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04화
석궁병은 신중하게 상대를 겨누었고 그가 쏘아낸 볼트가 도적 두목의 목을 꿰뚫자마자 나는 괴성을 내지르면서 돌진했다.
기습 공격, 적 두목의 암살, 지휘관이 선두에서 병력들을 이끄는 모습. 이런 행동 하나하나가 병력들의 사기에 알게 모르게 영향을 끼친다. 물론 이런 행동들이 게임을 플레이하며 시스템이나 로그에 정보로 남는 건 아니지만 말이다.
이런 점들이 이 게임의 난이도를 올리는 데 일조했는데 이는 플레이어가 자신의 행동에 대한 리스크와 어드밴티지를 예측하기 힘들게 만들었다. 즉, 자신의 행동이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에 대해서 확신하기가 힘들다는 말이다.
하지만 난 내 행동이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고 실제로 우리의 수가 적들과 비교하면 훨씬 적은데도 불구하고 힐데가르트는 물론 휘하의 병력들까지 괴성을 내지르며 적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단지, 너무 깊게 감화되다 보니 석궁병마저 들고 있던 석궁을 내팽개치고 칼을 뽑아 드는 문제가 있긴 했지만 말이다.
어쨌건 갑작스러운 제3세력의 개입에 도적들과 상인들 역시 당황한 모습이었지만 이내 힐데의 복장과 방패에 새겨진 정화 교단의 문장을 본 도적들의 표정은 일그러졌고 상인들의 표정에는 안도가 깃들었다.
애초에 도적 두목을 기습한 것만 봐도 우리가 어느 쪽에 호의를 품고 있는지는 명백했다.
“승리를 위하여!!!”
힐데가르트는 메이스를 치켜들며 신성력을 폭발시켰고 그 모습에 나도 모르게 감탄을 했다. 확실히 그녀는 전투 사제가 아닌 빙옌의 성녀 힐데가르트로 불릴 때도 그 압도적인 전투력으로 이름 높긴 했다.
그런 그녀와 내가 앞장서서 도적들을 때려눕히기 시작하자 적들의 사기가 요동치기 시작했고 이내 무기를 내버린 채 하나둘 도망치기 시작했다.
저들을 추격한다면 마저 섬멸시킬 수 있었지만 이미 와해된 집단인 데다 눈앞의 상인 집단과 연을 맺는 게 이득이었기에 나는 적당한 시점에서 전투를 갈무리 지었다.
“힐데. 어디 다친 곳은 없나?”
“고작 저런 놈들을 상대로 다친다면 전투 사제라는 이름이 울 겁니다.”
그녀는 메이스에 묻은 피를 털어내며 당연한 표정으로 얘기했고 나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나중 일이기는 해도 교단의 성녀라는 자리는 도박을 해서 딸 만큼 만만한 자리가 아니었고 전투력만 놓고 따지면 순위권에 드는 게 힐데가르트였다.
“그렇다면 다행이군.”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라그나르 당신이 걱정해주는 게 썩 나쁜 기분은 아니군요.”
그녀는 특유의 오만과 뒤틀림이 섞인 표정과 말투로 대꾸했고 나는 적당히 대꾸해주며 휘하의 병력들을 끌고 상인들을 향해 다가갔다.
그들은 여전히 약간의 경계심과 호의가 공존하는 얼굴로 우리를 바라보았고 나는 그들과 적대할 생각이 없음을 보여주기 위해 도끼와 방패를 수납한 뒤 열 발자국 정도 떨어져 멈춰 섰다.
“본인은 레이븐 용병단을 이끄는 라그나르 로드브로크라고 합니다. 이쪽은 정화 교단의 사제 힐데가르트고.”
힐데는 내 소개에 가볍게 정화 교단의 성호를 그으며 살짝 고개를 숙였고 상대측에선 우리가 적대 의사를 내비치지 않자 안도한 표정으로 자신들을 소개했다.
“위험한 상황에서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신성 제국 출신으로 레비아탄 상단을 이끄는 탈다스 레비아탄이라고 합니다. 편하게 탈다스라고 불러주십시오.”
그는 천천히 내게 다가오며 손을 건넸고 나 역시 오른손을 내밀며 그와 가볍게 악수를 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탈다스 상단장. 일단 자세한 얘기를 하기 전에 뒷정리부터 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이쪽에 사제도 있고 하니 필요한 게 있으면 우리도 도와드리겠습니다.”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말을 끝으로 일단 우리는 전투의 흔적을 지우고 죽은 자들을 한곳에 몰아 화장하며 힐데가 그들의 명복을 빌어주었다. 또한, 부상자들에 대한 응급 처치를 마치고 내동댕이쳐진 물자들을 수습하며 뒷정리를 끝마쳤다.
