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7화. 승리의 신
말릭의 도움을 거절하기로 결정한 아셀은 연무장으로 나오는 내내 머릿속에 울려 퍼지는 말들에 정신이 나갈뻔한 것을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해 참아냈다.
아무리 아셀이 얼굴에 철판을 깔고 지낸다고 해도 말릭의 앞에서 아로이아스가 하는 말을 모두 내뱉었다가는 수치심에 절벽 아래로 뛰어내릴 것만 같았으니까.
[너..너! 계속 내말을 무시했다가는 꿈속에서라도 나타날 거야!]
“그만... 그만좀 중얼거려봐.”
[와아! 야 야 야 야 야! 들리는구나! 왜 그동안은 내 말을 무시했던 거니!?]
“...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한 가지만 물어볼게.”
[한 가지뿐이겠어?! 수백 가지는 물어봐도 돼! 나도 인간하고 직접적으로 대화하는 건 처음이라 너무 설레거든!]
“혹시 신인 척하는 뭐.. 이상한 그런 존재니?”
[뭐..뭐! 뭐! 야!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가 있어!!!]
머릿속에 울려 퍼지는 괴성에 아셀은 잠시 눈살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아니면 위엄이...”
위엄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포르틴에게 가호를 내려주는 마르스가 보여준 위엄과 비교하면 더더욱!
[방금 그 전쟁광이랑 나랑 비교했지! 웃기셔! 어떻게 나랑 그런 녀석이랑 비교할 수 있는 거야!?]
“마르스는 그래도 조금 능력이 있어 보이던데?”
아닌 게 아니라 마르스의 경우 로렌시에 숨어있던 누네스 일행의 존재를 알아차린 것.
아셀이 은근히 아로이아스의 자존심을 긁으며 입을 열자 다시 한번 머릿속에서 괴성이 울려 퍼졌다.
[그런 것쯤 나도 할 수 있어!! 못하면 너희들이 아직 찾지 못한 그림자들 위치를 다 알려줄까?! 그런 게 뭐가 대단한 거라고!]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인데! 내가 너한테 가호를 내려주는 건 원래 안 되는 일이라고! 인과에 어긋난 일이야 애초에 나라는 규격 외의 존재가 인간에게 가호를 주는 게!]
잠시 말을 멈추던 아로이아스는 분에 겨운지 씩씩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대륙에 위기가 닥치고 수많은 사람들이 너를 희망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내가 몸소 나타난 거라고! 이 승리의 신 아로이아스님이 말이야!]
“오....”
할 말이 없었기에. 잠깐 내보인 감탄사.
그런 아셀을 무덤덤한 반응에 아로이아스는 진심으로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이 인간 왜 이렇게 덤덤해?’
아로이아스가 아셀에게 직접적으로 가호를 내려주기로 결정했을 때.
그녀는 이런 덤덤한 반응은 전대로 생각하지 않았었다.
오히려 대륙에 얼마 없는 자신의 신전을 세우겠다고 소리치거나 대륙 정중앙에 최소 5m짜리 자신의 조각상을 만들겠다고 말할 인간을 떠올렸으니까.
[혹시 내가 필요 없니.....?]
그랬기에 갑작스럽게 밀려드는 불안감에 아로이아스는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아니지? 아니지? 내가 필요 없다는 그런 거 아니지? 안 돼..! 그런 생각도 그런 마음가짐도 가지고 있으면 안 된다고 아셀! 너 그러다가 죽어!]
“혹시 신내림 물리면 죽는 거냐?”
[아니 이 바보야! 마왕한테 죽는다고! 나 없이 그 사악한 걸 어떻게 이길래?!!]
“?!”
아셀의 두 눈이 크게 떠질 수밖에 없었다.
설마 마왕이라는 이름이 아로이아스의 입에서 나올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기 때문에.
“마왕이라고?”
본래의 역사에도 부활하려면 남은 시간이 한참은 남았으며 그동안 녀석의 부활을 막기 위해 아셀이 막아내었던 수많은 사건들.
그것들 때문에 더욱 지연되거나 망가졌을 부활 계획이 성공했다는 듯한 아로이아스의 말에 아셀은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불가능해.”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
마왕이 부활했고 예전의 그 절망적이고 압도적인 무위가 실제로 재현되었다면. 과연 현시점에서 녀석을 이길 수 있을지 아셀은 저절로 떠올리고 있었다.
‘유저들도 없다. 그리고 케락스나 포르틴 같은 아이들은 아직 제대로 강해지지도 않았어.’
수천만의 유저만 없는 것이 아니었다.
