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05화
투자라는 얘기에 상단장은 순식간에 얼굴이 굳었지만 이내 빙긋 웃으며 날 떠보듯 가벼운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레비아탄 상단에 대한 투자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말한 그대로입니다. 무력이든, 돈이든, 뭐든 간에 탈다스 상단장 그대에게 투자하고 거기에 대한 배당을 받고 싶다는 얘기입니다.”
“무슨 말씀이신지 제가 잘….”
‘나는 아무것도 몰라요’라는 표정을 지은 채 헤실헤실 미소를 짓고 있는 상단장을 향해 나는 단호한 어투로 얘기했다.
“상단장 그대가 뭘 걱정하는지는 알고 있습니다. 내외부적으로 우환이 있는 상황에서 갑자기 조력자가 되고 싶다는 절 보면 의심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딱 좋은 타이밍에 적절히 쓸만한 상대가 호의적으로 다가온다? 바보도 의심할 게 뻔한데 영악하고 눈치가 빨라야 하는 상단의 장이라면 의심을 안 하는 게 이상한 일이다.
“하하, 의심이라기보다는….”
“하지만 저는 순수하게 그대에게 투자하고 싶습니다. 두 눈으로 보면 알겠지만, 저와 제 휘하 용병단 역시 상태가 썩 좋지 않습니다. 여기에서 도적들이나 잡고 있는 걸 보면 대충 감이 오지 않습니까?”
“…….”
내가 솔직하게 현 상황을 이야기하며 진심을 담아 이야기하자 상단장은 변명을 그만두고 입을 다문 채 나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전 가지고 있는 모든 기반을 잃은 상태고 그 때문에 다시 비상하기 위해서는 압도적인 돈이 필요합니다. 그대도 상단을 운영해봐서 알겠지만, 한 단체를 운영하는 데는 돈이 천문학적으로 많이 들지 않습니까?”
우리의 인생도 그렇지만, 게임 속에서도 돈은 언제나 중요하다. 모든 일을 돈으로 처리할 수는 없겠지만, 대부분의 일은 돈으로 처리하는 게 가능하고 돈이 있으면 안 될 일도 되게 할 수 있다.
그만큼 돈은 초반부터 후반까지 중요한 자원이고 지속적으로 안정적인 수입을 얻기 위한 방법이 몇 가지 있는데 그게 현실과 매우 흡사하다.
일단 스스로 공방을 운영하든가, 상단을 운영하든가, 아니면 땅을 사서 소작을 주는 방법이 있다. 아니면 지금의 나처럼 투자를 하고 그에 따른 배당을 받아갈 수도 있다.
그런 측면에서 너무 크지도, 너무 작지도 않은 레비아탄은 매우 좋은 투자처였다. 물론 아까 말한 알력 다툼이라는 게 거슬리지만, 추후에 내가 뒷배가 돼주거나 레비아탄의 덩치 자체가 커지면 해결될 문제다.
거기에 상단과 관계를 맺고 있으면 종종 상단 호위 퀘스트나 더러운 일에 손을 빌려주면서 짭짤한 보수를 기대할 수도 있기에 상단은 이래저래 실보단 득이 많은 거래 대상이다.
“즉, 저와 계약을 하고 싶다는 말씀이시군요.”
“계약이 껄끄럽다면 당분간은 일회성 거래를 하는 게 어떻습니까? 서로 원하는 게 맞는 것 같으니 거래 상대로는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피차간에 못 미더운 건 마찬가지니 시간을 들여 신뢰를 쌓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거래라는 말에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있던 탈다스가 두 눈을 빛내며 나를 바라보았다.
“거래라… 확실히 그건 솔깃하군요. 다만 그 전에 지금 하는 얘기와는 별개로 제 생명을 구해주신 데에 대한 보답으로 레비아탄 상단이 가진 전체 지분의 5%를 단장님께 드리겠습니다. 만약 지분 대신 돈으로 받기를 원하신다면 그에 해당하는 돈을 현금으로 지급해드리겠습니다.”
“제가 그 정도나 되는 지분을 가져도 경영권 방어가 가능하십니까?”
그는 내가 경영권이라는 개념에 대해 알자 놀란 눈치였다. 아무래도 무의식중에 나를 야만인으로 보고 있던 모양이었다. 하긴, 글도 모르는데 무식하다고 생각하는 건 당연한 거겠지.