그러는 사이 어느덧 해가 저물었는데 상인들은 굉장히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이유를 알고 있는 나는 짐짓 은혜를 베풀어준다는 얼굴로 그들에게 다가가 제안했다.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 우리가 캠프를 구축하고 있는데 상단장만 괜찮다면 그곳에서 하룻밤 묵어가도 괜찮습니다”
“호의는 굉장히 감사합니다만….”
돈에 민감한 상인인 만큼 탈다스는 무상의 호의는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 만큼 죽음의 위기에서 자신들을 구해준 것만 해도 큰 빚이었기에 그들로서는 이 이상 빚을 늘리고 싶지 않을 것이다.
“상단장께서 감당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대가를 요구할 테니 너무 그렇게 딱딱하게 굴 것 없습니다. 애초에 상단의 재물이 목표였다면 왜 굳이 산적들의 손에서 구해줬겠습니까?”
너희랑 산적이랑 사이좋게 다 같이 조지고 독식할 수도 있었음을 은연중에 이야기하자 상단장의 얼굴이 굳어졌지만 이내 영업용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허면 염치불구하고 용병 단장님의 도움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나는 웃으며 그들을 데리고 우리가 차려놓은 캠프로 데려갔고 그들은 캠프의 규모나 휘하 병력의 규모보다 우리가 그동안 도적들을 조지고 쌓아놓은 물품들을 보면서 감탄했다.
한눈에 봐도 도적들 세력 한두 개를 소탕한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일단 부상이 심한 인원은 이곳에서 좀 더 제대로 된 치료를 받게 하고 식사부터 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안 그래도 상단의 구성원들은 지치고 굶주려있었기에 내 제안에 쌍수를 들고 환영했고 탈다스는 미묘한 표정을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피곤할 테니 이쪽에서 식사와 불침번까지 서주겠습니다. 그리고 식사가 준비될 동안 상단장께서는 저와 이야기 좀 했으면 하는데….”
“알겠습니다.”
서로 계산할 걸 계산하자는 내 말에 상단장은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힐데에게 내가 자리를 비우는 동안 뒤처리를 맡긴 뒤 상단장을 내 막사로 데려왔고 그에게 준비해 둔 차와 가벼운 간식거리를 건네며 가볍게 물었다.
“상단장님께선 어디 다치신 곳은 없습니까?”
“용병단장님께서 시기적절하게 도와주신 덕분에 아무 이상 없습니다.”
“다행이군요. 상단의 전체적인 피해는 어떻습니까?”
내 말에 상단장은 큰 한숨을 쉬며 선뜻 말을 꺼내지 못했다. 이게 진짜 피해가 커서 그런 건지, 아니면 최대한 연기를 해서 내게 적당히 뜯어가라고 시위를 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꽤 큰가 보군요. 대형 상단과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레비아탄 상단이라면 저런 조무래기들한테 당할 정도는 아닐 텐데….”
내가 알기로 레비아탄은 신성 제국 내에서 나름대로 입지를 가지고 있는 중견 규모의 상단이다. 어지간한 소규모 상단들도 도적들을 상대로 털리는 일은 없는데 레비아탄이 털렸다고 그러니 솔직히 믿어지지가 않는다.
“으음… 조금 알력다툼이 있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알력이라… 내부에서 경영권을 두고 싸움이 일어났든가 외부세력과 마찰이 일어났든가 둘 중의 하나겠군. 안면을 트자마자 내부 사정을 캐묻는 것도 그렇기에 난 더 이상 얘기하지 않고 바로 본론에 들어가기로 했다.
“우리가 그대들에게 요구할 건 두 가지입니다. 먼저 이곳에 쌓여있는 장물 처리를 부탁드리겠습니다. 대부분 상태가 안 좋긴 하지만 녹이거나 필요한 부분만 처리하면 재활용 정도는 가능할 겁니다.”
“음… 좋습니다. 그 부분은 최대한 높은 값을 치러서 계산해드리겠습니다.”
그는 시원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는데 사실 이 부분은 그다지 문제 될 게 없다. 원래 아무리 쓰레기라도 상인들에게 파는 건 가능했으니까. 값을 제대로 쳐주는지는 둘째 치고 말이다.
다만 레비아탄은 현재 우리에게 빚을 지고 있는 데다 호감도도 중립을 넘어섰을 테니 기본적으로 받을 수 있는 금액에 [email protected]를 쳐줄 것이다.
내가 상술을 찍든가 아니면 상술 특기를 지닌 동료를 통해서 판다면 더 많은 돈을 받을 수 있겠지만, 이 정신 나간 난이도로 인해 플레이어가 임의로 특성을 찍는 게 불가능해진 데다 상술 특기인 동료를 찾는 데 한세월이 걸릴지도 모르기에 그냥 바로 처분하기로 했다.
