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2화. 마지막 싸움 (1)
“페레양이 사라졌네.”
쿠이가를 마주한 아셀은 한참을 물끄러미 마탑의 수장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 괜찮으십니까?”
“괜찮냐고? 자네가 지금 나한테 괜찮냐고 묻는 건가? 그렇다면 괜찮다고 말해주겠네.”
“괜찮지 않으신 거 같군요.”
쿠이가의 얼굴에 드리워진 피로감.
그것은 완성에 가까운 마법사라도 지워내지 못하는 그런 종류의 것들이었다.
게다가 모든 피로감들은 아셀에 의해 억지로 마탑주가 되었고 아셀이 말해준 경고들에 의해 생긴 것.
자신을 걱정스러워 하는 아셀을 바라보며 투정이라도 부려볼까 고민하던 쿠이가는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입을 열었다.
“페레양이 어디로 사라졌을 거 같나?”
페레가 사라진 것.
아셀은 마지막으로 페레를 봤을 때를 떠올리며 이 같은 일이 벌어질 것을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그래도 달라진 것은...’
분명 대부분의 기억을 되찾았을 얼음마녀가 소동을 일으키지 않고 있는 것.
아셀은 그것이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지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예전의 얼음마녀와 지금의 페레는 다르다.’
부활과 동시에 대륙에 거대한 위험을 가했던 얼음마녀였을 적과 다르게 지금 그저 대륙에서 실종된 페레.
아셀은 자신과 함께하며 페레의 무언가에 변화가 왔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아셀. 마왕도 침공해오는 상황에서 페레 그 아이까지..”
잠시 쿠이가는 말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얼마 전까지 함께 했던 동료가 공격해온다는 소리는 함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걱정 마세요. 영감님.”
그런 쿠이가의 염려를 아는지 모르는지 아셀은 그저 씨익 웃으며 쿠이가를 바라보았다.
“모든 일이 끝난 후 찾으러 가면 됩니다.”
“역시 자네는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는 눈치로구만.”
쿠이가는 잠시 말을 멈춘 후 긴 수염을 쓸어넘기며 입을 열었다.
“하기야. 자네가 알아서 해줄 수 있겠지.”
혼자서 납득한 쿠이가를 바라보며 아셀은 그저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나저나 자네는 참으로 대단한 사람일세. 아 물론 나만큼은 아니지만 말이야. 대륙의 모든 무인들이 자네의 말을 기다리고 있으니까.”
쿠이가의 말처럼 현재 항구도시 라스에는 대륙의 유명한 무가와 무인들이 몰려들고 있는 상황.
모두가 마왕과의 전투에 대비하기 위해 모이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7용사 가문의 수장들이 나를 대표해서 자네에게 이걸 전해주라고 하더구만.”
7용사 가문의 수장들은 조상의 위엄을 다시금 세우기 위해 라스에 제일 먼저 도착하는 놀라움을 보여주었다.
아셀이 그들을 적폐에 가깝고 멸망하는 것을 내버려 두려고 했던 것을 다시금 생각하게 할 만큼.
쿠이가의 손에 들려있는 귀걸이를 바라보며 아셀은 두 눈이 크게 떠질 수밖에 없었다.
“로막스의 쌍둥이?”
얼마 전 마경에서 가문 전체가 타락한 프레스코에 의해 멸문 당해버린 7용사 로막스가의 보물이자 무지개 무구 세트의 아이템 중 하나.
아셀이 붉은빛이 도는 귀걸이를 바라보며 두 눈을 껌뻑이자 쿠이가는 순수 아셀의 손에 로막스의 쌍둥이를 쥐여주었다.
“이걸 제게 준다고 허락했습니까?”
“모든 것은 마나의 순리대로 돌아가는 법. 어울리는 주인에게 돌아온 것뿐이네.”
로막스 가문이 프레스코에 의해 허무하게 멸문 당하고 아셀은 이것을 찾기 위해 수많은 방법을 떠올렸던 것이 무색해졌다.
“참으로 신기하구만 벌써 7용사의 무구가 자네에게 4가지나 있는 것이 말이지.”
필드가 마리우스가. 아피엘가. 그리고 지금 로막스가의 무구까지.
그 어떤 유저도 그리고 그 어떤 존재들도 이루지 못한 파밍을 해냈다는 사실에 아셀의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무지개 무구 세트의 효과가 나오는 최소 조건을 충족했습니다.]
