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 속 바이킹이 되었다-1화 (1/205)

▣ 001화

My destiny is my own. 속칭 엠디모(Mdimo).

물론 저런 별명보다는 그냥 망겜으로 불리는 게임이다.

사실 진정한 망겜은 언급조차 안 되는 걸 생각해볼 때 그래도 가끔 언급되는 걸 보면 비운의 똥망겜 정도는 되는 게 아닐까 싶다.

문제는 내가 그런 망겜을 만 시간이 넘게 한 고인물이자 똥믈리에라는 건데, 사실 널리 알려진 것과 다르게 이 게임은 생각보다 재밌고 할만했다.

일단 기본적으로 자유도가 높았으며 중세 향을 가득 담고 있었고 무엇보다 사람 짜증 나게 만드는 난이도가 묘하게 내 도전의식을 자극했다.

거기에 대부분의 서양 게임이 그렇듯 여캐의 얼굴은 서양식 감수성이 한가득 들어가 있었지만, 패치로 인해 선녀처럼 바뀌었고 이는 묘하게 현실감 느껴지는 캐릭터들의 AI와 시너지를 일으켜 내게 굉장히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물론 이런 장점들을 씹어먹을 어마어마한 단점들 때문에 똥겜이 되긴 했지만… 어쨌거나 나는 이 게임의 고인물이었고 이 게임에 대한 애정과 지식은 제작자들보다 더 크다고 스스로 자부할 수 있다. 물론 애정보다는 애증이 맞는 말이겠지만.

아무튼, 이 게임은 나름 매니아층이 있던 건지 아니면 제작진들이 책임의식이 있던 건지 잊을 만할 때쯤 이런저런 패치를 올려줬는데 특히 고인물들을 위한 콘텐츠들도 여러 가지 추가해주었다.

하지만 난 제작사에서 무슨 패치를 하든 게임을 클리어할 자신이 있었다. 난 고이다 못해 썩어서 원액만 남은 석유였으니까. 하지만 그런 고인물인 나조차 예상치 못한 상황이 있었으니….

“돌격! 적을 무너뜨려라!”

“전군 방패 앞으로! 위치를 사수하여 적을 막아내라!”

바로 내가 실제 게임 속으로 들어가는 상황이었다.

그것도 전투가 한창인 전쟁터로.

* * *

현실은 소설보다 더 소설 같다고 하던가.

말 그대로 소설 속에서나 가능했던 일이 내게 일어나버렸다.

“라그나르. 이곳에 더 머물 생각이오?”

“음… 하루만 더 머물 건데 괜찮겠습니까?”

“괜찮고말고. 하루 숙박비는 10두카트일세. 물론 자네 동료들 몫까지 포함한 거고 식사는 늘 그렇듯 별도지만 하루 정도는 서비스로 해주지.”

“감사합니다.”

내가 원래 쓰던 이름도 강제로 개명당하고 쓰는 돈의 단위와 말, 시대까지 다른… 아니 아예 시공간을 초월한 곳에 들어온 걸 보면 말이다.

이런 말도 안 되는, 불합리하기까지 한 현실을 내가 정확히 인식하고 받아들이는 데는 정확히 이틀이 걸렸다.

그 시간 동안 나는 방황하기도 하고 혼란스러워했으며 질질 짜기도 했지만, 그런다고 뾰족한 수가 나오는 건 아니었기에 결국 이 현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게임 속으로 들어왔다고 하면 대체 누가 믿어줄까.”

난 한숨과 함께 탁자에 놓인 맥주를 마시며 잠시 과거를 회상했다. 그러니까 내가 처음 이 망겜에 빙의했을 때 나는 전쟁터의 한가운데로 떨어졌다.

게임 속에 들어왔다는 이 영문 모를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풍겨오는 강렬한 피비린내와 전쟁의 광기에 겁먹은 나는 그저 눈앞의 칼을 피해 살고 싶다는 일념 하나로 비명을 내지르며 전쟁터에서 도망쳤다.

