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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바이킹이 되었다-3화 (3/205)

▣ 003화

게임 후반에야 도적들은 귀찮은 잡몹에 불과하지만, 초반에는 플레이어에게 아낌없이 주는 나무 그 자체다.

전투에서 승리한 뒤 포로로 잡아 염전 노예로 보내서 주기적으로 돈을 빨아먹을 수도 있고, 노예 상인에게 팔아치울 수도 있으며, 전향시켜서 고기 방패로 쓸 수도 있다.

전투에서 패퇴하고 1주일이 넘게 여관에서 놀고먹으면서 지냈기에 물자와 돈에 슬슬 압박이 들어오고 있었는데 이렇게 알아서 찾아와주니 절이라도 해주고 싶은 심정이다.

“네놈들은 뭐지? 우리에게 볼일이라도 있나?”

나는 껄렁껄렁 다가오는 도적무리를 바라보며 물었고 도적 집단은 자기들끼리 서로 바라보더니 이내 키득거리면서 내게 대꾸했다.

“네놈 말고 네놈이 가지고 있는 것들에 볼일이 있지.”

“이런 날강도 새끼들을 봤나.”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도적놈들이었고 대화는 이걸로 충분했다. 내가 도끼와 방패를 꺼내 장비하자 아군 역시 무기를 빼 들었고 그렇게 전투의 긴장감이 흐르고 있을 때, 무언가 으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퍼억!!!

뼈가 박살 나는 소리와 함께 내 앞에 서 있던 도적은 얼굴이 함몰돼서 바닥을 나뒹굴었고, 그 잔혹하고 혐오스러운 광경에 적뿐만 아니라 나 역시 당황해서 힐데가르트를 쳐다볼 뿐이었다.

“…힐데?”

내 말이 들렸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는 피가 뚝뚝 흐르는 메이스와 정화교단의 문장이 새겨진 카이트 실드를 들고 경건한 표정으로 주기도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나의 하나뿐인 유일신이시여. 그대의 어린 양을 보호하소서.”

“제가 바라는 것은 이 고난을 헤쳐나가고 적들을 정화할 수 있는 힘뿐이니.”

“적들이 저를 짓밟게 두지 마시옵시고 다만 바라건대 오직 승리의 영광으로 이끌어 주소서.”

기도를 마친 힐데가르트는 그 가녀린 체구에서 나온다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거대한 함성을 외치며 적에게 뛰어들었다. 그런 힐데가르트의 투지에 이끌려 나 역시 괴성을 내지르며 전장에 합류했다.

평화로웠던 숲속은 순식간에 피와 비명이 난무하는 전쟁터로 돌변했고 그중에 단연 백미는 힐데가르트였다.

그녀는 전투 사제라는 이름에 걸맞게 묵직한 메이스로 적의 골통을 박살 내고 방패로 적을 밀쳐내며 실시간으로 적의 전열을 무너뜨리고 있었다.

그녀의 메이스가 번뜩이며 적의 두개골을 박살 냈는데 그 모습이 마치 신성력을 눈에 보이게 물리적으로 구현해놓은 것 같은 모습이었다.

아무튼, 그녀의 활약에 힘입어 십여 명이 넘는 도적들을 죽이거나, 죽기 직전까지 만들어놓는 데는 채 10분도 걸리지 않았다.

거기에 다행히 나 역시 살인에 대해 거부감을 느끼지도 않았고 패닉에 빠지거나 PTSD에 빠지는 일도 없었다.

사람을 죽이는 게 무덤덤하다는 사실을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는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전투가 컨텐츠의 절반을 차지하는 곳에서 싸우지 않는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으니까.

첫 전투치고는 싱거웠던 싸움이 끝나자 나는 한숨과 함께 무기를 수납하며 가볍게 힐데가르트를 치하했다.

“고생했어 힐데.”

“제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죽은 놈들은 모아서 묻거나 태우고 기도나 해줘.”

“알겠습니다. 전부 태워서 정화하도록 하겠습니다.”

개인적으로 숫자가 얼마 안 될 때는 묻는 게 낫지만, 시체에 대한 처리는 사제인 힐데가르트의 영역이었기에 내가 뭐라 할 건 아니었고 그녀의 소속인 정화 교단에서도 실제로 태우는 걸 권장하고 있기에 괜히 척질 게 아닌 이상 그녀의 뜻대로 하게 두는 게 좋다.

사실, 원리원칙대로만 따지면 도적들의 시체를 태우는 건 썩 좋은 행동은 아니다. 사람 몸이라는 게 그냥 불붙인다고 타는 게 아니니 장작도 따로 모아야 하는 데다 태우다 보면 연기가 날 수밖에 없다.

그 연기를 보고 주변의 다른 도적 무리나 안 좋은 목적을 가진 집단이 찾아올 수도 있는 거고 살 타는 냄새에 이끌려 들짐승들이 찾아올 수도 있다.

