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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바이킹이 되었다-2화 (2/205)

▣ 002화

말을 마치는 순간 방 안은 정적에 휩싸였고 힐데가르트로부터 경멸에 가까운 시선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녀는 내 예상을 벗어나지 않고 날카로운 어투로 나를 힐난했다.

“혹시 미치셨습니까? 아니면 지난 전투에서 머리라도 얻어맞은 겁니까?”

“아니, 그건 아닌데….”

“아니라면서 지금 겨드랑이를 보여달라고 하시는 겁니까? 분명 좀 전에 기운을 차리라고 하기는 했습니다만, 이런 걸 바라고 한 말은 아니었는데요.”

“…음.”

“가끔 욕망에 가득 찬 눈으로 절 훑어볼 때부터 대충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이런 기이하고 남들에게 말 못 할 취향을 가지고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습니다.”

“….”

“용병단장이라는 권위를 이용해서 자신의 음습한 욕망을 채우려고 하다니… 라그나르 당신도 참 대단하군요.”

“….”

저렇게 쏘아붙이니 할 말이 없다. 하긴, 뜬금없이 겨드랑이를 보여달라고 하면 미친놈 취급하는 게 당연한 거겠지. 하지만 난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겨드랑이를 봐야 할 이유가 있다.

“하지만 그런 그릇된 욕망을 해소해주고 올바른 길로 이끄는 것도 사제의 역할이겠지요.”

말을 마친 그녀는 입고 있던 평상복의 단추를 하나 푼 뒤 오른손으로 소매를 벌림과 동시에 왼팔을 들어 올리며 내게 겨드랑이를 노출했다. 물론, 그 과정 중에도 그녀의 비난과 매도는 멈추지 않았다.

“이런 게 좋으신 겁니까? 일반적인 상식을 지닌 저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군요.”

그녀의 겨드랑이를 보면서 나는 이 라그나르 로드브로크라는 존재는 내가 아니라 그저 내가 빙의한 인물에 불과하다는 것을 확신했다.

원래의 나. 그러니까 라그나르라는 캐릭터 속으로 빙의하기 전의 나는 딱히 겨드랑이 페티시를 가지진 않았다. 그저 대놓고 직시하기에는 조금 민망한 부위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의식하지 않아도 눈이 절로 돌아가고 있었다.

사람의 성벽이라는 게 하루아침에 바뀔 리가 없을 테니 이로 인해 내가 라그나르라는 캐릭터에게 빙의됐다는 걸 100% 확신할 수 있었다. 나 자신의 상태창에 ‘겨드랑이’라는 기벽이 적혀있던 게 유효하다는 소리겠지.

뭐, 사실 하루아침에 바뀌지 않는 건 성격도 매한가지지만 그건 내가 객관적으로 판단하는 게 불가능한 범주이지 않던가.

거기에 지금 와서 빙의든 환생이든 뭐든 그게 무슨 상관이겠냐만, 덕분에 내 나름대로 남아있는 미련을 떨쳐낼 수 있었다.

애초에 게임에 빨려들어 온 지 단 이틀 만에 냉정함을 되찾고 차분하게 생각을 정리할 수 있던 건 냉정 특성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결국은 내가 이런 일 자체에 익숙했기에 아무렇지도 않았던 것뿐이었다.

거기에 패닉상태라고는 해도 전쟁터 한복판에서 무사히 도망친다는 것 자체가 기본적인 능력이 뛰어나다는 걸 얘기하는 거니까.

“됐어. 그거면 충분해.”

대강 생각을 정리한 나는 팔을 휘저으며 힐데가르트에게 이야기했고 그녀는 묘한 표정을 지으면서 팔을 내렸다.

“평상시라면 뚫어져라 쳐다봤을 텐데 이상하군요. 진짜 어디 몸이라도 안 좋은 겁니까?”

젠장. 내 평상시 생활이 어땠던 거지? 나는 그녀의 물음에 곤란한 기색을 띄우며 적당히 얼버무렸다.

“나보다 너는 어떻지? 아까 얼핏 보니 지쳐 보이던데.”

“당신이 제 몸을 걱정해주다니 해가 서쪽에서 뜰 일이군요.”

“….”

“보다시피 별 이상 없습니다. 당신이 하나뿐인 사제의 몸을 걱정하여 구석구석 확인해보겠다고 바득바득 우기신다면 확인시켜 드릴 용의도 있습니다만….”