그때 당시의 나는 패닉에 빠져있어서 잘 몰랐는데 뛰다 지쳐 기절했던 걸 보면 네다섯 시간을 쉬지도 않고 도망쳤던 것 같다. 그렇게 탈진해서 산기슭에서 쓰러졌다가 깨어난 나는 눈앞에 둥둥 떠 있는 기이한 창을 볼 수 있었다.

# 긴급 목표(성공)

― 아군이 패퇴한 전쟁입니다. 도망치십시오.

그 눈앞에 떠 있는 반투명한 창을 보며 나는 내가 게임 속에 들어온 걸 알 수 있었다. 그야 만 시간이 넘게 봤던 형태의 알림창인데 모른다는 것 자체가 더 이상한 일이었으니까.

“대체 이건 무슨….”

― 불완전한 동기화가 진행됩니다.

― 불완전한 동기화로 인해 일부 기억에 혼란이 있을 수 있습니다.

― 통증에 주의하십시오.

“크윽!!!”

그 순간 머릿속에 강렬한 아픔과 함께 내가 겪은 게 아닌 새로운 기억들이 강제로 주입되기 시작했고, 한참의 시간이 지난 뒤에야 나는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기억의 주입 과정에서 생긴 통증을 견디기 위해 바닥을 뒹굴어서 그런지 온몸이 진흙으로 범벅되어 있었다.

이대로 마을로 내려갔다간 걸인이나 미친놈 취급받을게 뻔했기에 나는 일단 근처 냇가에서 몸을 씻기로 했다.

차가운 물에 몸을 담그자 머리끝까지 올라가 있던 흥분과 열기가 가라앉았고 그 덕분에 차분하게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다.

도망칠 때는 몰랐지만 내 몸 여기저기에는 새겨진 흉터와 새롭게 입은 상처들이 가득했고 허리춤에는 도끼와 군인들이 쓸법한 장비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 얼굴이 아닌 난생처음 보는 흉악한 얼굴이 물가에 비치고 있었다. 단순히 얼굴만 바뀌었다면 모를까 골격과 피부색, 머리 색은 물론이요. 눈동자의 색까지 바뀌어 있었다.

이름 : 라그나르 로드브로크

소속 : 레이븐 용병단의 용병단장

상태 : 부상, 탈진

기벽 : 겨드랑이

체력 : 난이도로 인한 열람 제한

스탯 : 난이도로 인한 열람 제한

<특성>

무식한 야만인 : 글을 모릅니다. (이 특성은 글을 배우게 되면 사라집니다.)

바이킹식 외교 : 바이킹의 외교는 지극히 합리적입니다. 네 것도 내 것, 내 것도 내 것 – 약탈과 관련된 행동 시 전리품 30% 추가 획득.

꺾을 수 없는 의지 : 당신의 의지는 강철과도 같습니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어냅니다.

냉철한 사냥꾼 : 당신은 어떤 상황에서도 냉정한 판단력을 내릴 수 있습니다.

거기에 화룡점정으로 이렇게 상태창까지 뜨는 걸 확인하자, 나는 나도 모르게 헛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사실 지금까지 긴가민가하기는 했다. 몇 시간 전에 겪었던 전쟁터도, 내 앞에 얼핏 스쳤던 알림창도, 달라진 내 모습도, 눈앞에 둥실둥실 떠 있는 상태창도 단순히 피곤해서 헛것을 본 거라고 치부하면 그만이었으니까.

하지만 꿈을 몇 시간 동안 깨지 않을 리가 없잖은가. 거기에 머릿속에 각인된 새로운 기억은 이게 현실임을 실시간으로 알려주고 있었다.

결국, 나는 더 이상 현실을 부정하지 않기로 했고 곧장 근처에 있는 마을로 내려갔다. 다행히 적기는 하지만 돈을 가지고 있었기에 이렇게 여관에서 머무르는 게 가능했다.