그럼 그냥 버려두고 가면 되는 거 아니냐고 할 수도 있는데 그렇게 되면 명예가 떨어진다. 명성이야 도적들을 처리하다 보면 자연스레 오르지만, 명예는 그에 걸맞은 행동을 해야 올랐고 이런 사후처리가 그나마 빠르게 명예작을 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였다.

“본래는 다른 수도원이나 정화 교단의 지부에 머무를까도 고민해봤는데… 도적질도 나쁘지 않겠어. 생각보다 수입도 짭짤하고.”

물론 실제라면 도적놈들이 얼마나 돈을 가지고 있겠느냐마는 이곳은 게임 기반의 현실 세계였고 어찌 보면 도적들도 몹이었기에 어느 정도 돈은 나오는 편이다.

“그러니까… 도적이 되겠다는 말씀이십니까?”

도적이라는 말에 힐데가르트의 표정이 순식간에 일그러졌고 나는 서둘러 한마디 덧붙였다.

“아니, 도적을 잡는 도적이 될 거다. 의적이라고 할 수 있겠지.”

“도적이면 도적이지 의적은 또 뭡니까. 음… 그래도 정화 교단의 사제로서 그 판단은 나쁘지 않군요. 이 세상에 필요 없는 이들은 전부 정화해 마땅하니까요.”

이게 그녀의 단점인데 보다시피 가치관이 굉장히 살벌해서 동료로 영입하기가 꺼려질 수밖에 없다. 게임을 하다 보면 거짓말을 할 때도 있고 통수를 칠 때도 있고 사기를 칠 때도 있고 이런저런 뒷공작을 할 때도 있는 법이다.

그런데 그때마다 툴툴거리고 호감도 까이고 동료와 불화를 일으키고 사기를 개판 쳐놓으면 대체 누가 좋아하겠는가. 십자군 같은 컨셉질을 할 때는 참 좋긴 하다만 지금 내 컨셉은 이미 바이킹이다.

물론 단점만 있는 건 아니다. 수백 명의 동료 중에서도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갈 정도로 기본적인 능력치도 좋고 주 무기가 메이스라 죽이기보단 부상을 입힐 확률이 높아서 포로로 잡을 확률도 높았다.

아무래도 찍히면 척추가 접히는 도끼보다야 메이스가 포로로 잡을 확률이 높지 않겠는가. 포로의 상태가 정상인가는 둘째 치고 말이다.

“좋아. 그럼 일단 방향성은 그렇게 잡고 내일부터 조금 더 산맥 안쪽으로 들어가자고.”

원래 이 게임을 하며 도적들을 조지는 건 어쩔 수 없이 거쳐야 하는 부분이다. 정신 나간 난이도를 자랑하는 게임답게 이 게임의 정규군이나 이교도의 고위급 병과는 진짜로 무쌍을 찍는다.

내 휘하에 창병이나 궁병 같은 하위 티어 유닛을 200~300명 끌고 가봤자 최상위 티어 중 하나인 카발리어나 카타프락토이, 윙드후사르, 하사신 같은 정예병력 대여섯 명한테 썰리는 게 현실이었다.

그 때문에 머릿수만 늘린다고 능사가 아니었고 휘하 병력의 수가 늘어날수록 나가는 돈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고 기동성에도 제약을 받기 때문에 나는 일단 휘하의 병력을 정예화시키기로 했다.

* * *

그렇게 도적놈들의 등을 쳐 먹는 생활을 이어나간다. 다만 이 생활이 여자인 힐데가르트에게는 조금 힘들 거 같아서 괜찮으냐고 물어봤더니 그녀는 아미를 찌푸리며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갑자기 또 무슨 헛소리입니까. 애초에 이런 걸 가르쳐준 게 당신 아닙니까.”

내가 그랬던가? 애초에 내 기억도 아닌 데다 동기화가 불완전해서 그런지 중간중간 필름이 끊긴 것처럼 기억이 혼란스럽다. 아무튼, 그녀가 그렇다고 하니 나는 적당히 얼버무리기로 했다.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종종 잊게 되는군.”

“조금만 더 나이가 들면 제 이름도 까먹겠군요. 얼마 전에도 절 생판 남처럼 힐데가르트라고 부르지 않았습니까.”

“내가 다른 건 다 잊어도 힐데 널 잊을 리가 없지 않나.”

아무래도 그녀는 힐데라는 애칭이 꽤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종종 이걸 주제로 계속 얘기하면서 날 곤란하게 만드는 걸 보면 말이다.

진짜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다. 애인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내 외관상의 나이가 거진 서른 후반에 가까운데 애인이라면 날강도도 이런 날강도가 또 없지.

“나이가 들수록 능글맞아지는 것 같기는 하군요.”

“그나저나 힐데.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말이야….”