묘하게 날 놀리면서 도발하는 듯한 말투였지만 생각보다 순한 맛에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확실히 지금도 성격이 나빠 보이긴 하지만 그래도 인게임만큼은 아니었던 것 같다.

하긴, 게임이니까 플레이어한테 대고 쓰레기니 뭐니 하는 말을 내뱉는 거지 현실이라고 가정하면 아무리 성격이 나빠도 그렇게 면전에서 욕설을 내뱉진 못하겠지.

오히려 그게 좋다는 놈들도 있긴 했지만, 난 그런 취향은 아니었으니 이게 훨씬 낫다.

“자네가 괜찮다면 괜찮은 거겠지. 실은 내일 바로 떠날 생각이었는데 하나뿐인 사제가 다친 상태면 곤란하지 않겠나.”

“말했듯, 이상 없습니다.”

“알겠네. 그럼 편히 쉬게.”

내 인사에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며 날 바라보더니 이내 알겠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고 나는 바로 내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드러누웠다.

“일단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메인퀘스트를 깨보는 수밖에 없겠네.”

당장 눈앞에 드러난 목표가 그것뿐이니 별수 없다. 최종 목표를 클리어한다면 다시 원래 세계로 보내주든, 아니면 리셋을 시키든 뭐든 반응이 있겠지.

* * *

여관에서 하룻밤을 머무르며 힐데가르트의 피로를 회복시킨 나는 다음 날 아침이 되자마자 바로 병력들을 이끌고 여관을 나섰다.

이는 여관비가 아까워서기도 했지만, 우리를 바라보는 마을 주민들의 눈에 공포와 두려움이 깃들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생각해보면, 이런 작은 마을에 중무장한 병사들이 돌아다닌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그들은 겁을 집어먹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현대에서도 총을 든 외국인 용병들이 시내를 버젓이 활보하고 다닌다면 당연히 불안하지 않겠는가.

이 상태가 지속되면 마을이 우리에게 적대적으로 변할 우려가 있었기에 나는 서둘러서 병력을 끌고 마을 밖으로 이동했다. 그렇게 마을에서 어느 정도 멀어지자 나는 병력들을 대기시킨 채 정보창을 켰다.

“부대 정보창.”

<레이븐 용병단>

라그나르 로드브로크

빙옌의 힐데가르트

에피로스 친왕국 정예 창병 ― 2

루스 공국 석궁병 ― 2

신성 제국 창병 ― 3

신성 제국 궁병 ― 2

아이유브 왕조 신병 ― 2

“진짜 답도 없네.”

이미 몇 번이나 봤던 창이지만 볼 때마다 한숨밖에 안 나온다. 원래 이 게임에서 병력을 구성하는 기본은 국가와 민족의 통일이다.

가령, 현대세계를 기준으로 군대를 편제하는데 일본군이랑 한국군, 중국군에 이어 러시아군과 북한군을 섞어놓으면 시너지가 일어날까? 협력은커녕 오히려 서로 죽이겠다고 쌈박질이나 안 하면 다행이지.

이 게임 역시 각 팩션에 따라 국가 간의 관계가 형성되어 있는데 사이가 좋지 않은 국가나 전쟁 중인 국가의 병종을 함께 편성하게 되면 사기 저하와 전투력 감소라는 형태로 드러난다. 하물며 지금 이건 현실인 만큼 어떤 식으로 드러날지 알 수도 없었다.

잘도 이 병력을 가지고 용병단을 운용했군. 썩어도 준치라고 내가 빙의하기 전의 라그나르는 본인 나름대로 능력이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아니, 그랬다면 애초에 전투에서 패퇴할 리가 없었겠지.

“라그나르. 이제 어떻게 하실 겁니까?”

내가 고민에 잠겨있을 때 중갑을 벗어놓고 휴식을 취하던 힐데가르트가 다가오며 물었고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자연스럽게 대꾸했다.

“글쎄… 당분간은 조용히 구석에서 몸을 추스려야겠지.”

내가 이 몸에 빙의하고 난 뒤 단순히 여관에서 죽치고 앉아있기만 했던 건 아니었다. 나름대로 정보도 모으고 내가 패퇴했던 전투에 대해서도 조사했는데 대략적인 전말을 파악할 수 있었다.