내가 굳이 얼마 없는 돈을 써가면서 여관에 머무르는 이유는 간단했는데,

[레이븐 용병단의 일원(정예 창병)이 무사히 전쟁터에서 도망쳐 합류했습니다.]

[레이븐 용병단의 일원(궁병)이 무사히 전쟁터에서 도망쳐 합류했습니다.]

이런 식으로 와해됐던 내 용병단원들이 하나둘씩 모여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현실이라면 어디로 도망쳤는지도 모를 내게 모여드는 게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애초에 내가 게임 속으로 들어온 것 자체가 말이 안 되지 않던가.

하지만 나는 내 용병단원들이 합류한 사실에 기뻐하기보다 앞으로의 행동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다. 사실 이에 대해서 몇 날 며칠간 고민했지만, 딱히 해법이 나온 건 아니었다.

“바이킹… 바이킹이라….”

나는 내 앞에 떠 있는 상태창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바이킹. 바다의 무법자. 피도 눈물도 없는 도살자, 도끼 하나로 전 유럽을 호령한 전투 민족 등등 칭하는 별명은 많지만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난폭하고 야만적인 광전사였다.

다만, 이 게임에서 바이킹의 위상은 그렇게까지 높지 않다. 그냥 일반 몹보다 좀 쎈 정예 몹. 그게 딱 바이킹의 위치였다.

하지만 그건 바이킹이라는 민족의 문제였지 플레이어에게는 별문제가 되지 않았다. 신앙이야 기독교로 개종하면 그만이고 각 영주의 밑에서 일하면서 천천히 입지를 다지면 출신 따위는 그리 큰 문제가 아니니까.

오히려 초반의 압도적인 피지컬 덕분에 초보자들이 꽤 많이 고르는 민족이었는데 문제는 내 이름이었다.

라그나르 로드브로크. 바이킹을 이끌었다는 전설적인 군주. 그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중세 영국을 초토화시켰던 이교도 대군세를 이끌어 낸 위대한 인물.

“퀘스트 창.”

# 메인 퀘스트

― 바이킹을 위한 나라는 없다 : 바이킹들을 규합해 나라를 만들고 초대 군주가 되시오.

그리고 그런 배경 지식과 더불어 메인 퀘스트는 내가 바이킹들의 군주인 라그나르 로드브로크로서 뭘 해야 할지 명백하게 알려주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번 패치 내역에 바이킹 군주들이 3명 업데이트된다고 했었는데 정복왕 윌리엄과 타란토의 보에몽에 이어 남은 하나가 라그나르였던 모양이다.

“바이킹의 정체성을 가지고 성공하는 게 쉬운 건 아닌데… 미치겠네.”

물론 만 시간이 넘게 플레이했던 고인물이니만큼 때로는 바이킹으로 플레이하며 컨셉질을 했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약탈에 한정된 짓이었지 따로 왕국을 세우거나 통일을 위해 싸웠던 적은 없었다.

물론 할 수 있느냐 없느냐만 물어본다면 시간이 오래 걸려도 할 자신이 있었지만, 그건 게임을 플레이할 때의 얘기였고 그걸 현실에서도 할 수 있느냐는 별개의 문제였다.

거기에 바이킹은 이래저래 제약이 많았다. 당장 내 특성 중의 하나인 무식한 야만인만 봐도 그랬는데 이건 단순히 글을 모른다에서 끝나는 얘기가 아니다.

가령 바이킹이라는 인종특성에 더해 무식한 야만인 특성을 가지고 있으면 속된말로 ‘지성인’들에게 보이지 않는 멸시와 차별을 받게 된다. 현대사회에서 고졸이냐 대졸이냐를 따지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그 때문에 이런 특성들은 단순히 눈에 보이는 게 다가 아님을 항상 인지하고 있어야 한다. 게임을 플레이하는 입장에선 눈에 보이지 않는 변수까지 생각해야 해서 골치 아프지만, 그래도 그런 현실적인 부분이 마음에 들어서 고인물이 된 게 아니었던가.