은근슬쩍 기억이 안 난다는 걸 핑계로 과거의 일을 그녀에게 물어볼 심산이었는데 경계를 서고 있던 병력이 허겁지겁 다가와서 급하게 보고했다.

“단장님! 도적들을 발견했습니다.”

기회가 지금만 있는 것도 아니기에 나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과거 얘기는 다음에 하도록 하지. 그래. 도적들의 규모는 얼마나 되나?”

“30명 정도 됩니다. 다만 특이사항으로 현재 다른 집단과 교전 중입니다.”

“다른 집단? 혹시 영주나 귀족이던가?”

종종 영지전을 벌이던 귀족이 패퇴해서 퇴각하는 걸 도적들이 기습하는 때도 있었는데 그걸 구해주거나 도와주면 그 영주와의 커넥션을 만들 수 있었다. 다만 굉장히 드문 일인 데다 말했듯 고위급 병종 한둘만 남아있어도 도적 따위는 다 털어버리는 게 가능하기에 빠르게 개입해야 했다.

“아닙니다. 수레를 가지고 있는 걸로 봐서 상단인 것 같습니다.”

상단이라… 그러고 보니 최근 산적들을 토벌하면서 이래저래 장물이 많이 쌓였었는데 처리도 할 겸 상단과 인맥을 쌓아두는 것도 나쁜 선택은 아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일단 도적들부터 정리하도록 하지. 추후 상단과는 말이 통하면 적당한 통행세와 목숨값 정도만 받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 * *

나는 캠프를 지킬 병력을 일부 남겨두고 최정예 병력들만 뽑아서 몰래 전투가 일어나는 곳으로 향했다.

“으음, 밀리는 것처럼 보이는데?”

당연히 전투병력의 질만 놓고 보자면 상단 쪽이 우세했지만 말 그대로 최상위 티어가 아닌 이상 숫자의 폭력을 무시할 순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단이 잡몹이라고 할 수 있는 도적들에게 털리는 건 꽤 희귀한 일이었는데 상단의 구성 인원이 기본으로 50명은 깔고 가는 데다 병종도 훨씬 우월했고 기병까지 껴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오면서 몇 번 전투를 치른 건지, 아니면 적대국의 영주에게 쫓겼던 건지 영 상태가 안 좋아 보였고 이대로 시간이 흐르면 공멸하거나 패배할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단장님. 바로 진입합니까?”

힐데가르트가 곧장 등 뒤에 메고 있던 메이스와 방패를 꺼내며 물었지만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뭐든지 때가 있는 법인데 적어도 지금은 아니다.

“잠깐 대기해. 일단 상황을 좀 더 지켜볼 거야.”

“뭐 때문에 그러십니까?”

실상은 수틀리면 상단을 털어버리기 위함이기도 하지만, 상대가 위험에 처해있을수록 내게 떨어지는 게 많기 때문이다.

다만 이 사실을 있는 그대로 얘기했다간 힐데가르트의 호감도가 바닥을 칠 테니 적당히 변명하기로 했다.

“저 상단이 최소한 우리의 적인지 아군인지는 파악해야 하지 않겠어? 보따리 건져줬더니 짐을 내놓으라고 겁박하면 어떻게 할 건데? 이쪽 인원은 6명밖에 안 되니 최대한 조심해야 돼.”

힐데가르트도 나와 함께 여행하면서 더러운 꼴을 몇 번 봐서 그런지 다소 불만스러운 표정을 짓기는 했지만, 별말 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저기 상단이 내거는 깃발 말인데… 라틴이나 에피로스는 아닌 것 같지?”

병력들의 구성이나 들고 다니는 물품, 마차의 생김새, 깃발에 새겨진 문장을 확인해봤을 때 100% 신성 제국의 상단이었지만 나는 짐짓 모르는 척 힐데를 향해 물었다.

“제가 볼 때는 그런 것 같습니다. 신성 제국이나 아이유브 왕조의 상단 같기는 한데… 애초에 소규모 상단이라면 굳이 신경 쓸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라틴이나 에피로스만 아니라면 당장 우리에게 문제 될 건 없지.”

과거의 행적까지 알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어찌 됐든 지금 당장 내가 만나기 껄끄러운 건 라틴 제국과 에피로스 친왕국뿐이다.

이렇게 얘기를 나누는 사이 예상대로 상단의 호위병력은 도적들에게 밀리고 있었고 여기서 더 지체하다가는 구해줄 상단이 전멸할 것 같았기에 나는 옆에서 대기하고 있는 석궁병에게 물었다.

“석궁병. 저기 뒤에 도적 두목처럼 보이는 놈 저격 가능한가?”

내 말에 석궁병은 거리를 비롯해 이것저것 가늠해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저 말을 100% 믿을 수는 없지만, 본인이 저리 자신만만해하니 맞출 확률이 높을 것이다.

“좋아. 오랜만에 백마 탄 왕자님이나 돼보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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