아직 나이가 어린 케락스 포르틴 같은 미래의 영웅들이 전성기에는 미치지 못하는 경지에 있는 상황이었다.
“흐음...”
[이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겠니? 어때 이 몸의 성상을 몇 개 만들지 신전은 어떻게 증축할지 정했어?]
“.......”
아로이아스의 이상한 말에 아셀은 잠시 눈살을 찌푸린 것도 잠시.
그의 눈앞에 놀라운 메시지가 나타났다.
[대륙의 암흑이 다가옵니다.]
[대륙의 역사가 크게 바뀐 것을 기점으로 대륙의 암흑들이 빠르게 다가오기 시작합니다.]
[마왕의 부활에 대한 정보를 얻었습니다.]
[퀘스트가 발생했습니다.]
[마왕 토벌하기. 퀘스트가 발생했습니다]
[마왕을 토벌하고 대륙의 평화를 가져오시오.]
[보상1:이 세상에서 마족들이 모두 사라집니다.]
[보상2:????]
“진짜구나.”
내심 아셀은 저 정신 나간 여신이 말하는 것이 그저 거짓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눈앞에 나타난 메시지와 발생된 퀘스트가 결국 마왕 조르게스타의 부활이 기정사실화 되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상황.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아셀은 긴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너랑 함께하면 조르게스타 저거 잡을 수 있냐?”
[당연하지 이 아로이아스님이 함께해서 못 이기는 적은 없다고! 내가 괜히 승리의 신이고 인과를 초월하는 존재겠어, 그거 알아? 나랑 함께하면 인과를 무시하고 무조건 네게 승리를 안겨준단 말이야!]
사기적인 능력은 분명했다.
그 어떤 경우에도 승리를 확정 짓는 능력.
도중에 과정은 생략한 그것들을 들으며 아셀의 머릿속에 잠깐이지만 무언가 스쳐 지나갔다.
‘설마 마족들한테 항복해서 승리하는 그런 결과는 아니겠지?’
***
[아... 으...으....]
콰가가가강! 마키헬의 사방에 거대한 마기들이 쏘아지면 모든 것들을 박살 내기 시작했다.
[으...아..아..아아아..]
모든 것은 그저 거대한 마기에 휩싸여 있는 마왕 조르게스타에서 쏘아지는 기운들.
그것들이 사방에서 쏘아지며 마키헬을 박살 내고 주변에 하늘에 검은색 번개들을 미친 듯이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베.벨님!! 이러다가 마키헬이 바닷속으로 가라앉겠습니다!]
수많은 마족들이 조르게스타의 마기를 막아내고 있는 마왕자 벨에게 주목했다.
마키헬에 남아있는 군단장급 마족은 이제 마왕자 벨 한 명뿐이었으니까.
‘부활에 무언가 착오가 생긴 것인가?!’
300년.
마족들에게도 기나긴 그 시간 동안 죽음에 빠져있던 조르게스타. 그런 상황 속이라면 아무리 살아있는 재앙이라 불리는 조르게스타마저 무언가 망가졌을 게 분명했다.
[아.....으으으..아으..아으..]
[저건 마치 어린아이 같지 않은가.]
[마치 새롭게 태어난 마족들 같구나.]
몇몇 눈치가 빠른 마족들은 조르게스타의 상태를 보고 새로 태어난 이성이 아직 희미한 어린 마족들을 떠올렸다.
‘정신이....!’
콰가가가가강! 다시 한번 거대한 마기가 마키헬을 휩쓸며 수많은 마족들을 모두 도륙 내기 시작했다.
[벨님! 차라리 벨님 만이라고 도망치시지요!]
[... 어디로 도망간단 말이더냐.]
[그거야....]
대륙에 남아있는 마족들의 이면 세계와 거점은 지금 이시간에도 철저하게 파괴되고 있었다.
뱀파이어들의 영지 블러드 필드는 퀴리의 죽음으로 사라졌으며 마수왕의 근거지는 얼마 전 아셀 필드에게 토벌된 상황.
심지어 지난 수백 년간 공들여 만들어놓고 타락시킨 존재들마저 어떻게 알았는지 박살 내거나 잡아들이고 있는 상황이었다.
‘아셀 필드.... 이 쳐죽일 녀석!’
이 모든 사건의 중심에 아셀 필드가 있었다.
퀴리를 베어내고 마수왕을 도륙했으며 던전 메이커와 파랑스의 계획을 무위로 돌리며 마탑을 구원했고 신성 기사단의 타락을 막아낸 존재가 바로 아셀 필드였으니까.
[아버지!!!]
더 이상 조르게스타의 저 거대한 공격을 막아낼 수 없을 거라 판단한 마왕자 벨이 앞으로 나서며 소리쳤다.