[무지개 무구 세트 4/7]
[전 스탯 40증가]
[용사들과 관련된 어떤 일을 하던 40%의 추가 효과 발생.]
[용사의 이름으로 퀘스트를 클리어시 보상이 40% 증가.]
‘역시나!’
심지어 아셀의 눈앞에 나타난 무구의 증가한 효과들은 모두가 사기적이라고 평가받을 것들.
그가 흡족한 마음으로 메시지를 바라보고 있자 쿠이가는 아셀의 모습에 두 눈을 껌뻑였다.
“허어... 이상하구만 어떻게 귀걸이 하나를 얻었다고 갑자기 강해진 것 같은 느낌을 주게 한단 말인지. 아무리 생각해도 용사 가문의 핏줄은 무언가 특별한 게 있는 거 같구만.”
***
“대혀어어어어업! 드디어 대협의 옆에서 같이 싸울 시간이 온 거 같습니다!”
“... 너도 왔냐?”
“드워프들이 아니라면 이곳을 요새로 바꾸는 것을 그 누가 할 수 있겠습니까 대협!”
토니와 한스 그리고 투란의 드워프들과 대장장이들이 바쁘게 라스의 이곳저곳을 손보기 시작했다.
모두가 방어에 적합하지 않은 항구를 요새화시키는 것.
아셀은 자신의 옆에서 드디어 때가 왔다느니 드워프와 용사라는 이야기가 후대에 울려 퍼질 거라는 등의 토니의 말을 그저 묵묵히 들어줄 뿐이었다.
“... 그래서 말입니다. 대협 만약에.. 만약에. 대협께서 아젠타석을 제게 빌려주신다면 단 하루 만에 이곳을 난공불락의 요새로 만들 수가..”
쭈뻣쭈뻣거리며 말하는 토니의 모습에 아셀은 그저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이제 보니까 이거 노리는 수가 있었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대협! 저는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말한 겁니다!”
발끈하는 토니를 바라보며 아셀은 사출의 주머니의 깊숙한 곳에 잠들어있던 아젠타석을 꺼내 보였다.
“아젠타석..”
“아아.. 조상님들.”
“허어.. 저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뭔가 손재주가 늘어난 듯한데?”
사출의 주머니에서 꺼내든 아젠타석을 바라보며 드워프들이 경외로운 듯 바라보는 것도 잠시.
아셀은 별다른 생각 없이 그것을 토니의 손에 쥐여주었다.
“그동안 고생했다. 토니 퇴직금이라고 생각해.”
“예...예?! 아니 대협 갑자기 어디 떠날 거 같은 사람처럼 왜 그런 말씀을...?!”
자신의 손에 드디어 아젠타석이 들어왔다는 사실보다 토니는 아셀의 떠날 거 같은 말투에 두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
“이제 필요가 없어.”
지저세계의 일원들을 전장에 참여시켜 인간들과 함께 마족과 대항하게 만든 것.
본래의 게임에서는 인간과 절대로 연합하지 않을 이들을 연합하게 만든 것만으로도 아셀의 입장에서는 성공이었다.
“어..어.. 대협. 나중에 딴말 하시면 안 됩니다?”
누가 가져갈까 봐 빠르게 품 안에 아젠타석을 넣어둔 토니의 기운이 이전과는 비교해 강해지는 것을 아셀은 빠르게 발견할 수 있었다.
게임 속 드워프들을 이끌며 마족들의 머리를 박살 내던 불의 전사 토니의 위엄이 조금 묻어 나오는 모습이 조금은 보이는 상황.
아셀은 그 모습에 잠시 피식 웃어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보니까. 조금 아까운 거 같기도 하고 그거 그냥 돌려줘라.”
“절대로 안 됩니다! 대협은 후레자식이 아니지 않습니까?!”
“너 지금 뭐라고?”
“아아앗 야 이 새끼야 누가 그렇게 못질하래! 요새 망가트릴 작정이야?!”
***
토니의 장담대로였다.
아젠타석을 되찾은 드워프들은 항구도시 라스를 단 하루만에 대륙의 그 어떤 요새들보다 견고한 요새로 완성시켰기 때문에.
“가문으로 돌아가면 성의 증축을 맡겨 보고 싶은데 말이오..”
“거 벌써 예약이 밀려서 10년 뒤에나 맡을 수 있을 거 같은데 괜찮수?”
“아니 방금 필드가의 가주 유론의 의뢰는 내일 당장 시작한다고 하지 않았소!?”