“간신히 방어가 가능할 정도입니다. 물론 용병단장님께서 제가 아닌 다른 이를 지지하신다면 조금 힘들어지기야 하겠습니다만….”
안 그럴 거지? 라고 묻는 듯한 그를 보며 난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상단장님의 믿음을 배신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좋습니다. 아무튼, 계약에 관한 건 사안이 사안인 만큼 지금 당장 답해드리기는 힘들군요. 말씀하신 대로 일단은 거래부터 하시지요.”
“이해합니다. 한번 계약을 하게 되면 한배에 타게 되는 거니 그 전에 서로 확인해봐야 할 게 있지 않겠습니까.”
탈다스 역시 날 고용해도 문제가 없을지 확인하고 싶을 테고 나 역시 레비아탄과 관계를 맺어도 문제가 없는지를 확인해야 한다.
“맞는 말씀입니다. 다른 건 모르겠지만 용병단장님과는 말이 잘 통해서 좋군요.”
탈다스는 시원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전 이곳에서 좀 더 머무르다가 볼일을 끝마치면 시간을 내서 레비아탄 상단을 방문하도록 하겠습니다.”
“용병단장님께서 빠른 시일 내에 방문하시기를 기대하겠습니다.”
어차피 가기 싫어도 지분 때문에 한 번 방문하긴 해야 한다. 조사해봐서 레비아탄이 영 아니다 싶으면 아까 탈다스가 얘기한 대로 돈만 쏙 뽑아먹고 헤어져야겠지만.
* * *
탈다스를 보내고 한 달이 더 흘렀다. 그동안 우리가 이곳에서 족친 도적만 수백 명에 소탕한 무리만 수십이다. 원래라면 말도 안 되는 얘기지만 도적들은 바퀴벌레처럼 끊임없이 생겨났기에 가능한 얘기였다.
“흠, 이 정도면 충분히 명예랑 명성작은 끝낸 것 같은데….”
난이도 때문에 상태창을 켜도 모든 정보가 다 보이는 건 아니지만 내가 괜히 고인물이겠는가.
어지간히 악행을 저지르지 않은 이상 이 정도면 어디 가서 현상금 수배를 당하거나 경비병들에게 체포되지는 않을 것이다.
거기에 초반에 도적들을 잡는 이유 중 하나를 달성했다.
“상태창.”
이름 : 라그나르 로드브로크
소속 : 레이븐 용병단의 용병단장
상태 : 활력
기벽 : 겨드랑이
체력 : 난이도로 인한 열람 제한
스탯 : 난이도로 인한 열람 제한
<특성>
무식한 야만인 : 글을 모릅니다. (이 특성은 글을 배우게 되면 사라집니다.)
바이킹식 외교 : 바이킹의 외교는 지극히 합리적입니다. 네 것도 내 것, 내 것도 내 것 - 약탈과 관련된 행동 시 전리품 30% 추가 획득.
꺾을 수 없는 의지 : 당신의 의지는 강철과도 같습니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어냅니다.
냉철한 사냥꾼 : 당신은 어떤 상황에서도 냉정한 판단력을 내릴 수 있습니다.
약자멸시(new) : 당신은 약자에게 지독한 혐오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약자만 보면 투지가 끓어오르며 약자를 상대로 전투력이 엄청나게 증가합니다.
양민학살(new) : 당신은 약자를 괴롭히는 데 도가 텄습니다. 약자들과 전투를 할 시 사기가 일정한 수치 이상 떨어지지 않으며 적군의 사기를 떨어뜨리고 도망칠 확률을 올려줍니다.
“여전하네.”
도적을 500명 이상 죽이면 약자멸시 특성을 획득하며 도적 집단 50개 이상을 토벌하면 양민학살 특성을 얻게 된다.
하지만 특성을 보면 알겠지만, 약자라는 기준도 구체적으로 나와 있지 않고, 전투력은 얼마나 상승하는지, 적에게 어느 정도의 디버프를 거는지 명확한 수치로 나오지 않기 때문에 특성 대부분과 스킬 같은 건 미루어 짐작할 수밖에 없다.
물론 나는 고인물이고 저 특성들이 발휘하는 대략적인 수치를 알고 있기 때문에 우선적으로 약자멸시와 양민학살 특성을 개화시킨 것이다. 육체파인 바이킹에게 저것만큼 잘 어울리는 특성은 또 없으니까.