그나마 다른 마이너스적인 특성이 더 없어서 다행이다. 더군다나 후반까지 유용하게 쓸 수 있는 특성인 불굴이나 냉철한 사냥꾼을 가지고 있었기에 시작으로는 나쁘지 않았다.

[라그나르의 동료 빙옌의 힐데가르트가 무사히 전쟁터에서 도망쳐 합류했습니다.]

[와해됐던 레이븐 용병단의 패잔병들 일부가 모두 합류했습니다.]

“어?”

누구? 힐데가르트? 얘가 왜 합류한 거지? 설마 랜덤 변수 때문인가?

내가 그녀에 대해 생각을 정리하기도 전에 피곤한 표정의 여성이 선술집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우두커니 앉아있는 나를 보더니 무표정한 얼굴로 다가와서 얘기했다.

“여기 있었군요.”

“어… 어… 음.”

여기저기 상처 난 갑옷을 걸치고 피곤이 잔뜩 묻어있는 얼굴을 한 적발의 여성은 고양이처럼 삐딱한 눈초리로 날 바라보며 물었고 나는 당황해서 말까지 더듬으며 고개만 끄덕였다.

“뭡니까 그 표정은? 평소처럼 성희롱이라도 할 줄 알았는데 그런 표정을 짓는 걸 보면 이번 전투가 꽤 뼈아팠나 보군요.”

“….”

내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평소에도 이랬던 건지 그녀는 손을 내저으며 자기 할 말만 내뱉었다.

“아무튼, 전 올라가서 쉬고 있겠습니다. 따로 시키실 일이 있으면 불러주십시오.”

그녀는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계단 위로 올라갔는데 갑자기 생각난 것처럼 무심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한마디 툭 던졌다.

“아, 그리고… 그런 얼빠진 표정을 짓고 있는 건 당신답지 않습니다.”

말을 마친 그녀는 내가 대꾸하기도 전에 모습을 감췄고 나는 그녀가 내 시야에서 사라지기 전에 허겁지겁 그녀의 상태창을 켰다.

이름 : 빙옌의 힐데가르트

소속 : 정화 교단, 레이븐 용병단의 전투 사제

상태 : 탈진, 경미한 부상

기벽 : 독설, 냉소, (추후 해제), (추후 해제)

체력 : 난이도로 인한 열람 제한

<특성>

광신도 : 광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는 존재입니다.

지식인 : 글을 읽고 쓸 줄 알며 교양이 있습니다.

강인한 정신력 : 강인한 멘탈의 소유자입니다. 어지간한 일로 흔들리지 않습니다.

“아직 성녀로 임명받기 전인가?”

원래 힐데가르트를 칭하는 호칭은 전투 사제가 아닌 빙옌의 성녀 힐데가르트다. 중간에 바뀌는 게 아니라 게임에 처음 등장할 때부터 성녀 타이틀을 달고 나오는데 아직 전투 사제인 걸 보면 아무래도 랜덤 변수 때문인 것 같다.

랜덤 변수는 말 그대로 게임 내에서 무작위로 발생하는 변수였는데 플레이어가 예측할 수 없고 통제할 수 없는 요인은 게임을 어렵게 만드는 데 일조했다.

사실 공략이라는 건 단순히 얘기해서 퍼즐 맞추기에 불과한데 그 퍼즐이 매번 바뀐다면 맞추기가 힘들지 않겠는가. 쌩 초보자에 비하면 요령이야 생기겠지만 말이다.

아무튼, 이런 랜덤 변수가 가장 크게 영향을 끼치는 건 주인공의 과거였는데 이 게임은 시작하기 전에 주인공의 간단한 성장 과정을 플레이어가 정할 수 있다.

어릴 때 귀족의 아들로 태어나거나 대장장이의 아들로 태어날 수도 있고, 성장하면서 상인의 길을 걸을 수도, 사냥꾼이 될 수도 있으며 모험가가 되는 이유 역시 가지각색이었다.