“그거야 필드가니까 그렇지?!”
“이보게 우리도 7용사 가문의 일원일세.”
“그래서.”
“그래서라니! 격으로만 따지면 필드가와 동등한 위치라 이 말일세!”
“거참 웃긴 양반이구만 그럼 당시네 가문에 아셀님이 계시오?”
“........”
오새의 완성으로 드워프들의 주가는 하늘 높은지 모르고 치솟을 수밖에 없는 상황.
아셀마저 하루 만에 완성시킨 요새에 감탄하고 있을 때였다.
“이곳으로 올 거라 생각하느냐?”
“스승님.”
거대한 검은색 망치를 어깨에 짊어지고 있는 한스가 아셀의 옆에 다가왔다.
대장장이보다는 무언가 용병 같은 그 모습에 아셀이 조금 놀라는 것도 잠시.
한스는 헛기침을 내뱉으며 입을 열었다.
“나도 싸우려고 한단다. 그림자들로서 대륙을 구하는 것은 모든 그림자들을 바람일 테니까.”
“아...”
1차 몬스터 웨이브에서 고블린들이 대거 침략한 상황 속에서도 검을 만들던 한스의 모습과는 대비되는 모습.
아셀은 한스가 직감적으로 이번 싸움이 힘들어질 것임을 눈치챈 것을 알 수 있었다.
“든든하군요. 그림자들 중에서 가장 강하신 분이 함께하는 게 말입니다.”
“녀석 입에 꿀을 발랐는지 듣기 좋구나. 그런데 마왕이 정말로 이곳으로 올 거라 생각하느냐?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올 겁니다.”
아셀이 기억하는 조르게스타는 분명 대륙의 모든 무인들이 집결한 이곳을 결코 넘어가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아니 아셀에게 한 방 먹은 이 장소를 가만히 내버려 둘 리가 없었다.
“녀석은 그런 존재니까요.”
게임을 플레이하면서 녀석이 적들에 대한 광적인 집착을 생각하면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는 것.
아셀은 녀석의 그 광적인 집착에 대륙의 끝까지 몰려 죽어 나갔던 영웅적인 npc들과 유저들을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놈은 그렇게 만들어졌으니까.’
조르게스타를 떠올린 아셀은 자신과 녀석의 간격을 자신도 모르게 잴 수밖에 없었다.
닿을 수 있을까 하면 닿을 수 있었다.
지금부터 수십 년을 수련하고 대륙에 흩어져있는 강자들의 그림자들을 모두 가져온다면 가능할 상황.
실제로도 아셀이 계획하고 설계했던 마왕 레이드 방법은 그것이었으니까.
“조급해 하지 말거라 아셀.”
하지만, 아셀이 이 망할 게임의 역사에 개입한 대가로 마왕은 너무나도 일찍 부활해 버렸기에.
그의 계획들은 크게 뒤틀릴 수밖에 없었다.
“대장장이가 시간에 쫓긴다면 졸작이 나올 수밖에 없는 법이다.”
한스의 망치에서 자연스럽게 검은색 기운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것이 허공에 무언가를 두드리기 시작하자 놀랍게도 대장간에서 철을 담금질할 때 나오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
그 소리에 결국 상념에서 깨어난 아셀을 바라보며 한스는 빙그레 웃음 지었다.
“네가 심각한 표정으로 걱정을 하는 모습을 보는 것도 낯설어 재미가 있다만, 지금은 그런 즐거움을 느끼기에는 시간이 없구나.”
“아셀 조급해하지 말거라. 그보다 네가 이룩한 것을 먼저 보거라. 네가 모아온 동료들 그리고 네가 얻은 무위들.”
“대장장이가 시간에 쫓겨 작품을 망치려고 하면 나는 만들고 있는 작품을 보라고 조언한단다.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변하지 않을 자신의 작품을 말이지.”
한스는 다시 한번 허공에 망치를 부딪치며 씨익 웃어 보였다.
“너는 이미 걸작이다. 아셀 이 대륙이 만든 수많은 존재들 중에서 가장 빛이 나고 가장 값어치가 있는 존재지.”
“그러니 조급해하지 말거라 아셀. 다 잘될 거다.”
아셀 혼자 더 생각하게 놔둘 생각으로 한스는 성벽 위에서 내려갔다.
“...그렇게 말씀하시면 더 부담스러운데요. 스승님?”
말은 그렇게 하지만, 아셀의 얼굴에는 부드러운 미소가 걸려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