애초에 약자란 상대적인 것이고 바이킹인 내가 강해지면 다 약자가 되는 것이다. 다만 각 국의 정예병들이 말도 안 되는 넘사벽이라 저 특성을 발현시키기 힘들 뿐이지.
“부대 정보창.”
<레이븐 용병단>
라그나르 로드브로크
빙옌의 힐데가르트
에피로스 친왕국 정예 창병 ― 2
루스 공국 석궁병 - 2
신성 제국 정예 창병 ― 3
신성 제국 석궁병 - 2
아이유브 왕조 방패병 ― 2
“일단 이 정도로 만족해야 하나?”
마음 같아서는 전부 다 정예병으로 만들어놓고 싶지만 경험치도 잘 오르지 않는 데다가 이 이상 병력들의 티어가 올라가면 돈을 감당할 수가 없다.
“보병부터 돈에 허덕여서야 기병은 꿈도 못 꾸겠군.”
중무장한 기병 3~5기만 끌고 다녀도 어지간한 보병들은 전부 박살 낼 수 있지만, 돈이 워낙 많이 깨지기에 단념하기로 했다.
“당분간은 어쩔 수 없이 뚜벅이 신세네.”
물론 뚜벅이라고 해도 마냥 무시할 수는 없다. 제대로 된 장창 방진과 전술만 구사할 수 있다면 기병도 갈아버릴 수 있는 데다 신성 제국은 보병, 궁병, 기병 전부 다 최종 테크트리가 무난해서 첫 스타팅 포인트로 나쁘지 않다.
특히 평민 최종 테크트리인 임페리얼 가드와 집행자는 전 보병을 통틀어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갈 정도로 강력했으며 특히 집행자는 귀족 병종과도 비빌 정도로 강력한 병종이었다. 대신 궁병이 조금 후달리기는 했지만, 그 정도는 충분히 감수할만한 단점이었다.
“라그나르. 캠프 정리가 끝났습니다.”
내가 병력 구성에 대해 고민하고 있을 때 힐데가 내게 다가와 보고했고 나는 상념에서 깨어났다.
“고생했어. 힐데.”
“별말씀을. 그런데 캠프를 완전히 정리하는 걸 보면 이제 하산할 생각입니까?”
“그래야겠지. 벌써 이곳에서 3달이 넘게 죽치고 있었는데 슬슬 내려갈 때도 됐지.”
아닌 말로 나도 이곳에서의 생활은 질렸다. 캠프를 차렸다지만 제대로 된 잠자리도 아닌 데다 제대로 된 음식을 먹을 수도 없고 유흥거리도 얼마 없는 데다 인원이 적어 나까지 불침번을 서야 했다.
이쯤 되니 남들에게는 우리가 산적으로 보일 정도였고 실제로 며칠 전부터 병력들의 사기도 지속적으로 하락하고 있는 상태다. 지금까지는 산적과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며 사기를 끌어 올리고 있었지만 이젠 그것도 한도에 다다랐다.
“일단 탈다스 상단장이 머무르고 있는 도시로 가지.”
“당분간은 신성 제국에 뿌리를 내릴 생각이십니까?”
“특별한 일이 없다면?”
“흠, 의외군요. 뭐 당신이 그렇게 결정했다면 저는 따르겠습니다.”
신성 제국은 첫 시작으로 굉장히 좋은 게, 위에서 언급한 장점 이외에도 제국 자체가 하나의 제국이라는 개념보다는 잘게 잘게 쪼개진 영주들의 연합체이기에 활동하기가 굉장히 편리하다.
황제도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절대권력을 쥐고 있는 게 아니라 인기투표로 당선되는 것이나 다름없었기에 공작이 황제보다 더 큰 자치령을 가지고 있는 경우도 많았다.
뭐, 애초에 모티브가 신성로마제국이다 보니 그런 거겠지만.
“돈도 어느 정도 모았으니 가는 길에 마차도 좀 사고, 말도 좀 사고, 이래저래 필요한 것도 좀 살 생각이야. 병사들 사기 관리도 좀 해주고.”
“마차? 그걸 굳이 살 필요가 있습니까?”
“필요해서 사는 거야.”