과거의 나는 라틴 제국에게 고용된 용병이었는데 에피로스 친왕국과의 전투에 참전하라는 명을 받고 집결해서 싸웠고 패배했다. 뭐, 승패는 병가지상사라고 전투를 하다 보면 질 수도, 이길 수도 있는 법이다.

문제는 우리가 치른 전투는 승리할 수 없는 전투였다는 점이다. 이게 단순히 병력이 열세라거나 지휘관의 역량 차이 뭐 이런 게 아니라, 말 그대로 치트라도 쓰지 않는 이상 이기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던 전투라는 얘기다.

라틴 제국의 상층부가 병신이 아닌 이상 이런 명령을 내린 이유는 뻔했는데 경험상 상대를 실각시키기 위한 음모가 대부분이었다. 실제로 라틴 제국의 총사령관과 내가 종군했던 칼리안 백작의 사이는 견원지간이라고 할 정도로 좋지 않았고.

그 때문에 당사자인 칼리안 백작 역시 이 부당한 명령이 뜻하는 바를 알고 있었고 그는 항명과 복종의 두 가지 선택지에서 복종을 택했다.

과거의 라그나르 역시 이런 전후 사정에 대해서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던 모양이었지만, 용병은 신용도가 생명이기에 이미 돈을 받고 계약을 수락한 이상 지켜야 할 의무가 있었고 이게 함정인지 알면서도 공격을 감행할 수밖에 없었다.

“당신치고는 괜찮은 생각이군요.”

“칭찬 고맙군. 그래서, 힐데가르트. 네 생각에 우리가 어디로 가야 한다고 생각하지?”

여지없는 그녀의 매도에 난 웃으며 지도를 펼친 뒤 물었다. 현재 내가 유일하게 상담을 할 수 있는 건 힐데가르트뿐이다.

휘하에 있는 병력들도 가능은 한데 뭐라고 해야 할까… 꼭 말 잘 듣는 강아지를 데리고 다니는 느낌이라 별 도움이 안 됐다.

뭘 물어도 잘 모르겠다고만 하는 데다 계속 물어보면 충성도나 사기가 까이니 최대한 건드리지 않는 게 상책이다.

“…….”

“힐데가르트?”

“……몸이 안 좋아서 좀 쉬겠습니다.”

“뭐?”

갑자기 저기압이 되어서 자기 할 말만 툭 내뱉고 가는 힐데가르트를 보며 나는 당황한 표정으로 되물었지만, 그녀는 대꾸도 하지 않고 저 멀리 나무 그루터기로 걸어가서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는 고개를 푹 박고 아무런 미동도 없는데 괜히 지금 가서 다시 말을 걸었다가는 용병단을 박차고 나갈 것만 같은 분위기라 일단은 지켜보기로 했다.

그나저나 어제까지만 해도 쌩쌩하다더니 왜 또 저러는 거지? 힐데가르트가 성격이 더럽긴 하지만 허세를 부리거나 괜스레 어깃장을 놓을 리는 없을 텐데.

“아….”

그 순간 문득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스치긴 했지만, 굳이 그 말을 입 밖으로 내진 않았다. 아무래도 말하기 민망한 그런 일을 남자인 내가 입 밖으로 내뱉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니던가.

실제로 게임 속에서도 동료들이 각자의 지병이나 특성, 성별에 따라 컨디션이 바뀌는 일도 있었기에 특별히 유의하기로 했다.

“오늘 하루는 이곳에서 노숙을 하겠다. 전원 준비하도록.”

내 말에 병력들은 묘하게 힘없는 표정으로 내 명령을 이행하기 시작했다. 만약 이게 게임이었다면 약간의 사기 저하와 함께 노숙 준비가 뚝딱 완료됐겠지만 여긴 뒤틀린 현실이었고 때문에 모든 준비는 시간을 들여서 손으로 직접 해야 했다.

그렇게 정신없이 군대의 추억을 떠올리며 준비하다 보니 어느새 저녁 시간이 됐고 나는 한숨과 함께 바닥에 주저앉았다. 휘하 병력의 숫자가 많으면 시키기만 해도 될 테지만 총원이 간신히 열 명을 넘는 이상 나도 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주인공이 직접 일하면 충성도와 호감도도 오르니 나쁜 건 아니었다. 단지 게임에서야 주인공의 스태미나를 사용하면 그만이지만 여기선 내가 직접 움직여야 한다는 게 문제였지만.