애초에 대부분 잡동사니라 큰 값을 받는 게 불가능하고 저 많은 양의 잡동사니를 들고 다니는 것도 다 일이다.
“지금 당장 돈으로 계산하는 게 어렵다면 가지고 계신 물품과 교환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그래 주시면 저희야 감사하지요.”
상단장은 품속에서 둘둘 말린 종이 더미를 꺼내 내게 건네주며 몇 마디 덧붙였다.
“이건 현재 저희 상단이 가지고 있는 물품입니다. 일부 품목은 상행 과정에서 잃어버렸지만 어지간한 물품은 카탈로그에 적혀있는 대로 있을 겁니다.”
“가격은 여기에 적혀있는 대로 생각하면 되겠습니까?”
“예. 거기에 적혀있는 금액은 저희가 물건을 가져올 때 쓴 원가인데 은인께는 특별히 원가에 물건을 넘겨드리겠습니다.”
상단장의 말에 나는 헤벌쭉하며 카탈로그를 보다가 눈살을 찌푸렸다.
[상품 목록]
뛟깛흣 ― 330두카트
깐세ㅎ쥐 ― 260두카트
웹둟띿ᅟᅮᆫ ― 350두카트
“마음에 안 드시는 부분이라도 있으십니까?”
내가 인상을 찌푸리자 탈다스는 내 눈치를 살피며 물었고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사실, 탈다스한테 별다른 문제는 없다. 문제라면 나한테 무식한 야만인 특성이 적용되고 있다는 점이었지.
“부끄럽지만 본인은 글을 알지 못합니다.”
“아… 이런. 죄송합니다. 제가 그 부분을 고려하지 못했군요. 여기 그림으로 된 카탈로그도 있습니다. 보시면서 궁금하신 점이 있으면 얼마든지 물어보셔도 됩니다.”
“감사합니다.”
사실 저런 식으로 글자가 깨져있어도 고인물인 내겐 별다른 장애가 되지 않는다. 애초에 글자가 깨진다는 건 무작위로 깨뜨리는 게 아니라 플레이어가 못 읽게 만드는 게 목적이므로 각각 대응하는 글자가 있기 때문이다.
가령, 가=뒓, 나=붱 이라거나 하는 식으로 말이다. 추후 이 사실을 파악한 게임사에서 패치를 하려다가 이 역시 고인물 특유의 스킬인 데다 까막눈임을 역이용해서 이득을 얻는 플레이도 가능했기에 패치본만 만들어놓을 뿐 따로 강제 패치를 진행하진 않았다.
난 당연히 패치를 진행하지 않았고 다행히 눈앞의 글자는 내가 알고 있는 정보와 동일했다. 하지만 난 얌전히 상단장의 호의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사실 말이 읽을 수 있다는 거지 거진 암호해독이나 다름없으므로 읽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고 나중에 어떤 식으로든 써먹는 게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난 모르는 척 카탈로그를 가리키며 물었다.
“여기 가죽 신발은 바닥에 징이 박혀있는 겁니까?”
“예. 그래서 쉽게 닳지 않고 유사시에는 적에게 대항할 수 있는 수단이 되기도 합니다.”
“좋군요. 이거랑 여기 이 옷에 가죽으로 덧댄 부분은 엘크의 가죽입니까?”
“안목이 좋으시군요. 전체는 아니지만 자주 해지는 부분에 가죽을 덧대서 옷이 해지는 걸 최대한 방지해줄 겁니다.”
“이것도 구매하도록 하겠습니다. 사이즈는….”
이렇게 나는 상단장과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며 필요한 물품들을 구매하며 장비를 업그레이드시켰다.
물론 그래 봤자 그 혜택을 받는 건 나와 힐데가르트 둘뿐이었는데 휘하 병력들의 장비를 업그레이드하기 위해선 병력들의 티어를 올리거나 서브 퀘스트를 수행해야 했다.
간단한 예시로 병력의 전투력 향상을 위해 다마스커스 강이나 등자, 합성궁 같은 퀘스트들을 깨야 했고 나 같은 경우 바이킹 계열의 병력을 사용할 테니 바이킹 소드(울프베르트) 퀘스트를 깨면 될 것이다.
물론, 당장 내 휘하에 바이킹들이 있는 것도 아니고 퀘스트의 난이도도 높기에 지금은 그저 나와 힐데의 장비를 업그레이드시키는 선에서 만족해야 할 것이다.
“좋은 거래였습니다. 대가라고 하기는 뭣하지만 안전한 가도가 나올 때까지 저희가 호위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내 말에 상단장이 허리 숙여 감사를 표했고 나는 차를 한 모금 마신 뒤 두 번째 용건을 꺼냈다. 사실 첫 번째 용건은 두 번째 얘기를 꺼내기 위해서 뜸을 들인 것에 불과하다.
“두 번째 요구사항은 상단장 그대에 대한 투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