문제는 랜덤 변수가 적용되면서 이러한 주인공의 과거 행적에 대해 플레이어가 상세하게 개입하는 게 불가능해졌고 이는 게임을 플레이할 시 높은 확률로 독이 되기도 하고, 가끔은 득이 되기도 했다.

능력 있는 친구라 동료로 받아들여 데리고 다녔는데 알고 보니 과거에 주인공이 학살한 마을의 생존자라 음식에 독을 타서 플레이어를 암살하는 경우도 있었고 반대로 적대국의 여왕이 알고 보니 어릴 적에 도적들의 습격으로부터 구해줬던 아이라 뜬금없이 전쟁 한중간에 구애하는 경우도 있었다.

지금도 이 라그나르라는 캐릭터의 휘하에 용병단이 있고 힐데가르트를 동료로 받아들인 것만 봐도 랜덤 변수가 적용된 모양이었다.

“힐데가르트라… 이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겠네.”

사실 힐데가르트는 여러 가지 문제점이 있고 다루기 까다로워서 그렇지 능력 자체만 놓고 보면 좋은 편이다.

다만 성격이나 가치관 쪽이 다소 극단적이라 다른 동료들과의 불화도 자주 일으키는 편이고 게임에서도 그녀의 성격이 좋은 편은 아니었기에 자주 쓰는 동료는 아니었다.

“확실히 시니컬해 보이는 성격이긴 한데….”

독기어린 말투도 그렇고, 표정도 그렇고, 행동도 그렇고… 알 수 없는 기벽이 몇 개 껴있는 것 같긴 한데 어쨌든 내가 알던 힐데가르트에서 크게 달라지진 않은 것 같다.

아무튼, 이참에 그녀를 통해서 하나 확인해볼 게 있다. 쇠뿔도 단김에 뽑으랬다고 그녀의 방문 앞에서 크게 심호흡한 나는 가볍게 문을 두들겼다.

“뭡니까?”

방문을 두들기자마자 문이 열리더니 이내 차가운 얼굴로 방문 목적을 묻는 그녀를 향해 나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망설였다.

그녀처럼 존댓말을 쓸까? 하지만 그녀가 말하는 걸 들어보니 내가 꽤 친근하게 굴었던 모양인데 말을 놓는 것 정도는 괜찮은 것 같았다.

“나인 줄 어떻게 알았지?”

“제 방문을 두들길 사람이 단장 말고 또 누가 있습니까?”

아, 하긴. 네임드 동료들을 제외한 휘하 용병들은 단순한 NPC다. 별다른 상호작용도 없고 그저 명령을 내리는 대로 따르는 NPC. 즉, 그녀에게 말을 걸만한 건 플레이어인 나밖에 없다는 뜻이다.

“잠깐 들어가도 되나?”

“이 야심한 시각에, 그것도 여자 혼자 머무르는 방에 들어오시겠다는 겁니까?”

“….”

내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어깨를 으쓱이자 그녀는 비틀린듯한 미소와 함께 문을 열어젖히며 내가 들어올 수 있도록 공간을 열어주었다.

그 때문에 얼굴만 쏙 내밀고 있던 그녀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는데 방금 막 샤워를 마친 건지 그녀는 평상시 입고 있던 중갑 대신 얇은 평상복을 껴입고 있었다.

아까는 숨이 턱턱 막히는 전투복을 입고 있어서 몰랐는데 이렇게 바라보니 묘하게 눈 둘 곳이 없는 차림새였다. 역시 화면 밖에서 보는 것과 두 눈으로 보는 건 차이가 확실하다.

“제 몸매를 감상하려고 온 건 아닐 테고… 할 말이라도 있으십니까?”

“음….”

그녀의 추궁에 나는 차마 입을 열지 못하고 계속 입술만 달싹거렸지만 의외로 힐데가르트는 참을성 있게 날 기다려주었다. 그런 그녀의 배려 덕분에 나는 마침내 하고 싶었던 말을 입 밖으로 꺼낼 수 있었다.

“겨드랑이 좀 보여줄 수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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