아무튼, 고된 노동의 대가로 정체 모를 붉은 스튜와 빵 쪼가리를 먹으려고 하는데 신성 제국의 창병이 다가와 무표정한 얼굴로 물었다.

“단장님. 사제님에게 저녁 예배를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힐데가르트가 그런 것도 하던가?”

“힐데가르트?”

창병이 의문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고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대꾸했다.

“혹시 다른 이가 하던가? 뭐 누가 하든 상관없네만.”

“아니요, 그게 아니라 이전에는 사제님을 힐데라고 부르셨지 않습니까.”

그 순간 나는 이게 이벤트임을 깨달았다. 종종 게임 내에서 플레이어의 행운에 따라 동료들이 조언이나 힌트가 될 말을 해주기도 하는데, 정작 조언을 해줄 힐데가르트가 저러고 있으니 일반 NPC 캐릭터인 병사가 해준 모양이다.

“내가 그렇게 불렀다고?”

“글쎄요.”

“좀 더 자세히 얘기해보게.”

“그것 이외에는 잘 모르겠군요.”

아무래도 이벤트는 이걸로 끝난 모양이다. 아마 여기서 더 캐물어 봤자 모른다면서 딴청만 피우고 대화가 더 이어지지 않을 것이다.

“고맙네.”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건 힐데가르트의 화를 풀게 할 실마리가 보였기에 나는 스튜와 빵을 들고 힐데가르트에게 다가갔다.

“옆에 앉아도 될까?”

그녀에게선 아무런 대답이 없었고 나는 침묵이 곧 긍정이라 여기며 옆에 앉은 뒤 가져온 음식을 그녀의 앞에 내려놓았다.

“배고플 텐데 뭐라도 좀 먹지 그래. 병사들도 네가 안 먹으니까 걱정하는 눈치던데.”

“하, 제 걱정은 하고 있었습니까?”

“나야 늘 힐데 네 걱정뿐이지.”

이게 제대로 고른 선택지가 맞나 싶었지만, 그녀의 표정과 슬쩍 올라가 있는 입꼬리를 보아하니 정답이었던 모양이다.

“지금껏 제멋대로 부르더니 왜 또 그렇게 부르는 겁니까?”

“미안해. 여태껏 정신이 없었거든. 그래서 몸은 좀 어때?”

“쉬었더니 괜찮아졌습니다. 그래서, 어쩐 일입니까?”

진짜 이게 원인이었나 보군. 힐데가르트나 힐데나 대체 뭔 차이가 있다고… 애칭 같은 느낌이긴 한데 라그나르가 대체 어떻게 성격을 이렇게 유들유들하게 만들어 놓은 건지 모르겠네.

“다른 건 아니고, 아까 얘기했던 것처럼 향후 방향성에 대해서 조금 의논을 하려고 하는데… 아무래도 지금 내가 믿고 의논할만한 상대는 너밖에 없잖아?”

“그거야 그렇지요. 이전부터 당신은 제가 없으면 안 됐으니까요.”

아무래도 과거에 힐데가르트와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기는 한데… 그걸 캐물었다간 별로 좋은 소리는 못 들을 것 같아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그 전에 라틴 제국과는 연을 끊을 겁니까?”

“글쎄… 지금 당장 가타부타 얘기할만한 건 아니고 천천히 생각해봐야지.”

물론 이대로 넘어갈 생각은 없고 추후에 내가 어느 정도 힘을 기르고 나면 한번 추궁해볼 생각이다. 굳이 나중을 기약하는 건 내가 있는 곳이 게임 속 세계라지만 그 근본은 중세이기 때문이다.

즉, 쥐뿔도 없는 야만인 용병 단장인 내가 영주들에게 개겨봤자 좋은 꼴을 못 본다는 말이다. 자칫 잘못하면 내 목이 잘릴 위험성도 있으니 최대한 조심하는 수밖에 없다.

“일단 아까 얘기했던 것처럼 한동안 힘을 추스를 생각이긴 한데…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 오신 것 같군.”

무법지대라고 할 수 있는 이곳에 왜 도적놈들이 안 나오나 하긴 했다. 물론 눈앞에 흉악한 도적들이 나타났지만 나는 미소를 지으며 도끼를 꺼내 들었다.

“잘 됐군. 안 그래도 물자랑 일을 대신 해 줄 포로가 필요했는데 제 발로 찾아와주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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