다.”
“왜? 왜 안 돼? 왜?”
내가 잔뜩 미소를 머금은 채 그녀를 놀리듯 묻자 힐데는 얼굴을 붉히며 필사적으로 변명했다.
“그건… 그… 난이도! 난이도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제 글을 막 접한 단장님에게는 다소 어려운 책입니다.”
“그럼 네가 그 글을 낭독해주는 건 어때?”
“…….”
그녀는 그제야 내가 놀리고 있다는 걸 깨달았는지 심통 난 표정으로 코트에 달린 후드를 푹 눌러쓴 채 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조금 더 놀려볼까 했지만 그랬다간 영영 삐칠지도 모르는 일이니 이쯤에서 그만두기로 했다.
물론 지금 상태로도 그녀의 화를 풀어주기 위해선 생각보다 많은 노력과 돈이 깨지겠지만, 그래도 힐데의 저런 얼굴을 봤으니 충분히 남는 장사가 아닐까?
* * *
그렇게 나는 마차 안에서 힐데가르트에게 글을 배우며 시간을 보냈고 글을 배운다는 행위를 하는 것 자체만으로 글이 조금씩 해석되어갔다.
가령 ‘힐데가르트’라는 단어가 ‘힐쀱가르굻’ 정도로 보인다고 해야 하나? 힐데가 워낙 잘 가르치기도 하고 실제로는 배운다는 행위와 시간만 들이면 배울 수 있기에 몇 달 안으로 공용어를 배우는 게 가능할 것이다.
“나머지는 시간 날 때 또 가르쳐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고생했어.”
“별말씀을. 그보다 여기가 노바라입니까? 처음 와보는데 생각보다 큰 도시군요.”
힐데가르트는 가볍게 기지개를 켜며 도시를 둘러보았고 나 역시 예상보다 큰 도시의 규모에 살짝 감탄했다.
물론 게임상에서야 몇 번이고 들렀던 도시지만, 그래도 눈앞에서 보는 것과 컴퓨터 화면을 통해서 보는 건 다르지 않던가.
“남부의 대도시인 밀라노보다는 아니지만, 노바라도 나름 큰 도시지.”
“눈으로 직접 보니 알겠습니다. 왜 굳이 밀라노가 아닌 노바라에 둥지를 틀었나 싶었었는데 이 정도면 충분히 본부를 둘 가치가 있군요.”
“그것도 그렇지만 이미 대도시인 밀라노에는 대형 상단들이 들어가 있거든. 낙수 효과를 바라고 조그마한 상단들이 들어가는 거라면 모를까 중형 상단인 레비아탄이 더 크려면 노바라 같은 중소 도시가 더 나아.”
“…….”
내 말에 힐데는 미간을 찌푸리며 미묘한 얼굴로 날 바라봤고 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물었다.
“왜?”
“아니요. 당신이 그런 것까지 알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조차 못 했습니다. 혹시 상단과 상행에 관해서 공부라도 따로 하신 겁니까?”
생각해보니 난 무식한 바이킹이었다. 글도 모르는 놈이 상행이 어떻고 저쩌고 떠들면 당연히 저런 눈초리로 보지 않겠는가.
“아… 아니, 그건 아니고 과거에 상단을 호위한 적이 몇 번 있었는데 그때 주워들었던 것들이야. 힐데 너도 알다시피 긴 상행을 하다 보면 지루하다 보니 이런저런 얘기들을 하게 되거든.”
“흐음… 확실히 그런 경험들을 무시할 순 없겠군요. 아무튼, 목적지인 노바라에 도착했는데 어떻게 하실 겁니까?”
다행히 급한 대로 내뱉은 변명이 그럴듯했는지 힐데는 고개를 끄덕이며 넘어가 주었다.
“어쩌기는, 우리가 죄지은 것도 아니고 당당하게 들어가면 그만이지.”
나는 병사들과 마차, 그 이외의 짐을 끌고 옆에서 심사를 받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을 지나쳐 병사들을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 귀족 특유의 오만하면서도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얘기했다.
“다들 고생하네. 노바라에 며칠 머물고자 찾아왔는데 들어가도 괜찮겠나?”
성문을 지키던 병사들은 이건 또 뭔가 하는 눈초리로 보다가 내 휘하의 무장한 병력들과 기품있어 보이는 옷을 두른 나와 힐데를 보고는 영업용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나으리. 다만 괜찮으시다면 나으리의 성함과 방문 목적, 체류 기간에 대해 말씀해주실 수 있으십니까?”
여기서 내가 실제 귀족이라면 콧방귀를 뀌면서 네놈들이 알 필요 없다고 호통치거나 고용한 시종이나 집사에게 모든 걸 맡겼겠지만, 알다시피 나는 귀족을 사칭 중이기에 최대한 소동을 일으키지 않고 넘어갈 생각이었다.
“본인은 스바치치 가문의 삼남. 블라디미르 스바치치라고 하네. 이곳에는 레비아탄 상단의 상단장이자 오랜 친우인 탈다스를 만나러 왔네만….”
내 말에 경비병들의 얼굴이 환해졌다. 레비아탄의 상단장은 꽤 이름 높은 인물이었고 그가 신원보증을 해준다면 굳이 귀족의 심기를 건드리며 이것저것 물어볼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알겠습니다. 나으리. 허면 저희가 레비아탄 상단으로 모셔다드리고 그곳에서 확인을 받아도 되겠습니까?”
“좋을 대로 하게.”
“모시겠습니다.”
경비병들은 우리를 인솔하며 레비아탄 상단으로 데려갔고 레비아탄의 본부는 생각보다 컸으며 활기가 가득 차 보였다. 정문을 지키던 상단의 인원은 따분한 표정을 짓고 있다가 경비병과 함께 오는 우리를 보고는 당황해 제지했다.
“무슨 일이십니까?”
“탈다스 상단장을 만나러 왔네. 겸사겸사 내 신원보증도 해줄 겸. 안에 있겠지?”
“그렇습니다만… 어떤 분이 찾아왔다고 말씀드릴까요?”
“스바치치 가문의 블라디미르가 왔다고 하면 알아들을 걸세. 그리고 이것도 함께.”
내가 상단장이 헤어질 때 준 패를 건네주며 얘기하자 상단원은 허겁지겁 안으로 들어가 탈다스 상단장을 데려왔다. 갑작스레 찾아온 귀족이라는 말에 이곳에 오는 탈다스 상단장의 얼굴에는 의심이 가득 차 있었지만 이내 내 얼굴을 보고는 놀람과 환희로 가득 찼다.
“라그….”
“하하하하하하! 오랜만이오. 탈다스 상단장. 지난번 연회 때 본 뒤로 대체 얼마 만이오?”
나는 그가 헛소리하기 전에 성큼성큼 다가가 그를 끌어안았다. 상인답게 눈치가 굉장히 빠른 그는 곧장 내 의도를 깨닫고 장단을 맞춰주었다.
“물론이오. 블라디미르. 미리 온다고 연통이라도 줬다면 내 그대를 마중 나갔을 텐데….”
“자네를 놀라게 하고 싶었으니까. 그보다 이 정도면 신원보증은 된 것 같네만….”
“물론입니다. 협조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블라디미르 경.”
경비병들은 내게 군례를 올린 뒤 다시 자신들의 근무지로 돌아갔고 나는 얼떨떨한 표정을 짓고 있는 탈다스를 향해 씨익 웃으며 물었다.
“제 선물은 마음에 들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