[마왕이라는 이름이 부끄럽지 않으십니까?! 지금 대륙에.. 대륙에! 7용사를 뛰어넘을 인간이 있단 말입니다!]
[7..7...]
콰가가가가가가가강!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거대한 기운이 마키헬에 있는 거대한 탑 바빌을 완전히 소멸시켰다.
[아.안 돼!]
[다 죽겠구나..]
[저것이 바로 마왕님.]
그 공포스러운 모습들에 마족들마저 겁에 질려있는 것도 잠시.
마왕자 벨의 두 눈은 반짝일 수밖에 없었다.
조르게스타가 자신의 말에 반응을 했다는 증거였기 때문에!
[또다시 당하실 겁니까?! 대륙에.. 대륙에! 그 저주받을 7용사의 재림에게 복수도 하지 못하고 그저 이 외딴섬과 함께 바다로 내려앉으실 겁니까!?]
[크어.....크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마키헬에 울려 퍼졌다.
그것이 무엇인지 눈치를 채기도 전에 하늘에서 내려치던 검은 번개가 마치 소나기처럼 지상으로 내려쳤으며 거대한 마기들이 사방으로 흩날렸기에.
어떤 것이 부서지고 이런 사태를 만들어내는지 알 수가 없던 상황.
오죽하면 마왕자 벨마저 꼴사납게 바닥을 뒹굴 수밖에 없었다.
[크헉!!]
구른 것도 모자라 생각 이상의 내상까지 입었는지 죽은 피들을 토해낸 마왕자 벨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이럴 수가...’
마왕의 힘이 이 정도였던가. 마왕자 벨의 머릿속은 혼란으로 가득 차 있을 수밖에 없었다.
300년 전. 마왕의 힘은 이 정도이지는 않았기 때문에.
[대체 무슨 일이...]
허망하게 중얼거린 마왕자 벨은 갑자기 사방을 박살 내던 마기들이 일순간 마왕의 근처로 빠르게 모이는 것을 발견했다.
[끄.끝인가?]
[마기들이...]
[마왕님에게 모인다?!]
태풍의 눈처럼.
일순간 고요해진 마키헬에 남은 것은 살아남은 극소수의 마족들과 파괴된 섬뿐.
그러나 이런 절망적인 모습들은 마왕자 벨의 눈에 전혀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아..아.. 아버님?]
바뀌었다.
이성을 잃고 날뛰었던 마왕이 아니었다.
자신의 몸에서 주체하지 못하고 터져 나갔던 기운들을 갈무리하고 점점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그 옛날 대륙을 절망으로 몰고갔던 마왕 조르게스타가 분명했으니까.
[내 아들 벨이여..]
[?!]
무언가 쏘아졌고 벨은 그것이 쏘아졌다는 것만 인식할 수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눈치를 챘을 때는 자신의 몸을 관통한 거대한 십자가 같은 것을 발견했을 때였으니까.
[커..커헉.. 아.아버지..]
[건방진 소리를 하더구나. 이 아비가 이성을 잃는 동안이라 생각해 안심했던 것이더냐? 아니면 300년이라는 시간이 너와 나 사이의 격이 무엇인지..]
꾸르르륵. 마왕자 벨의 가슴에 박혀있는 거대한 십자가가 점점 비틀어지며 벨의 몸을 헤집기 시작했다.
[아버지.. 자.자비를...!]
[잊은 것이더냐 벨이여.]
고통에 겨워하는 자신의 아들을 즐거운 듯 바라보던 조르게스타는 이내 피식 웃으며 손가락을 튕겼다.
[쯧.살아있는 군단장급 마족이 너 하나뿐이라니...언제나 운이 좋구나 내 아들 벨은.]
[하아... 하아..감사합니다.]
순식간에 사라진 검은색 십자가. 그것이 남아있는 자리에 있던 상처들마저 놀랍게도 말끔하게 사라진 것에 주변 마족들은 눈을 크게 뜨며 바라보았다.
‘어떻게 저런 기술이..’
‘잠깐만 벨님의 기운이 이전보다 강해지신 거 같은데?’
상처만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놀랍게도 벨의 기운이 이전과 비교해 거대해진 것이었다.
[대륙에 알리거라 내 아들 벨이여.]
순간 조르게스타의 몸에서부터 수많은 거대한 검은 십자가가 사방을 쏘아지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죽어있던 마족들의 몸이 부르르 떨리기 시작하며 일어나기 시작하는 것.
순식간에 수만의 마족들을 부활시킨 것도 모자라 이전보다 강하게 만든 조르게스타가 씨익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 조르게스타님이 돌아왔다고.]