“설마 말을 못 타는 건 아니겠지요?”
“그럴 리가.”
물론 내가 말을 타보진 않았지만 라그나르라면 분명 말을 타봤을 테니 승마 자체는 별다른 문제가 없다. 힐데가르트 역시 기본적으로 승마술을 하나 찍고 있기에 전투 중에 타는 건 힘들지라도 이동할 때 타는 건 아무 문제 없다.
그런데도 굳이 비싼 마차를 타려는 건 지금부터 귀족 사칭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사실 중세시대에 귀족을 판별하는 방법이 딱히 정해져 있는 건 아니다. 뭐 각 가문에 전화를 해서 이 사람이 당신네 가문의 사람이 맞습니까? 하고 물어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인터넷을 뒤져서 사진이랑 대조해볼 수도 없는 거고 민증을 확인해 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각 귀족 가문마다 문장이 새겨진 패가 신분증으로 사용되기도 한다지만, 그게 진짜로 가문에서 발행한 것인지 어떻게 아는가? 특히 신성 제국처럼 수많은 가문이 난립하는 곳에선 그 진위 여부는 둘째 치고 이게 진짜 귀족 가문의 문장인지조차 판별하기가 힘들다.
그럼 뭐로 판별을 하느냐? 바로 그 사칭을 하는 사람이 얼마나 귀족다운 행색을 하고 다니느냐는 점이다. 뭐라고 해야 할까…… 현대 시대로 따지면 부자들이 값비싼 외제차를 타고 다니는 느낌이다.
가령 람보르기니를 끌고 다니면 돈 좀 있어 보이지 않던가. 그 사람이 빌린 것인지 훔친 건지 카푸어인지는 둘째 치고 말이다.
이처럼 내가 하려는 행동은 타인이 봤을 때 나를 귀족으로 인식할만한 최저한의 한도를 맞추려는 것이다. 물론 세세하게 따지면 다 들통나겠지만, 지금 필요한 건 내가 귀족이라는 인식뿐이다.
물론 귀족 사칭도 상당한 양의 돈이 있어야 하지만 지금의 내게는 힐데라는 치트키가 있다.
힐데는 글을 읽고 쓸 줄 알며 사제인 만큼 기본적인 교양과 학식을 가지고 있는 데다 말투가 나쁘긴 하지만 어쨌건 행동에서 기품이 넘친다. 마지막으로 외모까지 예쁘니 그야말로 귀부인의 정석이었다.
“힐데.”
“부르셨습니까?”
“잠깐 내 부인 좀 돼줘야겠는데.”
내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힐데의 표정이 순식간에 와락 구겨졌고 그녀는 오물이라도 보는 것만 같은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처음에는 저 시선에 적응이 안 됐지만, 요새는 저 경멸 어린 표정을 보는 재미도 제법 쏠쏠하다. 내가 힐데를 화나게 만들었다! 나는 힐데의 감정을 지배할 수 있다!
“미치셨습니까?”
“음, 요새 그 말을 조금 자주 듣는 것 같은데….”
“제가 볼 때는 단장님께서 삐뚤어진 욕망을 가지고 있다고밖에 생각이 안 드는군요. 제게 이런 비난과 매도를 듣는 게 기쁘신 겁니까? 확실히 그런 기벽을 가진 남성분들이 있다는 얘기를 듣기는 했습니다만 제가 존경하고 또 존경하는 라그나르 단장님께서 그런 기괴한 기벽을 가지고 계실 줄 몰랐군요.”
역시나 신랄한 비난이 이어졌지만 근 3개월간 함께 지내며 익숙해졌기에 나는 대강 흘려들으며 내 할 말을 했다.
“내 취향 얘기는 둘째 치고 이건 마차를 사는 거에서 이어지는 얘기야.”
나는 힐데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고 뚱한 표정으로 설명을 듣던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단장께서 저와 결혼하고 싶어서 미칠 지경이라니, 굉장히 소름 끼치고 경멸스럽지만, 모두에게 자애로워야 하는 사제로서 라그나르 당신의 그 그릇된 소원을 들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조금 다르게 이해한 것 같지만, 어쨌건 그녀는 승낙했고 그렇게 귀족을 사칭할 준비를 끝낸 우리는 레비아탄 상단의 탈다스 상단장을 만나기 위해 출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